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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곤한 인생을 사는 지혜 / 삼하 16: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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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피곤한 인생을 사는 지혜
본 문 : 삼하 16:9-14
설 교 : 박근호 목사 (구미영락교회)   


1년 중 전철의 유실물 보관센터가 가장 붐비는 시기가 3중 중순부터 5월 초순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풀리는 계절인 이 봄은 '춘곤증'이라는 독특한 계절현상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피로가 밀려드는 시기로 우리를 무력감과 피곤함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런 신체적 생리적 피곤함이 아닐 것입니다. 그건 질병이 아니라 새로운 계절을 맞는 우리 몸의 자연스런 반응이기에 오히려 그 피곤을 활기찬 마음으로 소화할 수 있습니다. 정작 우리를 힘겹게 하고 버겁게 하는 것은 생의 여러 굴곡에서 만나는 스트레스, 염려, 걱정, 근심, 노이로제 등과 같은 피곤함과 곤고함입니다.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는 피로감은 때로는 심각한 질병으로 바뀌기도 하고 급기야 죽음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해 중 가장 병원이 붐비고 지인들의 부고가 많이 전해지는 계절이 또한 이즈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봄의 계절이 기독교의 사순절과 맞물려 있습니다. 사순절 또한 결코 가볍지 않은 기독교의 절기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게 하는 절기로 절제와 금욕과 자기부정을 요청하는 근신의 절기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깃든 이 사순절과 춘곤증을 유발시키는 봄이 맞물리면서 육체적으로도 힘들지만 영적으로도 힘든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오순절, 대강절 등의 여러 절기 중에 가장 자기부정적 몸가짐으로 지내는 절기가 바로 이 사순절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순절기가 되면 세계 곳곳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모양으로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려 합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실제로 자기 몸을 나무에 달아 십자가를 재현하는 행사를 벌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주님의 고난을 체험해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런 십자가의 재현 같은 고난 체험은 아니라고 봅니다. 정작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우리가 어떻게 소화하며 사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들 일상에 깃들어 있는 여러 가지 삶의 장벽들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인생의 피로와 곤고함을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극복하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나아갈 때 그 발걸음을 가로막는 사탄의 훼방을 어떻게 해결하며 승리의 길을 걸어가느냐 하는 것이 더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과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가 삶의 피로감을 떨쳐버리고 활기차고 희망찬 신앙적 삶을 이루어가느냐 하는 것이 이 사순절에 우리가 가져야할 신앙의 화두인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피곤한 이 봄에 그리고 영적으로 곤고한 이 사순절기에 여러분은 어떠한 인생고를 겪으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어떤 것이 오늘을 사는 나의 인생살이 속에서 가장 나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합니까? 무엇이 그리도 나를 맥빠지게 하고 한숨짓게 하고 눈물나게 하며, 신앙생활을 해나감에 있어 무엇이 우리로 허탈과 좌절에 주저앉게 합니까?...

우리들이 겪는 인생고의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대개 몇 가지로 구분지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식들로 인해 겪는 인생의 아픔과 곤고함'이 있습니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도,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잘 날 없다'는 말도 다 벌로 나온 얘기가 아닙니다. 그만큼 자식을 키우면서 겪는 부모의 고통과 어려움이 크다는 것입니다. '품안의 자식'이라는 말처럼 세월갈수록 자식들로 인한 고민은 커져만 갑니다. 자식 농사 잘 지은 자가 인생의 성공자라는 말이 그래서 있는 겁니다. 인생에 있어 자식으로 말미암는 고통은 적어도 인생고의 1/3은 차지할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과 아픔'입니다. 이웃들과의 관계로 말미암는 인생의 고통과 피곤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철썩 같이 믿었던 자의 변질로 말미암는 인생의 허탈과 좌절이 있습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변질과 배신으로 인해 겪는 삶의 고통은 그 무엇보다도 고달프고 애달픕니다. 인간관계의 단절과 반목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우리 심령을 상하게 하고 우리 몸을 망가뜨립니다. 이것 역시 인생고에 있어 1/3을 차지하는 영역일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환경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의식주의 문제, 생활고의 문제... 이것 또한 적지 않은 현실적 고통의 영역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거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의 결핍과 부족은 참으로 인생을 곤고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자식에 대한 기대가 크면 클수록, 이웃에 대한 기대가 크면 클수록 더욱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낙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생입니다. 그리고 환경의 열악함에서 오는 삶의 현실은 참으로 우리의 생을 힘겹게 합니다.

