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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광 중에 즐거워 하라 / 시편 14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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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시편 149편
제 목 : 영광 중에 즐거워 하라
설 교 : 임대식 목사 (평화교회)


우리 인간이 이 땅에 거하면서 받은 축복 중의 축복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수많은 이 땅의 피조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위해서 자기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이사야서 43장 21절을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존재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배는 생명의 통로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병든 육체가 회복됨을 체험하게 됩니다. 또 예배는 능력의 통로입니다. 예배드리는 가운데 피곤하고 지친 영혼들이 하늘로서 나리는 힘과 능력을 공급받게 됩니다. 그리고 예배는 기쁨의 통로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 불안과 좌절 가운데 살던 사람이 예배를 통해 하늘의 기쁨을 맛보며 영혼이 소생케 됨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이 예배의 자리, 예배의 시간으로 우리를 초청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계셔서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고, 하늘 문을 활짝 여시고 은혜와 축복을 허락하시기를 준비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 4절 이하를 보면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 영광 중에 즐거워 하며 바른 예배, 바른 신앙의 자세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진정 우리가 인생을 바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그 자세가 중요합니다. 무엇을 얻었느냐, 무엇이 될 것이냐, 얼마나 발전했느냐, 또는 얼마나 잃었느냐 하는 문제 자체보다도 그 문제에 임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가령 공부하는 학생이면, 그가 어느 학교, 어느 학과를 다니고 있느냐도 중요하지만, 공부하는 기본적인 자세, 자신의 학문함에의 바른 자세가 중요합니다. 직장생활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장이냐, 과장이냐, 수위냐 그 직책도 중요합니다만, 어느 직위에 있든 자기가 하는 일에 기본적인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그 가운데 보람도 찾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다 살고 뒤늦게 인생을 뒤돌아 볼 때, 양심에 가장 괴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어떤 자세로 내가 살아 왔는가, 내 자세가 바람직했는가, 이 문제로 가책을 느끼게 되고, 여기에 심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몸가짐과 마음 자세와 그 뜻이 중요합니다. 이 기본자세가 바로 되지 않고는 아무것도 바로 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신앙인에게도 신앙인의 자세가 있습니다. 예배드릴 때는 경건한 예배의 자세가 있고, 봉사할 때는 성실히 봉사하는 자세가 있으며, 생활할 때는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자세가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올 때에는 내가 무엇을 위해 나왔는지, 무슨 목적으로 나왔는지 생각해 보며, 그것에 합당한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의 생각도 가지가지입니다. 목적도 각각입니다. 그 자세도 나름대로 다 다릅니다.

첫째는 받고자 해서 나오는 간구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올 때마다 달라는 것입니다. 나올 때마다 청구서를 써서 냅니다. ‘하나님, 이렇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이루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자녀가 부모님께 요청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듯,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은 자녀 된 우리의 특권이지만, 이는 성숙한 신앙의 자세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자녀들이 어렸을 적에는 부모에게 자꾸 요구하지만, 성숙해서는 오히려 부모님을 공경하고 모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둘째는 명상형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은 마음과 감정의 순화를 위해서이다, 혹은 교양삼아, 수양삼아 나와서, 처음 앉은 때부터 눈 감고 고요히 명상하면서 자기 마음을 달래고 수양하려고 하는 자세입니다. 이것 귀한 자세입니다만, 신앙과 예배는 이 수양을 뛰어넘는 부분이 분명있습니다.

셋째는 그저 나온 사람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계형입니다. 습관형입니다. 안 나오자니 꺼림직하고, 나오자니 별것 아니고, 그러다보니 언제나 시간이 늦습니다. 나갈까 말까 주일 아침되면 갈등을 합니다. 안 나오면 무언가 마음에 꺼림직합니다. 석연치 않습니다. 일주일 동안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러나 또 교회에 나와 봤자 별 것 없습니다. 남의 손에 이끌리어 다니는 사람이나, 부모님으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은 사람들 중 이런 분이 더러 있습니다.

그저 들락날락하던 발걸음이라서 나가는 것이지, 이렇다 할 무엇이 없습니다. 감격도 없습니다. 기쁨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때로는 부담이 됩니다. 오래 믿은 사람 역시 이런 타성에 젖기 쉽습니다. 그것은 그저 습관화 되어버린 신앙의 유형입니다.

