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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진할때와 머물때 / 민 9: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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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전진할때와 머물때
본 문 : 민수기 9:15-23
설 교 : 박삼우 목사 (잠실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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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에 `스프링 북'이라는 산양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대여섯 마리 정도가 무리를 지어 삽니다만 어떤 때는 한 곳에 모여들기 시작하면 수백 수천 마리가 집단을 이루기도 합니다.  집단을 이룰 때 가끔 이런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풀을 뜯어가면서 천천히 한가롭게 옮겨갑니다.  그러나 양들이 너무 많다보니 앞서가는 양들이 풀을 먹어버리면 뒤따라가는 양들은 먹을 풀이 없습니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 뒤따르는 양들이 풀을 차지하기 위해 앞다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뒤쪽에서 자꾸만 먼저 앞으로 나가려 하게 됩니다.  앞에 있는 양들은 뒤에서 자꾸 밀고 나오니 영문도 모르는 채 밀려서 앞으로 달려나갑니다.  이렇게 해서 대열은 조금씩 점점 빨라집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모두가 전속력으로 앞으로 달리게 됩니다.
 
  처음에는 앞에 가서 풀을 더 뜯겠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달리다 보면 처음의 목적은 잊은 채, 그저 무조건 달릴 뿐입니다.  초원을 지납니다.  시내를 건넙니다.  사막을 건넙니다.  마침내 바다에 다다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도 이 행렬을 멈추게 할 수가 없습니다.  바다를 향해서도 계속 달려들어갑니다.  결국 그 수많은 산양들이 모조리 바다에 빠져 죽는 것으로 이 달리기는 막을 내린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모두가 바쁘게 쫓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실제는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쫓기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냥 달리고 있습니다.  마치 달리는 것만이 목적이 되어버린 아프리카 산양처럼 그저 달리고만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달리면서 싸웁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싸우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옛날에는 남을 죽이고 자기가 살자해서 탈이었습니다.  "너는 죽고 나는 살자."  이래서 문제였습니다.  요사이는 그것이 아닙니다.  "너도 죽고 나도 죽자." 이렇게 무서워졌습니다.  너는 죽고 나는 살자고 한다면 그래도 길이 있겠는데, 자기가 죽는 것도 모르고, 함께 죽자고 나서는 데는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무섭게 싸우며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 우스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어느 성악가가 노래를 부르는데 한번은 악보에 따라 노래를 부르다가 죽었답니다.  악보대로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 부르다고 죽었습니다.  이상해서 악보를 살펴보니 악보에 쉼표가 없더랍니다. 

  멈출 때가 있어야 합니다.  벌써 한 해도 12월 중순입니다.  우리는 한 해도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도대체 어디를 향해, 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까?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이며 내 삶의 방향은 어디입니까?  다시 한 번 기도하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경건을 찾아야 할 때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 가나안땅을 향해 갈 때 그 진행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 목적지인 가나안까지 가는데 무려 40년의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러니 실제 거리는 그렇게 먼 것이 아닙니다.  당시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두 갈래였습니다.  하나는 지중해연안을 따라 가나안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애굽에서 곧바로 가나안으로 가는 길로서 일 주일이면 걸어갈 수 있고 요단강을 건너지 않아도 됩니다.  다른 길은 시내 반도를 둘러 요단강을 건너 들어가는 길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갔던 길입니다.  이 길은 바로 가는 길에 비하면 다소 멀긴 합니다만 그래도 곧장 걸어가면 한달 정도면 갈 수 있었습니다.  요즈음 비행기라면 50분 정도의 거리이고 자동차라면 7-8 시간 거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코스를 40년 동안 걸었습니다.

