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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화 / 엡 2: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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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엡2:13-18
제 목 : 평화
설 교 : 오세원 목사 (대구칠곡교회)


세계의 인사말을 보면 "평화"가 제일 많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도 히브리 사람들은 항상 "살롬"이라는 말을 인사로 사용합니다.
이 '살롬'은 바로 평화라는 뜻입니다. 평화를 많이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단어가 많다는 것은 그 단
어가 주는 의미의 환경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그 말이 주는 의미의 삶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
해 많이 사용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많
이 사용한다는 것은 사랑이 많지 않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사랑이 많
으면 사랑이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의 행동이 나타나고
있는데 단어가 필요합니까? "웃읍시다" 스마일 운동을 하는 경우가 있
는데 잘 웃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
면 "평화"라는 단어를 인사로 사용할 정도로 많은 것은 그만큼 평화스
럽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인사말은 "밤새 안녕하셨어요" "진
지 잡수셨어요"라고 합니다. 이런 경우에 보면 어떤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밤사이에 안녕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굉음이 들립니다. 하나는 사회의 소리요, 하나는
정치의 소리요, 다른 하나는 국제사회의 소리입니다. 사회학자들이 말
하듯이 21세기는 3不 시대입니다. "불안과 불신, 그리고 불확실"의 시
대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마음에는 내면의 평안이 없습니다. 염려
와 초조와 긴장으로 압박 당합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마음에 평안
이 없고 평안이 없는 인간의 마음들이 점점 악해져서 사회가 평화롭
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문제지만 우리나라에도 평화를 찾아보
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까?. 당신의
가정에는 평화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회사에 평화가 있습니까?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
다. 그는 유머가 남다르고 또 독설도 구사하는데 아주 재주가 많고 유
명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쓴 작은 기도의 시 한편이 있습니다. 이
것은 'War Prayer'라고 하는 것인데, 전쟁의 기도입니다. '전쟁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우리 현대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악
한 심성을 그대로 노출 시켜서 고발하는 그런 내용의 시입니다. 우리
는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전쟁의 기
도"라는 것은 평화의 기도의 정반대의 기도라고 하는 그런 성격을 쉽
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전쟁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하나
님이여 우리의 포탄이 저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피 반죽을 만들어 버
리게 해주십시오.' 이게 전쟁에 나가는 모습이요. '웃음꽃이 피었던
이 들판에 애국자들의 싸늘한 시체로 꽉꽉 메우게 하여 주십시오. 아
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던 과부들의 심장을 슬픔으로 가
득 차게 하여 주십시오. 주여 그들의 희망을 고갈시켜 주시고 그들의
모습을 시들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어떻습니까?

때때로 우리는 이런 심정을 가지지 않습니까? '나를 괴롭히는 사
람, 아주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 사람을 죽이면 살인죄가 되겠으니
못하지. 아주 자취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주변의 귀찮은 사람들 싹 쓸
었으면 좋겠다.' 또 어떤 사람들 보니까 우리 북한을 향해서도 '저 북
한의 못된 놈들 그냥 쾅하고 없어졌으면 좋겠다.' 또 북한에서는 '남
쪽 사람들도 빨리, 아주 깨끗하게 말살했으면 좋겠다.' 서로가 망하기
만 바라고 있어요.

남이 망해야 내가 잘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 눈에 거슬리는 이 사
람들이 다 빨리 없어져야 그래야 세상이 바로 될 거라고, 그리고 평화
가 올거라고 혹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바로 그것이 오늘 이 시
에 나타난 마음입니다. 평화라는 것은 철학적으로 둘로 나누어 생각
합니다. 하나가 '팍스 로마나(Pax Romana)', 팍스라고 하는 의미의
평화가 있습니다. 영어의 Peace라는 말이 라틴어의 팍스에서 온 것입
니다. 단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이 중요합니다. 로마식 평
화, 또 하나는 히브리식 평화! 이것이 다릅니다. 그러면 로마식 평화
가 뭐냐하면은 힘의 철학입니다. 승리가 평화요, 전쟁과 억압과 수탈
과 착취로 다 죽여버려서 평안해요. 전쟁에 나가서 상대방을 다 죽여
버려야 그래야 평화가 있다. 아니면 전부 죽여버린 상태에서, 전부
그 신분을 낮추고 죽은 자처럼 만들어요. 세상을 공동묘지 같이 고요
하게 만들어요. 그 억압 속에 아무도 말을 못해요. 아무 저항도 없어
요. 이것을 노예적 평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조용한 것 같은데 그건
조용한 게 아닙니다. 죽 은 듯이 조용하지만 그건 조용한 게 아닙니
다.

