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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동체를 귀하게 여깁시다 / 히 10: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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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히10:22~25
제 목 : 공동체를 귀하게 여깁시다
설 교 : 이철 목사 (남서울교회)


(히10:22~25)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공동체로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 처음에는 아담 한 사람을 만드셨는데,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한 것을 보시고 그를 위해 돕는 배필을 지으심으로 가정 공동체를 이루어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내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열매를 따먹음으로 범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도 하와가 주는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자 공동체에도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옷도 입지 않고 아무 것도 가리움이 없이 살던 그들이 이제는 옷을 입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책임을 추궁하자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을 통해 태어난 아이들도 서로 싸우고 결국에는 형이 아우를 때려죽이는 불상사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가족은 서로 헤어지게 되었고 공동체가 깨어져서 서로 남남이 되어 반목질시하고 미워하며 싸우고 죽이는 전쟁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은 새로운 공동체를 구상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택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구약이라는 긴 기간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만드셨고 그들에게 율법과 제도를 주셔서 사회공동체를 이루어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하나님께서 원래 구상하신 공동체를 회복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누구보다 공동체를 잘 알고 공동체에 익숙한 분입니다.
그 분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과, 또 성령님과 더불어 공동체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셔서도 공동체를 떠나지 않고 그를 낳으신 육체의 부모를 모시고 형제들과 더불어 가정 공동체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를 하실 때도 혼자 사역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사역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늘 공동체를 강조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높은가를 생각했고 으뜸이 되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늘 섬기는 본을 보이면서 그들 가운데 어떤 공동체를 이루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시고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날 제자들을 위해 드린 기도가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를 유심히 살펴보면 내용이 공동체를 이루도록 해달라는 기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23)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신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 안, 하나님 안에 있어서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하셨던 주님은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사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을 받을 터인데 그 성령을 받으면 그 동안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바로 공동체 생활을 하는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초대교회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들의 생활이 어떤 생활이었습니까?
서로 나누는 생활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내어주면서 다른 사람과 나누고, 말씀도 나누고 기도를 나누고 심지어 물질도 나누면서 전체적으로 함께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고, 각각 집에 모여서도 뿔뿔이 헤어져 사는 것이 아니라 늘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전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갔습니다.
그 후에 세워진 모든 교회가 다 이 공동체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그랬고 빌립보 교회가 그랬으며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랬습니다.
특히 우리가 바울이 쓴 에베소서 같은 것을 보면 교회의 공동체성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 주일부터 이 에베소서 강해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공동체의 성격을 자세히 이해하고 그 공동체 생활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셨던 교회는 공동체였고 실제로 성령이 임하여 이루어진 성도들의 삶은 공동체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오늘 날 우리들의 교회가 그런 공동체를 온전히 이루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이런 질문 앞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본다면 우리는 아직 주님이 만들어 주신 공동체를 유지하지 못하다는 것이 솔직한 대답일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교회라고 하지만 공동체를 이루고 있지는 못합니다.
아직도 나만 있지 '우리'라는 개념이 확립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나의 것을 따지고 다른 사람과 나누려는 의식이 부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소속감이 부족합니다. 헌신도 약합니다.
교회가 내 가정이라는 의식, 성도들이 한 가족이라는 의식이 약합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서로 다툽니다. 미워합니다. 남 생각 안 하고 나만 생각합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도 내 중심적으로 더 좋은 자리에 앉아야 하고, 내 자리에 앉은 사람이 밉고, 차를 주차하는데 있어서도 내 차가 더 좋은 곳에 파킹을 해야 하고 남이 그곳을 차지하면 싫습니다. 옆 사람이 조금만 부딪쳐도 싫은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저는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의 목회 이념 중 하나가 공동체를 귀하게 여기는 목회입니다.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될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다른 것을 잘해도 예수님이 원래 계획하셨던 이 공동체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이름은 교회지만 교회의 역할을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 부족한 것이 이 공동체성입니다. 자기 혼자서는 잘 합니다. 그리고 가족들끼리는 잘 됩니다. 그러나 더 넓은 의미에서의 이 공동체 의식은 매우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질서가 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국민의 힘도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지만 외국의 다른 교회보다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적어서가 아니고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열심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성이 약하기 때문에 힘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이 공동체성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본문 말씀에서 세 가지 가르침을 듣습니다.

