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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자다운 신앙인 / 욥 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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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욥기 1 : 20~22 
제 목 : 신자다운 신앙인
설 교 : 백장흠 목사 (독립문교회).


1) 변질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쉽게 말하면 의리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변화와 변질은 다릅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변질되는 것은 오늘의 적입니다. 자기에게 유익하면 앞장 서다가 불리하면 뒤로 빠지는 그런 인물은 지탄을 받습니다. 한 번 약속한 것은 끝까지 이행하면서 그를 돕고 위해주는 사람은, 오고 오는 세대에 자랑할만한 사람입니다.

2) 의무는 다 하면서 권리 주장은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성실하게 감당하면서 전혀 자기를 나타내지도 않고 다른 이에게 공로가 있다고 자랑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반대로 그 일을 할 능력도 없으면서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이들이 문제입니다. 흔히 듣는 말입니다만 기쁨이라는 말을 영어로 표현하면 JOY 입니다. J는 Jesus이고 O는 Other이며 Y는 You가 되어야 기쁨이라고 합니다. 즉, 먼저 ‘예수님’, 다음이 ‘당신’, 마지막이 ‘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제일 먼저이고 예수가 제일 나중이 될 때에 문제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예수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인정 받게 됩니다.

3) 다른 이들로부터 사랑받을 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받을 줄도 모르고 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답답한 사람입니다. 사랑받을 줄은 아는데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어느 분이 반대 당 지역에 가서 한 말이 있습니다. 자기는 보복 정치는 안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하두 보복하는 게 많은 세상인지라 보복정치는 안하겠다는 말이 통하는 세상입니다. 사랑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하게 사는 딸이 어머니를 위해 옷을 한 벌 해왔습니다. 뭐라 하여야 합니까? “어미를 생각하여 옷을 해 주었으니 참으로 고맙다.” 그리고 입어야 합니다. “왜 이것을 사왔냐? 나 옷 많다.” 그렇게 말하면 다시는 옷을 얻어 입지 못합니다. 그리고 사랑하여야 합니다. 더 많은 것을 줍니다.

4) 언제 어디에서도 구실을 다하는 사람을 인정합니다.
기능을 발휘하는 사람입니다. 운동경기로 말하면 박빙게임이 진행중입니다. 그때 감독이 “선수교체” 하면서 “너 나가라.” 그 때 나가서 결정 꼴은 넣었다던지 야구 같은 경우에 역전 홈런을 칠 수 있는 사람, 혜성같이 인정받는 쳄피언이 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밀리고 마지막 패배자로 남을 수는 없습니다. 욥과 같이 마지막에 축복을 받고 역사에 길이 남는 복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승자, 얼마나 멋있고 스릴이 있습니까? 저는 선배 목사님들로부터 들은 말이 있습니다. “목회는 장기전이다. 끝에 승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KO승 보다는 판정승이 더 아름다운 것이다.”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한 마디 제가 덧붙이고 싶은 말은, “지금은 지더라도 마지막에 이기는 역전승의 명수가 되어라.”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이기는 완승도 좋습니다. 처음에는 지는 것 같습니다. 그게 끝까지 지면 완패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안 되는 것 같은데 마지막에 이기는 삶, 이게 역전승입니다. 삶도 사역도 역전승의 명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게 욥의 신앙입니다. 역전승의 명수는 어떠하였습니까?


1. 감사다운 감사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감사절 때마다 청교도가 어떻고 감사를 넘치게 하자고 말합니다. 그 때 듣는 이들이 무엇을 생각합니까? 헌금 많이 하라는 말로 알아 듣고 있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부담을 느낄 정도로 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마음없이, 믿음없이 풍성한 헌금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근원부터 다릅니다.

