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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라에 의인이 많아지면 / 잠언 2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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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나라에 의인이 많아지면
본 문 : 잠언 29:2~4
날 짜 : 2002. 12. 15
설 교 : 옥한흠 목사 (사랑의교회)


이제 21세기가 시작되고 우리 나라의 첫 통치자를 뽑는 제 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핵 문제가 다시금 붉어지고, SOFA 개정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확산되면서 나라 전체가 어수선해지고 여러 염려스러운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우리가 나라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야 되겠고, 과거에 한번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면, 지금은 두번 무릎을 꿇고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우리는 정치에 너무나 많은 환멸을 느껴왔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나라를 보면 여러 가지 개혁되는 부분들이 있지만, 가장 먼저 개혁되어야 할 현장이라 할 수 있는 정치계는 아직도 스스로의 개혁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계에 대한 불신은 계속 높아지고 결과적으로 나라에 대한 애착까지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보셨겠지만 얼마 전 신문 지상에 보도된 내용입니다. 여러 나라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자기 나라의 정치와 국가에 대해 얼마만큼 만족하고 있는지를 조사했습니다. 미국은 41%가 만족한 것으로 나왔는데, 생각보다 낮은 수치이지만 10명 중 반 가까운 사람들이 자기 나라에 대해 긍지와 만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 나라는 14%로 10명 중 거의 9명이 이 나라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마저 나라가 어떻게 되든지 '나 몰라라,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처신하거나 정치에 대해서 냉소주의로 일관 또는 무관심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나라와 정치, 사회를 놓고 우리가 무관심하면서 어떻게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개인의 구원을 강조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정을 가진 교회는 정치나 사회에 대해 관심이 부족한 것을 봅니다. 사회적인 책임에 대해서 다소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의 바른 자세도 아니거니와 오히려 절름발이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단 2가지 입니다. 하나는 도망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에 속한 자입니다. 인생은 세상에서 70~80년 살다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후에 하나님나라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시적인 삶이 아닌 영원한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분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쪽 눈을 감고 성경 말씀을 읽고, 하나에 치우쳐 생각하다 보면 도망가는 길이 훨씬 쉬운 길처럼 보입니다. 사실 젊은이들의 경우 "이 악한 세상, 도무지 선한 사람들은 받아주지도 않고, 무능한 사람들은 짓밟아 버리는 더러운 세상, 왜 내가 이곳에 평생을 걸고 살까? 보기 싫다." 하고 등돌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열심히 하자.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선교 하자."면서 완전히 세상을 등지고 한쪽 길로 가버리기도 합니다. 옛날 중세기 암흑시대 때에도 세상이 너무 악해지자 젊은이들이 세상을 감당할 수 없어 선택한 길이 도망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이 얼마나 많이 생겼는지 모릅니다. 머리를 밀고 수도사가 되어 그 안에서 한평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한편으론 그 길이 더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하나님의 말씀을 검토하면 그것은 잘못된 태도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도피하며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내용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 쉬운 말로 바꾸면, "하나님 아버지, 여기 있는 제자들을 내가 당장 하나님나라로 데려가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들을 세상에 남겨놓기 원합니다. 아직 세상에 남아서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바라기는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이 세상에 교회를 남겨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등지고 도피하면 안됩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합니다. 소금이 가야 될 곳은 뻔합니다. 또한 '너희는 세상의 빛이'이라고 말씀합니다. 빛이 가야 할 곳은 어두움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도피해선 안됩니다. 오히려 국민으로서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이 두 가지를 함께 해야 합니다. 세상을 등지면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세상과 담쌓고 살면서 소금과 빛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나라와 정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사회 이슈는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 속에서 현실 인식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말씀이 두 절 나옵니다. 먼저 2절을 봅니다.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을 하느니라." 나라가 잘되려면 의인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인이 많아지게 됩니다. 어느 쪽이 나라를 위해 더 좋은 일입니까?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나라에 만족하기 위해서는 의인이 큰소리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이어서 4절입니다.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2종류의 통치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의롭게 나라를 정치함으로써 모든 백성이 균등하게 행복을 누리도록 책임지는 통치자입니다. 반면에 공직을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남용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뒤로 뇌물을 받아 먹고, 부정부패를 용인하면서 결국은 나라를 형편없게 만드는 통치자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공의와 정의대로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의인과 정의로운 통치자, 이 2가지는 우리가 이 나라에서 큰 소리 치면서 살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 다음 3가지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 땅에서 의인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의인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양심적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잠언서의 의인은 이렇게 넓은 의미로 받아 들입니다. 물론 좁은 의미로 말한다면 예수 믿고 중생 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좀더 넓게 말하면 중생 받지 못했더라도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모두가 의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만들어야 됩니다.

