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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과 불안 / 시 9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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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삶과 불안
설교 : 조용기 목사
성구 : 시편 91편 1∼12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삶과 불안』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옛날 소련의 유명한 문호였던 톨스토이는 인간 실존의 절망에 관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사람이 저 중앙아시아의 넓은 들판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일진광풍이 불어오더니만 무시무시한 들소가 뿔을 세우고 그를 향하여 돌진해 왔습니다.
그는 소를 피해서 전력을 기울여 질주를 했는데 점점 더 거리는 좁혀지고 나중에는 소의 뿔이 엉덩이에 닿을락 말락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앞에 마른 우물이 있어서 뛰어 들어갔습니다. 우물에서 떨어지다가 그 가운데 나와있는 나무에 철렁하고 걸렸습니다. 그는 나무를 잡고 겨우 안정해서 앉아서 위를 쳐다보니 들소가 발로써 흙을 파고 코김을 내뿜으면서 눈을 부릅뜨고 밑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몸서리쳤습니다. 그 밑을 내다보니까 마른 우물인데 밑바닥에 독사가 새끼를 낳아가지고 독사들이 밑에 와글와글 합니다. 자 쳐다봐도 절망이고 내려봐도 절단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지 끝에 보니까 벌들이 꿀을 쳐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손을 내밀어 꿀을 찍어서 입에 대보니 정말 달고 맛있거든요. 그런데 뭐가 싹뚝싹뚝해서 보니까 저 끝에 나무 줄기를 새앙쥐가 와서 갉아 먹고 있습니다. 언제 가지가 부러져서 독사가 와글와글한 마른 우물 밑바닥에 떨어질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손을 내밀어 자꾸 꿀을 찍어 먹습니다. "하하하 맛있다. 하하하" 이것이 인생이라고 톨스토이는 말했습니다. 인생은 결국 위를 봐도 절망이요, 밑을 봐도 절망이요, 현재도 절망적인 상황속에 있으면서 순간적인 꿀을 빨고서 이것이 전부인줄 알고 즐기고 있다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정말 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불안한 존재라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불안합니까?

<본론>

1. 잃어버린 존재로서의 불안

첫째로, 우리는 잃어버린 존재이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여러분 산속에서 길을 잃어 버렸을 때 불안하지요? 대도시에서도 길을 잃어 버리면 우리는 당연히 마음속에 불안할 것입니다. 고향이나 집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을 난민이라고 합니다. 난민의 삶은 극히 불안합니다. 오늘날 세계 여러곳에 내전과 기타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난민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향을 등지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은 아무곳에도 안주할수 없고 끝없는 불안의 연속인 것입니다.

아담은 바로 난민의 처음 시작인 것입니다. 에덴이 아담의 고향인데 그가 하나님께 범죄하고 고향 에덴에서 쫓겨나서 지구상에 난민이 되어 버리고 만것입니다. 그는 지구촌 난민이 되고 그 후손들인 인류는 실상 고향 에덴의 낙원을 잃은 난민들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에덴에서 살아야 될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쫓겨나서 사는 난민이요, 난민의 후손들인 것입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보면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쫓겨난 인생, 고향을 잃어 버린 사람들은 당연히 난민이 아니겠습니까? 중국으로 탈북한 우리 북한 주민들 그들 청소년들의 불안과 참상을 우리들은 신문이나 매스컴을 통해서 종종 보고 듣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삶의 정체성을 잃어 버렸었습니다. 쫓겨난 난민이 되니까 내가 누군지를 알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릴 때 상당히 존경하던 학자요, 실업인인 한분이 계셨는데 그분앞에 가서 인생이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그분 하는말이 "인간은 하나의 고등동물에 불과하다. 인간이 소히 말하는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은 서로 화통하게 살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규약에 불과하지 인간은 순수한 동물이다" 저는 그말을 듣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상당히 제가 존경하는 학식있고 덕성있고 또 사업에도 성공한 사람이 좀 고상한 인간에 대한 정의를 내릴줄 알았더니 인간은 순수하게 동물에 불과하고 인간의 윤리와 도덕이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편리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규약에 불과하다 그말을 했습니다. 그러니 결국에 인간은 무엇이냐? 정체불명의 존재인 것입니다.