넷째는 드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은 귀해 보이지만 이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공로형입니다. 이 사람은 교회에 나오는 생활 자체, 나오고 들어가고 하는 자체를 공로화하고 있습니다. 순례자의 고행처럼 이렇데 다님으로써 이 공로가 쌓여서 축복이 주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도 조금하면 뭔가 석연치 않고 아쉬운 느낌을 갖게 됩니다. 바쳐도 남보다 많이 바쳐야 되지 않겠나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예배란 한마디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놀라운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나를 기억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보살펴 주시고, 나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않으시며,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으로 내 죄를 씻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내가 어떻게 보답할꼬 하며 취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 인간의 최소의 그러나 최고의 응답이 곧 예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지금 이시간도 이 자리, 이곳에 임재하셔서, 우리의 심령을 두드리고, 하늘의 놀라운 은혜와 깨달음과 은총을 더해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이 성령을 내 영혼 깊은 곳에 모시고, 만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예배의 형식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형식이란 내용을 담는 그릇이요,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의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예배 형식이란 인간의 성의의 표현입니다. 형식이 내용을 대치시켜서는 안되지만, 그러나 그 형식은 정성이 넘치게 되면 생기게 마련입니다.

연애를 할 때에 연애편지를 노트를 그냥 성의 없이 쭉 찢어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편지지도 정성껏 마음에 드는 것을 구해, 몇 번이나 쓰고, 찢고, 썼다가는 찢고 하면서 성의껏 편지를 씁니다. 이렇게 형식이란 것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내면의 가득 찬 정성이 바깥으로 흘러나온 표이지, 형식이 내용을 대치하거나, 형식이 내용 없는 거짓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나 또한 사랑합니다. 내 삶의 자리에 늘 임재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나의 영혼의 자리에 모시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런 우리의 중심을 담는 그릇이 곧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주일 예배인 것입니다.

우선 우리 예배는 8시와 11시에 하나님께 드리지만, 예배 시간 5분전 까지 교회당에 나오셔서 예배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사업하는 사람이 10억 정도의 융자를 받기 위해 어느날 오전 8(11)시에 은행장을 만나기로 했다 할 때에, 누가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은행장입니까, 나입니까? 어느날 오전 8(11)시에 대통령을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 하면,5분,10분 늦추어 나가도 되겠습니까?

하나님께로 향하는 예배란 준비에서부터, 교회에 나오는 그 걸음이 예배이며, 교회에 도착하는 그 시간도 예배의 진행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은 하나님과 만나는 약속 시간입니다. 시간을 지키는 것이 가장 기본 된 일입니다.

예배 순서 중 우리가 특별히 기억해야 할 몇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입니다. 설교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입니다. 우리의 영혼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은 살아있다. 그래서 성경은 나에게 말씀하신다. 말씀은 발이 있다. 그래서 나를 따르신다. 말씀은 손이 있다. 그래서 나를 붙드신다. 말씀은 살아 역사한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나를 붙들고 말씀이 나를 보호하고 말씀이 나를 인도하고 말씀이 사단을 물리칩니다. 이것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배 시간의 성경 봉독과 설교를 통해서 새로는 시대를 살아갈 지혜와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는 예배 중에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 영이 자라납니다.  풀이 햇빛을 바라볼 때 자라나듯 우리 영이 하나님을 바라볼 때 자라납니다. 또 기도를 통해 우리 마음이 더 건강하고 든든해 집니다. 마음속에 평화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큰 능력을 받습니다. 시험도 이길 수 있는 능력, 역경도 돌파할 수 있는 능력, 슬픔도 견딜 수 있는 능력, 모든 능력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악한 마귀 사단의 역사와 공격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성도님들, 금요 심야 기도회에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작은 촛불은 뜨겁지 못해도 활활 타는 장작은 열기가 넘칩니다. 혼자 기도하기는 힘들어도 함께 모여 합심해 기도하면 참 은혜가 넘치고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을 만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셋째는 찬송입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드리는 찬미의 제사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노래하는 종교입니다. 찬송은 곡조 있는 기도이며, 영혼의 울림이며 하늘나라의 언어입니다. 찬송은 또한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환경 속에 있다 하더라도 환경을 향해서가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시는 주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찬송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찬송 중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할렐루야를 불러야 합니다. 할렐루야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찬양으로 가득한 책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사역인 성만찬을 거행하시고, 십자가를 지기 직전에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기도하러 올라 가셨다고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성경의 맨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을 보면 천군 천사의 찬양으로 마감합니다. 구원받은 천만 성도들의 찬양으로 가득한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왜 내 영혼이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왜냐하면 우주만물의 존재 목적이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 마지막으로 할 일이 무엇니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찬송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자연스런 표현입니다.

