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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은 자를 향한 위로 / 습 3: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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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피영민 담임목사 (강남침례교회)
* 본 문: 스바냐 3장 14-18
* 제 목: “남은 자를 향한 위로”

(서론)

오늘은 우리에게 약간은 생소한 스바냐서를 통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 있는 예언서와 선지서를 구분할 때에 크게 두 가지로 분류를 합니다. 하나는 대선지서이고, 또 하나는 소선지서로 나눕니다. 이때 대선지서와 소선지서를 나누는 양은 그 책의 분량입니다. 두꺼운 책은 대선지서가 되는 것이요, 얇은 책은 소선지서로 분류를 합니다. 조금 전에 우리가 읽은 스바냐서는 소선지서에 해당합니다. 스바냐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숨겨 놓으신 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스바냐란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숨겨 놓으셨다는 사실을 짐작 할 수가 있습니다. 스바냐 1장 1절을 보면 스바냐에 대한 소개가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여기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스바냐를 가리켜서 ‘히스기야의 현손이라’는 표현입니다. 히스기야의 현손이면 과연 몇 대 손일까요? 증손자, 고손자, 현손자가 되니까 스바냐는 히스기야 왕의 4대손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스바냐가 왕족 출신임을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스바냐서에는 예루살렘에 익숙하고, 왕족들이 입고 있는 옷들에 대해서도 아주 능통한 스바냐의 독특한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1장 8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10절을 보시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곡성이, 제 이 구역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서 ‘이방인의 의복과’, ‘어문과 제 이 구역’에 대해서 스바냐가 너무나 잘 알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왕족의 혈통을 이어 받은 위대한 가문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스바냐에게 임하기 이전에는 예루살렘의 그 누구도 이 사람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이 사람에게 임하자 역사의 위대한 경륜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이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라고 오늘 본문은 명백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간혹 헷갈리는 부분이 여러 왕의 이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선 시대의 왕들의 이름을 지금도 암기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역대 왕들의 이름을 외우는 데에 시간을 투자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4명의 왕들이 연관되어져 있습니다. 한 왕은 히스기야이고, 그 다음으로는 므낫세고, 암몬이고, 요시야 왕입니다. 이 왕들 중에서 히스기야 왕은 아주 선한 왕이었고, 종교 개혁을 일으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일으켰던 아주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본인도 죽을 병에 걸렸으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에 생명의 연장을 받았던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의 아들인 므낫세는 참으로 악한 왕이었습니다. 이 므낫세 왕은 이사야 선지자를 톱으로 켜서 죽인 매우 악명 높은 왕입니다. 그리고 이 므낫세 왕의 아들인 암몬 왕도 자기 아버지를 닮아서 훌륭한 왕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왕인 요시야 왕은 선한 왕이었습니다. 요시야 왕은 구약 시대에 있어서 종교 개혁을 크게 일으킨 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도 가끔 신앙의 개혁을 일으킬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가정과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하다고 느낄 때에는 과감히 안으로부터의 종교 개혁을 일으켜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에,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응답을 받기 위해서 뜨겁게 기도하는 신앙의 개혁을 우리는 종종 가져야만 합니다. 교회의 개혁도 중요하지만, 더욱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신앙개혁이 우선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갖고서 우리 교회가 다음주에 부흥회를 합니다. 이번 부흥회에는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고, 은사를 체험하고, 성령을 충만히 받는 데에 있습니다.