밤에 여러분 갑자기 대문을 두들기는데 문을 열고 보니까 정체불명의 사람이 서있습니다. 그 사람을 볼 때 마음이 불안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정체불명의 존재가 될 때 우리는 항상 불안한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우리가 알지 못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하지 않습니까? 한때 우리 국민들이 많이 불렀던 최희준씨의 노래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여러분도 아마 많이 불렀을 것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입니다. 난민의 길이요.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야곱이 애굽에 이주해서 바로왕이 그 나이를 묻자 야곱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1백 3십년인데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그는 자기의 일생을 나그네 길이라 했습니다. 고향을 찾는 나그네 길이니까 난민 아닙니까? 일생의 삶이 난민이었는데 그의 삶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잃어버린 존재로써의 난민이 된 인간은 어찌할수 없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앉아도 불안하고 서도 불안하고 잘 살때도 불안하고 못 살때도 불안합니다. 인간은 그렇기 때문에 존재적인 불안을 가슴에 앉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2. 불확실한 환경으로 인한 불안
둘째로, 왜 인간이 불안하냐 하면 불확실한 환경으로 인해서 불안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환경도 예측불허한 것입니다. 자연환경이 오늘날 얼마나 변화무쌍합니까?
예레미야서 51장 29절에 "땅이 진동하며 고통하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바벨론을 쳐서 그 땅으로 황무하여 거민이 없게 할 경영이 섰음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땅이 사실은 진동하고 고통하고 있잖아요.

