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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사람/ 행 22: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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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하나님의 사람
본 문 :  행 22:22-30


사도 바울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마귀에게 속한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삽니다. 그러나 마귀에게 속한 사람은 썩어질 세상을 위해서 삽니다.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에 따라서 그의 소속과 존재양식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께 서 그를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이 세상 어디서나 환영과 존경과 사랑과 지지를 받음직 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에 어디를 가든지 필요한 존재일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 적으로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환영받고 존경받아야 할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에서 미움받고 추방되고 처형까지 되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간신은 나라와 민족에게 해독을 끼치는 자로서 땅 위에 있어서는 않될 사람이요, 충신은 국가와 민족에 크게 공헌하는 사람으로써 땅 위에 없어서는 않된 사람이건만 간신은 환영받고, 충신은 제거당하는 것이 고금의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없어야 할 악한 사람은 공신처럼 떠받들면서 떠받들어야 할 하나님의 사람은 원수처럼 배척을 당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과 인류 구원을 위하여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군중들은 노도처럼 외치고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상한 일입니다. 도대체 어째서 이모양일까?
땅의 사람과 하나님의 사람의 존재양식의 차이 때문에 야기되는 혼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의 존재양식은 어떤 것인가?


1.신 의존적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 수 밖에 없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본질적인 면에서 그렇고 다른 하나는 실제적인 면에서 그렇습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되 흙으로 형체를 만드시고 그 속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매 비로써 사람이 된 것입니다.
창2:7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신 의존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생기란 바로 신적인 요소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께 속하였으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낳아 내게 속한 자녀는 언제나 그 부모를 의지하며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남의 부모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3:11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사모하며 그를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은 생활과정에서 항상 당위성과 가능성의 불균형에서 생기는 갈등과 고민을 안고 살게 되는 것입다. 여기서 인간의 한계성과 불완전성과 죄악성을 어느정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양심적으로 자기 의존이 될 수 없고 전능자의 손을 의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 의존적 사람은 말씀과 성령이 그의 마음속에 역사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외하기 때문에 무신론자가 될 수 없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게 되므로 배은 망덕자가 될 수 없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게 되므로 반항자가 될 수 없고,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봉사하게 되므로 패역한 자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전형적인 대표자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갈1:24에서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고 했고, 빌1:20절에서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그리고 고전10:31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언젠가는 이런 고백과 헌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에 속한 사람은 항상 자기 의존적입니다. 저들의 존재양식은 로마서 1장에서 지적한 대로 그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자기 마음대로 행한다고 했습니다.
롬1:28절에 보면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자들은 자신의 지식을 의지하고, 돈을 사랑하며, 자기 생각에 필요한 우상을 섬깁니다. 이들은 신의 지배를 받기는 커녕 신까지 지배하려고 대드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교만하고, 불순종하며, 모든 악과 더러운 것과 불의와 불법에 대하여 무감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술과 담배와 마약으로 자기의 양심을 잠재우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세상에 속한 사람의 생활양식이 전혀 다른 고로 자기 의존적인 인간들이 신 의존적 하나님의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 사람으로부터 환영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그들의 생활양식을 따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령 미움과 박해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신앙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남들이 좋아하건 말건 하나님의 계시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2.예언자 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가 예언자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벧전2:9절에 보면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딤후4:2절에 보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과 그의 복되신 말씀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받아 전할 우리들은 모두가 예언자적인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어디든지 가라는 곳으로 가서 무엇이든지 외치라는 대로 외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상대방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가 권력이 있건 없건 상관이 없고, 재산이 많건 적건 알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그것을 전하는 일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런데 세상엔 죄악이 관영합니다. 롬3:10절에 보면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하여 말하면 듣기를 싫어합니다. 세례 요한 경고를 듣기 싫어한 헤롯처럼 세상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죄를 고발하고,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기 때문에 교만한 심령들은 언제나 듣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사람의 비위만 맞추어주어야 할 것입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갈1:10절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있게 하시고, 부르시고, 사명을 맡기시고, 여기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만 전생애가 봉헌 되어야 할 것입니다.


3.천국 지향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현제 혹은 차세 지향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것에 집착하는 과거 지향적이며, 물질만 절대시하는 물질 지향적이며, 외형만 치중하는 외형 지향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차세적인 것에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과거가 아무리 찬란해도 뒤를 돌아다 보지않고 앞을 향해 전진하는 미래 지향적이며, 물량적인 것이 아무리 방대해도 이를 자랑하지 않고, 얼마나 많으냐보다는 얼마나 옳으냐를 추구하는 의미 지향적이며, 외양이 아무리 화려해도 그것 부러워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내면적인 충실을 중시하는 내면 지향적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높고자하고, 크고자 하여 애쓰고 또 그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서 세상에서는 만물의 찌끼가 되를 주저하지 않는 것입니다.
크고자 하는 자는 작아지고,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존재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차세를 넘어서 내세 지향적인 것입니다.

경기자가 중간에 잘하다가 마지막 꼴인 지점에서 넘어지면 무순 소용이 있습니까?  비록 중간에 뒤지다가도 마지막에 일등으로 들어올 때에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
과거가 아무리 화려하고 다음 세대가 아무리 발전한다 할찌라도 하나님의 심판때에 지옥가면 그 인생처럼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을 연행한 천부장이 바울을 심문하기 위해서 가죽 줄로 매고 치려고 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이소리를 들은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사람이냐 내게 말하라' '그러하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의 시민권을 소유한 자임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외형적인 것에 치중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확대에 최대한의 지혜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인 자기보다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부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판단이란 대단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판단에만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궁국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서 더욱 더 힘쓰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너무 쉽게 자만에 빠지지도 말고, 너무 빨리 절망에 빠저서도 않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내게 찬사를 보낸다고 해서 내가 성자가 된 것도 아니고, 내게 가시관을 씨운다고 해서 내가 악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판단이 있기까지는 침묵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땅 위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바울처럼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로인하여 세상으로 부터 또는 사탄으로부터 공격을 받겠지만 그것은 어히려 영광일 것입니다.
마5:10-12절 말씀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끝까지 의와 진리의 길을 따르는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상급과 영광에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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