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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즐거운 삶의 행진을 위하여 / 신 1: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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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즐거운 삶의 행진을 위하여
본 문 : 신 1:19-33
설 교 : 장희종 목사 (명덕교회)


19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호렙산에서 발행하여 너희의 본 바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아모리 족속의 산지길로 가데스바네아에 이른 때에 20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모리 족속의 산지에 너희가 이르렀나니 21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22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회보케 하자 하기에 23내가 그 말을 선히 여겨 너희 중에서 매지파에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매 24그들이 앞으로 가서 산지에 올라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그곳을 정탐하고 25그 땅의 과실을 손에 가지고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우리에게 회보하여 이르되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좋더라 하였느니라 26그러나 너희가 올라기기를 즐겨 아니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여 27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고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붙여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28우리가 어디로 갈꼬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로 낙심케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29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30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1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여Trj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32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33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1600km를 여행한 끝에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습니다. 그러나 최악의 날들은 이제 끝이 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이제 승리의 문턱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려면 위험한 아모리 족속의 땅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에 대한 훈련이 되어있지 않은 그들은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긴 여행에 몸은 지쳐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전쟁을 하게되면 패배하게 되리라고 하는 생각에 겁을 잔득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자손에게 위기였습니다. 아모리 족속의 군대가 강해서 이들에게 위기가 아니라 심신이 지쳐버리고, 할 수 없다고 고하는 좌절 의식과, 전쟁을 하면 다 죽는다고 하는 이 두려움이 이들에게 위기인 것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 나아가는데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두려움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이스라엘자손들이 경험한 사건이지만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도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롬15:4).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즐거운 삶의 행진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미래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기억해합니다.
21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에 취해야 할 땅을 우리 앞에 두셨다고 했습니다. 아직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지만 미래에 소유하게될 땅을 하나님이 우리 앞에 놓아두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미래는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사상은 구약의 선지자나 신약의 사도들도 강조한 사상입니다 예레미야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29:11)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래에 그의 백성에게 재앙이 아니라 평안과 소망을 안겨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려줍니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1:8)고. 우리의 주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를 통치하시며, 우리를 다스릴 뿐 아니라 앞으로도 동일한 권위와 능력으로 다스리실 분이심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미래는 우리의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심이 없는 우리의 미래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오늘이 있음은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미래가 주어졌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우리 혼자서 미래를 직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도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시고 역사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의 하나님이심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처럼 미래에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하고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우리의 미래가 두려워 지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21절에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말씀을 붙들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너희들의 열조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늘 너희들의 하나님이니 그 말씀을 너희도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례 길 걸어가는 우리에게 위로와 힘이 되도록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의 갈 길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약할 때 힘을 주고, 주저할 때 용기를 주는 하늘의 양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풍성한 보배로운 약속이 있습니다. 성도들이여! 순례길 가는 길에 두려움이 오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옛적 우리선배들에게 주셨던 그 풍성한 약속의 말씀은 오늘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미래를 전망하는데 마음의 창에 두려움의 안개가 끼이거든 하나님의 말씀으로 두려움의 안개를 끊임없이 제거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셋째, 미래가 어두워 안보일 때는 뒤를 돌아보라는 말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을 "너희 열조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열조란 앞서간 신앙 선배를 두고 한말입니다. 미래가 불확실하여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는 지난날 신앙선배들의 역사 속에서 함께 해주셨던 하나님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지난날 여호와께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감싸시고 인도하셨던 그 신앙 조상들의 역사를 회고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성경 속에서 신앙 열조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돌아보십시다. 엘리야를 생각해보십시오. 로뎀나무 아래서 좌절하고 있을 때 까마귀 편에 물과 떡을 보내어 먹게 하시고 기력을 얻게 하여 그가 할 일을  계속하게 하셨던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고민하고 슬퍼"하시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마66:38) 하나님의 사자를 하늘로부터 보내셔서 예수님에게 힘을 돕게 하셨던(눅22:43)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음으로 기독교 이천년 역사속에서 하나님이 신앙선배들에게 행하신 일을 봅시다. 16세기 영국 종교개혁에 크게 영향을 미쳤던 라티머(Hugh Latimer1490-1555)는 사회의 부패와 부정을 비난하고 로마교의 연옥설과 비 성경적인 성자숭배를 혹평을 하다가 파문 당하고 수감되었습니다. 그리고Cranmer, Nicholas Ridley 함께 옥스퍼드에서 1555년에 화형을 당한 개혁자였습니다. 화형대의 불길에 휩싸여 타 들어가면서 외쳤던 그의 순교일화가 교회사에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자기 뒤에 세워진 기둥에 묶여서 불에 타고 있던 젊은 리들리가 비명을 지르자 Hugh Latimer는 큰 소리로 외칩니다. "리들리! 두려워하지 말고 대 장부 다워라! 오늘 우리 하나님의 은혜로 악의 세력이 영원히 끌 수 없는 불을 밝히고 가자!"라고 외치면서 장렬한 순교를 한 것입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담대하고 용감하게 했습니까? 그 때 그들과 주님이 함께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고요한 바다로 향해하던 큰 풍랑일어나 위기에 처하든 우리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심을 믿읍시다.