그럼 이렇게 피곤한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육체적, 영적 피로를 제거하고 활기차고 쾌활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렇게 영육이 쇠약해지기 쉬운 계절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이 모든 인생의 피로감에 대한 처방을 갖고 사는 것과 갖지 않고 사는 생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으로 이 피로감을 해소하며 살 것인가요? 박카스나 콘디션이나 우루사를 먹는다고 이 피로감이 가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믿지않는 사람들처럼 담배로, 마약으로, 레저와 쾌락으로 풀 수만도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 시간 그 해답을 구약의 대표적 인물인 다윗에게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복을 받은 가장 대표적 인물입니다. 성경에 일개 목동에서 왕이된 다윗만큼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그의 생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정말 그는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아픔과 괴로움을 다 겪은 자였습니다.

먼저 그는 자식들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고 심지어 자식으로부터 배신당한 아버지였습니다. 삼하15장에 보면 그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반역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는 과정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압살롬은 언제부턴가 자신에게 부과되지도 않은 세력을 구축하고 월권을 자행하더니 왕의 사법적 권한까지 침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외된 주민층을 포섭해서 저들의 환심을 사므로서 자기의 지지기반으로 삼습니다. 그렇게 4년여를 준비한 어느 날 마침내 그는 아버지를 향한 역모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러한 압살롬의 모반은 다윗에게 상당한 위협이 됩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측근 가운데에도 압살롬의 추종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의 주도면밀한 공작으로 인해 다윗은 이스라엘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소외를 당합니다. 15:13절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했다'고 향했습니다. 민심이 다윗을 떠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황급히 다윗은 신하들과 함께 수도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치기에 이릅니다.
15:30절은 이렇게 도망치는 다윗의 비참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다윗은 울면서 머리를 감싸안고 감람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올라갔다. 그것도 맨발로 걸으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왕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맨발로 도망치며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렇게 왕의 체신도 아랑곳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겠습니까?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에게 그런 반역을 당했으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잠언 17:6절에 보면 '자식은 부모의 면류관'이라 했는데 이 자식은 오히려 부모의 왕관을 빼앗기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 이 얼마나 망신스런 일입니까?
그러나 다윗은 분노하기보다 슬퍼합니다. 어찌 자식을 향해 칼을 빼들겠습니까? 우리 옛속담에 '부모 속에는 부처가 들어있고 자식 속에는 앙칼이 들어있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 경우의 다윗에게 그대로 적중하는 경구입니다. 그는 자식을 향해 적개심을 드러내기 보다 자기 머리를 감싸고 그 수모를 다 감당하며 맨발로 길을 걷습니다.

'자식 농사만큼 어려운 게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 모시 키우는 놈과 자식 키우는 놈은 막말을 못한다'는 격언이 있는 겁니다. 마음대로 안되는 게 자식이라는 것이지요. 자식으로 인해 대부분의 부모들 마음은 새까맣게 숯검댕이가 되어 갑니다. 부모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자식, 별로 없습니다. 이게 부모 자식의 관계입니다. 지금 부모 세대인 우리도 돌아보면 우리의 부모님들께 기쁨을 드리기 보다 고통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자식은 부모에게 죄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철이 들어 뭘 좀 깨달을만 하면 이미 그분들은 이 세상에 안계시고... 아뭏튼 아들 압살롬으로 인해 다윗은 처절한 인생고를 경험합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6:3절에 보면 다윗은 그 피난길에서 므비보셋의 종 시바를 만납니다. 시바는 자기를 그토록 괴롭혔던 원수 사울의 손자이자 자기를 그토록 아껴주었던 친구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보필하는 종이었습니다. 다윗에게 므비보셋은 정적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었기에 그를 제거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래야 후환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원수의 손자로 대하지 않고 친구의 아들로 환대합니다. 그래서 자기 상에서 함께 먹을 수 있게 하여 자기 아들같이, 왕자같이 거두어줍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푼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를 없애야 마땅합니다. 그가 반역의 불씨가 될 수 있습니다. 언젠가 불만세력들이 그를 중심으로 다윗에게 반기를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떠올리지 않고 요나단을 떠올립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푼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환대에 '이젠 죽었구나' 싶어 덜덜 떨던 므비보셋은 '어찌 죽은 개 같은 나를 돌보아주시느냐'고 감격하며 그 앞에 충성을 서약합니다.

