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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 땅이여 나팔을 불라 / 사 64:1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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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온 땅이여 나팔을 불라
본 문 : 이사야서 64:1 ~ 4
설 교 : 박종화 목사 (경동교회)


  주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내려오시면,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 것입니다. 마치 불이 섶을 사르듯, 불이 물을 끓이듯 할 것입니다. 주의 대적들에게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떨게 하여 주십시오. 주께서 친히 내려오셔서, 우리들이 예측하지도 못한 놀라운 일을 하셨을 때에, 산들이 주 앞에서 떨었습니다. 이런 일은 예로부터 아무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귀로 듣거나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 말고 어느 신이 자기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이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서신서의 말씀: 히브리서서 10:19 ~ 22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꿰뚫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가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24:29 ~ 35

  "그 환난의 날들이 지난 뒤에, 곧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 때에 인자가 올 징조가 하늘에서 나타날 터인데, 그 때에는 땅에 있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으로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천사들을 큰 나팔 소리와 함께 보낼 것인데, 그들은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선택된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 "무화과나무에서 비유를 배워라. 그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너희는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문 앞에 가까이 온 줄을 알아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끝나기까지는,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나의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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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이사야서 64장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을 위로해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바빌론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다가,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향 땅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특별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만에 고국 땅에 돌아옵니다.

돌아와서 지낸 세월의 한 대목을 오늘  읽은 이사야서 64장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돌아와 보니, 그리던 고향 땅인 것은 사실이지만 고향 땅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험난했으면, 냉혹한 생활 조건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먹을 것, 마실 것, 아무것도 없다고 한탄하면서, 차라리 이집트에서 나와 황량한 광야에 있을 때가 차라리 나았을 것 같다고 했겠습니까?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귀환했을 때에는 자기 고향 땅으로 되돌아온 기쁨이 충만했습니다만, 막상 돌아와 생활을 시작하면서 부닥친 의식주 문제는 굉장히 심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누구나 당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아프리카를 가보시면, 이런 경험을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아프리카를 다녀온 뒤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한 번은 아프리카에 꼭 다녀오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두 번 갈 곳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을 할 만합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여러 번 다녀온 분들 계십니다만, 저도 여러 번 다녀왔는데, 갈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광활한 대지, 다양한 자원, 동식물도 많은 이 아프리카 대지가 왜 이렇게 버림을 받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하자원도 많지만, 식민지 시절에 다 파가고 지금은 주로 사막에 군데군데 남아 있는 실정입니다. 대륙 내부로 들어가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제 가나안 땅에 귀환해서 보니, 그 동안 바빌론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착취해 간 뒤였습니다. 가나안 땅의 자원들은 다 고갈되었고, 가나안 땅의 자연과 산물 가운데 쓸 만한 것들을 다 바빌론으로 가져가 버렸습니다. 가나안 땅,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던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 그건 이미 옛말이고, 이제 남은 것은 황망한 황토 뿐.

하지만 고국 땅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들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감사도 최소한 먹을 것이라도 있어야 계속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너무 먹을 것이 없으니까, 감사가 오래 가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차라리 바빌론에 남아 있을 걸. 자존심은 상하지만 차라리 의식주 문제는 해결하면서 그냥 남아있을 걸. 민족과 개인의 자존심을 회복해서 가나안으로 왔지만, 너무나 크고도 오랜 물질적 궁핍의 현실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종의 자기 정체성의 위기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우선 먹고살아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는 야웨 하나님의 방식으로는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빌론에서 배운 방식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다시 말해 비를 주고 햇빛을 주는 이방 신들을 섬기기로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굶을 때 먹을 걸 주셨고, 또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셨으며, 항상 도우심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배반한 경우에는 여지없이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심판받을 각오를 하고서 이방신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배고프다 보면 신조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자기의 윤리적, 도덕적 신조는 물론 신앙까지도 버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집단적으로 자기 신조를 방기한 겁니다. 야웨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바알신을 섬겼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이라는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이사야입니다.

