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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이 여기 있으니 / 시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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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행복이 여기 있으니
본 문 : 시편 1:1-3
설 교 :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참 복이 많습니다!'라고 말씀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혹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복이 많다는 말을 들으십니까? 주로 무엇을 보고 그렇게 이야기 합니까?

제가 관찰해 보았더니 주로 연세 많고 건강하여 병원에 가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복이 많다고 합니다. 자녀 교육에 매달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자녀가 잘 되거나 또는 불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사업이 잘 되어 자금사정이 좋은 사람들을 보고 그렇게 말합니다. 혹은 높은 지위에 앉게 되거나, 미모가 뛰어나거나 몸매가 예쁜 분, 공부를 잘해서 좋은 성적을 얻은 사람에게도 말합니다. 제 경우에는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사람들을 보고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많은 부분 복의 원래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복 있음의 기준을 잘 세워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 땅에 과연 행복이 존재할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사건이 많습니다. 행복해 보이는 것 같아도 그 삶 속에 있는 불행한 부분, 행복하다고 느끼는 가운데 어느새 찾아온 어려움과 고통으로 인해 이 세상 속에 과연 행복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행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름답게 지속될 때 얻게 되는 복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복을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는 2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라크]라는 단어로 구약에만 415번 정도 쓰였습니다. [바라크]는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축복하시거나, 신적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줄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사람들의 선행, 즉 착하고 복되게 살든 말든 상관없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인해 일방적으로 주시는 복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나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 [아시와르]가 구약성경에만 44번 정도 사용되었습니다. 시편에 26번, 잠언에 8번, 그리고 욥기와 전도서에 각각 1번씩 나옵니다. [아시와르]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가진 삶의 자세와 태도로 인해 복된 사람의 모습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복(바라크)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얻을 수도 혹은 얻지 못할 수도 있는 복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 함께 생각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복, [아시와르]입니다.

여러분 사람마다 이 땅에 태어나는 환경이 다 제각각입니다. 못생긴 얼굴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도 선택하지 않았고, 환경도 외모도 체질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태어나고 보니까 부모님은 부자였고, 마침 좋은 머리를 물려받았고 거기다 부모님이 잘 생겨서 미남 미녀가 되어 미인대회에 나가 뽑히기도 합니다. 가정환경이 좋아서 복된 인생으로 시작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보고 복이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생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바로 주어진 좋은 조건 때문에 불행과 파멸로 끝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 때 박대통령의 아들 지만 군을 보고 장래가 보장된 사람이라 했지만, 오히려 대통령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 마음에 심한 좌절과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들을 겪고 지금은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존재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복의 조건들이  행복의 진정한 조건이 되지 못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불행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날 때가 있습니다. 가난한 부모를 만나 공부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잘 생긴 얼굴로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유전자를 받아 고통을 겪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이 불행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불행한 조건이 더 복되고 활기찬 인생을 살아가도록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복이나 소유의 기준도 행위의 기준에 따름이 아니라 어떤 존재로 살아가느냐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자, [아스레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엄청난 행복, 최고의 행복 그리고 온전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복은 복수형이 되어서 한 가지 복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복을 누리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정말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전해주기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속에 이미 남들이 말하는 좋은 조건에서 출발하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분들, 그리고 좋은 조건으로 출발했지만 더 큰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막막해 하시는 분들, 내 인생과 행복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분명 계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어떤 환경에 처해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시편기자의 고백이면서 시편 전체의 서문이 되기도 하는 오늘 말씀을 살펴봅시다. 

