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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다리는 사람들 / 눅 2: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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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기다리는 사람들 
본  문 : 눅 2:25-32
설교자 :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한 양로원에서 예배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이 양로원은 특히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외로운 노인들이 수용되어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결같이 건강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예배 후 원장님과 차를 나누면서 대화하게 되었습니다. 원장님 말씀이 이곳에 수용되어 계신 어르신들은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답니다. 웃음이 없으시고 틈만 나면 창 너머를 말없이 바라 보신 답니다. 행여라도 누군가가 찾아오지 않을까 해서랍니다. 1년이 다 가도록 누구하나 찾아오는 일 없지만 오늘도 또 창 너머를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마음이 아려왔습니다. 하루 종일 기다려도 오지 않는 그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 노인들의 모습이 너무도 제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이분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고는 하나 제 눈에는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머지 않아 찾아올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슬펐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노인들뿐 아니라 우리도 기다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작게는 하루를 사는 동안에도 수많은 기다림이 있습니다. 사거리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립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차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식당에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립니다. 크게는 인생을 사는 동안에 수많은 기다림이 있습니다. 농부는 곡식이 무르익기를 기다립니다. 부모는 자식이 자라기를 기다립니다. 청춘남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결국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인생 성패는 기다림에 달려있습니다. 참고 견디지 못하여 기다림을 포기하는 사람들은 인생에 실패합니다.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림에 시행착오를 범하는 사람들은 인생을 어렵게 삽니다. 그러나 잘 참고 끝까지 견뎌서 기다림을 온전히 이루는 사람들은 인생에 성공합니다.


신앙은 기다림이다.

성경을 보면 인생 뿐 아니라 신앙도 기다림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신앙은 공동체적으로는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을 보면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저가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경건하다는 것은 신앙이 좋다는 뜻이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다는 것은 곧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시므온뿐 아니라 구약의 모든 신앙인들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개인적으로는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습니다. 시 130:5를 보면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 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시인이 개인적으로 성전에 오르며 약속하신 대로 성전에서 제사할 때 여호와의 임재하심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신약에 보면 신앙은 공동체적으로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행 1:11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그러니까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천사들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본 것처럼 주님께서 승천하신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재림하실 것이다. 그러니 이를 기다리라’ 그래서 이날 이후로 모든 성도들은 계 22:20 말씀 그대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를 외치며 주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개인적으로는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습니다. 행 1:4를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약속하신 성령 강림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그 자체로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성패도 기다림에 달려있습니다.

우선 기다림에 실패해서 큰 낭패를 본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놀랍게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첫 손가락에 꼽힙니다. 창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 나이가 75살이었습니다.

마음이 급해진 아브라함이 기다리지 못하고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았습니다. 15:4를 보면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약속을 확인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네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그런데 세월이 흘러 아브라함 나이 85세가 돼도 아무런 조짐이 보이지 않자 아내 사라와 의논하여 사라의 몸종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17:5-6에서 “내가 너로 열 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 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약속을 다시 세우셨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었지만 초창기 기다림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기다림의 실패로 이스마엘이 태어났고, 태어나서는 안될 사람이 태어남으로 끝없는 고통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아랍 계의 테러와 전쟁은 바로 이스마엘의 후손들과 이삭의 후손들 사이의 싸움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다림의 실패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의 실패는 신앙생활의 실패입니다. 그 실패의 쓴 열매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기다림에 성공해서 큰 구원을 이룬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노아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홍수 심판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자그마치 120년 동안 방주를 짓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120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렸습니다.

그동안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전했고, 저들도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노아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노아도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정말 견디기 힘든 긴 기다림의 세월 120년을 보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방주 속에서 40일 동안 밤낮 가리지 않고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150일 동안 온 천지가 물에 잠긴 채 방주에 떠 있었습니다. 1년 10일만에 방주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기간도 저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기다림의 시간들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노아가 한 번도 기다림에 시행착오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저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의 성공이 믿음의 성공입니다. 이 성공의 열매를 맛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대림절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예수 성탄 전 4주간을 말합니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대림절을 지키게 된 것은 7세기 경부터이고, 그 신학적인 의미를 바로 세워 본격적인 교회력의 한 절기로 삼기 시작한 것은 10세기부터입니다.

이 대림절의 신학적인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님의 성탄을 마음을 정결하게 준비하고, 다른 하나는 영광가운데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기다림의 절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력으로 볼 때 이 대림절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 대림절이 교회력으로는 새해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대림절 첫째 주일 바로 오늘부터 새해의 교회력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력의 시작이 기다림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이 바로 기다림에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오늘 하루하루 우리에게 임재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생활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기다림의 비결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이 기다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갈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기다림에 실패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무엇인가 내 힘으로 해 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캐나다의 영성가 헨리 나우엔은 “영성의 길”이란 책에서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에 나오는 핵심 단어가 ‘넘겨주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막 14:10을 보면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의해서 대적들에게 넘겨지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주님의 수난은 시작된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의 공생애는 크게 둘로 구분이 됩니다. 대적에게 넘겨지기 전까지 주님은 당신의 뜻대로 말씀을 전하셨고, 이적을 베푸셨고, 하나님 나라를 널리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넘겨지신 후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때리면 맞으셨고, 옥에 가두면 갇히셨고, 물으시면 답하셨고, 십자가에 달면 달리셨습니다.