이사야서는 굉장히 긴 책입니다. 학자들의 분석 결과는, 이사야서는 한 권으로 이루어진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사야서가 그 쓰여진 상황과 문헌이 성격이 일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1장부터 39장까지를 한 권으로 보고, 그 책의 저자를 제1이사야라고 합니다. 40장에서 55장까지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어떤 사람이 썼는데, 그 저자를 제2이사야라고 하고, 그 다음 56장부터 시작해서 마지막까지는 앞의 둘과 다른 사람이 썼는데, 이 사람을 제3이사야라고 합니다. 오늘 64장의 말씀은 제3의 이사야가 썼다고 하는데, 제3이사야는 바빌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다시 가나안에 정착한 당시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주님의 백성이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이곳에 왔는데, 하늘 문이 닫혔습니다. 당신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주님은 얼굴을 가리셨습니다. 당신은 은퇴하셨군요. 당신은 실종되었군요. 하늘문이 완전히 닫혀 있다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당신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부탁입니다. 하나님, 하늘을 가르고, 우리말 번역에는, 하늘을 쪼개고 제발 얼굴을 보여 주십시오. 땅으로 내려오십시오. 이 백성이 죽을 지경입니다. 하늘을 쪼개고 오시면, 산들이 막 떨 것 같습니다. 산들만 떠는 것이 아니라, 하늘 없이, 하나님 없이 살았던 모든 백성들이 우왕좌왕 하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당신을 맞이할 것입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사야가 "하나님, 하늘 좀 쪼개주십시오. 당신은 왜 얼굴을 가리셨습니까? 왜 이 백성에게서 등을 돌리셨습니까? 당신이 오셔야 합니다." 하고 외쳤겠습니까? 그렇게 하소연하고서는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호소합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이 백성의 모든 원한을 다 풀어주실 겁니다. 백성 여러분, 하나님이 하늘을 쪼갤 때까지 기다립시다. 그리고 간구하십시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하나님이 오시는 방식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실 때 반드시 막힌 담을 헐고 오십니다. 그 담이 하늘이라고 하더라도 그 하늘을 가르고 쪼개고 그리고 직접 땅으로 내려오십니다. 이렇게 하늘을 쪼개고 내려오신 하나님의 모습, 그 모습을 우리는 말구유의 예수라는 사람에게서 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늘을 가르고 오신 하나님, 그분은 많은 사람이 잠자는 그 시간에, 그것도 한적하고 초라한 말구유에 살며시 눈 오듯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말구유에 그렇게 내려오셨지만, 그분이 오실 때 하늘은 쪼개졌습니다. 산들이 떨었습니다. 사람들이 몰랐을 뿐입니다.

똑같은 이야기가 히브리서에 있습니다. 그렇게 오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다음에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데, 인간이 되어 오신 그 하나님, 이름하여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실 때, 이사야서에서는 하늘을 쪼갰지만, 그분은 성전 안에 있는 지성소의 휘장을 찢었습니다. 휘장을 찢고 우리 인간에게 오셔서 우리 죄를 사해주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이 두 성서 말씀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먼저 하늘을 쪼개고, 휘장을 찢고 우리한테 오십니다. 인간이 쌓아 놓았고 걸어 놓았던 모든 벽이나 휘장은 반드시 하나님이 먼저 부수고 찢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먼저 너희들에게 간다. 나를 맞이하여라. 너희가 나한테 오라 하지 않는다. 내가 간다. 내가 갈 테니, 나와 함께 즐기자.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한테 두 가지 제안을 하십니다. 하나는 "내가 하늘을 쪼개고 갈 테니 나와 함께 즐기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서 보면 하나님을 즐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즐길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즐긴다는 게 뭡니까? 하나님을 가지고 놀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착실하게 본문을 읽어보면 이런 뜻입니다. 즐긴다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붙들고 이불 속에서 뒹구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아버지와 같이 씨름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웃고 까불고 맘대로 즐겁게 놀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 입장에서 보면, 나는 아버지와 붙어서 아버지를 잡고 아버지와 함께 즐긴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시면,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처럼 우리와 씨름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면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와 함께 뒹굴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함께 즐거워하고 싶어 하십니다. 이것이 하늘을 가르고, 하늘을 찢고, 휘장을 찢고, 오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하고 놀자. 나하고 인생 역사를 함께 마련해 가 보자. 나하고 이 사회, 이 역사도 같이 만들어 가 보자. 온 세계 역사를 나하고 함께 꾸며 가 보자. 나하고 뒹굴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 세상에 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 역사가 인간의 역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슬픔을 이기려고 하나님께 탄원하는 기도할 때에도, 너무 기뻐서 찬송을 부르고 나팔을 불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즐깁니다. 아니 하나님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진실로 즐길 줄 아는 아이,  아버지와 침대에서 뒹굴 수 있는 자식은 자기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 자식이 아버지를 아버지처럼 섬길 수 있고 공경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즐기지 못하는 사람의 경배를 하나님은 받으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즐긴 다음에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언제 하나님과 함께 즐길 겁니까?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무화과나무를 보면 무화과나무 줄기가 부드러워지고 잎사귀가 푸르면 이제 여름이 오는구나, 열매를 맺겠구나 하고 알지 않느냐?" 마찬가지로, 내 육체가 내 영이 유순해지면서 새싹 같이 파릇파릇한 날개를 펼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이 오시는 때 아닙니까?

제가 이런 얘기를 하나 읽어보았습니다. 과실수들은 열매를 맺을 때, 한 해는 열매를 많이 맺고, 한해는 열매를 적게 맺습니다. 그걸 해갈이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토리를 연구해본 결과, 학자들은 도토리에는 눈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도토리는 눈으로 보고 있는 듯이, 들판이 오곡백과로 가득 차 풍년이 들면, 그 해에는 도토리는 열매를 적게 맺습니다. 농사가 어려워 흉년이 들면, 도토리는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논밭을 통해서든, 산야의 나무 열매를 통해서든, 식량이 풍족하게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거리를 지나가시다가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지금 줄기가 부드러워지며 푸른 잎사귀가 무성하니 이제 열매가 맺혔어야 하는데, 열매가 없는 것을 보고,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면서, 잘라서 불에 태우라고 하십니다. 도토리만도 못한 무화과나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가 되면 세상이 돌아가는 걸 알고 열매도 맺는데, 양식이 많이 있으면 적게 맺고 양식이 적으면 많이 맺기도 하는 사람, 세상이 돌아가는 징조를 알고, 때의 징조를 알고 조정할 줄 아는 사람, 혜안을 가진 사람, 이게 도토리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께서 도토리만도 못한 인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세계가 들끓고 있는데, 세계가 지금 통곡하고 있는데, 왜 그대들은 우는 사람들을 위로하지 않습니까? 기쁨에 겨워 춤추는 이들을 보면서도 그대들은 왜 춤추지 않습니까? 이 세대를 뭐로 비유하면 좋습니까?"