1) 감사할 수 없는 중에 하는 감사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부모를 섬길 수 있는데도 안합니다. 이유는 “내가 너무나 형편이 어렵다. 이후에 잘 하겠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부모공경은 자신이 어렵습니다. 힘들게 살고 있음에도 부모를 생각하여 도와드립니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에 효도해야 효도지, 세상을 떠난 후에 잘 하려고 비석 세우고 명당 찾아 다니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감사 진정한 감사는 어떻게 하는 겁니까? 누가 보아도 욥은 감사할 형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10남매, 그런데 하나도 남김없이 죽었습니다. 병들어 죽었다면 말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인데 갑자기 죽었습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수없이 제단을 쌓았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매일 번제를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죽었습니다. 그런 때에도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욥과 나 자신을 비교해 봅시다. 우리들, 예수 믿는 것 맞습니다. 원망할 게 없음에도 수없이 남을 탓하고 환경을 원망하였습니다. 감사하려면 마음에서부터 나와야 합니다.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느냐?” 남이 잘못했을 때 쓰는 말입니다. 당연한 원망입니다. 자신도 못하면서 다른 이들을 비판하고 원망하였다면 모순된 원망입니다.
어떤 이는 원망거리를 찾아서 탓하는 이가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아서 가난하게 되었는데 그게 마치 그 나라의 지도자가 정치를 잘 못해서 가난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원망을 하게 됩니다. 원망하지 않고 살았다는 이는 없을 겁니다. 용어가 부드러워야 합니다. 공격적인 원망은 해서는 안됩니다. 원망은 습관이 됩니다. 원망 대신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고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양에 ‘김학성’이라는 유명한 분이 살았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삯바느질을 하면서 두 아들을 서당에 보냅니다. 전과 같이 바느질을 하고 있던 어느날, 갑자기 큰 비가 내립니다. 처마 물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달랐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처마 밑에 이상한 게 보입니다. 그래서 파서 보니 커다란 솥이 나오는데 그 속에 은전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아마 예전에 난리가 일어났을 때 돈을 가마솥에 넣고 땅에 묻어두었던 것이 한참동안 그대로 묻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여인은 빨리 솥을 다시 묻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집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여전히 열심히 바느질을 하여 아들들을 훌륭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숨이 끊어지려는 순간에 아들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왜 그런 보화를 땅에 묻어두고 어머니는 고생하였단 말입니까?”라고 물으니 어머니 대답인 즉, “땀 흘리지 않고 얻은 재물은 화를 자초할 수 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오늘날 같으면 “대박 터졌다”고 말하면서 “내가 왜 바느질이나 하고 있느냐”고 바느질 그릇을 내팽게쳤을 것이고, 메스컴에서는 운 좋은 여인이라고 크게 보도 했을 겁니다.
오늘날 보세요. 일하지 않고 임금 많이 달라고, 마치 자기들이 못사는 것은 ‘저 사람 때문’이라고 원망합니다. 원망하는 사람에게는 감사는 없습니다. 원망하지 맙시다. 오히려 감사를 찾아 자꾸 감사하려고 하여야 합니다. 원망할 수 밖에 없는데 감사로 바꾸었습니다. 이게 감사다운 감사입니다.

2) 받은 은혜만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겁니다.
탈무드에 보면 우리의 생각속에는 두 개의 주머니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기억의 주머니요 또 하나는 망각의 주머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의 주머니에 넣어야 하고 망각할 것은 망각의 주머니에 넣어야 하는데, 너무 바쁘다 보니 기억할 것을 망각의 주머니에 넣고 망각할 것을 기억의 주머니에 넣는다는 겁니다. 섭섭한 것은 망각의 주머니에 넣고 원한 맺을 만한 것도 망각의 주머니에 넣어야 합니다, 감사한 일, 은혜 받은 일은 기억의 주머니에 넣어야 하는데 반대로 넣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좋은 일은 기억의 주머니에 넣고 나쁜 것은 망각의 주머니에 넣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힘들고 어렵습니까? 오늘을 생각하면서 ‘어렵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지난 날에 받은 은혜를 기억하라는 겁니다. 수술실에 들어갈 때에 무엇을 생각하고 들어가야 빨리 쾌유하게 되는가 하면 삶 중에서 가장 좋았던 일,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수술실에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지난날에 받았던 은혜와 앞으로 주실 축복을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게 감사다운 감사입니다.