가정도 보면 어떤 남편은 아주 이 팍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 가
지고 그저 뭐 쾅쾅 큰소리 쳐서 그 마누라는 벌벌 기게 만듭니다. 시
퍼렇게 되어 가지고 아이들까지도…… 아무 소리도 못해요. 조용해
요. 물론 이혼도 없어요. 싸움도 없어요. 우리 집은 평안하다. 여러
분 이게 평화입니까? 이런식의 팍스 로마나 타입의 평화를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면에 히브리식의 평화라는 것은 '에리레네'라고도 하고 히브리말
로는 '샬롬'이라 합니다. 이 샬롬의 뿌리는 하나님이 평화의 왕이십니
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될 때에 하나님은 아버지요, 나
는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 그래서 형제가 되
는 거예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기를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고 이웃
을 형제로 그리고 모든 자연과 역사는 하나님의 품과 같이 넓은 가슴
처럼 생각해요. 이것이 샬롬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것 도덕적인
것 정치적인 것 심지어는 물질적인 것까지 통합해서 이것을 샬롬이라
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가장 완전한 평화요, 하나님이 축복으로 우
리에게 내리시는 평화, 그것을 샬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팍스라고 하는 건 인간적 방법이요, 샬롬은 하나님이 이루시
는 방법입니다. 거기에 큰 뿌리가 다른 것입니다. 평화인 것 같으나
평화는 아닙니다. 그건 거짓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사회가 가지고 평
화는 살롬입니까? 팍스입니까?

우리나라에는 평화가 있습니까? 있다면 살롬입니까? 팍스입니까?
요즘 우리 사회는 데모의 소리들이 요란합니다. 데모는 경영자와
근로자들의 기싸움입니다. 요즘은 공무원 노조도 있어서 여러 가지 문
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미국과의 마치 전쟁이라
도 한판 할 것처럼 성난 모습으로 나아가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미군
의 장갑차에 치어 숨진 두 여중생의 사건으로 전국적으로 아이와 어
른 할 것 없이 항의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미국까지 건너가
서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했습니다. 곳곳에서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부시대통령이 우리나라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로 사과를 했다
고 언론으로 인해 보도되었고 어제저녁에는 전국 80여 군데에서 촛불
시위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치는 어떻습니까? 대통령 선거로 인한 후보들간의
뜨거운 설전과 후보를 낸 각 당간의 혈투와 같은 선거 유세는 금방이
라도 이 땅이 두 동강 날 것처럼 무섭게 대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는 평화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원수만이 있습니다. 젊은
세대 와 기성세대 간의 대결, 보수와 진보의 대결, 하층민과 상류증
의 대결, 야당과 여당의 대결, 호남과 영남의 대결 등으로 타협과 화
합의 모양은 전혀 보이지 않고 보든 것이 대결양상으로 치닫고 있습니
다. 이런 선거는 누가 이기든 평화가 깨어집니다. 평화가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팍스와 같은 평화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힘으로
하는 팍스입니다. 경찰국가처럼 경찰의 힘으로 제압하고 평화스럽게
보이는 것이 팍스입니다.

국제사회는 어떻습니까? 평화가 깨어지는 분열의 소리만이 들려옵
니다. 테러의 위협과 테러의 희생, 그리고 보복으로 국제사회는 항상
불안합니다. 평화스러운 것 같아도 들어가 보면 평화스럽지 않습니
다. 지금 국제사회에서 평화를 가장 위협하는 요소로 등장한 것이 이
라크과 북한의 문제입니다. 이라크에서는 일단 무기사찰을 받아들여
서 조사중에 있지만 미국은 할수만 있으면 전쟁을 통해서 무너뜨리겠
다고 합니다. 보세요. 지난해 9월11일 미국 뉴욕을 급습했던 테러범들
을 잡기 위해 아프카니스탄을 공격하여 테러의 주범인 것으로 알려진
빈라덴을 잡기 위해 쓴 돈이 얼마입니까? 그렇다고 거기에 평화가 있
습니까? 그런데도 미국은 최근에 다시 이라크에 선전포고를 하고 있습
니다. 거기다가 엊그제는 북한이 지금까지 국제원자력기구로부터 핵개
발을 할 수 없도록 감시하고 있는 것을 철수하라고 했고 앞으로 핵무
기를 개발하겠다고 했어 우리로 하여금 잔뜩 긴장하게 만들고 있습니
다. 얼마전에는 북한이 미사일 15기를 예멘으로 수출하기 위해 선박으
로 운반되는 것은 공해상에서 나포까지 했으나 국제법상의 아무런 법
적 근거가 없어 결국 풀어주고 말았습니다만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우
리의 마음의 평화까지도 빼앗아 가버립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전운이 감도는 듯한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안되
면 한번 치겠다는 식으로 강수를 띄우고 있으니 우리로서는 두려움이
없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미국까지 이라크에 대하는 태도처럼 한다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 한반도의 이 사회
는 정신차려야 합니다. 사람은 평화를 심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이 심
는 평화는 일시적으로는 가능할는지 몰라도 평화를 지속하기 어렵습니
다.