이사야 24장 19절에 "땅이 깨어지고 깨어지며 땅이 갈라지고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서있는 터전입니다. 터전이 이렇게 흔들리니 불안하지 아니할수 없지요.
이사야 8장 22절에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 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8장 22절에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선생은 귀를 귀울여 보니 하늘도 땅도 바다도 다 탄식하고 고통하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어느곳에 하나 평안한 곳이 없습니다. 그런곳에 있는 우리가 불안하지 아니할수 있겠습니까?
지구의 자연재앙은 세계 곳곳에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10월에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서 강진으로 24명이 죽었습니다. 11월 3일 미국 알라스카에는 규모 최고 7.9의 강진이 알라스카를 뒤흔들었습니다. 같은날 에콰도르에서 화산이 폭발했습니다. 11월 4일 파키스탄 북부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10명이 죽었고, 인도네시아 스마트라 섬에서도 강진이 발생하여 70명이 부상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10월에 경남에서 진도 3의 약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같이 온 세계는 지진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자연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깨어지고 깨어집니다. 우리가 서있는 이땅 어느곳에도 완전히 안전하고 평안한 곳은 없습니다. 또 온화와 엘리뇨 현상으로 지구는 이중재앙에 걸려 있습니다.
1998년 여름, 중국 양쯔강이 대홍수로 3,000명이 사망했잖아요. 2000년 인도 아열대 지역에 영하 10도 한파로 300명이 죽었습니다. 그 아열대 지구 더운곳에 갑자기 한파가 다가온 것입니다. 2000년 7월 유고 연방 수도에서 섭씨 43.5도의 폭염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햇빛에 타죽었습니다. 금년에 동유럽과 남아시아에 100년만에 최악의 홍수로 1500여명이 사망했는데 우리나라도 여름에 큰 홍수 피해를 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구촌 곳곳에 폭우, 홍수, 가뭄, 한파, 폭염이 발생하는 원인은 지구 온난화에서 97년과 98년 엄청난 엘리뇨현상이 겹치고 산림난벌과 개발로 이변이 겹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뇨는 적도부군 태평양의 수온이 올라가는 현상으로 1도만 높아져도 대기와 해수의 흐름을 바꾸어 곳곳에 폭우와 가뭄이 발생하고 97년, 98년에는 태평양 수온이 4도까지 올라갔기 때문에 온세계 기온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요즘 호주는 60여건에 이르는 산불로 큰 피해를 입고 있고 미국 동부는 5일까지 폭설로 20여명이 사망하는 피해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자연에 무시무시한 재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에 의존하고 자연에 둘러싸여 사는 우리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정치가 있는데 정치적인 불안이 온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70년 만에 공산주의가 붕괴했으니 우리는 아직도 남북분단과 동서지역 화합 문제가 과제가 되어 있고 북한이 핵을 만들도 있으므로 북한 핵문제가 남북한, 세계간 정치적인 불안의 요소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알다시피 미국은 지금 이라크와의 전쟁하기 위해서 긴장상태에 있습니다. 언제 이라크와 전쟁이 터지고 온세계 정쟁이 불안해 질지 모르므로 우리는 신문보기가 불안하고 텔레비젼 틀기가 불안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어느곳에 봐도 전쟁과 테러리즘이 온지구에 곳곳에 편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족간 내전, 종교간 충돌, 국가간 이권에 따른 전쟁은 계속하고 있습니다. 9·11테러로 3,031명이 뉴욕에서 죽었지 않습니까? 최근에는 발리섬에서 테러가 일어나고 필리핀, 이스라엘 테러 이런 테러가 확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10월 무차별 연쇄 살인으로 10명이 죽고 2명이 부상해서 외출도 못하고 공포에 떨게한 그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결국 범인이 체포되어서 평안하게 되었지만 이런 테러가 오늘날 문명국가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알다시피 알카에다는 라마단 즉, 금식기도 종식에 맞춰 미국과 동맹국들에 대한 제2테러를 예고하여 성탄과 연말, 연시 연휴를 앞두고 미국 전역과 해외 공관등에 테러에 대비 비상경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일이 일어납니까? 성경에는 말세에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미국 국민들의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19세기 말 미국의 남북전쟁과 20세기 대경제공항과 세계 제2차대전의 위기를 극복한 미국민들은 9·11테러 이후의 위기도 국가없는 적들과 이전보다 더 어려운 전쟁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전쟁은 나라와 나라 국가 경계를 가지고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국경없는 전쟁인 것입니다. 어디에서 불쑥 튀어나와서 거대한 파괴를 가져올지 알수가 없습니다. 마약, 빈곤, 암과의 전쟁처럼 실존이 아니면서도 쉽게 끝나지 않는 만성적인 전쟁상태로 세계는 돌입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6절로 7절에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다고 말했었습니다.

전도서 8장 7절로 8절에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생기를 주장하여 생기로 머므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자도 없고 전쟁할 때에 모면할 자도 없으며 악이 행악자를 건져낼 수도 없느니라"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경제적인 불안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대통령 선거에도 제일 중요한 이슈가 경제적인 문제입니다. 앞으로 대통령으로 선출될 사람이 우리 나라를 경제적으로 안정되게 하고 잘살게 할수 있는가 없는가 이것이 우리 최대의 관심사가 아닙니까? 지구촌 경제는 언제 세계적인 경제 공항을 몰고 올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7절에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지막때는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게끔 마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경기침체가 다가올 위험이 있고 우리나라도 다시 외환위기 걱정이 사무칩니다.

