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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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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본 문 : 사도행전 3:1-10
설 교 :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어떤 아이가 스케이트를 타다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다들 구경만 하고 서 있는데 한 아이가 혼신의 힘을 다해 물에 빠진 아이를 극적으로 구조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며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때 아이가 대답하기를 ‘저 아이가 제 스케이트를 신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짧지만 오늘날 사람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아이는 친구의 생명보다도 자기의 스케이트가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물질이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밖의 사람들은 교회도 물질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교인들 중에서도 특별히 어려운 이웃을 위해 얼마만큼 예산을 쓰느냐를 보고 교회의 건강도를 평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웃사랑을 위해 물질로 표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웃사랑의 가장 큰 계명을 물질로 나타내기 원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를 통하여 나타난 첫 번째 기적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에 주님의 사역을 위임하고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회가 무엇이고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교제는 점점 아름답고 풍성해져 가나 그 자신의 본질을 찾지 못할 즈음에, 주님께서는 이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등장시키셔서 교회가 무엇하는 곳인가 하는 것을 말씀하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첫 번째로 주님께서는 교회가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2절 말씀을 보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매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 라고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교회에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교회의 상징적인 존재가 매일 습관처럼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는 장면과 일상적으로 늘 구걸하는 자리에 앉아있는 앉은뱅이가 함께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가져야 할 관심의 대상이 바로 앉은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앉은 자는 누구입니까? 이 사람은 구걸하는 장소에 스스로 올 수 조차 없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구걸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거지였고, 사도행전 4장엔 그가 40여세가 되었다고 하는데 40여 년 동안 장애자로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기능과 역할을 상실해 가치가 없는 존재로 버려졌습니다. 

그의 내면은 어떠합니까? 태어나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자신은 꿈을 펼칠 수 있는 어떤 것도 가지지 못하고 태어났다는 사실 때문에 외적인 장애와 함께 내적인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좌절하며 살아왔습니다. 그의 삶은 어떠합니까? 사람들이 얼마를 적선해주느냐에 따라서 그날 하루 삶의 질이 결정되는 사람입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 사람이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할 대상이고 돌봐야 될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관심 없이 ‘항상 그 곳에 와 있는 사람’ 정도의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와 요한이 이 앉은뱅이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여주시면서, 주님의 관심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교회가 어디에 관심을 가져야 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앉은뱅이 사건을 보면서 바로 우리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아닌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앉은뱅이가 앉아 구걸하는 현장은 바로 성전 미문이라는 입구였습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배경으로 쓸쓸하고 외롭게 앉아있는 앉은뱅이가 나의 모습은 아닌지. 가족과 친구들은 저마나의 인생을 화려하게 장식해 나가는데 오히려 나는 앉은뱅이처럼 앉아서 구걸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스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도 극복할 수도 없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과 관심을 구걸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나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느냐에 따라서 기분과 그날 삶의 질이 결정될 정도로 연약한 우리의 자아는 아닌지 말입니다. 40년이라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여전히 희망은 보이지 않고 이전에 살아왔던 것 그대로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삶, 새로운 미래를 설계할 수 없는 삶 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주님은 우리 모습일 수 있는 이러한 사람들,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을 돌보기 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번에는 베드로와 요한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들에게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보신데 반해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일로 여겼습니다.  ‘주님, 저 많은 사람을 빨리 돌려보내십시오.’ 인간적인 동정심이나 애정도 갖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다가왔을 때 금지시켰던 사람이며, 소경 바디매오가 길가에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칠 때도 조용히 하라며 그의 소망과 울부짖음을 짓밟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두 사람이 성전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에게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살아계시는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 마음속에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변화하기 이전의 눈으로 볼 때 앉은뱅이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에 주님의 관심과 뜻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알게 하셨기에, 이제는 주님의 마음을 담은 두 사람은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앉은뱅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첫아이를 잃어버리고 12년 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없으니까 주변에 아이 없는 가정이 얼마나 많은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들 부부가 겪는 안타까움과 주변의 시선들로 인한 외로움들을 우리가 겪었던 일들로 인해서 느끼고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 아이가 없는 가정이 없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같은 일을 경험하고 마음속에 그러한 경험의 아픔이 담겼을 때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옛날부터 앉은뱅이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에게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까닭은 주님을 영접하여 내 마음속에 계신 후로부터는 내가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들어와 계신 주님이 세상을 보시고 사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길 원하시고 어떠한 일을 하길 원하시는가 하는 마음을 담고 있을 때에, 주님의 마음이 주님의 눈이 우리로 앉은뱅이를 보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주님이 하셨던 사역을 제자들과 교회에 위임할
때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아, 내가 하던 모든 일을 너희에게 위임한다. 그리고 너희들이 나의 증인이 되어다오. 또 내가 원하니 너의 손을 내게 다오.  내가 너의 손을 통해서 삶을 잃어버린 지치고 힘든 영혼들, 그래서 통곡하며 오늘 무엇을 해야 될지 알지 못하고 앉아 있는 그 사람들을 바로 너의 손을 통해서 씻기고 싶구나. 너의 손을 나에게 다오.’ 우리가 우리의 손을 주님께 드리면 우리 손은 주님 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너의 귀를 나에게 다오. 세상에서 아무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고 토해놓을 수도 없는 자기의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신음하는 그 사람의 신음소리를 내가 너의 귀를 통해서 듣기를 원한다. 너의 귀를 나에게 다오.’ 그 귀를 주님께 드리면 그 귀는 내 귀가 아니라 주님께 쓰임 받는 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신 일을 바울은 이렇게 정의 했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예배를 드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의 귀를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손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가슴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보는 것을 중단하고 주님이 보시는 것을 나도 볼 수 있도록 나의 눈을 드리는 것, 이것이 오늘 이 예배의 산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산 예배입니다. 주님을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 보는 것과 세상의 관점을 가지고 보는 사람은 분명히 보는 것이 다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보기를 원하시는 사람이 어쩌면 여러분 옆에 또는 여러분의 가정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여러분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전혀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주님은 또 다시 ‘목자 없는 양’이라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잠시 잠깐 지나가는 인생이 전부인 것처럼 오늘도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니는 저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저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보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라고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이러한 중요한 지적은 후에 초대교회가 구제 때문에 시달리며 교회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나타났을 때 분명한 기준을 세우는 사건이 되기도 합니다.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념하겠다고 하는 교회 본질을 세우면서도, 주님께서 교회가 돌보기를 원했던 사람을 위해 집사를 세우고 교회가 해야 될 일을 함께 이루어 가도록 하는 초대교회의 건강한 모습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도전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이 성전에서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누구를 보고 계십니까? 목사를 보십니까? 성가대를 보십니까? 혹시 세상의 눈으로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눈으로 주님을 모신 사람, 마음으로 주님을 모신 사람, 귀로 주님을 모신 사람은 다릅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는지, 주님께서 나의 손과 귀와 발과 심장을 통해서 보고 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는지, 주님께서 우리가 보기를 원하시는 그 사람에게 집중하고 관심을 가지라고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로 4절 말씀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구체적으로 땅을 바라보고 돈을 바라보는 그에게 ‘우리를 바라보라’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주목한다는 [아테니사스]라는 헬라어 단어는 진지하고 강렬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바라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즉 그 앉은뱅이를 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표현한 단어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앉은뱅이를 바라보며, 그가 필요한 것이 채워질 때까지 시선을 주고 계속적인 관심과 주의를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사람에게 필요가 채워질 때까지 계속적인 관심과 주의를 준다는 의미를 저는 두 가지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먼저 시간을 함께 보내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쓰는 것입니다.