3) 변함없이 감사하여야 합니다.
사람 중에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 잘 될 때에도 그를 따르고 그 분이 어려움을 당해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생활화 된 감사입니다. 감사는 추수감사절 하루만이 아니라 일년 내내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욥은 좋을 때만 감사한 게 아니라 어려울 때에도 감사하였습니다. 이게 범사에 감사하는 겁니다. 감사의 생활화, 습관화가 되어야 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잘 하는 것 중에 하나는 항상 “Thank you”라는 말을 한다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인, 일본사람, 그리고 한국사람, 세 명이 사이 좋게 아프리카 여행을 하다가 무단 침입죄로 인하여 야만인들에게 붙잡혀 곤장 100대씩을 맞게 되었답니다. 다행히 야만인 추장은 이들에게 단 한 가지씩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첫번째 미국인에게 “소원은?” “제 등뒤에 방석6장을 올려 주십시요.” 추장은 소원대로 방석 6장을 올려 놓고 곤장을 칩니다. 70대를 맞고 나니까 방석이 다 떨어져 나머지 30대는 그대로 다 맞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걸 본 일본사람에게 “네 소원은?” “예. 제 등위에 메트리스 6장을 올려 주십시요.” 그렇게 하고 곤장을 아무리 쳐도 일본인은 힛죽 거리면서 ‘나는 일본 사람이야 모방에 귀신 아닌가?’ 그러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인, “너는 무슨 소원이 있느냐?” “예. 저 일본사람을 제 등 뒤에 세워 주십시요. 남을 끌고 들어가는데 능란하다는 것을 비꼬아 말한 거라 생각됩니다. 우리의 단점입니다. 오늘의 시련에서도 지난날에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앞으로 주실 축복을 기대하면서 변함없이 감사하고 사는 삶이 감사다운 감사의 사람입니다.


2. 견딜 수 없는 고난을 극복하였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성도들이 고난을 겪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일상적인 위로의 말일수도 있겠지만 그런 분을 만나면 “욥을 생각해 보세요.”라고 말합니다. 욥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축복받는 다리로 이용하였습니다. 어떻게요? 잘 극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생산적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할 때에 사랑에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말로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은 비생산적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의 어려움에 내가 책임을 집니다. 생산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한 면만 보는 게 아니라 전체를 봅니다. 오늘만 보는 게 아니라 미래를 볼 줄 압니다. 욥은 고난만 본 게 아니라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패배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까? 삶을 역전시킵시다. 그렇다면 지금 당하는 고난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장하십니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져 죽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의하여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자도 여호와시라’ 하였습니다. 인생의 근본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다는 겁니다. 핏덩어리로 와서 갈 때에도 빈 손으로 간다는 겁니다. 이것은 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겁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갖고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더 힘듭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욥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하는 모든 고난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다 갖고 가실지라도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왜? 다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것을 자기가 취한다는데 할 말 없다는 겁니다.
고난을 극복하는데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아버지는 전능하시기에 하시는 모든 일에 실수함이 없습니다. 잘못하심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아버지이십니다.