전부가 무너지는 소리입니다. 갈라지는 소리입니다. 마치 천지 창
조 때처럼 소리가 요란합니다. 이렇게 사회의 소리와 정치의 소리와
국제사회의 소리가 굉음을 이루고 있는데 이 굉음은 곧 부서지는 소리
요, 평화가 깨어지는 소리요, 분열의 소리입니다.
이렇듯 평화가 깨어지는 현상이 왜 일어납니까? 힘의 불균형 때문
입니다. 조화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양
보가 없고 희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힘으로, 즉 팍스로는 안됩니다.
미국이 평화를 만들고 있습니까? 지금 세계를 공포속에 몰아넣는 것
이 누구입니까? 미국입니다. 약소국가들은 다 죽어가도 됩니까? 그래
서 미국의 괴짜장군 패튼은,
"미국이 평화를 사랑한다는 건 거짓말이다. 미국인은 전쟁을 사랑
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구 어디에서건 싸움만 나면 쫓아가서 싸우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싸우기 좋아하는 미국이 세계의 평화를
심겠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현재와 같은 힘으로 유지하는 평
화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팍스로마와 같은 팍스아메리카에 불과합
니다. 힘의 평화를 추구하려고 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우리
는 살펴보아야 합니다.

인류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일 중 하나인 2차 세계대전은 1936
년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삼국동맹체결로 한층 가속화 되었습니다.
이 삼국동맹의 결과로 평화로운 지구 곳곳은 온통 화약냄새와 피비린
내가 진동하는 전쟁터로 화했습니다. 그러나 삼국동맹의 주역들은 모
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먼저 유태인을 600만이나 학살한 히틀
러는 연합군이 한참 독일로 전진해 오던 45년 그의 지휘벙커에서 애
인 엠마 브라운과 함께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극악한 파시스트인 이
탈리아의 뭇솔리니는 45년 연합군에 패전후 국경밖으로 도망하려다 암
살됐습니다. 일본의 동조 천황은 전쟁기에 국민들로부터 거의 신으로
떠받들어지던 이미지를 모두 상실한 채 89년 한 인간으로 돌아와 병
에 걸려 죽었습니다. 전쟁의 악령에 사로잡혔던 세 사람은 결국 그 악
령의 조종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던 것입니다.

인류는 평화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으
로부터 평화는 오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14절에 보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화평입니다. 골로새서 3:15절에도 보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rule)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
강이 나의 마음을 주장하도록 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나의 마
음에 평강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이 사회에,
나라에 세계에 평화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네 영혼을 덮으소서" 할렐루야!
평화가 어디에서 내려옵니까? 예,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그
래서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하늘에서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하리로
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영광이 땅에 임재하실 때는 평화가 찾아왔습
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이 평화하든 나라가 평화하든 사회가 평화하든 세
계가 평화하든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집니
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신 나의 마음에는 평화가 넘쳐야 합니다. 평
화가 임재하면 제일 먼저 해결된 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
이 허물어졌습니다.

14-15절에 보면 "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
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
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
수님이 오셔서 막힌 담을 헐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화평하게 했습니
다. 평화는 선이 없습니다. 국경이 평화를 깨트립니다. 도의 경계가
평화를 깨트립니다. 우리 영호남간의 경계는 얼마나 큰 장애물입니
까? 국론의 분열과 국가의 균형적인 발전의 저해요소였습니다. 보이
지 않는 선이 보이지 않는 평화를 깨트리고 있습니다. 보이는 선이 보
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의 선까지도 그어놓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영
호남은 지역적인 경계임에도 불구하고 그 경계안에 사는 사람이 경상
도 사람, 전라도 사람이라 해서 서로 선을 그어놓고 분쟁하고 있습니
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막힌 담을 헐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서 우리를 화평케 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사는 우리 성
도들은 첫 번째로는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로 막혔던 담이 무너지고 하
나님께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
을 우리는 구원이라 부릅니다. 죄의 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보혈로 허물었습니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했다고 했습니다.
대구시 정책중에 최근에 전국적인 호응을 얻고 고등학교 교과서에까
지 게재될 정도로 좋은 반응을 보인 것이 "담장허물기운동"입니다.
1996년부터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해서 지난해 8월까지 156군데 총 길
이 8,700m의 담장이 허물어졌습니다. 교회들도 동참하는 교회들이 등
장하고 있습니다. "담장을 허물면 이웃이 됩니다"이것이 작은 슬로건
입니다. 우리의 삶의 울타리인 집의 경계를 만들었던 담장을 허무니
이웃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죄로 가리워진 벽을 허물었으니 하나
님이 보이지 않습니까? 십자가로 예수님을 통해서 죄의 담을 제거해
주시닌 하나님이 거하시는 낙원 에덴동산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보입
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허물어 놓은 장벽을 오히려 쌓고 있
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허물어 놓은 장벽을 도리어 쌓고 있는 성도
들,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안으로 들여다 봅시다. 보이
지 않는 담장이 빽빽합니다. 교파만해도 얼마입니까? 이런 교파가 생
겨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잘난 사람들 때문입니다. 의인들 때문입니
다. 성도간의 장벽들도 보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높아졌던 장벽이
무너져야 하는데 도리어 장벽이 높아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자존심, 위신, 체면 등으로 울타리가 쳐진 것입니다.