주님께서 넘겨지신 후에도 천군 천사를 불러 저들을 물리치실 수 있으셨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저들을 얼마든지 제어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얼마든지 내려오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넘겨지신 후에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기다리시기만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다림뿐이었습니다. 만일 다른 일들을 모색해 보고 이렇게 저렇게 몸부림을 치셨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방해가 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시기를 오래 뒤로 미룰 뿐이었습니다. 주님은 넘겨지신 후에 철저하게 기다리기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점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약속을 기다릴 때 그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장중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만 기다려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일을 앞당겨보려고 몸부림칩니다. 심지어 로비를 하고, 급행료를 주고, 부정한 방법까지 동원해 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하나님의 때는 멀어져만 간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라 멀어져간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봄을 앞당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묵묵히 기다릴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묵묵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둘째,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다림에 실패하는 이유 가운데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우리 마음 가운데 의심이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사실일까? 만일 그렇다면 이렇게 늦어질 수 있을까? 믿음이 흔들립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기다림에 성공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로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시 13편을 보면 정말 그의 기다림이 얼마나 처절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여호와여 어느 때 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기다려도 기다려도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으니까 너무 고통스럽고 힘이 든다는 것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때를 앞당겨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 내용은 3절에서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절에서 “내가 요동될 때...”라는 구절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아무리 하나님의 때가 더디 와도 믿음으로 기다림에 승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5절에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에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내 생각보다 더디고 늦어져도 하나님께서 내게 인자를 베푸시고 나를 후대하신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동안 기뻐하고, 또 찬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동안 기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동안 찬송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실제로 많은 경우 믿음이 흔들려 불안해하고, 안절부절못하면서 원망하고 한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맺으신 약속을 끝내 지키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응답이 더딘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아직 때가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반드시 옵니다. 따라서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셋째,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기다림에 실패하는 이유 가운데 또 하나는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대부분 조급증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빨리 빨리 증후군을 앓고 있습니다. 기다림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어느 식당엘 가보니까 “음식을 주문 한 뒤에 15분 이내에 나오지 않으면 무료!”라고 써 붙여 놓았더라구요. 어떤 피자 가게는 30분 이내에 배달이 되지 않으면 돈을 받지 않겠다고 광고를 하더라구요. 사진을 찍어도 20분 이내에 나와야 하고 그것도 모자라 즉석 사신을 찍습니다. 인스턴트 식품인 라면도 모자라서 컵라면이 잘 팔리고 있고, 5분 컵라면이 3분 컵라면으로 이제는 전자 레인지에 데워서 ‘1분이면 OK!’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의 조급증을 마케팅에 적극 활용해서 성공한 케이스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현대인은 기다림의 훈련이 되어있지 못합니다. 참고 인내하며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시 130:6을 보면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하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는 군대생활 하던 때 전방에서 철책선 근무를 하면서 저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한 밤을 꼬박 새우며 보초를 섭니다. 보초를 서면서 아침이 오기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는 지 모릅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차례로 생각해 봅니다. 알고 있는 노래를 불러도 봅니다. 별 짓을 다해봐도 시간이 가지 않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지 정말 온 몸으로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기다리는 일이 이보다 더 힘이 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시절 아침을 기다리던 그 때를 생각하면서 믿음의 기다림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시 37:7 말씀을 보면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말씀했습니다. 기다림에 있어서 인내는 기다림의 뿌리입니다. 인내 없이는 기다림을 이룰 수 없습니다. 롬 8:25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지니라” 기다림에는 참음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조금 더 참으시기 바랍니다. 조금만 더 견디시기 바랍니다. 고지가 바로 저기인데 예서 말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시므온은 평생의 긴 기다림 끝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28절에 보면 그렇게도 기다리던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께 찬송했습니다. “주재여 이제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이제 그 긴 기다림을 끝냈다는 것입니다. 이제 자기의 사명을 다 완수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믿음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시 40:1에 보면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고 했습니다. 기다림에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은 그 자체로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에 승리하면 신앙생활은 성공한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의 시므온처럼 긴 기다림을 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대림절 기간에 우리의 기다림이 더욱 깊어지고 성숙되기를 바랍니다.

# 기도/

우리의 기다림이 열매맺게 하옵소서.

하나님께 맡기게 하옵소서.

약속을 믿게 하옵소서.

참고 기다리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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