2050년의 세계는 4배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국가간 빈부격차와 도시의 셀루무아(?)로 암울한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로 변할 것이고 인구도 90억명이나 불어나 세계는 사회적, 환경적으로 더 이상 생존하기 어렵게 될것이라고 8월 20(?)일 3개 은행이 발표를 했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신중하게 살지 못하고 흥청망청 살다가는 큰 경제적인 위기에 처할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개인 가계빚이 평균 3천만원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한가구당 3천만원씩 빚을 지고 있으니 이 빚을 어떻게 갚겠습니까? 이 빚을 은행에서 빌려서 그대로 막쓴것입니다. 우리가 빚을 갚지 못하고 파산에 이르면 은행이 파산되고 국가경제가 파산되고 또다시 우리는 IMF와 같은 비극적인 상황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경제가 결코 낙관할수 없는 불안한 살얼음 위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우리가 더 겸허하게 살지 않으면 큰 위기를 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삶의 내용의 부재에서 오는 불안
셋째로, 우리 삶이 불안한 것은 삶에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고생하며 살아야 하는가! 요사이 제게 온 인터넷 편지 중에서 그런 내용의 편지가 많이 옵니다.
"목사님! 무엇 때문에 살아야 됩니까?" 오늘받은 인터넷 편지에서는 "나는 주일날 여의도순복음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이외에는 모든인생이 회색빛"이라고 말했습니다. "살아갈 아무런 의미를 발견할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마다 가슴속에 허무와 무의미의 불안이 있습니다. 왜사나!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져 버리고 맙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리고 잠언서 14장 13절에는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웃고 있으면서도 가슴은 슬픕니다. 즐거움이 있으면 끝에는 더 큰 슬픔이 다가옵니다.

세계적으로 우울증과 같은 정신 신경질환에 걸린 사람들이 4억명에 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세계보건기구가 작년 1월에 밝혔습니다. 이런 질환은 가난하거나 부요한 국가에 관계없이 중요한 문제이며 여성이 남성보다 2배이상 많이 걸린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세계와 한국에 가장 많이 팔리는 약이 위궤양 치료제, 두통약, 수면제가 제일 많이 팔립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무척 불안하고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책으로 인한 양심의 고통과 불안이 있습니다. 그런 것 없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마음속에 양심이 있고 우리는 양심에 상처를 입히고 살았기 때문에 자기가 의식하든, 의식안하든 상처입은 양심이 끊임없이 토해내는 불안이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39절에 "살아 았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라고 했으니 무슨일을 당해도 "이건 내가 죄로 말미암아 벌받는 것이지. 내가 잘못해서 그렇지" 그러한 마음에 잠재적인 불안이 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 9절에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 한 헬라인에게며"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양심을 거스리고 악을 행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환란과 곤고가 마음속에서 잘먹고, 잘입고, 잘살아도 평안과 기쁨과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은 죽음의 불안과 내세에 대한 불확실성의 불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문득문득 죽음에 대한 불안이 다가옵니다. 갑자기 내가 암에 걸리고, 고혈압에 걸리고, 심장병에 걸리고, 불치의 병에 걸려서 죽지 아니할까? 또 이러한 병들이 소리도 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어느날 내가 중대한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다는 선고를 받게 될 때 좌절과 절망은 파도처럼 엄습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현재 살고 있지만은 언제 무시무시한 죽음의 병에 걸릴지 모를 시한폭탄을 안고 있기 때문에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드은 미래에 죽음의 저 건너편에 대한 확신이 없는 이상은 늘 불안한 것입니다. 전도서 6장 12절에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는 양심이 압니다. 죽고 난 다음에 저 세상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잠재의식 속에서는 심판을 받을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로만 빈센트 필 박사는 사람들이 걱정하고 불안해 하는 40퍼센트는 과거일이고, 10퍼센트만 현재일, 50퍼센트는 미래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미래에 대해서 끝없는 불안과 공포심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4. 인간 불안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
그러면 네 번째, 인간 불안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수많은 불안을 극복하고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살수 있나요?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이 있나요?