이런 장벽을 허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나쁜 사람들만 허물
수 있는 장벽입니다. 선한 사람들은 절대로 허물수가 없습니다.
『어느 곳에 이웃해서 사는 두 집이 있었습니다. 한 집은 아이도 없
이 부부 단 둘이 사는 집이지만 밤마다 싸움을 해서 큰소리가 새벽까
지 나는 집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건너집은 부부 보부모 두 아이들
이 함께 사는 집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집에는 웃음이 끊
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노부부는 이웃
집을 찾아가서 그토록 화목한 이유를 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웃
의 아저씨가 웃음을 띠면서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먼저 당신들 집에 싸움이 그치지 않는 이유는 두분 모두가 착한 사람
(?)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집에 싸움이 없는 이유는 나쁜 사람
들(?)만 모여 살기 때문입니다. 가령 내가 방 한가운데 놓여 있는 물
그릇을 모르고 발길로 차서 엎질렀다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부주의해서 이렇게 되었군요' 그러면 아내는 '빨리 치우지 못
해 죄송해요'라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립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나이
살이나 먹은 내가 보고도 못본채 했으나 내가 잘못이구나'라고 말씀하
십니다. 모두가 자진해서 나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죠. 그렇게 잘
못은 자신에게 도리고 잘된 일은 다른 사람 덕분이라고 서로 칭찬하다
보면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게 되었답니다"
이 말을 들은 부부는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여자가 물그릇
을 아무데나 두면 어떻게 해" "지금 누구 탓을 하는 거예요? 자기가
잘못했으면 빨리 치우거나 할 것이지. 꼭 남 핑계 대고 있어. 어휴 지
겨워" "아니 이 여자가 남편한테 꼬박꼬박 말대꾸야"』

사실은 예수님도 스스로가 나쁜 사람이 도셨습니다. 그래서 죄물로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을 자신의 허물로 뒤집어쓰
고 죽으신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나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자신을 나쁜 죄인을 만들어
죽으실 때 우리와 하나님 사이가 회복되었듯이 우리 모두 이웃간에 성
도간에 교파간에 모든 벽을 허물도록 합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벽을 허물기 위해서였습니다.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벽이
없어지지 않고는 평화롭게 살 수 없습니다.
지난 96년에 남창수씨는 개인적으로 처음 담장을 허물었는데 처음에
는 범죄와 사생활 침해 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마
찬가지로 우리가 처음에 다른 사람을 수용하기 위해 마음 문을 열고
나서면 별의 별 생각을 다합니다.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닌가?'
다른 사람들이 나보고 '속도 없는 사람이라고 조롱하지는 않을까' '오
히려 나의 뜻을 무시하고 나를 무시하지는 않을까'등의 우려가 있지
만 마음을 열면 좋은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
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
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왕이건 백성이건 자기 가정에서 평화를 발견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
한 사람이다." ⇒ 괴 테
성경에 예레미야 29장에 보면 "너희는 어는 곳에 가든지 그 성읍이
평안하기를 위하여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
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회사에 근무합니까? 그 회사가
평안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해요. 그래야 여러분이 평화로운 거예요.
어느 가정에 있습니까? 가정이 평안해야 여러분에게 평안이 있는 거예
요. 우리 교회에 오셨습니까? 이 교회가 평안하기를 위해 힘도 쓰고
기도해야 해요. 그래야 여러분에게 평안이 있는 거예요. 또 주의 종들
에게는 마태복음10장에 보면 어느 집에 심방하든지 그 집에 들어가서
평안하기를 기도하라고 했어요. 이 집에 평안을 주시옵소서. 주여 이
집에 평안을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라는 거예요. 왜? 평안이 제
일 귀한 선물이니까.

세상에 촛불시위가 없고 경찰이 나가 막는 일 없고 붉은 띠 머리
에 두르고 머리 빡빡 깍고 험상궂은 모습으로 대결양상으로 치닫는
일 없고 '당신이 잘못했다고 당신이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없
이 모든 것은 나의 책임이야 하고 평화를 심는 삶이 되도록 합시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받아 평화를 이땅에 심는 성탄절이 되도록 합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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