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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끝까지 사명 감당하게 하소서! / 삼상 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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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사무엘상6:10-16
제 목 : 끝까지 사명 감당하게 하소서! 
설 교 : 강재식 목사 (구미등대교회)


인류학자 E. 토머스의 "개의 숨겨진 비밀"이란 책에서 개들이 싸울 때 분명한 이유가 있고, 아무 때나 막무가내로 싸우지 않으며, 개들은 자기들 안에서는 절대로 분파를 나누어 싸우지 않으며, 서로 누르고 올라서서 평화를 찾기보다는 서로 도와 가는 집단으로 평화롭게 살기를 더 원하고, 정당한 권위에 절대 순종하는 특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자기의 권리가 침해당하지 않는 한 물거나 짖지 않으며, 공연히 날아가는 새를 향하여, 가만있는 꽃을 보고 짓는 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개가 사람보다 나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라도 어떤 것은 짐승에게도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도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잠언6:6-8) 하시면서 개미에게 배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태복음10:16)고 하셨습니다.

요즈음 우리는 여리고 작전을 실시하고 있으며 그 주제가 "주님! 쓰시기 합당한 연장이 되게 하소서"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께로부터 사명을 맡은 자로 더 잘 쓰여짐 받아 우리를 통해 주님의 온전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하루의 첫 시간 새벽에 주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중입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 이것은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해 주어진 것이고,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로 주님께서 맡겨주셨기에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고 가치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달리 복입니까? 구원받아 영생을 소유한 것도 감당할 수 없는 복인데, 주께로부터 인정받아 주님나라의 사명까지 맡았으니 복이 아닙니까? 예수 믿고 사명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기쁨이 충만하고, 대기업 사장자리 안 부럽게 충성합니다.

서두에 '개' 이야기를 하였는데, 개에게서 배울 인격이 있는 것처럼, 오늘은 사명 감당함에 있어서 '소'를 통해서 배울 것이 있어서 본문을 선택하여 말씀드립니다.

구약시대에 엘리라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었고, 엘리 제사장이 나이 많아 늙었을 때, 두 아들이 제사장의 직무를 맡아 하였는데, 이들은 선하고 충성된 아버지와는 달리, 하나님께 제사를 멸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못된 짓을 일삼는 제사장이었다. 불레셋과 전쟁을 치를 때 이스라엘이 불리하자,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나가는데, 이들 제사장이 허락하고, 같이 나갔다가 언약궤는 빼앗겨 버리고, 두 제사장은 전쟁터에서 죽고 맙니다.
믿음이 있어야지 언약궤를 앞세운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지요. 믿음이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이 교회 온다고 은혜와 복이 주어지는 것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아간 불레셋나라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언약궤를 빼앗아다 불레셋 나라 아스돗이라는 동네에 있는 자기들 신전에 갖다 놓았는데, 아침에 신전에 가보니 그들의 신상인 다곤이 언약궤 앞에 얼굴이 바닥에 닿은 채 팍 엎어져 있는 것입니다. 다시 세워 놓고 그 이튿날 아침에 나가보니, 이제는 엎어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엎어져서 목과 두 손목이 부러져 문지방에 가 있고, 몸뚱이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동네 사람들이 갑자기 몸들을 벅벅 긁고 있는 것입니다. 독한 피부병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들은 언약궤를 가드라는 다른 동네로 옮겼는데 역시 많은 재앙이 일어났고, 다시 에그론이라는 곳에 보내니, 그 곳 사람들이 우리를 죽일 일이 있냐! 안 된다.고 데모를 하고 난리가 나니 더 이상 언약궤가 그들에게 애물단지가 되었고, 보관할 때가 없으니 결국 이스라엘로 되돌려 보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점술가들을 불러 어떻게 보낼까? 물으니, 독종을 옮기는 금으로 만드는 쥐의 형상과 금으로 만든 독종의 형상을 각각 다섯개씩 만들어 상자에 담아 같이 보내고, 수레를 만들고 그 수레를 끄는 짐승은 소 두 마리로 하되 송아지 딸린 암소로 하고, 송이지는 떼어놓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블레셋 관리들은 송아지가 딸린 두 마리의 암소를 구하고 송아지는 집에다 떼어놓고 수레를 끌어가게 하는데 목적지는 에그론에서 가장 가까운 이스라엘에 벧세메스라는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실은 이 암소 좀 보소! 자기가 끄는 수레에 실린 것이 하나님의 언약궤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잘도 끌고 갑니다. 젖은 띵띵 부어 새끼에게 젖을 먹일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막중한 사명을 맡아 가고 있으니 되돌아 갈 수도 없고, 떼어놓은 새끼가 생각이 나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나 울면서 울면서도 좌우로는 치우치지 아니하고 앞만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짝들에서 밀을 베다보니 빼앗긴 하나님의 언약궤가 돌아오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기쁩니까! 어느덧 소는 여호수아의 밭에 큰돌이 있는 곳에 멈춰섰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동네 사람들이 소 등어리를 두드리면 수고했노라고 꼴을 갖다 주는 것이 마땅하거늘 다짜고짜 수레를 뽀개어 장작으로 만들고 소를 잡아다가 장작 위에 올려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까!

