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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주노라 / 사 49:13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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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주노라
본 문 : 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49:13 ~ 15
설 교 : 박종화 목사 (경동교회)


하늘아 기뻐하여라 ! 땅아, 즐거워하여라 ! 산들아, 노랫소리를 높여라. 주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또한 고난을 받은 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셨다. 그런데 시온이 말하기를 "주께서 나를 버리셨고,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하는구나.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

서신서의 말씀: 요한1서 2:22 ~ 25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사람이 곧 적그리스도입니다. 누구든지 아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이요, 아들을 시인하는 사람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그것이 여러분 안에 있으면, 여러분도 아들과 아버지 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분이 친히 우리에게 주신 약속인데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요한복음 12:44 ~ 50
예수께서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 나를 배척하고 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은 따로 계시다. 내가 말한 바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 가를 친히 나에게 명령해 주셨다. 나는 그 명령이 영생을 준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해 주신 대f로 말할 뿐이다."


성탄이 바로 엊그제 지나갔습니다. 교회력의 절기 중에서 성탄만큼 즐거운 절기는 아마 없을 겁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신 날!
그런데 성탄이 지나고 나면,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합니까? 존경하는 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분, 그런 분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아니면 생존해 계시더라도 그분들의 유훈이나 업적을 기리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성입니다. 그래서 생가(生家)도 복원하고 기념관도 짓고 또 기념물도 만들곤 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분의 생가는 어디에 있으며, 그분의 생가는 어떻게 복원되어야 합니까? 예수님은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베들레헴에다 예수님의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다음 곧바로 이어진 박해로, 그 예수의 유지(遺志)를 따르려고 했던 많은 사람들은 지하에 숨어서 조심스럽게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가 복원은 엄두도 못 냈습니다. 곳곳에 지하교회가 탄생했고, 로마제국의 경우 카타콤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 믿는 것 하나 때문에 핍박을 당해야 했습니다. 생가 복원은 꿈일 뿐 현실로 이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를 통치하던 자들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로마제국의 지배체제 안에 통합할 수 있을까 하는 궁리를 했고, 결국은 예수 신앙의 맥을 끊어서 기독교라고 하는 것을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나셨다고 하는 베들레헴 마구간 언덕에다가 로마의 신 ‘아도니스’의 신전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135년의 일입니다. 같은 시기에 또 하나의 신전을 세웠는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소위 무덤에 묻혀 있던 골고다 언덕 위에 세운 신전이 그것이었습니다. 로마 신 ‘비너스’의 신전을 세운 것입니다.
그 두 신은 다 로마의 신이고, 기독교의 신은 아니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기억이 압축된 두 장소에 그렇게 신전을 세운 것은 기독교 신앙을 거세하고 로마제국에 통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의 탄생하신 말구유의 베들레헴, 예수가 죽어서 묻혔다고 하는 예루살렘 외곽의 골고다 언덕, 이 두 개의 역사적 상징은 로마제국의 역사와 동일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로마제국의 통치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틴 왕이 소위 로마제국을 통일하고서, 제국의 통일에 혁혁한 공을 세워 주었던, 십자가를 모자에 탄 십자가 군병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종교를 선포했습니다. 이때부터 지하교회가 지상교회로 탈바꿈합니다.
그리고 나서 상징적 조치로, 콘스탄틴 왕의 어머니인 헬레나, 소위 대왕 대비가 성지순례에 나섰습니다. 먼저 골고다 언덕에 가보았습니다. 비너스 신전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철거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 언덕에 가보았습니다. 거기에 아도니스 신전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철거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렇게 신전이 철거된 그곳에 기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예루살렘 외곽에는 소위 성묘교회라는 교회가 세워지고, 베들레헴 언덕 위에는 예수탄생 기념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것이 339년의 일입니다.

지금 교회 건축에 관련된 일을 역사적으로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시 베들레헴 성지로 가봅니다. 베들레헴이라는 동네는 유대 땅에서 산악지대에 위치한 동네입니다. 그곳에는 동굴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 동굴에서는 양도 기르고 염소도 기르고 다른 가축도 기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태어나셨다고 하는 마구간은 아마 이 동굴들 중에 어느 하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에 아프가니스탄과 미국의 전쟁에서 동굴작전에 관한 것을 신문에서 읽고 방송에서 보았습니다. 그 많은 동굴들, 그 산악지대의 동굴들 중 하나에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교회가 지어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탄생교회가 세워졌지만, 그후 200년이 지나서 팔레스타인 땅에서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이 생겨나고, 민란도 생겨났는데, 그 민란의 와중에 이 성전교회가 파괴되었습니다. 소요가 진정된 다음에 당시 그 지역을 통치하던 비잔틴제국의 왕, 유스티니아가 예수탄생교회를 이전과 같은 모양으로 재건축하게 했는데, 그것이 오늘의 예수탄생 교회입니다.
다만 처음과 달라진 게 하나 있습니다. 옛날 교회는 말을 타고도 들어갈 수 있도록 대형 문이 있었는데, 새로 건축된 이 성전에는 교회 문을 아주 작게 바꿔 버렸다고 합니다.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의 문 높이는 1m 20cm, 폭은 80cm입니다. 이유는 말을 타고 마구간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들어가는 사람은 문 높이가 120cm이기 때문에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경배하라는 뜻입니다.