2) 고난을 은혜로 해석할 줄 알아야 극복합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우리는 ‘왜?’라고 생각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어야 하나?’, ‘왜 나는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할 때에는 답답합니다. 낙심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이것도 은혜다.’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금년에는 태풍으로 인하여 우리나라 전역에 큰 해를 가져 왔습니다. ‘왜 태풍이 일어났는가?’ 알고 보면 태풍 때문에 어획량이 크게 늘어난다고 합니다. 바다 깊은 곳까지 깨끗하게 대청소 하는 기회라고 합니다.
거기에도 어떤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이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죄가 있기에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에매하게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억울한 고난입니다. 그리고 선택적 고난이 있습니다. 의롭게 살기 위하여 알고 있으면서 고난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에게는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 때 기억할 것은 이 고난을 통하여 나에게 유익이 된다는 겁니다. “베토벤이 행복하였더라면 위대한 음악가가 될 수 있었겠느냐?”라고 묻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26세시(1796년) 귀에 이상이 생기고 4년 뒤부터 귀가 들리지 아니하는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오히려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고난이 있었기에 총리가 되었습니다. 시편 기자와 같이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한 말씀을 기억하면서 고난을 극복하여야 합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JF오벨랑 목사(1740-1826)님은 어려운 일을 당하여 불평하는 성도에게 두 개의 보석을 보이면서 설명하였다고 합니다. 두 개의 보석을 내놓고 “어느 것이 더 빛나고 값이 나가겠습니까?” 얼른 보기에는 똑같아 보여도 하나는 눈부신 빛을 뿜고 있고 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더 흐릿해보이는 보석은 8번 깎았고 빛나는 보석은 80번을 깎았기 때문입니다. 시련은 하나님이 우리를 값지게 하기 위하여 깍으시는 기회인 줄 믿어야 합니다. 고난 당한다고 낙심하거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고난 당할 때마다 ‘이 고난도 내게 유익이다’라고 해석하여야 합니다.

3) 고난 극복을 위하여 할 게 있습니다. 인내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하였습니다. ‘이제는 못 참아’라는 생각이 들 때에 ‘한 번 더 참자’로 고쳐야 합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잘 넘겨야 합니다. 마라톤 선수가 ‘이제 더는 못 가. 한 발 자국도 못 가.’ 그런 생각이 들어올 때에 육체적 포기를 안해야 한답니다. 사무실을 정리하고 퇴근하려는 순간에 사장이 들어오면서 “김대리, 이것 좀 해 주어야겠어.” 그 때 “이 이상 못 참아. 사표 쓰자.” 그 순간에 사표 쓰면 실패합니다. 그 시간에 “참자”라고 해야 합니다.

부부가 참을 수 없을만큼 화가 치밀어 오르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래 잘 됐어. 이 판에 헤어져야 한다.” 그 시간을 참아야 합니다. 인내, 또 인내하여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장점이 많은 민족입니다. 그러나 단점은 바로 인내력 부족이라고 말합니다. 조급성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근자에 ‘쏜다 족’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20대들이 하는 말, “오늘은 내가 쏘고 내일은 네가 쏴라”라고 합니다. 이 말은 친한 사람들끼리 식사한 후 돈을 지불하는 사람한테 쏜다고 한답니다. 그런데 IMF구두라는 말도 있습니다. 신을 벗을 때마다 끈을 풀었다 묶었다 하면 내가 지불할 것도 성질 급한 사람이 쏘는 것을 말합니다.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은 적은 것부터 손해를 본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큰 일을 하고 복 되게 살려고 하는 우리는 시련이 왔다고 그대로 포기하거나 절망할 수는 없습니다. 참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실패요, 어려움의 연속이었다고 그대로 인생을 실패와 좌절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역전승해야 합니다. 잘 참고 견디는 삶의 철학을 가져야 합니다. 전도할 때에도 인내심을 갖고 해야 합니다. 단 한번에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적어도 아홉 번을 만나면 성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내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오늘을 사는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앞서간 성공적인 삶을 산 신앙의 성공자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바로 욥같은 사람입니다. 시련 중에서 완전히 비참하게 인생을 끝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갑절의 축복을 받고 역사에 길이 남는 복 된 신앙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1)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다운 감사를 했습니다. 오늘 바로 우리는 감사다운 감사를 실천해 봅시다.

2)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을 잘 극복하였습니다. 그럼으로 오고 오는 시대에 시련을 겪는 모든 이들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인생을 패배라고 생각할 때에 다른 이들이 갖지 않는 비젼과 믿음을 갖고 실패를 모르는 인생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실패하는 삶이라면 이제부터 역전승으로 바꾸는 삶의 지혜를 가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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