알다시피 무언가를 바꾸려면 사람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만일 가정이 행복하지 못하다거나 부부간에 문제가 있어서 한 지붕 밑에 살아도 밤낮없이 갈등하면서 괴로워한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작은 집에서 큰 집으로 이사를 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금요일 저녁마다 팔짱을 끼고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외식을 하고 들어왔다고 해서 부부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 문제가 해결되려면 남편이 변하든지, 아내가 변하든지 아니면 둘이 다 변하든지 해서 사람이 바뀌어야 합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가 바로 되려면 사람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도 의인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데 의인을 만드는 길은 단 하나, 전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서 많은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사람이 바뀝니다. 그 심령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기능을 잃었던 양심이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 믿고 나면 항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려는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의 뜻에 복종하려는 사람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믿고 변화된 의인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나라가 바로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인들이 많아지면, 의인들은 세상 속에 깊이 스며들어가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소금의 역할을 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곧 방부제가 되는 것입니다. 좀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수평적인 충격파를 일으키는 존재가 됩니다. 서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의인이 많이 번성하면 악인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건강한 풍토가 조성될 것입니다. 뿌리가 번성하기 힘든 독특한 환경이 조성될 것입니다. 이럴 때 나라가 잘 되고 사회가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비록 전체 국민에 비해 그 숫자가 소수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의인이 전국민의 2%만 되어도 그 나라의 모든 영역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전을 가진 2%의 사람들이 그 나라의 운명을 바꾼다는 말이 공공연히 통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 2%만 있어도 나라가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0년 전에, 80년 전에는 우리 나라 기독교인의 숫자가 전체의 5%도 못 미쳤습니다. 그러나 그들 때문에 나라가 바뀌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의인이 많으면 이런 풍토가 조성됩니다.
지난 50년 동안 우리는 형극의 길을 걸으면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복은 바로 의인들을 많이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돌아온 사람들이 전 국민의 1/4에 해당할 만큼, 천만의 성도라고 자랑할 만큼 많은 의인들이 이 땅에 생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큰 축복입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 의인을 만드는 일에 전력을 쏟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전도만 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필요할 때는 사회의 여러 가지 일에 우리가 관여해야 되고, 또 사회를 개선하고 개혁하기 위해서 우리가 앞장서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일을 우리가 들어주기 위해서 우리의 힘을 결집해야 합니다. 의인들이 많아지는데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고 가만히 뒷짐지고 있다고 한다면 나라는 바뀌지 않습니다. 사회는 바뀌지 않아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세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사회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달라야 되지 않아요? 안 믿는 사람과 우리가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줘야죠. 그들이 우리를 보고 본받고 따라오기를 원할 만큼 우리의 삶이 뭔가 드러나는 점이 있어야 될 것 이 아닙니까? 이것이 모범이에요. 모범을 보여야 됩니다.

둘째로 우리는 사회봉사를 해야 합니다. 사회에 모범을 보이는 동시에 봉사를 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내버려 두고 우리끼리 할렐루야를 외쳐서는 안됩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에 우리 자신의 것을 털어서라도 그들을 도우면서 사랑의 봉사를 해야 합니다. 자선사업을 해야 합니다.