안에 들어가 보면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를 기념하여 열 한 개의 돌기둥이 좌에 두 줄, 우에 두 줄, 네 줄로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현재 이 교회는 교파 단위로 보면, 희랍정교회 관할 구역에 있습니다. 그래서 정교회와는 다른 전통을 가진 로마카톨릭교회가, 우리도 예수탄생 기념교회를 지을 필요가 있다고 해서, 그 옆에다가 탄생교회를 새로 하나 건축했습니다. 그 교회 이름이 카타리나 성당입니다. 혹시 크리스마스 이브에 여러분께서 TV방송에서, 베들레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보셨다면, 거기에 나오는 교회는 본래의 탄생교회가 아니고, 천주교가 세운 성 카타리나 성당입니다.

예수께서 구세주로 우리 가운데 오셨는데, 그분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길이길이 복원하고 싶고 그분을 우리 기억 속에 담고 싶습니다. 그래서 생가가 필요합니다. 그 생가를 보고싶으신 분은 지금 비행기를 타고 베들레헴을 방문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가 발전해오면서 베들레헴에 있는 이 생가는 하나의 역사적 기념물로만 여기고, 실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하는 이 현실 가운데에 예수님을 기리는 센터를 세우려는 노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천주교가 로마의 한복판 바티칸에다 교회 하나를 세웠습니다. 여러분이 로마를 방문할 때 자주 보게 되는 성 베드로 성당입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변형된 생가입니다. 천주교와 쌍벽을 이루었던 정교회에서는 당시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도시, 지금은 터키의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입니다만, 이 도시에다가 또 다른 정교회식 생가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성 소피아 성당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성 소피아 성당은 회교도들의 지배하에 들어가, 지금도 회교의 박물관으로 변해 있습니다. 성공회를 전파했던 영국의 성공회는 자기들 나름대로의 생가를 자기들 식으로 복원하자고 해서, 여러분이 런던에 가면 보시는 대로, 캔터베리 주교좌 성당을 세웠습니다. 개신교회를 뺀, 천주교와 정교회, 성공회 등은 다 이런 복원을 했습니다. 종교개혁의 후손인 우리 개신교회에는 이런 성당이 없습니다.

제가 성서 말씀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던 아기 예수는 인류를 심판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죄 짓고 억압 속에 사는 이 세상을,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구세주로 오신 분입니다. 그분이 꼭 이렇게 말씀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분의 뜻을 헤아려 보면 이럴 것입니다. “내가 태어난 생가를 복원하고 싶은 사람은 꼭 런던에 갈 필요가 없다. 바티칸에 갈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스탄불에 갈 필요가 없다. 내가 태어난 성전은, 말구유는 오늘 여러분이 모여 있는 경동교회다.” 예수께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내가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성서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아버지께 돌아가야 한다. 내가 가고 나면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공백이 생길 텐데, 이 공백을 성령이 대신해서 메울 것이다. 성령을 보내마.” 지금 우리 교회 속에 성령이 역사하고 계시다고 하면, 그 성령은 다시 우리 가운데 보금자리를 두시는 것입니다. 말구유를 마련해 놓고 다시 태어나십니다. 이미 지나간 성탄이 아닙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오늘도 예수께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분 예수, 부활하신 분 예수의 대행자인 성령이 역사하셔서 생명의 예수를 우리 가운데 살아 있게 하심을 알았습니다. 그 고백이, 그 신앙고백이 너무나 큰 고백이었습니다. 지금도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크리스마스, 그건 행사에 불과합니다. 지나가는 하나의 이벤트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크리스마스는 오늘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없는 아기 예수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부활하신 분의 대행자인 성령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과거를 돌이켜 보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면, 이 예수의 탄생도 성령의 역사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정녀 마리아가 잉태하되,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여 아들 예수를 낳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가 태어났습니다. 오늘도 성령으로 잉태하여 우리 가운데 아기 예수가 탄생하십니다. 마리아 같은 우리 가운데 아기 예수가 탄생하십니다. 구원의 주, 예수가 탄생하십니다. 이 복은 내 이름으로 모이는 많은 교회들이 받을 복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이 복을 받기 전에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성서의 말씀을 곱씹어 보면, 예수님의 뜻은 이런 것입니다. “마구간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그것이 내 생가는 아니다. 내가 태어난 장소도 아니다. 내가 탄생한 목적은 십자가를 통해서 만유를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이름으로 모이는 모든 교회는 십자가 아래 모여야 한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교회도 아니고, 십자가 없는 교회는 내가 탄생할 곳도 아니다. 그곳에는 성령의 역사도 없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모여라. 그러나 그 십자가는 부활의 광채로 둘러싸인 십자가이다. 부활의 광채로 둘러싸인 십자가 아래 모인 교회, 그것이 오늘 베들레헴이다. 내가 탄생하는 곳이다.”
교회는 어느 특정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참된 의미의 모든 교회는 베들레헴의 마구간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 마음 한가운데에 하나님의 나라가 태동합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오늘 말구유입니다. 그 구유 위에 아기 예수께서 누워 계십니다.