오늘날 21세기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은 주변에서 생기는 여러 일들을 보면서 시대의 징조를 읽어야 합니다. 세상이 수확의 계절로 가는지, 흉년이 드는지, 아니면 풍년이 드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젯밤에도 서울 시내에 촛불 시위가 굉장한 걸 보았습니다. 의정부에서 여중생 둘이 탱크에 깔려 죽은 사건을 계기로, 또 운전했던 미군 병사들이 무죄 판결을 받은 일 때문에 지금 한미간에 엄청난 갈등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소파, 당연히 개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 쪽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 합리적이고 평등하게 개정되어야 합니다. 그건 당연한 얘기인 것 같습니다. 누가 반대하고 찬성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중생이 두 명 죽었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와 똑같이 미군이 파송되어 있는 일본의 여학생이었다면 사태가 어떻게 되었을까? 미군이 우리보다 훨씬 많이 주둔하고 있는 독일의 여중생이었으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면 미국 내에 있는 미국 여학생 두 사람이 훈련하는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었다면 미국 여론은 어땠을까?

불쌍한 여중생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여중생은 누가 위로를 해줍니까? 소파는 개정해야 하고, 미국의 세계 전략은 어떻고, 우리의 대응은 어떻고, 이 사람 저 매체가 한참 토론하고 있는 이 와중에, 누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 여중생에게 위로를 베풀 수 있습니까? 이 어머니, 아버지에게는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합니까? 시스템 말고, 제도 말고, 사람은 어디 갔습니까? 저는 어제 촛불을 보면서 우리 여중생과 그들을 낳고 기른 어머니, 아버지, 친지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했습니다. 사과하고 위로하는 일은, 군인 장갑차가 사고를 내었으면 군대의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해야 합니다. 누구를 위로하고 사과해야 되느냐 하면, 여중생과 그 부모에게 해야 합니다.

내일 모레가 세계 인권선언의 날입니다. 인권은 하나님이 모두에게 주신 사람의 권리입니다. 탱크에 깔려 죽은 여중생에게도 인권이 있습니다. 누가 이 인권을 보상해줍니까? 누가 여중생의 권리를, 비참하게 밟혀진 권리를 누가 보상해줍니까? 그래도 미국을 비롯한 서양 나라들이 인권의 보루, 민주의 산실이라고 생각해서 우리는 상당히 부러워하고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우는 인권이라는 가장 귀한 가치관이 오늘 여중생 사망사건에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해결하려는 노력이 별로 보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람 한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짓밟히면, 짓밟힌 이 인간은 하나님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을 찢고 좀 내려와 주십시오." 다른 한편으로, 사고를 낸 미군 병사들, 무죄판결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이 장갑차를 운전한 두 병사는 어떻게 됩니까? 법적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이 사람들이 자기들이 누구를 죽였는지 아는데, 평생 동안 나는 죄 없다며 편안히 살 수 있겠습니까? 죄책감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이 두 병사에게는 누가 무슨 이유로, 어떤 방식으로 위로해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새로운 삶을 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피해자인 여중생, 가해자가 된 군인 사이에서, 거기서 죽어가고 그래서 위로 받아야 할 이는 사람입니다.

시스템을 분명히 바꿔야 합니다만, 시스템을 바꾸는 중에도 사람이, 사람 속에 담긴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고 중시되어야 합니다. 제도도 바꾸어야 하겠지만, 그 제도를 움직이는 사람이 중시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찾으십니다. 당신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한테 묻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들과 함께하고 싶다. 내가 무너뜨릴 벽이 뭔지 말해다오. 내가 찢어야 할 휘장이 뭔지 말해다오. 내가 부수어야 할 장벽이 뭔지 말해다오. 나는 그 장애를 뚫고 너희에게 가고 싶다. 지금 가고 있다."

이 대림절에 예수님을 맞으려고 하면, 여러분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해야 합니다. 오늘 세계현실 가운데로, 하나님은 또다시 이 세상을 만드신 생명의 주인으로 오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합니다. 히브리서 말씀에 이렇게 써 있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여러분들, 아무리 힘들어도 원수 갚는 일만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서 진실로 평화롭게 함께 살 그 세상을 만들어 가면 됩니다."

오늘 저는 이 세계와 우리의 현실 속에, 이 하나님께서 하늘을 쪼개고 우리한테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평화와 자유가 넘쳐나고, 믿음과 사랑이 넘쳐나는 그런 사회를 우리더러 만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신답니다. 즐기자고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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