다행히 한국교회는 이 일을 열심히 하는 편입니다. 정부의 통계를 보면 우리 나라 자선 사업, 복지 사업의 70%를 교회가 책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불교나 가톨릭이 따라오지 못합니다. 개신교가 이 일을 거의 도맡아서 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제 12월에 있는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앞두고 남모르게 음지에서 눈물 흘리며 잠 못 이루는 가난한 이웃들을 조금이나마 돕기 위해서 3억 이상의 예산을 들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손을 잡아 주고 위로해주기 위해 지금 준비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규모상 3억이란 돈이 큰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은 돈도 아닙니다. 우리는 1년 동안 사회의 자선사업을 위해서 많은 돈을 썼습니다. 그러나 연말에 마지막으로 힘을 써보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 봉사 없이 우리가 이 세상을 바로 잡는 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우리가 사회참여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모범이 되는 것은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사회봉사를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거기에서 머물면 이 사회는 바뀌지 않습니다. 아무리 구제 많이 해도 세상이 안 바뀌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애를 써도 사회가 안 바뀌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회참여 하는 것입니다. 사회참여가 무엇입니까? 사회 문제의 원인을 찾아서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가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가령 범죄가 기승을 부린다면 그 원인을 찾아서 범죄가 덜 생길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또한 가난한 자가 계속 가난을 벗지 못한다면 잘못된 사회 구조를 바꾸는 일에 열심을 다해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 무척 험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 길을 놓고 비유 하나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하다가 그만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흠씬 두들겨 맞아 빈사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불쌍히 여겨 나귀에 싣고는 주막으로 돌아와 상처를 싸매주고, 계속 간호를 요청하기 위해 모든 부대비용을 지불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주님은 너희도 가서 이웃에게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이처럼 길이 험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강도사건이나 살인사건이 날 정도면 교회가 수 십대의 응급차를 동원해 그 길에 배치해놓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곧 이 문제는 사회봉사만으로는 해결 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도대체 그 길에 왜 강도들이 들끓는지 원인을 찾아야 됩니다. 그래서 그 강도들을 소탕하기 위해 법 제정을 필요로 한다면 국회에 들어가거나 로비활동을 펴서라도 무슨 조치를 취해야 됩니다. 만약 경찰들을 배치하는데 예산이 필요하다면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 지역에 경찰을 세워서 다시는 길을 가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이것이 사회참여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교회만큼 광범위하고 잘 훈련된 대중을 소유하고 있는 집단이 없습니다. 천만 성도를 자랑하는 우리 나라 교회를 보십시오. 그 가운데 수백만 명이 매주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다집니다. 이런 집단이 한국 외에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평생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앙의 끈으로 똘똘 뭉쳐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거룩한 의인들이 하나로 힘을 합쳐 사회의 모든 문제에 참여하면, 엄청난 사회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찰스 피니라고 하는 위대한 부흥사가 19세기에 등장하여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원래 법을 전공한 법학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자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얼마나 성령의 감동을 많이 주셨는지, 아무리 양심이 마비된 사람이라도 그의 설교를 듣고 나면 그 자리에서 떼굴떼굴 뒹굴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새롭게 변화되는 역사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찰스 피니가 가는 마을마다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술집과 카페가 문을 닫고 창녀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도시마다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 믿고 변화된 의인들이 결국 1830년대 미국의 개혁운동을 일으킨 선구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노예제도를 폐지하자는 운동과 금주운동, 백인과 흑인들의 화해운동, 여성들을 위한 여권신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제일 선두에 서서 이 일을 주도한 사람들이 모두 찰스 피니의 부흥운동에 감화를 받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 의인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군림해서 전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가 된 것입니다. 