  하나님은 시대 시대마다 그의 택한 백성을 도우시는 일에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이제 나를 도와주지 않으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다윗은 지난 과거를 회상하며 오늘 나를 도와주실 하나님을 확신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편에 계시지 아니 하셨더면 그 때에 저희의 노가 우리를 대하여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그때에 물이 우리를 엄몰하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잠갔을 것이며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잠갔을 것이라"(시124:2-5).

  이렇게 과거를 회상할 때 회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는데 앞이 보이지 않고 망망할 때 는 뒤를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지난날 우리의 신앙선배들을 어떻게 하나님이 인도하셨는지를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두려움이 올 때 하나님의 자비하신 손길을 의식해야합니다.
  이제 22-25절까지 읽어봅시다.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회보케 하자 하기에 내가 그 말을 선히 여겨 너희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매 그들이 앞으로 가서 산지에 올라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그 곳을 정탐하고  그 땅의 과실을 손에 가지고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우리에게 회보하여 이르되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좋더라 하였느니라"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이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두려워하기 때문에 선발대를 보내자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 제안을 받아드리고, 각 부족마다 한 명씩 선발하여 12명을 보냅니다. 12명의 선발대는 그곳의 볼거리와 이야기 거리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보고하기를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좋더라"(25)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용기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 그곳의 볼거리와 이야기 거리를 가지고 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백성들이 자기를 신뢰할 수 있도록 물증을 가지고 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받을 축복에 대해서 현재의 보증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주저하거나 망설일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열조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쁨으로 올라가서 취하면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연약하심을 아시기에 그들이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자비의 손길을 그들에게 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체질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주저하는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폭군처럼 시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지도 않으면서 위험한 일을 하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미래에 놀라운 복을 주시기 위해서 오늘 우리에게 펴시는 자비의 손길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을 의식하며 용기 백배했던 것입니다. 시편 3편을 보십시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꺽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미래의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거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생각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쉽게 좌절하는 존재임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늘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두려워 말라"(21)라고 격려하신 것입니다. 말씀으로 격려해주실 뿐만 아니라 자비의 손을 펴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저하고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주저하지 말고"일어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들라고 일어나 기쁨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에게 말씀하시고 함께 해주셨던 우리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신1:21-22) 

  두려움 없이 즐거운 삶의 행진을 하기 위해서는 미래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신실하신 말씀을 끊임없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움과 어둠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몰려오거든 지난 신앙의 역사를 되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지금 당신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을 의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백성을 때를 따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돌봐주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처해 있는 모든 환경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과 처지에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이스라엘은 이적 적으로 애굽에서 해방되어 홍해를 마른처럼 건넜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그리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돌보심입니다. 하나님의 이적 적인 돌보심으로 그리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지 2달쯤 되었을 때 엘림과 시내산 중간쯤에 진을 쳤습니다. 이때 애굽에서 가지고 온 모든 음식이 다 떨어져 먹을 음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불평하기를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3)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이들을 관대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 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출16:4)

  하나님은 그이 종에게 말씀하신 대로 매일 아침 이들에게 만나를 비처럼 풍족하게 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원망하니 못 이겨서 만나를 내려 주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평과 원망에 못 이겨서 무엇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주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여 내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겠다고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신실히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약속대로 인도해 가시는데 이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도록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광야에 있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광야에는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이 메마른 땅에서 씨를 뿌리고 추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이들을 돌보시며 하늘로부터 하늘의 양식을 비같이 쏟아주신 것입니다.