이번 부흥회가 모든 성도님이 참석하셔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은혜와 은사를 많이 받는 참으로 뜨겁고도 은혜스러운 복된 시간이 될 줄로 믿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시야 왕이 종교 개혁을 일으키기 전에, 이 유다에는 우상숭배가 매우 극심했습니다. 그 당시 유다 백성들은 4가지 우상들을 숭배를 하였습니다. 첫째는, 바알 종교입니다. 이 바알 종교는 농사를 많이 짓도록 생산을 많이 하게 하는 신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농부들이 이 종교에 많이 빠지게 되었고, 이 종교의 특징은 사제들이 대단히 음란했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음란을 이기지 못하고 이 바알 종교에 많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그마림 이라는 종교입니다. 그마림의 뜻은, “돌팔이 사제”라는 의미입니다. 이 그마림 이라는 사제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숭배를 권유하던 제사장들 입니다. 셋째는, 하늘의 일월성신을 섬기던 천체숭배가 있었습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4장 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 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고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므낫세 왕은 성전 뜰 안에다가 천체 숭배를 하기 위한 제단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는 하늘의 태양과 달과 별을 섬겼으며, 별점을 보는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요즘도 어떠한 스포츠 신문을 보면 점을 보는 내용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런 신문을 쳐다봐서도 안 됩니다. 심심하니까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그리고 오락이라도 절대로 그런 것을 행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을 자주 하는 사람치곤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늘의 별을 보고, 자신의 미래를 예견한다는 사람의 인생이 어쩜 그렇게도 비참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성도는 절대로 점을 보거나 오락으로서도 그런 것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성경을 통해서 그러한 행동을 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경고하셨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말감이라는 종교가 있습니다. 이 종교는 암몬 사람의 신을 섬기는 종교입니다. 이 종교는 솔로몬왕의 첩들이 이방에서 들고 온 잡스런 종교입니다.

이 4가지 우상을 섬기는 종교를 향해서 하나님의 질투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이 득달같이 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하셨습니다. 이 ‘여호와의 날’은 언제나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날은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심판의 날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자들, 하나님의 남은 자들과도 같이 신앙을 지킨 성도에게는 그날이 위대한 구원의 날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스바냐의 주제는 ‘여호와의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진리에 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이러한 심판의 와중 속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반드시 구원하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스바냐서 3장 13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서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줄인다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이스라엘을 심판을 하시고, 열방을 심판하셔도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꼭 구원을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럼, 신약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신역의 핵심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약의 메시지는 ‘택함 받은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약속의 증거입니다.


1. 남은 자들에게는 고통이 있습니다.

오늘 스바냐 3장 18절을 보니까, “내가 대회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들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너의 치욕이 그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남은 자들도 근심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절기를 지키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데 “어찌해서 우리는 그 절기를 지킬 수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는가?”라고 심히 근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는 치욕도 있고, 무거운 짐도 있습니다. 또한 12절 말씀을 보면,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남은 자들도 때로는 곤고합니다. 때로는 가난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도 때로는 근심과 곤고와 치욕과 가난과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영혼문제, 진리문제, 교회문제로 근심과 걱정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교회가 어떻게 되든지,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남은 자들은 진리를 위해서 근심하며, 교회를 위해서 때로는 치욕을 당하며 눈물 흘리며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항상 부흥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부흥기가 있으면 반드시 침체기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을 때가 있으면, 은혜를 많이 받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교회의 성도도 일년 365일 동안 계속해서 큰 은혜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신앙의 길을 따라가면서 항상 은혜의 절정기를 지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흥기도 있으면, 또 한때는 침체기도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신학교 교수 시절에도 수많은 신학생들에게 그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앞으로 목회를 하면서 설교를 할 때마다 매 주일 잘하려고 하지 말라고 강조했습니다. 대신에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잘 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프로야구 선수 중에서 MVP를 차지한 선수도 타율이 3할을 겨우 넘깁니다. 즉 3번 나오면 한번 정도 안타를 치면 그 선수는 정말 대단한 선수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잘하는 야구의 천재라도 타석에 나올 때마다 안타를 치지는 못합니다. 때로는 포볼로 나가기도 하고, 또 때로는 삼진 아웃을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병살타를 쳐서 팀 분위기를 종종 망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 신학생들에게 설교를 할 때마다 홈런을 치려는 욕심을 버리고, 겸손하게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잘해도 그 사람은 목회를 성공적으로 잘 할 수 있다고 권면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인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반드시 고난은 있게 마련입니다. 이 고난에는 육신의 고난도 있습니다. 저도 지난 2주간 독감으로 인해서 참으로 많은 괴로움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많은 성도님의 사랑과 관심으로 이제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에 있을 부흥회에는 제가 펄펄 뛰면서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암흑기에도 결코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현재 어느 교회든지 침체되었고, 어려움이 많다고 생각을 하면 그것은 좋은 징조입니다. 왜냐하면 어려움은 잠깐이요, 금방 지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두움이 지나가면 틀림없이 밝고 화창한 날이 오게 마련입니다. 지금 어떠한 교회가 크게 부흥되고 있다고 해서 너무 부러워하지 마십시요. 조만간 그곳에도 필연적으로 시험이 찾아오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에 남아있는 것은 어두움이 아니요, 큰 부흥의 밝은 시대임을 간절히 소망하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남은 자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19-20절의 말씀을 보더라도, 우리 하나님께서 어려움에 처한 남은 자들을 향해서 큰 소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계십니다. 한 번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로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로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지금 하나님께서 택하신 남은 자들에게는 칭찬과 명성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 강남중앙침례교회가 이제 온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명성을 얻게 될 날이 속히 올 줄로 확신합니다. 지금까지도 우리 교회를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지만, 앞으로는 더 큰 칭찬과 명성을 얻게 되는 축복을 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소망을 이루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우리 남은 자들에게 괴로움과 고난을 줄지라도, 능력의 하나님이시요,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소망의 하나님 되시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택하심을 받은 남은 자들에게 영원한 소망을 허락하여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님들이 전 세계의 방방곡곡에서 복음의 횃불을 크게 날릴 줄로 믿습니다. 복음의 밝은 빛을 비추어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영적으로 크게 방황하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구원이라고 하는 영원한 소망의 기쁨으로 인도하게 될 줄로 확신합니다.