연초 송구영신 예배 때 드린 말씀을 기억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말씀드릴 때 시간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시간은 우리의 생명이라고 말씀드리면서 나사로의 비유를 들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또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살려주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나사로에게 조금 더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은 생명이고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해야할지 말씀하심을 듣는 기회가 됩니다.

앉은뱅이와 함께 있다는 것은 그와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그 시간만큼 내 생명을 태운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았다는 것은 오늘 하루를 다른 것과 바꿨다는 의미입니다. 근심과 염려로 하루를 살았으면 내게 허락된 생명을 근심과 염려로 바꿨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도박이나 술로 하루를 보냈다면 내 생명을 도박과 술로 맞바꾼 것입니다. 여러분 시간은 생명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에게 관심을 갖고 그와 함께 대화를 했다는 사실은 자기 생명을 앉은뱅이에게 나눠줬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나눴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무엇과 바꾸기를 원하십니까? 주님께서 시간을 개수하실 때 우리가 사용한 시간과 맞바꾼 것들이 폭력과 술과 염려, 낙심, 미움, 질투, 불평, 남을 비판한 것, 돈을 벌기 위해서 동분서주한 것과 아파트 평수 늘리기 위해서 정신없이 뛰어다닌 것이라면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내 생명, 내 시간을 가장 값지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주님께서 우리가 관심 갖고 시간 보내기 원하시는 그 사람을 위해서 보내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는 베드로와 요한이 말한 것처럼 우리를 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인물이 잘생긴 사람인지 못생긴 사람인지, 키가 큰사람인지 작은 사람인지, 부자인지 가난한 사람인지, 학력이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는 자기의 구걸하는 통속에 떨어지는 돈의 액수에 따라서 사람을 평가합니다. 돈이 얼마가 모이느냐에 따라 그날그날의 삶도 결정된다는 마음으로 누가 얼마를 넣느냐에 관심이 갖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미문을 통해 성전으로 들어가 얻게 되는 놀라운 구원의 감격과 기쁨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등 따습고 배부른 사람들이나 갖는 소망이나 믿음은 자신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삶에는 사치스러운 것이라며 오직 통속에 담겨지는 돈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동정어린 눈빛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더 비참하게 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40년을 살아왔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눈과 눈을 마주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줍니다. 그가 주님께서 재판받으시는 동안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을 때, 주님의 눈과 마주쳤고 마주쳤을 때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눈길을 통해서 느꼈던 것이 무엇일까요?

