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께 합당하게 살려면 / 엡 4:1-3

  • 잡초 잡초
  • 492
  • 0

첨부 1



본 문 : 에베소서 4:1-3 절 
제 목 : 주께 합당하게 살려면
설 교 : 백장흠 목사(독립문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 옆에 누가 있는지 살펴 보세요. 교회에서 하는 말, 모르는 사람과 같이 앉아서 서로 친해지도록 하라고 하지만 그래도 실천하지 않습니다. 자리에 앉았다가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조금 불편함을 느낍니다. 평소에 친절하게 지내던 사람이나 잘 아는 분이 있는 곳에 앉고 싶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108가지 고통 중에 하나가 미운 사람과 함께 사는 고통이라 하였습니다. 일을 해도 자기 마음과 맞는 사람과 같이 하기를 원한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예수와 함께 살아야 하고 이후에 영원한 천국에도 같이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우리 주님과 마음이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께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게 된 게 전적으로 주님의 부르심 때문입니다. 신앙 안에는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게 나의 의지라고 생각하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부모를 통하여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나는 예수를 모르고 살았는데 부모가 예수 믿음으로 나도 믿게 되었다는 겁니다. 어떤 사업의 실패나 육신의 질병으로 예수 믿게 된 분들은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이 나의 나 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나를 부르신 게 은혜입니다. 예수 믿게 된 게 큰 은혜입니다.

왜 부르셨습니까?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영원한 하늘나라 백성을 삼으시려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입고 예수 믿는 사람은 천국백성이 됩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부르셨습니까? 주의 일을 하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 이 몸 바쳐서 이 몸 바쳐서 주만 위해 사르렵니다.’ 부르심에 감격한 사람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나는 주님이 부르셨습니다. 이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부르셨습니다. 구원해 주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축복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르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게 바로,


1. 겸손하여야 합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교만하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리고 겸손해서 손해 본 사람이 있다는 말도 들어볼 수 없었습니다. 세상 직장이나 사회에서는 똑똑한 사람을 찾습니다. 다른 이 보다 많이 알고 분명한 사람이 좋습니다. 잘 나고 똑똑한 사람이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 앞에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즈음 가정에는 입지 못하는 옷이나 가구가 있습니다. 그게 예전 가난한 시절에 살던 사람이 보면 참으로 좋은 물건들입니다. 그러나 좋은 것 하고 필요한 것과는 다릅니다. 좋지만 필요하지 않기에 버립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겸손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주께 합당하게 사는 겁니다. 겸손한 사람은 누구라도 좋아합니다. 교만하면 외롭습니다. 대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겸손하면 평화를 가져 옵니다.

근자에 미국 사람들에게 항의하는 시위를 합니다. 미군 병사가 우리나라 여중생을 죽였답니다. 고의가 아니었을 겁니다. 그들이 ‘무죄’라고 하는 자기들끼리의 재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야단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간접으로 사과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무엇을 발견합니까? 겸손이 빠졌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그들의 문화는 쉽게 “Excuse Me.” “Sorry” 라는 말을 하면서도 정작 책임질 일이 있으면 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린 생명이 죽게 되었을 때에는 ‘이 말을 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입니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보아도 ‘이건 심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에 여기에 동조하게 됩니다.