  길고도 지루한 그 40년 여정의 단면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하나님 저들을 인도하는 구름기둥이 성막 위에 덮인 채로 가만히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은 행군을 중단하고 머물러 있었고, 구름이 떠오르면 행군을 시작하여 그 구름이 가는 대로 따라갑니다.  그러다가 구름이 다시 머물면 바로 그 자리에 진을 치고 다시 머뭅니다.  구름이 금방 떠오르면 금방 떠났지만, 구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진을 친 그곳에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일 년이고 머물렀습니다.  구름이 떠오를 때까지 머물러만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달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 년간 걸어갔습니다.  참으로 인간적으로 볼 때 답답한 행군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이 볼 때 납득할 수 없는 비생산적인 행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오늘 우리 인생 여정에 하나님 주시는 진리가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현대인들이 들어야 소중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전진은 하나님이 허락할 때만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전진을 원합니다.  앞으로 나가기를 원합니다.  앞으로 나갈 때 거기 희망과 기대가 있고 성취와 발전이 있습니다.  전진함으로 우리는 뜻을 이루고 성공을 이룹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에게는 가나안이라는 분명한 목적지가 있었습니다.  전진이란 바로 그 목적을 향하는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진이야말로 그들에게 기쁨이요 보람이요 행복입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지금 그들은 광야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의식주를 비롯해 모든 것이 임시적이요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춥습니다.  더구나 사람 사는 것이 먹고 입고 자는 것 해결되었다고 사는 것 아닙니다.  즐거움이 있어야 하고, 계획이 있어야 하고, 보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광야를 걸어가는 데 무슨 즐거움이 있고 계획이 있고 보람이 있겠습니까?  하루라도 빨리 가나안 땅에 들어가 집도 짓고 농사도 짓고 인생을 설계하며 보람있게 살고 싶었습니다.  저들에게 있어 정말 전진보다 더 희망차며 기대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희망과 성공이 약속되고 기대되는 길이라고 해도 내 마음대로 전진할 수는 없었습니다.  17절에 보면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진행하였고"라고 했고 18절에도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고"라고 했습니다.  20절 하반절과 23절에도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다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구름이 떠올라야 떠났습니다.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져야 떠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가라해야 갔고 하나님이 지시를 해야 떠났습니다.

  육상 경기에서 선수들이 달리기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출발선에 서서 준비 자세를 갖추고 앞을 응시하면서 온 신경을 총소리에 집중시킵니다.  그래서 총성과 함께 쏜살같이 뛰어나갑니다.  총성이 울려야만 떠납니다.  조급한 나머지 출발 총성도 울리지 않았는데 달려나가면 조금은 빨리 나갈지 몰라도 소용없습니다.  무효가 되고 다시 해야 합니다.  몇 번 그렇게 하면 실격됩니다.

  인생이 마찬가지입니다.  틀림없이 잘될 것 같고 성공이 100 퍼센트 보장되었다고 믿어지는 일도 내 마음대로 달려나가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출발 총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달려나가면 조금 빨리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하고 맙니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오늘 우리 주위가 왜 이렇게 시끄럽습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 출발 신호도 울리지 않았는데 자기 마음대로 달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부 자기 마음대로 입니다.  그래서 돈도 벌고 명예도 얻고 출세도 합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돈은 벌었는데 양심은 잃었습니다.  출세는 했는지 몰라도 진실은 잃었습니다.  명예는 얻었는지 몰라도 위선자가 되었습니다.  무엇인가 얻은 것 같고 많이 달려온 것 같은데 마음은 허무하고 참된 기쁨은 잃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진실로 얻은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국은 허무와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보십시다.  만약 저들이 빨리 가나안 땅으로 가겠다고 구름기둥이 떠오르지 아니했는데 마음대로 나아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애굽에서 나올 때 먹을 것 조금 가지고 나온 것 얼마가지 아니해 동이 났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을 어떻게 구합니까?  낮의 그 뜨거운 태양열과 밤의 또 그 추위에서는 어떻게 보호를 받습니까?  저들이 만약 자기들 마음대로 갔다면 몇 일이 못되어 전부 광야에서 쓰러져 짐승의 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본문의 기록대로 하나님의 지시만 따라 진행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 먹을 것 주셨고, 하나님 마실 물 주셨습니다.  구름 기둥으로 낮의 뜨거움에서 보호해주셨고 불기둥으로 밤의 추위에서 지켜주셨습니다.  수많은 원수들이 손대지 못했고, 마침내 약속의 가나안까지 진군할 수 있었습니다.