여러분 성경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예수님이 오셨다고 말했습니다. 눈에 안보이는 하나님이 역사적인 인물인 예수로 지구상을 찾아 오셨다. 이게 우리 큰 위로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지만은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2천년전에 안보이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역사적인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0절에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다고 했습니다. 우리 때문에 예수께서 육을 쓰고 보고 만질수 있게 나타난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 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셨다고 말했었습니다. 이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과 사랑을 했다 했습니다.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귀신을 쫓아 내어 주시고 병을 고쳐 주시고 배고픈자를 먹이시고 죽은자를 살리시고 평안을 주시며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인간의 현재와 미래를 주장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한 해답을 제시해 준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온 전신이 멸망에 쌓여 있는데 이 멸망을 극복하고 영생을 얻을수 있도록 예수를 보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함을 믿는 사람들은 멸망을 털어 버리고 영생을 가슴속에 가질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다고 했으니 얼마나 마음에 든든합니까? 죄 때문에 버림 받았으나 용서를 통하여 고향과 집인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이 우리의 고향이에요. 우리의 집입니다. 탕자가 집을떠나 버림받아 무수히 고생하다가 아버지께로 돌아온 것처럼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돼요. 난민의 신세를 처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우리 대신해서 주님이 이런 대속의 고난을 받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는 저주에서 속량받고 성경 말씀대로 너희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했었느니 아버지의 영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확정하여 주시고 위로하여 주시고 평안을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다고 한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2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 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눈에 안보이는 우주의 창조자 우리 아버지를 우리가 알게 되고 발견하고 그 품안에 들어가게 되고 아버지와 교토할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 생각할 때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평안을 얻을수 있는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 품속에 살수 있다는 것을 시편 91편 1절로 12절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새겨 들어 보십시오. 이 말씀을 외우십시오. 이 말씀을 매일같이 반복해 보십시오.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저는 매일같이 이 시편을 외웁니다. 얼마나 은혜가 됩니까? 여러분 이 하나님의 품안에 안겨 사는데 이 세상에 불안과 공포가 있을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품에 안기면 우리는 난민의 신세를 면하여 고향을 발견하고 부모품에 안기게 되고 자연의 재앙이나 정치적인 불안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어떠한 불안이 와도 우리는 두려워할게 없어요. 환란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냐 죽음이냐 칼이랴 이 모든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한 삶의 의미와 내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영생을 얻고 생수를 마시게 되지 않았습니까? 누가복음 19장 10절에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했으며 요한일서 5장 11절로 12절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구주로 믿으셨으면 아멘 하십시다. 그러면 여러분 생명이 있습니다. 영생이 여러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로 10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이제 요한복음 12장 26절처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했었습니다. 우리가 이땅에 살면서 성수주일하고 십일조 드리고 말씀읽고 기도하며 전도하며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아버지가 너무너무 사랑하고 기뻐하고 우리를 위해서 즐거워서 하나님이 소리를 발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고독하거나 버림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독하지 않습니다. 버림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시편 42편 5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고 찬송할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제는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살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로마서 8장 38절로 39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어떠한 것도 여러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끊을수가 없습니다.

<결론>
우리는 일생 동안 끊임없이 삶의 불안과 공포의 공격을 당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기도하면 불안의 적병들은 하나하나 정복되고 내어 쫓기고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우리는 쟁취할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과연 너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 하겠노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이러므로 이 불안한 세계속에 불안한 시대에 불안한 인간존재를 우리가 탈피하고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과 함께 믿음, 소망, 사랑, 의 , 평강, 희락을 가지고 살고 이 세상을 떠날때도 당당하게 예수님의 손을 잡고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이별하는 것이나 구하는 것이나 알린 것이 없는 영원한 고향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불안한 존재로 태어나고 우리 삶 자체가 불안하고 세계 자체가 불안하고 공포에 들어차 있습니다.
하나도 확신할 곳, 하나도 확인할 것이 없습니다. 불안한 미래 속에 사람들은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긴 우리들은 모든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고
의와 평강과 희락을 가지고 살수 있고 장차 영원한 영광을 꿈꾸고 살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이 구원을 주신 우리 아버지께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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