3. 남은 자들을 향한 소망의 근거

그럼, 우리가 이같은 소망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과연 그러한 성경적인 근거가 있을까요? 네, 틀림없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시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해서 소망을 가질 수가 있습니까?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 인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과 늘 함께 하시는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 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부유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한 우리는 부유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무능해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는 한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무지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는 한 우리는 지식의 근본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소망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남은 자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소망과 위로를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4가지 모습으로 우리 남은 자들과 늘 함께 계십니다.

첫째,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목사가 아무리 설교를 잘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지 아니하시면 그 교회에는 구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그곳에는 반드시 구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법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 성도님의 간증들을 심방을 하면서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대부분의 성도님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우리교회에 오게 되었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따라서 마음의 문을 열고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 교회에 이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더욱더 크게 일어날 수 있도록 성도 여러분 많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때로는 어려움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저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사람은 바로 제가 전도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의 신앙적인 성장과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며 충성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큰 희망을 늘 갖게 됩니다. 그들은 언제나 저의 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전도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힘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전도를 열심히 하여서 구령의 열매를 많이 거둔 사람들은 저 천국에서도 복된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시편 127편 5절을 보면,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이 시간에도 임하셔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영혼들이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이 어렴움과 고난과 환난에 처해도 그 모습으로 인하여서 오히려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남은 자들은 불안해서 떨고, 초조한 상황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습을 보시고서 기뻐하십니다. 제가 성경을 보면서 제일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 바로 욥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 살고 있는 욥의 자녀들의 생명을 하루에 다 거두어 가시고, 재산을 다 잃게 만드시고, 육신에 큰 질병을 주시고, 심지어는 사랑하는 아내로부터도 철저한 배신과 외면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욥의 고난을 보시면서도 저 천국에서 이렇게 크게 웃으셨습니다. “하하하, 마귀야, 보았느냐?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네가 그렇게 괴롭게 하면서 나에게 송사한 욥의 믿음을 보았느냐? 욥은 결코 나를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라고 하나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겪을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슬퍼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에게 슬픔을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고난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바라보십니다. “아하, 네가 조금 괴롭구나!, 아하, 네가 조금 슬퍼하는구나! 아하, 네가 그러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나를 향한 믿음을 끝까지 잘 지키는구나! 나는 참으로 기쁘다”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을 사랑할 때에도 요란한 사랑은 그리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그러한 사랑은 조금 있다가 곧 깨어지는 법입니다. 남녀간의 사랑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그 사람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조금 허전한 마음이 들고, 그 사람을 잠잠히 사랑하는 관계는 아주 오래가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요란한 사랑이 아니라, 잠잠한 사랑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끼리의 사랑도 잠잠한 사랑이 되어야만 할 줄로 믿습니다. 담백하고 잠잠한 사랑이 우리 성도 안에는 있어야만 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의 사랑이 뜨거운 사랑이 되기보다는, 이처럼 잠잠하지만 오래가는 사랑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너무 차갑게 사랑하지도 마십시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듯이, 우리들도 서로가 서로를 잠잠히 사랑했으면 합니다.

