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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땅에서 제사하라 / 출 8:25-27, 눅 2: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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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 이성희 목사 (연동교회)
제 목 : 이 땅에서 제사하라
본 문 : 출 8:25-27, 눅 2:41-47 

 
미국의 연방정부 대법원은 종교로 인정한 세속적 인간주의(The Secular Humanism)를 발표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정은 다음 사상들을 신봉하게 하여 그것을 세상의 절대규범 같이 여기게 합니다. 인간의 행복은 지상에서 이뤄집니다. 인간의 마음은 낙원을 만들 수 있는 절대조건이 됩니다. 인간에게 절대성은 없습니다. 모든 행동은 상대적입니다.

인본주의는 ‘너 자신만 위하라’고 합니다. 인간의 본질은 스스로가 자신의 신이 됩니다. 인간은 스스로 낙원을 만들어내고 자신이 신이 됩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을 무한하게 만듭니다. 인간은 불가능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불가능은 없다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거룩한 곳에 계신다고 합니다. 바로는 모세에게 꼭 멀리까지 갈 것이 무엇이 있느냐, 이 땅이면 어떠냐고 합니다. 얼핏 봐서는 그럴싸한 말로서 바로는 모세를 현혹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임금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혼돈하기 쉬운 세상의 논리로 대항합니다.

욥기 14:4에는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합니다. 아무데서나, 아무렇게나, 아무에게나 예배하라는 세상 왕의 편의주의를 배격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반드시 애굽이 아닌 사흘 길을 가서 희생을 드리라고 합니다. 모세는 세상의 왕의 현혹에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고수합니다.


첫째, 왜 애굽에서 희생을 드리라고 합니까?

바로는 노예도 잃지 않고 재앙도 면해보려는 의도에서 타협을 시도합니다. 이런 얄팍한 잔재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자신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바로의 유혹을 잘 보세요. 먼저 이 땅에서 희생을 드리라고 합니다(8:25). 두 번째는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고 합니다(8:28). 세 번째는 장정만 가라고 합니다(10:11).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라고 합니다(10:24). 이런 바로의 유혹은 신앙생활의 유혹에 큰 교훈을 줍니다. 애굽에서의 희생이란 미움 아래에서의 제사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미워하는 데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이런 제사가 순결한 제사일 수 없습니다. 에스라 9:11에는 “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로 명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고 합니다. 더러운 땅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더럽고 가증하면 땅이 더럽습니다. 더러운 땅에서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불의가 행해지고, 음행이 행해지고, 이방신에게 제사가 행해지는 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도 않고 받으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이런 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이 “뭘 교회까지 가느냐? 집에서 예배드리지”라고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뭘 그 교회까지 가느냐? 가까운 데는 교회가 없느냐?”고 하기도 합니다. 집에서 예배드려도 됩니다. 그러나 공예배는 교회에 와서 드려야 합니다. 인터넷을 통해서도 좋은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순간에 참 설교입니다. 인터넷에도 훌륭한 교회 소개가 많이 있습니다. 인터넷에도 훌륭한 목사님들의 설교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야 참 말씀의 선포와 교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사이버교회를 많이 말합니다. 저도 사이버나 인터넷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버교회는 온전한 교회일 수 없습니다. 폴 투르니에가 말했습니다.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이 둘이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혼자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인터넷 채팅을 통하여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진정한 만남이란 실제적 만남이 있어야 하고 흔히 말하는 스킨십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교회는 봉사가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봉사와 교제가 있는 곳만이 교회입니다. 사이버교회의 또 한가지 잘못은 희생 없는 예배와 신앙을 원합니다. 내 자신의 희생이 없이 희생을 드리려는 인간의 욕구가 날로 증대되고 있습니다. 요셉 케이보는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주의 통치하에 있을 때 유명한 분입니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공산주의를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는 주일 아침이면 3시간동안 기차를 타고 프라하로 갑니다. 교회에 가서 2시간 반 동안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마치면 공원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점심 후에 다시 2시간 반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3시간 걸려서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왜 그렇게 하는지 아십니까? 그곳에 가야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에 예배 한번 드리는 것이 이렇게 소중한 일입니다. 그분은 후에 체코인들을 위한 자국 선교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번의 예배를 위해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예배하러 가고 예배해야 합니다. 캘빈 밀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자기 희생이라는 강인한 골격을 통해 유지되는 따뜻한 유기체적 삶이다”고 했습니다. 예배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가까운 곳에서 적당히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좀 멀어도 좀 힘들어도 희생이 있어야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기체적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까지 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며칠 씩 걸려 올라가는 곳이지만 그 곳에 갈 때에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는 것은 그들에게 무한한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122:1에는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고 합니다. 그들의 기쁨을 우리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왜 애굽에서 희생을 드리지 않겠다고 합니까?