복 있는 인생은, 첫째 복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본문 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복을 만들어 가고, 복을 받을 수 있고, 복을 창조할 수 있는 삶의 자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는 사람,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는 사람,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이 정말로 복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악인의 꾀]라는 말은 하나님은 없다하는 사상과 철학을 의미합니다. 세속적인 눈으로 봤을 때 성공한 사람들, 인간적으로 잘 된 사람들이 ‘이렇게 살면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전재로 하지 않은 그 모든 이야기에 우리 귀를 닫고 듣지 아니하는 태도를 갖고 사는 삶은 복된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마음에는 하루에도 수 만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떠오르는 생각을 분류해 보면 용기와 격려를 주는 생각도 있고, 좌절과 낙담을 주는 생각도 있습니다. 내적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에 한번은 모인 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의 삶 속에 자존심 상하는 일이 생겼다면, 하던 일이 실패로 끝났다면, 잘되던 일이 실수로 마감하게 되었다면, 소중한 것을 잃게 되었거나, 가족들을 먼저 떠나보내어야만 했다면, 심지어는 힘들고 고통스런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면 이런 경우 여러분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겠습니까?”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무가치하게 여겨진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 남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다. 화가 난다. 복수하고 싶다. 다 끝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괴롭다. 한숨이 나온다. 의욕이 사라진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노력해도 소용없다. 인생은 다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외롭다. 나는 선천적으로 약하다. 실패한 인생이다. 나는 매력적이지 못하다.’ 등 이런 생각이 마음에 자리 잡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마음에 떠오르는 이 생각이 여기서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유발하고 행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악인의 꾀를 ‘쫓는다’의 [할라크]는 ‘걷는다’라는 뜻이 있는데, 생각이 그 자체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연결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생각은 감정을 일으킵니다. ‘슬프다. 괴롭다. 지친다. 힘이 없다. 화가 난다. 분이 폭발할 것 같다. 두렵다. 불안하다.’그리고는 생각과 감정이 흐르는 방향대로 행동에 옮기게 됩니다. 결국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 인격과 성격으로 자리 잡게 되어 불행한 인생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정에 부부싸움이 있었습니다. 가정의 문제가 심각할 때, ‘내가 어쩌다가 저런 사람을 만났을까? 그 때 두 번째 선 본 여자만 만났더라도 달라졌을 텐데. 실수로 만나지 말아야할 사람을 만났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인간은 문제의 원인을 자기 아닌 밖에서 찾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 저 여자는 내가 만날 때부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어. 해주는 밥도 싫어. 웃는 것도 싫어.’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점점 거리감이 생기고 나중에는 내 입으로 하는 말이 ‘이혼하자!’는 것입니다.

이렇듯 이런 생각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상황에 따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반대되는 세상과 육의 생각과 습관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오만한 자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즉 자신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습관과 가치관, 성품을 형성하고 어느새 익숙해져서 자신에게 해로운 생각인지 유익이 되는 생각인지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정신과 의사인 ‘윌리아드 가이린(Willard Gaylin)’은 자신을 비하시키는 사람은 마치 진흙을 갖고 노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진흙을 가지고 놀 때 처음에는 손만 더러워집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옷이 더러워지고 마침내는 온몸이 더러워지고 맙니다.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될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마침내는 온 영혼을 더럽히고 파멸시키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판단의 근거가 되는 어릴 때부터 형성된 나의 성격과 인격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는 믿음에 뿌리를 둔 것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믿음에 기초하지 않은 인생은 허무로 끝난다고 성경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복된 사람은 악인의 꾀에 세워진 어떠한 생각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결론은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디엘 무디(D. L. Moody)는 울퉁불퉁한 지팡이가 곧은 것인지 삐뚤어진 것인지를 밝히려면 말싸움을 할 것이 아니라 곧은 지팡이를 옆에 놓아보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둘째, 복 있는 사람은 행복의 진정한 원천이 하나님 말씀에 있다는 사실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2절 말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묵상의 [하가]라는 단어는 단순히 조용히 마음에 되새긴다는 뜻이 아니라 힘을 다해 소리를 내어 읽는 것을 말하는데 말씀을 귀중히 여기고 말씀대로 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합니다.