  전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불안한 전진이 있고, 승리가 보장된 전진이 있습니다.  불안한 전진은 내 마음대로 출발한 전진입니다.  여기에는 승리의 기약이 없고, 언제 어디서 적병의 기습을 당할지 모릅니다. 

  승리가 보장된 전진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나아가는 전진입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나갈 때  결국은 승리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역대하 20장을 보면 유다 왕 여호사밧은 모압과 암몬 연합군과 전쟁을 하러 나갈 때 찬양대를 앞세워 찬송을 부르게 했습니다.  군대가 전쟁터로 나가는데 찬양대가 앞에서 찬송을 부르며 행군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가라고 하셨고 하나님이 이미 승리를 약속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생각하십시다.  나의 전진은 어떤 전진입니까?  기도하고 말씀 듣고,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출발신호를 듣고 전진하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나아가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우리의 전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이 머물면 머물렀습니다.  지금 구름기둥이 높이 솟아 백성 앞에서 전진합니다.  백성들은 구름기둥을 따라 나아갑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구름기둥이 진행하기를 멈추고 하나님의 성막 위로 내려 덮입니다.  그러면 모든 백성들도 진행을 멈추고 그곳에 짐을 풀고 천막을 칩니다.  하나님이 머물라하면 머물어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아무리 잘 나아가고 있었다 할지라도, 아니 조금만 더 가면 좋은 유숙처가 있다 할지라도 구름 기둥이 머물면 더 갈 수가 없었습니다.  구름 기둥이 머물면 머물러야만 했습니다.

  전진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전진하다가 때로는 머물 줄 알아야 합니다.  비행기를 보십시오.  비행기가 항상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아닙니다.  날다가 땅에 내려와서는 오랜 시간 준비를 합니다.  기름을 넣고 정비를 합니다.  멈추는 것입니다.  이 멈추는 시간이 있어서 비행기는 날 수가 있습니다.

  두 나무꾼 친구가 산에 올라갔습니다.  경쟁적으로 나무를 찍어 장작을 만들어 갑니다.  한 사람은 친구에게 지지 않을 양으로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나무를 찍었습니다.  다른 한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50 분 일하고 10 분 쉬는 식으로 숨을 돌려가며 일했습니다.  산을 내려 갈 때가 되어 두 사람은 서로 수고한 결과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쉬어가면서 일한 친구가 훨씬 더 많은 장작을 장만했습니다.  열심히 일한 친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투덜거렸습니다.  "내가 더 열심히 일했는데 어째 자네 것이 더 많은가?"  다른 한 친구가 점잖게 설명을 합니다.  나는 10 분씩 쉴 때마다 도끼날을 갈았다네"  도끼날 무디어지는 줄도 모르고 덮어놓고 열심만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전진만이 아닙니다.  전진만 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쉬어야 하고 때로는 머물러야 합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이 머물러 있으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일 년이고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본문 22절에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으면 이틀이고 한 달이고 일 년이고 떠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목적지는 가나안입니다.  하루 빨리 행군해서 목적지에 가고 싶은 것이 모두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구름이 떠오르지 아니했다는 이유 하나로 일 년을 진을 치고 기다립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광야에서 천막을 쳐 놓고 일 년을 그냥 머뭅니다.  그 동안 무엇을 하라는 말입니까?  아무것도 없는 막막한 광야,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돌멩이와 모래뿐입니다.  아무 할 일이 없습니다.  그냥 기다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기다릴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가나안이 목적에 있는데, 가나안을 코앞에 두고 광야에서 그냥 앉아 일 년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기다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건 누가 보아도 허송세월이요 시간낭비입니다.  아마 그 때도 성질 급한 사람은 빨리 가자고 떠들고 소리치고 대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머물라고 하시면 머물러야 했습니다.