그런데 시바가 와서 하는 말이 그 므비보셋이 다윗을 배반했다는 겁니다. 그가 지금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데 '오늘 이스라엘의 집이 내 아버지의 왕국을 돌려줄 것'이라고 떠벌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곧 므비보셋도 다윗을 배반했다는 말입니다. 자기 아들도 자기를 배반하고 둘도 없는 친구의 아들도 자기를 배반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중에 시바의 거짓말로 드러납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순간 다윗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참으로 허탈하고 막막했을 겁니다. 혈육에게 배반당했습니다. 은혜를 베푼 자에게도 등돌림을 당했습니다. 삶의 피로가 겹겹히 밀려옵니다. 그의 머리는 점점 더 혼미해지고 발걸음은 더욱 비틀거립니다.

그런데 이게 또 왠일입니까? 이번엔 그 피난길에 시므이라는 자가 나타나서는 다윗을 저주하기 시작합니다. 사울의 친척인 그는 계속해서 다윗을 따라오면서 악담과 저주를 퍼부으며 돌과 오물을 던져댑니다. 그는 다윗을 이렇게 저주합니다. "너 살인자야, 이 잔인한 놈아, 꺼져라, 사라져라. 네가 네 아들 압살롬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나는 것은 사울의 집에 온갖 살인을 저지르고 그 대신 왕이된 네게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니라. 너는 살인자이므로 네 스스로 불행을 자초한 것이니라..."

갈수록 첩첩산중입니다. 혈육에게, 친구의 아들에게 그리고 이젠 그를 괴롭혔던 원수의 친척에게까지 공격을 받습니다. 정말 다윗은 끝이 어딘지도 모를 끝없는 추락을 하고 있는 겁니다. 다윗 일생에 이토록 처참했던 순간이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발에 흙을 묻히지 않던 왕의 자리에서 맨발로 길을 걷는 자리로까지 떨어졌겠습니까?....
다윗이 왜 사울을 죽인 살인자입니까?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도 않았고 죽일 마음도 없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 했던 자는 오히려 시므이의 친족 사울이었습니다. 다윗은 번번히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사울에게서 칼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삼상24:4절에 보면 다윗은 얼마든지 사울을 죽일 수가 있었지만 사울의 옷자락만을 살짝 베어내어 그에게 자기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는 11절에서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다'고 탄식하며 '하나님이 나와 왕 사이를 판결하사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한다'고 절규합니다. 그러자 사울은 그런 다윗을 향해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다'며 울면서 회개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을 죽인 것은 다윗이 아니라 블레셋 군대였고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셨습니다.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 가문은 철저한 멸문지하를 당합니다. 그 배후에는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책임을 다윗에게 뒤집어 씌우는 겁니까? 사울의 혈족인 시므이가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고 해서 그를 향해 살인자라며, 왕의 자리를 빼앗았다며 온갖 모욕과 저주를 퍼부을 권리도 자격도 없는 겁니다. 그건 무고요, 누명이요, 억지인 것입니다.