죽은 여중생들의 부모가 하는 말입니다. “이제는 미군이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희생자 가족 앞에 엎드려 빌 때까지 용서하지 않겠다.” 라고 하였답니다.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희생자 가족과 국민 앞에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였더라면 대통령까지 나서지 않아도 될 것을 지금은 간접으로 대통령이 사과한다고 해도 안된다는 말입니다. 돈 2억원을 주면서 “무죄” 그런다고 누가 그것을 용납합니까? 돈 없이도 겸손히 사과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목회하는데 여름철 수련회에 아들 하나밖에 없는 집, 그 중학생이 익사했습니다. 목사님이 그 집에 가서 사과하고 같이 울었답니다. 밤을 새우며 우니까 그 부모가 하는 말이 “목사님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우리 아이가 잘못해서 그런 일이 생겼고 다 팔자소관 아니겠습니까?” 그러더랍니다. 겸손하면 화평하게 됩니다. 가정에서도 겸손하여야 합니다. 단체생활도 겸손하여야 합니다. 신앙공동체 안에서도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얼마나 착합니까? 그런데 교만하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겸손하면 자기 자신을 낮춥니다. ‘주 앞에서 스스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높이시리라’(약4:10) 라고 하였습니다. 겸손이라는 단어가 Humility 인데 낮은 것을 뜻하는 라틴어 Humilis 즉, 땅(Humus)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후므스’ 이게 겸손입니다. 땅은 제일 낮은 곳입니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짐승들도 밟고 지나갑니다. 그래도 말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입니다. 쓰레기도 시체도 땅 속에 묻습니다. 모든 것을 용납한다는 말입니다. 땅은 모든 것을 썩게하여 새로운 생명력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쓰레기로 새로운 풍요로움을 남겨줍니다. 이게 겸손이라는 말입니다. 땅바닥에 엎드리는 자세를 갖는 것이 겸손입니다.
자기 자신이 낮아지면 상대적으로 다른 이는 높아집니다. 내가 높아지면 다른 이가 낮아집니다. 이 마음이 예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탄을 기다리는 대강절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모시고자 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덕 중에 덕’이 ‘겸손’이라고 하였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살면 싸울 일이 없어집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봉사하여야 합니다. 겸손이 그리스도인의 생명입니다. 겸손한 자세로 말씀을 들으면 은혜가 됩니다. 겸손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반성하여 보아야 합니다. 내가 혹 교만하게 행동하지 않았던가? 겸손하면 자기 자신이 편안합니다. 자기에게 기쁨이 옵니다. 잠언22:4절에는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 합당한 사람, 겸손의 사람이 됩시다. 하나님께서 왜 무디를 사용하였을까? 이유는 겸손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도 겸손하였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사도’라고 하다가 ‘성도 중에 적은 성도’, 나중에는 ‘죄인 중에 괴수’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겸손하였기에 주께 합당한 사람으로 일생을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배우려고 합니다. 아는 체 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체 하면서 더 잘 배우려고 묻기도 하며 좋은 것이 있다면 찾아갑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추월할 수 있습니까? 자꾸 배우는 사람은 발전합니다. 더 겸손합시다. 겸손한 사람이 주께 합당한 사람입니다.


2. 온유라고 하였습니다.

온유라 하면 우리가 짐작되는 뜻이 생각납니다. 부드러움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이해심, 깊음, 혹은 정중함이라고도 번역됩니다. 온유는 중용지도입니다. 치우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본능적인 욕구 등을 스스로 자제하는 덕성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면서 ‘그들이 바로 땅을 차지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온유하면 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중국의 고사에 인생의 참된 도리를 깨달아 알고자 하여 유명한 스승을 찾아 나선 이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깊고 높은 경지에 도달한 도인 스승을 만났습니다. 스승은 날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아니하고 매일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만 합니다. 결국 이 선비는 인생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 때 이 사람은 깊은 것을 깨닫고 고맙다는 인사를 수없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게 바로 치폐설존이라고 하였습니다.
입 안에는 사람에게 절대 필요한 두 가지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는 치아입니다. 그 곳으로 음식을 씹습니다. 이는 튼튼합니다. 그리고 혀 바닥을 물리기도 합니다. 혀는 약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무슨 소문을 들을 때에 혀가 썩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을 겁니다. 이는 썩습니다. 이는 부러집니다. 그러나 혀는 부러지지 않습니다. 왜요? 부드럽기 때문입니다.

이는 빠지지만 혀가 빠졌다는 말은 들어 본 일이 없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이들이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적이 없습니다. 다른 이들이 미워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때로는 무능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다른 이들이 좋아합니다.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태풍이 불면 나무의 가지들이 찢겨 나갑니다. 그런데 버드나무 가지가 부러졌다는 말은 없습니다. 바람이 세게 불어도 부러지지 않는 이유는 부드럽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이들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싸우지 않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인정 받은 부분이 ‘바로 그는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더라’ 하셨습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강한 짐승은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구상에서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존하려고 사람들이 애를 씁니다. 그러나 약한 동물은 많이 존재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다.