탄생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탄생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구원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또 다른 성탄을 여러분이 축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복을 받은 것을 가리켜서, 성서는 “우리 각자는 모두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교회 속에 하나님 나라가 역사하십니다. 모든 교회는 각 사람 마음속에, 그 중심에 존재합니다. 여기서 역사하시는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힘입니다. 힘이 없는 구원은 구원이 아닐 겁니다. 우리는 힘이 있어야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 나라를 “동방의 등불”이라고 했던 시인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인도 사람, 라벤드라나트 타골이라는 시인입니다. 이분이 재미난 글을 하나 썼습니다. 권력과 세상, 사랑과 세상, 두 개를 구분해서 쓴 내용입니다.

권력이 세상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 꺼다.” 세상은 권력의 위력 때문에 그 권력을 왕좌에 앉히고, 그 대신 왕좌에 앉은 권력을 죄인으로 낙인찍었습니다. “당신 권력이여, 당신은 왕좌에 앉아 그대로 계십시오. 민생 속에 들어오지 마십시오. 거기서 부패하든지 썩든지 다스리든지, 거기에서만 하십시오.” 부패한 권력, 위로부터 다스리는 권력, 아래 도탄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는 권력, 그 권력은 그냥 왕좌에만 계십시오.“ 예수의 오심은 이런 방법은 아닐 겁니다.

타골의 말이 계속됩니다. 한편, 사랑이 세상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네 꺼다. 나를 가져라.” 세상은 너무 감사하여 사랑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 당신에게 우리 세상에 머물 수 있는 자유를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세상 속에 사랑은 자유롭게 흐르고 있습니다. 위로부터 누르며 통치하는 권력은 왕좌에 앉아서 죄인 취급받고 있고, 아래에 내려와서 섬기고 위로하며 보듬어 주는 사랑은 이 세계를 맘대로 다니면서 사랑의 봉사를 펼치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예수는 어떤 모습으로 오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한테 태어나시는 예수는 지금 권력의 모습입니까? 사랑의 모습입니까? 그러나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은 타골이 말한 그 어느 모습과도 다릅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세상을 향해 “세상 너는 내 꺼다. 내가 통치하마.” 하시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니 나를 가져라.” 그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집착하는 소유의 관계입니다. 내가 당신을 소유해야겠다, 당신이 나를 소유해라 하는 소유 관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나 스스로 죄 된 인간이 되겠다.”고 하십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가질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세상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세상이 되마. 내가 인간이 되마.” 소유가 아니라 존재입니다. 당신이 아예 세상이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피조물이 되어 오늘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하나님은 소유하고 소유 당하는 그런 주종관계의 차원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스스로 인간이 되십니다.

요한일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베들레헴에 태어났던 사람,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오늘도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걸 믿습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습니까? 구세주 그리스도가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임을 믿습니까? 두 사람은 동일합니까?”

동일하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자신 가운데 오늘 베들레헴 성전이 마련됩니다. 예수 믿는 신앙은 이렇게 하늘이 땅이 된 존재의 변화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때로는 매를 맞으며, 때로는 욕지거리를 당하며, 때로는 짓밟히시면서 그러나 인간구원을 위해서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 세상이 된 하늘나라, 이 나라가 오늘 우리 가운데 탄생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닮아 가는 세상,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인간, 새롭게 되는 피조물, 이것을 이루려고 하나님이 오늘 어린 예수가 되어 탄생하십니다.

변화의 역사, 새 사람의 역사, 새 교회의 역사, 새 세상의 역사가 오늘 펼쳐지려고 합니다. “그릇 좀 다오. 빈 방 있는가? 공간 좀 만들 수 있느냐? 내가 너희들 속에 태어나고 싶다.” 공간을 내어 드리십시오. 그분한테 자유를 주십시오.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그분께서 약속하십니다.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어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나는 절대로 너희를 잊지 않겠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늘 그분이 태어나려 하십니다. 누우실 자리 만들어 드립시다. 하나님에게 성탄의 장소를 제공하십시다. 아기 예수가 오늘 여러분 가운데 탄생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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