  하나님 머물라고 하시면 머물러야 합니다.  머무는 것은 분명 기다림이요 인내입니다.  희생이요 고통이요 아픔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머무는 것도 하나님과 함께라면 전진 이상의 축복이요 은혜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행 27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호송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 보면 바울의 일행이 탄 배가 미항이라는 항구를 떠나려할 때 바울은 이 배가 출항을 중지해야 한다고 호송책임자에게 말합니다.  여기서 머물어 겨울을 나야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자기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니라 계시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호송책임자는 선장과 선주의 말만 듣고 배를 출발시킵니다.  선장은 "나는 지중해를 손바닥처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큰 소리 쳤고, 선주는 배를 지체 시켜 한 시라도 손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머물어야 한다고 했는데 떠난 것입니다.  마침내 배가 떠났을 때 순풍에 돛을 달았습니다.  하늘은 쾌청하고 바람은 잔잔했습니다.  선장과 선주는 물론 호송책임자는 의기 양양했습니다.  그러나 곧 바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 광풍이 대작하니...."  얼마 못 가 광풍이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머물라고 하는데 갔습니다.  순풍에 돛을 달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갔습니다.  얼마 못 가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는 넘기고 결국 배는 파선 당하고 맙니다.  물론 그런 다음 하나님의 돌보심을 체험하기는 합니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머물라고 할 때 머물러야 했다는 진리입니다.  머무는 것은 손해처럼 보입니다.  괴롭고 고달플 수도 있습니다.  한없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보다 큰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더 큰 전진을 위해 준비케 하시며 힘을 모으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도 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민족해방이라는 뜨거운 소원을 가슴에 품었던 모세를 하나님의 광야에 40년간이나 머물게 하셨습니다.  한 발자국도 앞으로 못나가게 하셨습니다.  꼼짝 못하고 40년을 머물렀습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웠겠습니까?  그러나 그 머무는 세월 허송세월 아니었습니다.  모세로 하여금 연단케 했고 인내케 했고, 겸손케 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40년은 어떤 전진의 시간 보다 값진 세월이었습니다.

  확실히 우리에게도 참고 기다리고 머물러서야할 때가 있습니다.  기다리느라 속상하고, 참느라 몸져눕기도 하고, 물러서느라 굴욕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허송세월 보내는 것 같고 시간 낭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과 함께 가는 사람이라면 참을 줄 알고 머물 줄 알아야 합니다.  머무는 가운데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섭리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자리에 하나님 계속 머물라고만 하시는 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전진하고 싶은데 그렇게 계획하고 있는데 하나님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조급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인내를 배우십시오.  머무는 거기에 더 큰 미래의 전진 또한 예비 되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인생이란 전진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머물고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진도 있고 후퇴도 있고,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고, 행복도 있고 불행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전진이냐 머무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명령을 따랐느냐, 누구와 함께 하느냐 입니다.  하나님 함께 하시기만 하면 전진하면 전진해서 좋고 머물면 머물러서 좋습니다.  전진에는 하나님 보장하는 승리가 있고 머무름에는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더 큰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그 동안 주어진 길들을 달려왔습니다.  이제 우리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의 가는 길을 점검하면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헤아려 보십시다.  여러분, 주님과 함께 전진하며 주님과 함께 머물고 계십니까?  진실로 주님과 함께 전진하며 주님과 함께 머물러야 합니다.  여기 예민해야 하고 여기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 동행하시고, 하나님 인도하시는 복된 인생 여정이 펼쳐집니다.  이 아름다운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한 해를 거의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우리의 인생 여정을 한번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의 지시만 따라갔습니다.  구름 기둥이 진행하면 전진했고 구름 기둥이 머물면 한 달이든 일년이든 머물렀습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쫓아 주와 함께 전진하고, 주와 함께 머물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에 예민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 살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오직 주님의 인도 따라, 주님과 함께 영원한 나라까지 이르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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