'에콰도르'는 중남미의 조그마한 국가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직도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는 불쌍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사법제도가 형편없어서 누군가가 기소되면 미결수로서 4-5년을 지내야 정식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도 뇌물을 쥐어 주지 않으면 10년이 걸리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일단 한번 무슨 일로 혐의를 받아 구치소에 들어가면 자기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구치소에서 4, 5년을 보내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뇌물을 주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것에서 10년 동안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누가 인간답게 살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의 모순과 고통을 마음 아파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호르에 크레스포 박사라는 분입니다. 그는 그 나라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법을 전공한 법학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믿고 나서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은 자기가 믿는다고 말하는 대로 사는데 있다." 곧 믿음과 삶이 일치되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참된 신앙은 개인적인 문제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나 혼자 구원 받으면 된다. 나 혼자 복 받으면 된다. 나 혼자 주님과 동행하면 된다.'는 데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사회 전반에 드러나도록 쓰임 받는 것이 신앙생활의 진수라고 그는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법제도와 교도소를 개혁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나섰습니다.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두 번이나 투옥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셔서 사법제도를 개선하는 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도록 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미결수는 3년 이내에 반드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거룩한 백성들이 의인이 되어서 사회 문제에 깊이 참여하면 그 사회와 나라가 바뀌게 됩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계속 설명하고자 합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저는 기독교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세계적인 기독교 역사학자였던 프리스톤 신학교의 라토레트(C. S. Latourette) 박사의 말을 들으면 얼마든지 수긍이 갈 것입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기독교로 인해서 문맹과 무지에서 벗어났습니다. 수많은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해방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노예제도가 무너지고, 힘있는 자들의 착취로부터 가난한 자들이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국가간에 정의와 평화의 기반을 닦는 원천이 마련되어 전쟁의 공포가 많이 줄었습니다.

한번 우리 나라를 보십시오. 아시아에서 우리 나라만큼 기독교의 좋은 혜택을 많이 받은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바로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시장경제, 평등한 교육 기회, 여성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여권신장, 행복추구의 권리, 우상과 미신에서의 해방, 사회복지의 개선 등등, 길지 않은 역사와 좁은 땅에서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그 많은 혜택들은 기독교 정신에서 왔습니다. 우리 나라를 위해 선교한 선교사들이 이 땅에 뿌려놓은 기독교의 씨앗이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사고와 가치관을 가지고 사회와 정치를 개혁한 결과, 오늘날 이와 같은 나라가 된 것입니다. 실로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개선되었는지 모릅니다. 바로 이런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사회 참여입니다.

한번 지도를 펴서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있은 국가는 빨간색으로, 불교의 영향을 받고 있는 나라를 파란색으로, 회교의 영향을 받고 있는 나라를 검은색으로 색칠해 보십시오. 과연 어느 나라가 인간답게 사는 나라인지 비교해보십시오. 금방 훤히 드러납니다.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 의인들이 활개치면서 이 사회에서 제 구실을 하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사회참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문제가 있다면, 과거에 비해 의인의 숫자는 엄청나게 증가한 반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점점 축소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고민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많은데, 왜 범죄는 더 늘어나는 것인가? 왜 사람들은 점점 더 흉포해지는가? 왜 성범죄는 더욱 문란해지는가? 왜 정치인들은 거짓말만 하며 경제는 투명하지 않는가? 왜 가진 자들이 횡포하면서, 가난한 자들을 고통 하게 만드는가? 예수 믿는 사람이 대통령도 되고, 국무총리도 되고, 정치 경제의 중요한 자리에 다 앉아 있는데도 왜 이 나라가 이 모양이 되는가?' 이에 대해 참으로 우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 중 한 가지만 든다면, 우리 나라 경제가 계속 발전하고 부를 누리게 되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엄청난 복을 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곧 이 나라가 근대화가 되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경제적인 혜택을 많이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부를 누리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와 기득권을 행세하는 주류가 되었습니다. 

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에 있는 구 가운데 제일 잘 사는 구가 서초구에 이어 강남구까지 2곳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의 비율이 적어도 35%이상 되는 구로는 마찬가지로 서초구와 강남구 2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을로 쳐서 예수 믿는 사람이 55-60%에 이르는 곳은 압구정동입니다. 가난한 구로 갈수록 예수 믿는 사람들의 비율이 점점 떨어집니다. 이런 근거 자료만 봐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좋은 혜택을 많이 받아 누리고 점점 잘 살게 되면서 기득권 층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사회 개혁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 배가 부르므로 정치가 잘못되어도 탄식하지 않습니다. 어딘가 잘못된 것이 있어도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 싶으면 눈감아 버립니다. 이것이 기득권 층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의인의 수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 구석구석에 어떤 변화를 끼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를 놓고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사회봉사나 전도도 중요하지만 사회참여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소극적으로 행동하면 안됩니다. 변두리에서 돌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 사회를 하나님나라로 바꾸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모든 악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우리의 힘을 결집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회참여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좋은 통치자를 우리는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한다고 말씀합니다. 공의롭게 나라를 다스릴 줄 아는 지도자를 세운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행복과 미래를 위해서 얼마나 생명처럼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과거의 왕정시대에는 우리가 통치자를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시대에는 우리가 원하는 통치자를 세울 수 있도록 제도가 정비화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을 세우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운명을 제 손으로 결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런 일에 무관심한 사람은 국민될 자격이 없습니다.