애굽사람들은 종교적 이유에서 짐승을 죽여서 희생을 드리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애굽사람들은 거의 모든 동물들을 숭배함으로 동물의 제사를 혐오했습니다. 암소는 애굽의 아시스 신의 상징입니다. 수소는 아피스 신의 상징입니다. 흰 암소는 절대로 제물로 바치지 않았습니다. 이런 애굽인의 종교와 동물을 죽여 바치는 이스라엘의 제사가 서로 충돌하여 싸움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계명을 받으러 올라갔을 때의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이끌던 모세가 보이지 않고 40일 동안이나 연락이 끊어지자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을 이끌 신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것은 금송아지였습니다. 왜 하필이면 금으로 만들었는지 아십니까? 왜 하필이면 송아지를 만들었는지 아십니까?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배워온 종교심이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 보고 듣던 것이 소에 대한 숭배였습니다. 소는 애굽인들이 신성시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일 쉬운 방법으로 가장 값진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면 그들을 이끌만한 신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애굽인들은 동물들을 고의로 죽이면 사람에게 사형을 내리는 형벌이 입법화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어느 한 로마 사신은 사고로 고양이를 죽였다는 혐의로 사형을 받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는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앉은뱅이를 고친 것을 보고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고 하며 바나바는 쓰스라고 하였고 바울은 허메라고 하였습니다. 쓰스는 제우스신을 말합니다. 허메는 말의 신 헤르메스를 말합니다. 13절에는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라고 했습니다. 소는 쓰스에게 바치는 신성한 동물입니다. 동물을 신성시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 종교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일수록 사람은 신성시하지 않습니다. 소나 호랑이나 코끼리나 원숭이 등을 신성시하여 잘 보호하는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도처럼 동물을 신성시하여 소를 귀하게 대접하고 소고기를 아예 안 먹고 굶고 있는 것도 잘못입니다. 동시에 오소리, 수달 등 천연기념물을 닥치는 데로 아무 것이나 다 잡아 먹는 것도 문제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애굽에서 희생을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이런 동물을 신성시하는 애굽인들의 폭동을 염두에 둔 말일 것입니다.


셋째, 왜 사흘 길쯤 가서 희생을 드리려 합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모세와 아론이 자신의 마음대로 변경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겠다는 것이 모세와 아론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이것이 신앙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우선은 불합리해 보이고, 무리이고,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알고 보면 하나님의 계산과 준비가 철저한 것을 알게 됩니다. 출애굽기 3장 12절과 18절에는 사흘 길을 가서 희생을 드리라고 여러 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사흘 길이 제사하기에 가장 적절한 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사흘 길은 고센에서 시내 산까지 가는 거리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제일 편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합리적이고, 가장 인간에게 편안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에서 하나님을 판단합니까? 우리의 경험에서 하나님을 이해합니까? 이런 인간의 기준이 잘못된 것입니다. 조금 불합리하고, 때로는 불편하고, 내 생각과는 거리가 있어도 따르는 것이 신앙입니다. 가장 좋은 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왜?” 보다 “어떻게?”가 필요합니다. “왜 사흘 길을 가야 합니까?”라고 하기보다 “어떻게 사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인가?”가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보다 먼저 가십니다. 모든 것을 아십니다. 명철이 한이 없으십니다.

이사야 40:28 에는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라고 하였습니다. 로랜스형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복종이야말로 자기가 좇아야 할 유일하게 안전한 길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이 명하시는 제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의 제사가 순전히 하나님의 계획과 명령 하에 이루어진 제도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제사 제도가 인간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것임을 확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란 우리의 충동적 의지를 굽히는 것입니다.


결론

카를로 카레토는 “오 나의 교회여 나는 그대를 비판할 말이 너무 많다오. 그러나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오”라고 하였습니다. 왜 우리가 먼길을 가서 제사해야 합니까? 왜 우리가 하필 연동교회까지 와서 예배드려야 합니까? 문제도 있습니다. 불편도 합니다. 더 가깝고 더 큰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제일 좋은 교회입니다. 110년의 장구한 역사 가운데 세워주신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하나님이 은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하고 교회를 사랑합니다. 날마다 우리가 아무리 먼길이라고 할지라도 이 교회에 올라와 예배드리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바랍니다. 110년의 역사를 감사와 은혜로 영광 돌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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