눈으로 대화를 해보셨습니까?  결혼식 주례할 때 저는 성혼선포를 하고 신랑신부에게 서로를 보도록 합니다. 침묵한 가운데 30초 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눈으로 대화하라고 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신랑신부가 주고받는 눈의 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 그 동안의 관찰한 결과는 그 시선은 보통시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이 서로 바라볼 때, 손을 뻗어 신랑 신부 사이를 저어도 가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그 시선 속에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습니다. 그럴 때 눈물을 흘리는 형제자매도 많이 봤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그 앉은뱅이와 눈길을 마주쳤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앉은뱅이를 바라보는 베드로의 눈빛은 아마도 패배자로서, 실패자로서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찾아가시는 주님의 마음을 가득 담고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눈빛으로 앉은뱅이의 눈을 바라보았을 때 앉은뱅이로 하여금 기대감을 자아내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가진 잘못된 시선을 바꾸어놓는 힘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눈을 바라보면 두렵습니다. 또 어떤 눈은 불안합니다. 살기가 등등하기도 하고, 절망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눈을 바라보면 그 속에서 용기를 느끼고 따스함을 느끼고 생명을 느낍니다. 나를 향한 어떤 놀라운 생명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은 주로 어떤 것을 담고 있습니까?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보라고 말씀하시는 그 대상에게 나의 생명을 나눠주고,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과 수용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6절 말씀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며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사람들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주기 원하십니다. 내가 가진 물질, 지식, 나의 신분을 가지고 옆에 있는 사람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주님은 근본적으로 그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주라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자랑할 만한 것은 아마도 배와 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기 잡는 노하우였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를 때에도 그의 삶 속에는 자기 자신의 높아짐이 최고의 꿈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제자로서도 실패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3년간 ‘생명의 말씀이 주께 있는데 내가 어디로 가겠나이까’ 했던 베드로가 계집종 말 한마디에 무참히 스승을 배반하고 맙니다. 아무리 주위가 요동쳐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과 같은 사람이 되라는 기대를 담은 이름 ‘베드로’ 이었지만, 그의 삶이 뿌리째 흔들리는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이름값을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동료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갈릴리 마을로 다시 돌아가서 밤새도록 수고하였으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는 자기 직업에서도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과연 인생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까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파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기는 쉬워도 나를 배반한 사람을 찾아가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베드로를 다시 세워주십니다. 용기를 주시고,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시며, 사명을 주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삶을 돌아봅니다. 지금까지 어부로서 큰소리칠만한 모든 것을 갖고 있었지만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던 과거, 그렇게 담대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 이다’ 고백했으나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 배반하고 말았던 과거입니다. 그 곳에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주님께서 그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의미 있게 만드셨다면 현재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입니까, 가지고 있던 소유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그러한 비중을 차지하는 분이십니까? 내 인생을 역전시키시고 근본적으로 바꾸시는 주님, 그러하기에 그는 4장 12절에 유명한 선포를 합니다.  많은 관원들과 대제사장들과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니라]라고. 

아무리 찾아보아도 인생을 변화시키는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그는 삶의 결론으로 가지고, 그러한 결론으로 삶의 현장에서 부닥쳐오는 문제 하나하나를 해결해나가는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에베소서에서 죄와 허물로 이미 죽었던 우리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죄를 가진 자신은 스스로 구원할 힘도 없이 끝나버리는 더 이상의 회생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보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 과거를 압니까? 나의 실패와 아픔을  압니까? 나의 좌절과 절망을 압니까? 나의 고독과 외로움을 압니까? 나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끝나버린 인생이었습니다. 내 인생을 변화시킨 그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어떤 좌절과 절망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비록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라 할지라도, 아름다운 성전 미문 앞에 초라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그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내 삶을 변화시킨 그 분이 바로 당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실 분입니다. 그분을 나는 당신에게 증거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도전을 드립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주님은 하나님의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앉은뱅이는 다름 아닌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스스로 일어나 걸어갈 수 없고, 다시 시작할 수 없으며, 그 시간 남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고, 남들의 사랑과 인정을 구걸하는 모습들이 낯설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 같은 앉은뱅이인 나에게 찾아오셔서 생명을 나눠주시고, 사랑과 이해의 눈으로 바라보심으로 세상 낙담과 절망에서 하늘나라 소망으로 바꿔주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받은 그 사랑으로 다른 앉은뱅이에게 증거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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