정치란 좁은 의미로 '다스리는 과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함께 살아가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덤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누구든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 정말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면 통치자입니다. 어떤 지도자가 그 나라를 다스리느냐에 따라서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나라가 되는가 하면, 도무지 함께 살 수 없는 지옥과 같은 나라가 될 수가 있습니다. 통치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인간답게, 인간 대우를 받으면서 살 수 있는 나라가 되는가 하면, 인간의 모습을 다 잃어버리고 짐승처럼 허둥거리면서 살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통치자를 잘 만난 나라와 잘못 만난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갈렸는가를 우리가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이 말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에서 정부가 하는 일은 땅과 물과 태양과 공기가 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 정부와 통치자는 인간이 짐승처럼 되는 것을 막아준다. 정부와 통치자는 인간성의 보존을 위해서 필요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정치를 거부하는 것은 인간성을 거부하는 것이요, 인간성을 박탈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통령과 같은 공직은 모든 소명가운데서 가장 성스럽고 명예스러운 것이다." 칼빈은 성직인 목사직 못지않게 대통령직도 성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너무나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정치가 우리에게 소망을 주지 못하자 대통령 선거를 놓고도 많은 사람들이 불신합니다. 냉소주의로 흐릅니다. 또는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선거일을 앞두고 골프채를 메고 동남아로 가는 사람들이 공항을 가득 메웁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우리나라에는 심각한 병리현상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곧 상식이 실종 당한 사회라는 것입니다. 상식이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의견을 그들은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도 존중해야 된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리고 '의견은 다르지만 우리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서 토론하고 논쟁하면 나라와 사회를 위해서 좋은 결론을 얻어낼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상식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상식이 안 통합니다. 내 편이 아니면 적입니다. 차라리 옳고 그른 것을 가지고 싸운다면 그나마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관심사는 옳고 그른 것이 아닙니다. 누가 좋은 지도자냐, 나쁜 지도자냐 도 아닙니다. 무조건 내 편이 아니면 적입니다. 이렇게 병들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는 국가의 통치자입니다. 바 된 통치자가 공의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면, 이 나라의 병이 치유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치자를 선택하는 것, 이것은 우리가 이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고,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어느 후보가 좋다, 나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한가지 상식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천만이 아닙니까? 그 천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령의 감동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영의 눈이 있습니다. 누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둘 다 좋지만 그 둘 중에서 누가 더 좋은지 분별할 수 있는 영안을 성령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천만이 한 마음이 되어서 성령의 도움을 받고자 기도하면 어떤 사람을 내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감동함을 받아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우리의 행복과 영광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어느 후보가 좋다는 마음을 일으켜 주신다고 믿습니다. 성령은 우리 모두를 하나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똘똘 뭉쳐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투표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사람이 대통령으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나라에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다시 한번 희망을 가집시다. 비록 국제적인 정세나 주변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돌발 사건을 보면 불안한 부분도 있지만, 이미 우리는 과거 50년 동안 수없이 위기를 맞이하고 이겨 나왔습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밤낮으로 기도하는 성도의 기도를 하나님은 듣고 계십니다. 이 기도 때문에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에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좋은 지도자를 세우도록 성도들을 모두를 감동시키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 산적해 있는 모든 문제들을 하나하나 슬기롭게 풀어가면서. 우리 모두가 21세기에 세계를 위해서 큰 몫을 감당하고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는 민족이 되길 바랍니다. 그런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축복해주시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희망을 갖고 기도하면서 이번 대선에 책임 있게 임하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이 나라의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대선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놓고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결단해야 될 것인가 배우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 나라를 위해서 좋은 지도자를 주시옵소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똘똘 뭉쳐서 이 나라의 의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해 주시어, 이 나라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아름답고 거룩하고 복된 나라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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