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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데스다 못가의 사회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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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베데스다 못가의 사회와 오늘
본 문 : 요한복음 5:1-8
설 교 : 김종준 목사 (꽃동산교회)


예루살렘 동북쪽으로 들어가는 성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못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문이 옛날에는 양들이 출입하는 문이라고 해서 “양문”이라고 불렀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그 문 앞에 있는 조그마한 못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행랑 다섯 채가 있고, 그곳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득실거렸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전설에 천사가 내려와서 그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 때에 제일 먼저 못에 뛰어드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고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수 많은 환자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앞 못 보는 소경도 있었고, 절름발이도 있었고, 혈기 마른 사람도 있었고, 각종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또 다른 공동체였습니다. 여기는 정상적인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사회와 그 당시 상황과 너무 흡사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베데스다 못가의 사회상을 살펴보고, 그 고질적인 병폐로 가득찬 사회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원리를 발견하여 이 시대의 삶에 적용하고자 합니다.


1. 베데스다 못은 환자들의 사회였습니다.

그곳은 정상적인 사람은 없고 환자들만 득실거리는 공동체였습니다.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 38년된 병자 등 수 많은 환자들이 누워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치료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의 사회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흡사하지 않습니까? 이 사회는 정상적인 사람보다는 비정상적인 사람들로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치료를 받아야할 사람들의 사회입니다. 가끔 신문이나 방송 매체를 통한 뉴스를 접할 때 느끼는 게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어떻게 저렇게 일을 할 수 있을까? 가끔 깜짝 놀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교회 성도님들의 일로 범정에 재판받을 때 몇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재판을 기다리면서 먼저 들어가서 다른 사람의 재판받는 것을 보았는데 이 사회가 치료받아야 할 사람들로 득실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재판을 하는 사람이나 재판받는 사람이나 불신과 아집으로 꽉 차서 환자가 환자를 치료하고 수술하겠다는 식으로 이 사회가 문제로 얼룩진 것 같았습니다. 한 마디로 깊은 병에 빠져 치료와 수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회입니다. 그러니까 베데스다 못의 사회처럼 병자의 사회인 것입니다. 이것을 치료받지 못하면 베데스다 못가에서 들리는 신음처럼 우리의 병만 깊어가고 고통과 아픔만 더해 갈 것입니다.


2. 베데스다 못은 이기주의 사회였습니다.

베데스다 못의 물이 동하는 순간 거기에 모여 있던 환자들은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자기보다 정도가 심한 환자가 있던 말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쳐내 가며 자기가 먼저 뛰어들었습니다. 남을 돌아보거나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만 있지 남은 생각하지 않는 오늘의 사회도 똑같지 않습니까? 사회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대인들, 나만 있고 우리가 없는 사회, 너무 흡사하지 않습니까? 정정당당하게 싸워 이기기보다는 비정상적인 방법이 익숙한 사회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 사회는 베데스다 못의 사회처럼 고질병으로 물든 사회입니다. 치료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사야서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앗수르와 바벨론에 망한 이유는 공정한 재판을 하지 않고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자기의 손익계산을 위해 불법을 행한 이기주의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회의 고질적인 무서운 병 이기주의의 병을 고침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고통만 더욱 깊어가고 무서운 심판만 가까워옵니다.


3. 이런 사회 속에 고침받은 38년된 병자

병든 사회, 이기주의 사회 속에 38년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이 환자는 그들의 이기주의와 경쟁에 밀려나 고통만 더해갔습니다. 그 못가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사회에서 병만 키워가고 움직이지 못하고 지칠대로 지쳐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풍요와 즐거움에 가득찬 도시에 가지 않고 빈곤과 질병과 절망 속에 빠져있는 진정으로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병든 사회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이 사회가 병든 사회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찾아오신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그 사회에 수 많은 환자가 있었지만 38년된 병자만 예수를 만날 수 있었고 예수를 만남으로 그 무서운 병마에서 풀려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축복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든 사회가, 병든 개인이 치료받고 변화하는 것은 환경이 아닙니다. 엄밀히 따지면 베데스다 못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럼 그 환자가 그 많은 환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예수를 만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는 38년이란 긴 세월 동안 그 고통 가운데서도 한 번도 좌절하거나 소망을 잃지 않고, 치료의 날을 기다리며 인내하고 견디며 살아왔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은 포기하고 좌절하고 실망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육신은 점점 늙어가고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갑니다. 누구 하나 부축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연못의 물이 동하면 병세가 조금 덜한 젊은 사람들이 먼저 뛰어들어 도저히 자기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은 환경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포기하거나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그곳에서 고침받는 날만을 기다려 온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회가 아무런 소망이 없는 사회 병든 사회라 할지라도 좌절하지 말고 타협하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면 38년된 병자처럼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로 인해 이 어둡고 부패한 환자의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되게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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