첫째는, 여기 23절에 우리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 주님에 의해서 구속함을 받은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장차 우리가 이루게 될 아름다운 공동체, 궁극적으로는 하늘나라에서 펼쳐질 완성된 공동체의 소망을 잃지 말고 굳게 잡으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바라고 이 세상을 살고 교회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비전이 있습니다. 이것이 영원한 하늘나라 소망인데, 하늘나라가 공동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결국 영원한 공동체에 살 준비를 하고, 이를 위해 훈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단체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방을 배정하는데, 평소에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과 한 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주최측에 쫓아가서 방을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방이 다 짜여져서 안되니 그 사람과 같이 지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와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번 일로 여행을 망쳐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평소의 미운 마음을 다 가라앉히고 그 사람과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해서 말도 곱게 하고 대화를 하며 노력하면서 같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오해했던 것도 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가까워져 친구가 되어 여행이 끝난 후 둘도 없는 친구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여행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돌아갈 고향,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예수님과 더불어 성도들과 같이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땅에 살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억지로 묶어주십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도 사람을 묶어주시고 교회에서도 묶어주셔서 할 수 없이 이 땅에서 싫은 사람과도 같이 살게 하고 말하기 싫은 사람과도 말하도록 하고, 나누기 싫은 사람과도 나누도록 훈련을 시키십니다.
이렇게 공동체 생활을 하도록 훈련을 시키시다가 이제 그들과 영원한 하늘나라의 공동체 생활을 잘 하도록 훈련하는 것이 이 교회라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먼저 하나님이 주신 소망에 대한 믿음을 절대로 놓지 말고 굳건히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이 여행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우리 모두는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에 가서 살 것과, 그곳은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공동체임을 믿으십니까?
이 사실을 분명히 믿으십시오. 이 세상은 잠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사는 것도 잠깐입니다. 우리가 부부로 사는 것도 영원히 사는 것 같지만 잠깐 사는 것이고 하나님이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관계도 마찬가지이고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본향은 하늘나라인데,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찾아봅시다.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그 때가 되면 여성들도 다 아들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딸이라고 섭섭한 말 많이 들었지만 하늘나라 가면 다 아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가족이 됩니다. 한 공동체가 되어서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원토록 사는 소망을 절대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곳이 뭐 하는 곳이냐 하면 이런 공동체 훈련을 시켜서 소망을 굳게 잡고 공동체를 위한 준비를 하는 곳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소망을 굳게 잡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행 2:42에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우리는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아서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의 내용이 공동체 훈련입니다.
왜 우리가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는가, 그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서로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서로 교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떡을 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찬식을 하는 것입니다. 성찬식을 통해서 공동체의 일원인 것을 느낍니다.
함께 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공동체는 더욱 굳건해 지고 공동체의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교회에서는 3월부터 성도들을 위한 신앙학교를 개설합니다. 이런 시간을 잘 보고 잘 가르침을 받아 공동체 생활의 훈련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 교제하는 데도 힘쓰고 성찬식에도 빠지지 말며, 기도하되 같이 모여서 기도하는 시간에 빠지지 않음으로, 주님이 주신 이 믿음의 소망을 굳게 잡고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공동체 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24절에 보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주고, 다른 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공급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서 4장에 보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고 합니다. 여행하다가 그 중 하나가 넘어지더라도 다른 하나가 붙들어 일으켜 줄 수 있지만 혼자면 붙들어 일으켜 줄 사람이 없어 화를 당하게 되고, 두 사람이면 함께 누워 따뜻하게 할 수 있지만 혼자면 추워서 견딜 수 없으며, 한 사람이면 강도들이 닥쳤을 때 패할 수밖에 없지만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할 수 있다고 하면서,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삼겹줄의 삶이 공동체적인 삶입니다.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 이렇게 혹시 넘어지더라도 서로 붙들어 줄 수 있고, 외로울 때에 서로 위로해주며,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에도 일어날 힘을 얻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생활은 서로 돌아보는 생활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내가 넘어질 수도 있고, 여러분이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붙잡아줘야 하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없으면 이 세상을 살수가 없습니다. 너무 차가운 세상입니다.

폴 투르니에 박사의 '고독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책 서두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위스 제네바 국제 복지기관에 그 기관의 책임자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미모의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 여성은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집에 들어가 잠자리에 들기 전 그 날 방송을 마감하는 시간에 아나운서의 마지막 인사말을 반드시 듣고 잠자리에 들곤 하였습니다.
아나운서의 마지막 인사말이란 별 것 아닌 "여러분 이 밤도 좋은 밤이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아주 짤막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비서에게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기 전 이 인사말을 듣고 자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과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여비서가 그렇게 하게 된 이면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그가 이 기관에 와서 일하는지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책임자를 비롯해서 누구 하나 그에게 인간적인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루에도 많은 사람이 사무실로 찾아오지만 모두 사무적인 이야기 외엔 다른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서 아파트로 돌아오면 많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지만 그와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나마 하루 중 인간적인 말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은 방송을 종료하는 시간에 아나운서의 마지막 인사말이었다는 것입니다.
투르니에 박사는 이 말을 하면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병에 걸려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해주는 책임이 있는 곳이 교회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많은 성도들이 있지만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 돌아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공동체입니다.