아모스서 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는 다림줄과 다른 하나는 쌓은 벽입니다. 건축하는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다림줄은 실 끝에 무거운 추를 달아 중력의 법칙을 이용하여 벽을 수직으로 똑바로 쌓는데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즉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율법을 상징하는 다림줄을 잡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인간의 역사와 생사화복에 관계되는 것의 모든 것을 세우시고 판단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이라는 기준을 따라 쌓은 성은 견고하고 바라지만, 다림줄이 없이 쌓은 담은 잘못 쌓아져서 쉽게 무너지고 균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아모스 선지자에게 다림줄과 쌓은 담을 보여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기초와 기준이 하나님 말씀에 있지 않고 바로 자신들 속에 있음을 알게 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내 마음의 벽’을 지은 톰슨 부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다림줄로 인생의 기초를 세우지 않는 사람은, 다른 것에 의해 인생의 기초를 세우는데 부모, 선생, 친구, 정부, 대중매체, 자기마음, 교회지도자 등을 통해 비춰지고 얻어지는 것으로 인생의 벽을 쌓아 간다고 합니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 일뿐 믿음의 대상은 아닙니다. 사람은 인생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참고 사항은 될 수 있어도 절대적 기준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 세워진 우리의 인생관과 성품 그리고 인격의 쌓은 담은 바라지 못하여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무너져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 다윗은 시편 50편10절 ‘하나님 내 마음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십시오.’하는 유명한 회개의 시에서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범죄함의 원인이 다른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중심에 하나님의 기준이 없었던 데에 있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다윗 자신의 삶 속에 있기를 간구합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이 저녁 무렵에 한숨자고 일어나 궁정을 걷다가 목욕하는 여인을 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던 탐욕이 그 여인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다윗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탐욕과 정욕이 인생의 기준이 되어버렸고, 이것이 만나고 싶고 함께 있고 싶은 감정을 일으켜 행동으로 옮기게 합니다. 그 여인을 왕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동침을 합니다. 그 여인의 남편을 죽입니다. 이 모든 행동은 어디서부터 시작했습니까? 육신의 정욕위에 인생의 기초를 세웠고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 결과입니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고 아들에게 쫓기게 되는 징계를 받게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울며 회개합니다. ‘하나님 내 속에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는 주님의 기준이 끊임없이 자리 잡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린아이를 안고 기도하는 중에 반드시 이 기도를 넣는 이유는, 혼탁한 세상 가운데 잘못된 기준으로 인생을 사는 결과는 결국 파멸이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삶이 바르고 아름답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바람이 이 기도 속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자기의 경험이나 지식위에 인생의 기초를 세우지 않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떠한 인생의 풍파와 어려움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으며 견고하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 냅니다.

워싱턴에는 링컨이 애독하던 성경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성경 중에서도 그의 손때가 많이 묻어 있는 구절이 있는데 시편 34편 4절 말씀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링컨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이 구절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링컨은 가난한 집에서 때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링컨이 9살 때 죽었습니다. 너무 가난하여 학교를 다니지 못했는데, 학교 다닌 날이 그의 생애 중 겨우 6개월 밖에 되지 않습니다. 22살 때 첫 사업에 실패합니다. 23살 때 주 의원선거에 낙선합니다. 24살 때 사업에 실패하고, 26살 때 사랑하는 여인을 잃었습니다. 27살 때 그 영향으로 정신분열과 신경쇠약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29살 때 의회 의장선거에 낙선하고, 34살 때 하원의원선거에 낙선했으며, 39살 때 또 낙선했습니다. 46살 때 상원 의원에 낙선했으며, 47살 때 부통령 선거에 낙선했습니다. 49살 때 상원의원선거에 또 낙선했습니다. 그리고 51살 때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동안에도 그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이야기는 끊임없이 있었습니다.

낙선할 때마다 링컨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주저앉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는 인생으로 일어서지 못하게 하는 일이 계속 찾아 올 때마다 실패가 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인생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위에 자기 인생의 기준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링컨은 결국 세계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었고, 주어진 시대적 사명을 완수한 행복한 인생으로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선교를 하는 중에 좌절과 시련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를 위협하는 환경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영국에 돌아왔을 때 어떤 기자가 “당신은 어떻게 그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면서 어려운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질문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저는 두 가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는 세상 끝 날까지 나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과 고아와 과부같이 버려두지 않겠다 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인생의 정글을 헤매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떤 기준을 기초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떤 이야기를 듣고 계십니까?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그 감정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에 기초를 두지 않고 내면에 일어나는 생각들과 주위에서 평가하는 말에 두면 우린 더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라 하신 일들을 행할 수 없음도 기억하십시오. 인생의 정글 속에 있는 분들, 말씀을 여러분의 삶 속에 받아들이십시오. 내 인생의 기준이 되도록 하십시오. 거기에 복된 인생의 비결이 담겨있습니다.

셋째, 복 있는 사람은 자신이 받은 축복의 열매를 베풀며 사는 인생입니다. 본문 3절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사는 사람과 복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주야로 묵상하고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시절을 좇아 인생의 열매를 맺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고난의 때에도, 평안의 때에도, 풍족할 때에도, 궁핍할 때에도 삶을 풍요롭게 하는 삶의 열매를 거둡니다.