그 시므이의 기가 찬 모습을 본 다윗의 용맹스런 심복 아비새는 당장에 시므이의 목을 베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다윗의 처신은 사뭇 감동적입니다. 다윗은 역시 여기서도 분을 내지 않고 오히려 아비새의 혈기를 가라앉히면서 이렇게 타이릅니다. "아비새, 이게 자네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개의치 말게나. 저가 나를 저주하는 것이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고 말씀하셨다면 누가 그에게 '왜 너는 그렇게 하느냐'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11절에 보면 기가 막힌 고백을 토해놓습니다. "내 몸에서 나온 내 아들도 내 목숨을 노리는데 지금 이 베냐민 사람이야 얼마나 더하겠는가! 저로 나를 저주하도록 내버려두게나. 하나님께서 나의 원통함과 억울함을 살펴보고 계실 것이니 하나님께서 그의 저주 까닭에 좋은 것으로 내게 갚아주실 것이네..."
그는 여기서도 모든 것을 수용하는 성숙한 믿음의 태도를 보입니다. 정말 놀라운 인내력과 수용력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소망을 밝힙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나의 원통함'... 다윗은 정적이 많았고 그를 시기하는 자 또한 많았습니다. 그러니 압살롬의 쿠테타가 가능했던 겁니다. 높은 곳에 있는 나무에 바람이 드세듯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 외로운 겁니다. 그의 가족들조차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세상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를 거역하고 그를 두고 체 까부르듯 별의 별 소리가 다 들리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기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식합니다. 이게 바로 이 피곤한 세상을 살아갔던 다윗의 지혜였습니다. '내 허물이면 감당할 것이고 내 원통함이면 하나님이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얼마나 놀라운 믿음의 고백입니까? 결국 삼하19:19절에 보면 시므이는 나중에 다윗 앞에 엎드려 사죄를 청하고 다윗은 그를 용서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자식도, 원수도, 모든 상황도... 그리고 그는 자기를 따르는 부하들을 이끌고 계속해서 길을 갈 뿐입니다. 시므이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던져대는 돌과 쓰레기와 저주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말입니다. 그 여정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었는지 14절에 보면 다윗이 요단에 당도했을 때 무척 지쳐있었다고 전합니다. 그 심신이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여정 속에서 왜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종이었는지, 왜 하나님께서 그에게 남다르게 각별한 은총을 베풀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는 피곤한 인생을 살아가는 믿음의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인생고의 문제에 허덕이고 있습니까? 이 사순절과 함께 시작되는 이 새봄에 여러분은 어떤 육체적, 영적 곤고함에 피곤해 하십니까?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이 사순절이 피곤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오히려 적지 않은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간에 우리 주님께서 우리 못지않은 곤고하고 피곤한 인생을 이 땅에서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주님의 생을 묵상하면서 '주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라고 말하고 '또 그분은 육체에 계실 때에 하늘 아버지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주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겁니다. 주님은 인생이 겪는 모든 아픔과 좌절과 절망과 고민을 다 겪어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분이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위로가 되시고 소망이 되시고 구주가 되실 수 있는 이유입니다.
C. S 루이스가 쓴 '스쿠루테이프의 편지'라는 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마귀들이 한데 모여 서로 구수회의를 합니다. 그 주제는 '어떻게 하면 원수인 하나님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들은 자기들의 원수인 하나님을 이길 방법을 여러모로 궁리합니다. 그런데 그 어떤 결론도 얻지 못하는 중에 그 중 하나가 '자기들이 원수 하나님을 이길 수 없는 한 가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이길 수 없는 한 가지 이유가 있네.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 되어보질 못했다는 거야. 그러나 우리의 원수는 사람이 되었지. 그러기에 우리의 원수는 우리보다 훨씬 생생하게 사람을 느끼지. 그게 바로 우리가 원수를 이길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신 사건 속에 바로 우리 인간의 구원이 시작됩니다. 이 성육신 사건을 기독교의 핵으로 여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그로 인해 인간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되셨고 그 인간의 온갖 아픔과 고민과 갈등과 시련을 헤아려 인간을 구원하는 구세주가 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여러 인생고의 문제들이 짐이 되어 짓누르고,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르고, 불길이 되어 심령을 검게 태우고 있습니까? 이 사순절기에 주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피곤한 인생에 답을 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분만큼 우리를 잘 아시는 분이 없으십니다. 그분만큼 우리를 잘 이해하시는 분이 없으십니다. 그분만큼 우리를 잘 다독이실 분이 없으십니다. 그분만큼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분을 멀리하고 엉뚱한 곳에서 헤메이고 있는 것입니까?...

다윗처럼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처럼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환경을 탓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서운해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십시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좋은 것만을 기대하십시다. 그럴 때 우리는 피곤한 인생 속에서도 피곤하지 않게 활기차고 생기있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실 것이라...' 이 감찰하시는 하나님, 이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온갖 피곤함과 곤고함을 깨끗이 풀어내며 승리하며 살아가시는 우리 영락의 권속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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