주께로부터 부름 받은 사명자인 우리는 이 두 마리의 소를 보고 무엇을 배울까요?


1.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갑니다.

만약 소가 펄쩍 뛰고서는 언약궤 떨어뜨리고 빈 수레를 끌고 갔다면 그 소는 본 받을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명자는 주신 사명을 떨어뜨려 버리고 빈 수레로 가고 있습니다. 힘들고 부담되는 것은 피합니다. 시간이 아깝고, 물질이 아깝고, 힘들고 부담된다고 사명 팽개치고, 빈 수레를 끌고 갑니다. 직분은 그저 명칭만 있습니다. 직분은 수고하지 않으면! 내 것을 아낌없이 드리지 않으면! 주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직분의 명칭만 가지고 나가는 자, 곧 사명을 내 팽개치고 빈 수레를 끌고 가는 자를 통해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이루지 않습니다.
예수 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십자가를 벗지 말고 지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는 무겁고 험악한 것으로 온전한 희생을 말합니다. 힘들다 하지 말고 기쁨으로 지고 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수레에 사명의 짐을 싣고 수고와 고난을 감수하시면서 가시기 바랍니다.


2.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끝까지 갑니다.

새끼생각이 납니다.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어쩌면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명을 위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새끼 달린 엄마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새끼를 돌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끼는 엄마가 없으며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약궤를 싣고 가는 사명이 더 중합니다.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9:62)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사명을 주실 때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여호수아1:6-7)
가나안땅을 차지할 때까지 좌측에 상황에 치우치지 말고, 우측의 상황에도 상관하지 말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가면 형통하여 약속의 땅을 차지함을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성령께서 증거 하시기를 네가 가는 성(城)마다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하였으나 연연하지 않고 옆길로 새지 않고 사명을 위해서 나아갔습니다.
사명자는 사명이 최우선이고,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 저것 다 가리고, 이런 염려 저런 염려 다하면서는 사명에 충성할 수 없습니다. 충성하지 않는 이유가 좌우에 치우치기 때문입니다.


3.희생 제물로 끝났습니다.

암소 두 마리는 사명을 훌륭히 수행한 후에 영광의 꽃다발이 아닌 번제로 드려졌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교훈 해 줍니까? 주를 위한 사명자는 나의 부귀영화를 위해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임을 알게 합니다.
사명 감당한 후에 실망과 낙심하는 이유는 나 자신을 위해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부귀영화를 위해서, 병 낫기 위해서, 형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사명을 맡아 감당하는 것은 나의 영광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하는 것입니다. 사명 그 자체가 영광이요. 복입니다. 디모데전서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영광은 이 두 암소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 목숨을 주를 위해 드리는 것으로 마감하는 일입니다. 순교의 제물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다 주께로부터 사명자로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사명자로 부름을 받은 자에게 중요한 것은 사명을 위해 충성하는 것입니다. 즉 두 암소와 같이 언약궤를 실은 수레가 지워 졌으면, 우는 한이 있어도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언약궤를 목적지까지 끌고 가고, 가서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알고 말입니다.
죄사함 받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영원한 생명을 받았고, 천국이 보장되어 있고, 우리를 믿어 사명까지 맡겨 주셨는데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아깝습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장차 주님 앞에 설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릴 뿐입니다.
더 많이 봉사하지 못해서 안타깝고, 다 많이 드리지 못해서 안타깝고, 힘이 달려서 안타깝고, 재능이 부족해서 안타까울 분이지요!

우리 구미등대교회는 지난 14년 동안 사명을 부여잡고 달려 왔습니다. 물론 두 암소가 사명을 감당하는 것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우리는 다시 한번 언약궤를 메고 불레셋에서 벳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처럼 죽을 각오를 하고 끝까지 나아갑시다. 반드시 주님께서 우리를 편리한 연장으로 사용하셔서 필요한 시설 갖추어 수많은 영혼 살리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그렇게 쓰여짐 받다가 주님 부르실 때 할렐루야 찬송 부르면서 갑시다.
"내 주를 따라 올라가 저 높은 곳에 우뚝 서 영원한 복락 누리며 즐거운 노래 부르리.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 곳에 서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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