또 우리는 어려운 일이 많이 생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직장에서 쫓겨나는 사람도 있고 사고를 당하는 사람, 사기를 당하는 사람, 또 질병에 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한 주간을 보내면서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서로 돌아보아 삼겹줄을 만드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원래 가족공동체가 강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앞의 예를 든 여비서와 같은 사례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즘에는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혼자 삽니다.
여러분, 요즘 우리 나라에 자살율이 높아지는 것 압니까? 이것이 큰 병입니다.

핵가족제도가 되면서 노부모님들이 외롭게 사는 경우도 많고 소외 받는 사람들의 층이 더욱 두터워지고 있습니다. 이혼율도 늘어서 이제 세 쌍 중 한 쌍이 이혼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게다가 아파트 문화가 들어오면서 공동체 의식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교회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일이 진정한 교회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25)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다시 말해서,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공동체생활의 가장 중요한 것은 모이기를 힘쓰는 일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함께 모이는 시간이 없으면 온전한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모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꼭 모여야 하는 모임이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전체적으로 모이는 이런 예배 모임입니다. 이것은 마치 가정에서 부모님의 잔칫날이 되면 온 가족이 모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날 모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가족공동체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의 일원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예배에 늘 나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비록 그분을 영으로 만나는 것이지만 한 가족끼리 만나는 예배의 모임을 잘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임을 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핍박과 어려움이 와도 지하에라도 모여왔습니다.
또 하나는 적은 단위로 모이는 소위 그룹모임도 필요합니다. 전체적인 모임에서는 우리의 이야기를 다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적은 단위로 모여서 말씀을 나누고 생활도 나누고 기도도 나누며 서로 돌아보고 어떻게 살아가고 위로해야 할 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 그룹모임을 구역모임이라고 합니다. 전체적으로 모였을 때 할 수 없는 공동체의 생활을 구역을 통해서 하게 됩니다. 진정한 공동체 생활을 하려면 이 전체 예배와 아울러 구역에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서로 교제를 나누고 말씀을 배우고 기도를 나누면서 진정한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교회에 전체적으로 모이는 공동체적 예배에 참석하고 일주일 동안 한번이라도 적은 단위로 모여 사랑과 기도와 말씀을 나누는 일에 빠지지 말기 바랍니다. 여기에 빠지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소년 한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한스라는 소년이 집을 떠나 외지에서 오랜 기간 일을 해서 주인으로부터 금 덩어리 하나를 삯으로 받게 됩니다. 소년은 집으로 가는 도중 어떤 사람이 말 한 필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그것이 갖고 싶어 금 덩어리를 말과 바꿉니다. 얼마를 가다가 말을 거위 한 마리와 바꾸고, 다시 얼마를 가다가 거위를 고양이 한 마리와 바꿉니다. 다시 얼마를 가다가 고양이를 숫돌과 바꿉니다. 나중에 개울을 건너다가 그것까지 물에 던져 버리고 빈손으로 집으로 가면서 그는 자기 자신은 아무 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단지 귀찮은 것을 버렸기 때문에 홀가분하다고만 생각했지,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는가에 대해서는 전연 생각을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현대 사람들이 소중한 것을 이렇게 잃어버리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개인적으로는 가족공동체가 중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족관계를 내팽개쳐 버리고 돈을 벌겠다고, 유명한 사람이 되겠다고 가족을 쉽게 버리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이보다 영원한 교회공동체는 예수님이 피로사신 귀한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육체적인 가족공동체를 떠날 수 없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공동체를 위해 훈련하고 준비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공동체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귀찮다고 여겨 다 팽개쳐버립니다. 그래서 주일날 예배 나오는 것, 귀찮다고 빼먹습니다. 모여야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자신이 유명한 사람이라는 핑계로 영원한 공동체의 소중함을 내팽개치고 주일날 설교만 들으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보다 소중한 영원한 소망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은 잠시 잠깐 여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원한 삶을 내다보는 우리들에게 금보다 중요한 것이 믿음이고 소망,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소중한 것을 세상의 돈, 지위와 친구와 재미와 쾌락과 바꿉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없는데도 스스로는 편안하고 만족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병든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공동체로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이 공동체의 문제가 생겼을 때, 예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공동체의 모형을 보여주시고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이 공동체가 가능하게 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이 땅에 새로운 공동체를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하늘나라의 영원한 공동체를 준비하시고 이 땅에서 준비하고 훈련하게 하셨습니다. 이 훈련을 받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임을 중요하게 여기십시오. 예배를 중요하게 여기고 3월부터 구역모임을 귀중히 여기고 참여하십시오.
처음 참석할 때는 귀찮고 부담스럽지만 이것이 귀중함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공동체를 귀중히 여겨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우리의 영원한 소망을 굳게 잡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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