힘을 빼고 순하게 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운동하는 선수들에게 당부하는 말이 있습니다. 힘을 빼라고 합니다. 그래서 골프하시는 분들이 하는 말, 힘을 뺄 수 있으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너무 힘이 들어갑니다. 말에도 힘이 들어갑니다. 같은 일을 해도 힘이 들어간 상태에서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힘을 뺀 성숙한 사람입니다. 부드러운 사람은 건강한 사람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드럽습니다. 허리도 부드럽고 팔, 다리도 유연합니다. 살도 부드럽습니다. 나이가 많아지면 어떻습니까? 굳어집니다. 넘어지면 부러집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굳어갑니다. 마음도 생각도 굳어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부드럽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됩시다.

존 번연이 말하는 대로 엎드린 자는 넘어질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잃을 것도 없습니다. 자신을 변호하거나 변명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화를 내지도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미 회개하였고 사람들 앞에서도 수요하는 자세를 갖기 때문입니다. 이런 온유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합당하게 사는 겁니다. 부부가 온유한데 부부싸움을 하겠습니까? 한 편만 부드러워도 평화롭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진실합니다. 정직하기에 용기가 있습니다. “주여. 온유한 마음을 주옵소서.” 이게 주께 합당하게 사는 방법이요, 복 있는 삶이 됩니다.


3. 인내라고 하였습니다.

오래 참음은 죄인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사람을 대하듯이 했더라면 우리는 이 세상에 남아있지 못했을 겁니다. 수없이 잘못 살고 있습니다. 범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래 참으심으로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 중에 네 번째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직 하고 좋은 사람인지 아십니까? 일시적으로 친절한 사람도 좋은 사람입니다.

일찍이 진시황의 아버지 ‘여불위’라는 사람은 사람을 판단할 때에 방법이 있는데 ‘6험론’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폈습니다. 재능이나 용모만 보고 선택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하면서 이것과 관계없이 원리가 있는데 그 하나는, 사람이 즐거울 때 그 즐거움에 얼마나 빠져드는가 하는 것이랍니다. 즐거움이 있을 때에는 마음껏 즐거워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다 즐거워 하는데 자신은 반대로 괴로워 한다면 문제 인물입니다.

]둘째는, 기쁠 때에 얼마나 자제할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나는 기쁘지만 다른 이들을 생각하여 자제할 수 있어야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일류대학에 합격하여 좋아할 수 있는데 옆집 아이가 삼수를 하게 되었으니 절제하면서 위로해 줄 수 있는 이는 훌륭하다는 겁니다.