또 왜 우리가 찬양합니까? 찬송을 통해 우리가 더욱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찬송을 하면 근심 걱정이 사라집니다. 불평 불만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시험과 유혹도 이기게 됩니다. 찬송을 부르면 악한 마귀가 놀라서 도망갑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하는 일은 더욱 잘 됩니다. 찬송을 부르는 사람은 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또 왜 우리가 찬양을 합니까? 찬송을 부르면 찬송을 듣는 이에게도 힘을 북돋아 줄 수 있습니다. 찬송은 나를 도와줄 뿐더러 다른 사람도 도와 줍ls다. 찬송을 듣고 구원을 얻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교회에 새로 나와서 아직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모르고, 아직 기도할 줄도 모르는 초신자들이 주로 어디서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습니까?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찬양을 듣는 가운데 영혼 깊은 곳에서 감동을 받는 이가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왜 우리가 찬양을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찬송을 들으시기를 제일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늘나라에서는 천군 천사들이 항상 찬송을 부른다는 것을 보니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천만 성도는 항상 찬송을 한다고 하는 것을 보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만 가지 은혜와 축복을 우리에게 거저 주십니다. 다만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알아서 찬송을 부르면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시편 149편도 할렐루야로 시작해 할렐루야로 마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배 중에 헌금 시간을 갖습니다. 이 헌금은 단순한 돈이 아닙니다. 헌금은 우리의 삶의 일부입니다. 바울 사도는 마게도냐 교회의 교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랑하는 이웃을 위해서 헌금했을 때 그 정신을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이 헌금을 드린다”고 했습니다. 헌금은 단순히 돈을 바치는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땀을 흘려 번 돈을 주님께 바칠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 삶과 인생을 주님 앞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물질에 담아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헌금은 미리 정성껏 준비해야 합니다. 즐거움으로 드리며,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규칙적으로 꾸준히 드리는 정성이어야 하나님께 열납 되는 예물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어릴 때에는 부모를 의지하고 사랑받고, 선물 받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이 되어 결혼하고 아기를 키우게 되면 비로소 철이 들어 부모님을 알고 효와 정성을 다하게 되는 법입니다. 철이 든 사람은 부모님을 찾아뵙는 것이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이요, 즐거운 일이며, 또 빈손으로 부모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성과 마음의 담긴 선물을 한보따리 씩 들고 찾아뵙곤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초보 단계일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사는 것이 전부이지만,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서는 어떻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꼬, 하며 주님을 위해 살기를 힘쓰게 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받는 것보다 바치는 것이 즐겁고, 이제는 나의 최선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5천 원짜리 돈 한 장이 가게에서 물건 살 때는 작게 보이지만, 교회에 헌금할 때는 왜 그리 크게 보이는지 모르겠다고 제 한 친구는 농담 삼아 말을 했습니다만, 과연 나는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얼마 전 어느 책에서 두 장면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쪽에서는 극장에 5천 원짜리 표를 내고 들어가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또 한 쪽에는 교회에서 5백 원짜리 동전을 헌금하면서,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네, 찬송을 부르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친구들을 만나서는 아낌없이 돈 쓰고, 식사하고, 놀고 즐기면서, 과연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정성을 다했는지, 학교에 가서는 자녀들 교육하는 선생님을 위해 정성을 쏟으면서, 영혼의 교사이신 주님 앞에는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지, 자녀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물 쓰듯 하면서 하나님 앞에는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바치고 있는지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습과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도 자유롭게 마음껏 예배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병들고 몸이 말을 안 들어서 마음처럼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바라기는 내가 건강할 때, 시간이 허락할 때, 자유로울 때 예배를 드리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나와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십니다. 영광 중에 즐거워 하며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시기 힘쓰시는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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