사실 부하고 평안할 때 좋은 열매를 거두기가 쉽지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는 열매를 거두기가 어렵습니다. 어려울 때는 불평의 열매와 원망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 일반적입니다만,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가장 깊은 고통과 큰 고난의 순간에서도 값진 열매를 거둔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담은 표현이 바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입니다. 시냇가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시내를 인생으로 비유할 때, 돈의 시내가 마를 때도, 사랑의 시내가 마를 때도, 자녀의 시내가 마를 때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마음의 시내가 마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개의 시내가 마른다 해도 다른 시내로 흐르는 맑고 시원한 물이 나무의 주위로 흘러서 나무로 하여금 메마르지 않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시내’ 라는 단어는 저절로 형성된 시내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를 의미합니다. 누군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마른 땅을 파서 수로를 만들고 그 수로에 물을 흘려보내는 시내입니다. 인생 속에 복 받을 요소가 없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 있는 삶의 태도로 살아갈 때에는 당신께서 메마른 광야 같은 인생을 뚫고 파셔서 생수를 흘려보내시고 아름다운 열매로 풍성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즉, 불행을 불행으로 마치도록 두지 않으시고 불행의 자리에 새로운 소망의 열매들을 맺게 하십니다.

‘나무’라는 단어도 그저 잡목을 뜻하는 것이 아닌 목적과 의미를 두고 구한 나무를 가져다가 그 곳에 심은 것을 말합니다. 별 볼일 없는 인생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복 있는 삶의 태도로 살아갈 때에, 바로 그 삶을 들어 의미 있고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존귀하고 복된 열매를 맺고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받은 축복을 혼자만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되어 있는데, 형통함의 축복은 우리 쪽에서의 형통함, 마음먹은 대로 다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입장에서 보실 때의 형통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내 인생을 통해 나타나고 이뤄짐을 말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우리에게 머물다가, 우리의 순종치 않음으로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혹은 중단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신 복을 혼자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베풀면서 살 때에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것 때문에 우리는 엄청난 복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안과 의사이신 ‘이인식’ 집사님이 계십니다. 이인식 집사님은 젊은 분인데 돈도 어느 정도 벌고 나이도 들면 그 때가서 다른 많은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 생각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고 ‘다일 공동체’를 찾아가 4천만 원 상당의 장비를 제공하고, 또 시간을 내어 봉사하겠다 하셨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 사람 손해 봤구나!’라고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참 아름다운 모습, 복 있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나누는데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미소, 조금만 근육을 움직여 웃음으로 옆 사람에게 기쁨을 나눌 수 있다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지입니다. 가지고 있는 작은 것부터 나누기 시작할 때 복이 있고 희망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이번 2002년 아시안 게임과 함께 조용히 알려진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몽골의 탁구팀 감독으로 참석하게 된 ‘강영순’ 선교사입니다. 강 선교사님은 생후 8개월 되었을 때 소아마비로 중증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대로 잘 자랐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앞두고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상대방 집안으로부터 거절당하자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음독자살을 하면 하나님 영광을 가리게 될까봐 산에 올라가 떨어져 죽기로 마음먹고 지리산엘 올라갔습니다. 죽으러 가는 이 중증 장애인이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처절하리만치 자신과 싸우며 올라가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만지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남들이 보기엔 보잘 것 없는 나무 한 그루지만, 내가 택하여 가꾸고 바로 이 시냇가에 심었다’하는 하나님의 생각이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신 것입니다. 그 후로 강선교사님은 산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세계 장애인 최초로 대만 최고봉인 위산을 단독으로 오르게 되었고, 또 탁구도 배우게 되어 89년도에는 장애인 전국 체육대회에서 우승까지 합니다. 그러다가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몽골 선교사로 파송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 몽골 국가대표 탁구 감독 자리가 있어 그곳의 요청으로 선수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아시안 게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되어 몽골 올림픽 협회와 체육협회로부터 많은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강선교사님은 그의 삶으로 사람들에게 복음과, 사랑, 생명을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희망을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보잘 것 없다고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인생,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지셨고, 자신을 어루만져주신 하나님의 기준으로 자기 인생을 세웠을 때, 소생하여 물가에 심긴 나무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은 복된 사람입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고 대답하신다면 어떤 기준 때문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 속에 지혜가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 그 사람이 복된 인생이요, 복을 창조해 가는 사람이며, 복의 문을 열어 가는 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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