셋째는, 괴로울 때 잘 참을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다른 이들은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데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잘 견디는 사람, 이런 이가 위인이랍니다. 참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참지 못하여 문제 인물이 됩니다. 말을 참아야 화평하게 됩니다. 성질을 참아야 합니다. 화가 나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참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참지 못하여 부부간에 사소한 싸움을 하고 헤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후회합니다. 참는 것을 못하여 차를 타더라도 급행이 아니라 직행, 그것도 초특급이 있어야 합니다. 중국의 만만디 하는 사람이 한국 자동차가 무섭게 달리는 것을 보면서 갈 땅도 없는데 어디를 그렇게 달리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고 합니다. 이는 인내심이 부족한 조급한 우리의 민족성을 비꼬는 말입니다. 편지를 부쳐도 등기로, 빠른 우편으로 해야 합니다. 이런 사상이 교회 안에 들어와 설교도 20분 이내에 은혜를 끼치는 목사님이 훌륭한 목사이고 예배 시간을 한 시간 이상 걸리는 목사님은 자리가 위태로워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기다릴 줄도 알고 인내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는 것을 보면서 “너희도 길이 참아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그러면서 욥의 인내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길이 참아야 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참지 못하고 성격대로 말 해 놓고 후회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인내하면서 삽시다. 이게 부름 받은 성도의 합당한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4. 사랑 가운데서 용납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4:2) 상대방을 용납하여 준다는 것이 말로는 쉽습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머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지혜나 지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배가 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주장한 게 유물론자 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인 ‘푸로이트’는 리비도(Libido) 즉, 성적 본능이 지배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강력한 지도력은 가슴이라 하였습니다. 즉,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처럼 강한 게 어디 있습니까? 사랑할 수 있어야 용납이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대로 ‘주께 합당한 사람인가?’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남을 쉽게 용서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징기스칸은 거칠고 투박한 성격에다가 비겁하거나 야비하지 않는다는 게 칸의 정신입니다. 끝없이 빼앗고 죽이고 부수어 대는 싸움터에서 평생을 보내야 했던 징기스칸이 적에게 자기 아내를 약탈 당한 것입니다. 적에게 자기 아내를, 그리고 침대와 베게를 내주게 되었습니다. 징기스칸은 그들과 전쟁을 벌입니다. 이번에는 징기스칸이 이겼습니다. 자기 아내를 다시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만삭이 되었습니다. 적의 아이를 품어서 배가 태산 같습니다. 얼마나 기막힌 상황이었겠습니까? 자기 주변에 있는 가까운 참모들이 아내를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징기스칸은 자기 아내를 지켜주지 못한 자기가 책임이 있다고 울었습니다. 심정으로만 용납한 게 아니라 진정으로 용납하였습니다. 그 여자가 낳은 아이가 생겼습니다. 아이를 낳았습니다. 자기 아내가 낳은 아이 이기에 자기 자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행동이었습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그리스도 인입니다.

주께서 용납하여 주시지 않았더라면 이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 땅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부모님이 나를 용납하여 주었기에 살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분위기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헬렌 니어링이 지은 ‘조화로운 삶’이라는 책에서 조화되는 삶의 원칙을 쉽게 풀어서 말하였습니다.

첫째는 웬만하면 오전에는 전화하지 말라. 바빠도 영적인 삶이 귀중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라.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나에게 고마운 사람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자꾸 나쁜 것만 생각하면 자기 자신이 사랑하는 방면으로 생각하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돈을 버는 데에도 버는 것에만 쏟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사업을 해도 사업에 미치지 않게 하라. 성공도 실패도 별게 아니고 사업을 끝낸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으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다른 이를 생각해 줄 수도 있고 그를 이해하여 주고 용납하여 주는 게 주께 합당한 사람입니다. 그때 향기가 납니다. 사랑하며 용납하면 아름다워집니다. 사랑으로 용납합시다.
이때 어떠한 역사가 나타납니까?

그 때 일치 됩니다. 하나 됩니다. 우리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한국이라는 나라가 둘입니다. 하나는 남조선이고 다른 하나는 북조선이라는 이름 때문입니다. 한국은 아주 적은 나라 중국 지도에는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중국의 학생들은 한국을 알지 못하고 중국의 남쪽에 있는 적은 섬으로 아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적은 나라가 무엇이 넉넉하여 나누어 둘이 되었답니까?

하나 되어야 합니다. 지구상에 무섭게 성장하는 이단 무리가 있습니다. 무슬림입니다. 그들은 교파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세력확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난 세월 중에 쓸모없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였습니다. 이제는 일치되어야 합니다. 주께 합당한 생활을 하면 하나 됩니다. 그 때 힘이 있습니다. 승리하게 됩니다. 자랑감이 됩니다. 잃어버린 일이 있어야 소중함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에 많은 것을 잃었었습니다. 일치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깊은 상처를 안겨준 게 무엇이었습니까?

하나 되어야 합니다. 일치되는 비결은 주께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겸손이요 온유함입니다. 그리고 오래 참음이며 사랑 가운데서 용납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대로 살아 주께 ‘합당하게 살았다’라고 주님께로부터 인정받는 복 된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