  엘리야의 경우에서도 그 사실을 봤습니다. 은둔하고 있는 엘리야에게는 까마귀를 시켜서 먹을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사렙다의 과부의 경우는 하나님의 사람을 대접하는 동안 양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을 이처럼 그 형편에 따라서 이적 적으로 돌봐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의 백성을 어려운 때에 이적으로 돌봐주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그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벳세다 들판에서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만나로, 메추라기로, 반석의 물로 기르신 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광야 같은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보통의 방법으로는 살아갈 수 없고 생의 위기를 만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건강의 위기, 경제적 위기, 가정의 위기, 직장의 위기, 우리의 힘으로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우리의 주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형편을 지금 알고 계신다는 것을 굳게 붙드십시오. 그 분은 우리의 형편을 아십니다. 우리가 당한 특별한 환경에서, 그 분의 특별한 방법으로 도우실 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이적적인 방법으로 돌보시는 목적이 있습니다(신8:3).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신8:1-5).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편적인 방법으로 돌보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수5:10-12을 보십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쳤고 그 달 십 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삶의 환경이 갑자기 변화된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와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했습니다. 이들은 광야에서 씨뿌리고 추수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이들을 돌봐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매일밤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아침에 일어나 장막 주변에 내린 만나를 주어다 요리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런 이적 적인 방법으로 돌봐 주시지 않으셨다면 한 사람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그치고 요단강을 건너 약속한 땅 가나안에 들어선 것입니다. 가나안은 광야가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추수할 수 있는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곳에 도착하여 유월절을 지켰고 그 다음날 그 땅의 소산물을 먹게 되었다고 알려줍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농사를 짓지 않고도 살 수 있었습니다.매일 아침 일어나 진 중에 널려진 만나를 거두어다 요리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가나안에 들어와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그 다음날 아침에 만나를 거두러 나갔으나 만나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던 만나가 이제 그쳐버린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은 이들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가 아니고 일반적인 방법으로 돌보심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초자연적 방법으로 돌보시는 것은 아닙니다. 초자연 적인 방법은 광야에서 필요한 방법입니다. 농사지을 수 없는, 일할 수 없는 환경에서 돌보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났습니다.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씨를 뿌리고 추수할 수 있는 환경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초자연적인 돌보심이 필요치 않은 곳입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에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40년 동안 계속 되어 오던 이적이 그친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리던 만나가 그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더 이상 초자연적인 식물을 받아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노동을 하고(땀 흘린 결과) 추수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굳게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사람을 일반적인 방법으로 돌봐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주심으로 돌봐주셨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도착해서 그 땅의 소산을 먹은 다음날부터는 만나를 내려 주시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방법을 통해서 식물을 주시고 땅에서 나는 것으로 먹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시대를 열어 가실 때는 이적과 기사로 역사 하십니다. 천지 창조 사건은 놀라운 것입니다. 말씀으로 하늘과 바다, 육축과 식물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육일 후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이적이 그칩니다. 그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이 자연적인 방법에 의해 운행되고 보존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 사건부터 광야 40년 동안은 하나님의 이적적인 돌보심에서 살아 왔습니다. 이제 그 이적 적인 방법이 그치고 새로운 방법으로 그들을 돌보심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들의 일터에서, 들에서, 농장에서 그들과 함께 해 주심으로 그 결실로 살아가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이 만나 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충격적으로 경험하여 배운 것인가? 저 광야 생활에서 만나를 주시던 하나님께서 이제 이 가나안에서는 파종할 땅을 주시고 추수 할 수 있도록 이른 비 늦은 비를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들은 이적 속에서만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한 자연 속에서도, 땀흘리면서 일하는 농장에서도, 하나님이 거기에 함께 계심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필요할 때 이적 적인 방법으로 그의 백성을 돌보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돌보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들이여! 하나님은 강물이 갈라지고 이적이 일어나는 요단 강에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요히 흐르는 시내 물에서도 하나님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가 있는 곳에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수고하고, 땀 흘리는 그 곳에도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창조동산에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사랑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느끼면서 즐거워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성도들이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변함없는 사랑으로 돌보신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만나로 살아왔습니다. 이들은 다 광야에서 태어나, 만나만 먹고 산, 만나 세대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광야를 지나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 여리고 들판 길갈에 왔습니다. 이 곳에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 땅의 소산을 먹고 잠을 잤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 만나를 거두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보니 만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이제 굶어 죽는가보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니 아침 햇빛에 황금 물결을 이루고 있는 곡식 밭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돌보시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돌보시던 방법을 회수하실 때는, 다른 방법을 준비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어떠한 경우에도 낙심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심을 믿읍시다.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 삶의 환경이 바꿔진 현실을 주님은 아십니다. 대학 캠퍼스에서 사회로 당신의 삶의 환경이 바꿔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주님이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백성을 때로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때로는 자연적인 방법으로 돌보시고, 먹이십니다.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앞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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