넷째, 하나님은 우리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시며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을 바라보시면서 즐거이 부르시며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대 창조를 하시고도 하나님께서는 노래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도 하나님께서는 노래를 부르지 아니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환난과 고통 중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모습을 보시고서는 하나님께서는 즐거워하시며, 기뻐하시며, 노래를 부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우리 남은 자들인 성도를 향하여서 3가지의 권면을 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 3가지 권면을 가지고 다음 주에 있을 부흥회를 준비하고자 합니다.


4. 남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권면이 계십니다.

첫 번째 권면은, 14절의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입니다. 고난 중에도 기뻐하며 즐거워 할 수 있는 사람은 주의 백성들 뿐입니다. 감옥에서도 찬송할 수 있는 사람은 주의 택하신 백성들 뿐입니다. 종달새는 낮에 노래하지만, 나이팅게일은 어두운 밤에도 노래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종달새의 노래가 아니라,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부르도록 하나님의 권면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기뻐하며 노래해야만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권면은, 15절의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이 무섭습니까? 제가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자그마한 아이가 어른과 같이 손을 잡고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그 아이가 ‘덜덜덜’ 떨고 있다면 그 어른은 틀림없는 납치범입니다. 사랑하는 아빠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는 결코 무서워하거나 겁을 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빠가 자신의 생명을 걸고서 사랑하는 아이를 보호하고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유라굴라의 대풍이 불어와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배는 부서져도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 권면은, 16절의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손을 늘어뜨리고 낙담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침례교회가 자랑하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인 윌리엄 캐리는 영국에서 구두 수선공의 일을 하면서 세계 선교의 큰 비젼과 꿈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목사가 되어서는 수많은 목사들 앞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설교를 통해서 윌리엄 캐리는 목사들로 하여금 선교에 앞장 설 것을 강력하게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나이 많이 든 목사가 이렇게 충고했다고 합니다. “젊은이, 자리에 앉게. 선교는 자네가 안 해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네!”. 이것은 굉장히 유명한 실화입니다. 그러나 이때에 윌리엄 캐리는 그들을 향해서 담대히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계획하십시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계획하십시요!”라고 선포를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인도의 선교사로 가서 30년 동안 세계 선교의 문을 활짝 연 혁혁한 공로를 세우게 됩니다. 그의 선교에 대한 비젼으로 인하여서 지금 전 세계의 선교 불모지를 향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들어가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결론)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남은 자들은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아무리 이 세상의 고난과 핍박이 산더미처럼 밀려온다고 할지라도 더 이상 하나님의 남은 자들은 손을 늘어뜨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 때일수록 위대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면서 뜨겁게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에 우리를 통해서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사역에 남은 자들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동참을 해야만 할 줄로 믿습니다. 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극히 적을지라도, 우리의 조그마한 믿음의 수고와 친절과 헌신으로 인하여서 하나님께서는 큰 역사를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과거에 우리 교회는 조그마한 고통과 어려움과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로 인하여서 우리 교회가 침체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런 것들이 우리의 신앙의 길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더 이상 시험에 빠져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남은 자들이 영적인 침체에 마냥 머물러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침체기를 지났기에, 앞으로는 큰 부흥의 역사만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는 하나님의 권면의 말씀을 다시금 기억하는 가운데에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가 뜨겁게 기도하여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사역을 능히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과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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