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30세와 40년 / 삼하 5:1-10

  • 잡초 잡초
  • 546
  • 0

첨부 1



제 목 : 30세와 40년
본 문 : 사무엘하 5:1-10
설 교 :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지도사상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 본문의 다윗을 통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로 역사를 연구하는 가트 린(Garth Lean)이 ‘하나님의 정치(God's Politician)’, 부제는 '윌리엄 윌버포스의 투쟁(William Willberforce's Struggle)'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가트 린은 1787년 27살의 젊은 나이에 국회의원이 된 윌버포스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인 국회의원으로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감동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윌버포스는 당시 영국 수입의 3분의 1을 차지하던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무려 백 오십 번이나 되는 의회연설로 영국 사람들의 양심과 신앙에 호소했고, 죽기 삼일 전인 56년 만에 노예 제도가 폐지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복권 시스템을 폐지시키기 위해 이십 년간 투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병들었을 때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정부 예산으로 설립하게 했습니다. 문맹 퇴치 운동과 더불어 야만적인 형벌시스템을 개조했고, 벌보다는 갱생 시스템을 통해 건강한 사회인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상류사회 남자들이 서로 결투를 벌이는 제도를 폐지했으며, 호화 파티만 일삼던 상류층 부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로 하여금 여가 시간을 사회봉사에 쏟도록 했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그 당시 영국인들에게 가장 미움 받는 사람이었지만,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영국의 양심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는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의 위치를 확인하며 삶의 현장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사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부터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는 사람 말입니다. 조금만 은혜 받으면 신학을 해서 무조건 목사로 헌신하려는 분위기에서나 아니면 반대로 세상과 쉽게 타협해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독특함과 사명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모습이 만연한 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지도자가 정말 필요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는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정치와 경제와 사회에 뛰어들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지닌 영향을 가지고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의 첫 번째 작품은 지난주에 말씀대로 사울이었고, 사울이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세상 기준을 따라가다 변질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다음 사람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소년, 양들과 함께 묻혀 지내며 살던 목동 다윗을 발견해내고 그의 가슴 속에 하나님의 비전과 하나님의 꿈을 심게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바로 사무엘과 같은 역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숨겨져 있어 눈에 띄지 않는 그러나 가능성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내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비전과 꿈을 심어주며, 그가 어느 삶의 영역으로 보내지던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며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꾼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도 역시 세상에 파송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였습니다. 구세주로 모심으로써 구체적으로 우리는 가정과 직장,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땅의 역사와 우리 삶 속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 하나님 나라는커녕 어둠의 나라로 어두워져 가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가 처한 각각의 다양한 환경 속에서 맡겨주신 일을 감당하며,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다윗의 삶을 통해서 우리 삶의 모습을 다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4절 5절 말씀, “다윗이 삼십 세에 위에 나아가서 사십년을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칠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면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다윗은 십칠 세에 사무엘로부터 ‘너는 이 땅의 왕이 될 것이다’하는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궁에 들어갔을 때 사무엘을 통해 받은 비전과 꿈이 이뤄지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 때부터 오히려 고난과 어려움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시고 나서 하나님의 때를 정하십니다. 하나님이 때를 정하실 때는 대체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에서 의지할 만한 분이 하나님 밖에 없음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분명한 믿음을 갖게 하시는 때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일을 맡기실 때에 감당할 능력을 갖추도록 하고자 훈련하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열일곱 살에 부르심을 받아서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십삼 년 동안 파란만장한 인생의 다윗이었습니다. 먼저 골리앗이라는 두려움 앞에서 그의 인생에 닥쳐오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막내였기 때문에 의존적이었을 지도 모르는 다윗은 자기를 사랑하고 돌보아 주어야 하는 장인 사울 왕으로부터 집요하게 추적당하며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철저하게 배웠습니다. 사람은 신뢰할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과 사랑하는 아내 미갈과의 아픈 헤어짐을 경험했습니다. 인생 중에 함께 영원히 가고 싶은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사의 모든 세파를 다윗은 경험했습니다. 그는 외로움과 고독이 무엇인지도 알았습니다. 광야 동굴 속을 전전긍긍하며 죽음의 그림자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헤쳐 나갈 때에 문득 산을 바라보며 외로움과 고독을 느꼈을 지도 모릅니다. 고독과 외로움을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알지 못하고 시를 알지 못합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면 외로움이 묻어있으면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십삼 년을 지냈기에 그는 일평생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세워드리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지만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버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삶의 현장에서 희미해져 버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훈련을 받고 난 사람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고난과 고통 가운데 배웠던 것이 무엇일까요? 그는 목동으로서 양떼를 돌보면서 어떻게 하면 양을 보호하며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양떼를 인도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그 고민과 의문을 가지고 양들을 인도해 갔습니다. 양을 풍성하게 먹였습니다. 그가 쫓겨 다니며 광야에 숨어 다닐 때에 자기를 따라다니던 가난하고 비루한 사람 400여 명을 먹이고 굶기지 아니하는 훈련을 바로 양 떼를 돌보며 받게 됩니다. 왕이 되었을 때에도 자기에게 맡겨준 백성을 굶주리게 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책임감에 대해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그리고 왕으로서 그 백성을 다스리고 인도하고 지키는 직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 기간동안 훈련받았던 것입니다. 십삼 년이 지난 다윗은 삼십 세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요셉은 서른 살이 되기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형제에게 팔려가기도 하고 모함을 받기도 하고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면서 총리대신이 되기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고도 이십오 년을 기다려야 했으며 모세는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해야 한다는 꿈을 품고 있으면서도 사십 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의 쓰라린 맛을 보게 하면서까지 기다리게 하실까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신분을 얻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주어졌으면서도 왜 우리는 왕처럼 고고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환경과 관계없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신뢰가 있으며 그 신뢰의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가 하나님의 시기와 때입니다.

사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제사장 사무엘이 오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한 나머지 제사장이 드려야 할 제사를 스스로 드렸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는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신다는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임의로 해석하여 아내 사라와 논의한 후에 사라의 몸종 하갈과 동침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날, 약속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인생에 가장 힘들고 고통스런 존재로 남게 됩니다. 이 두 아들의 분쟁이 지금까지 중동의 문제입니다. 

요셉이 삼년을 기다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감옥에 있을 동안 요셉의 내면은 훈련되었겠지만 감옥에서 삼년을 기다리지 않았다면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애굽의 관리로 등용될 수 없는 사회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가 감옥에 있을 동안 하나님은 요셉의 내면세계를 변화시키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애굽의 다른 많은 관리들의 생각에 히브리 족속의 노예라는 생각 대신 자기들을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바꾸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때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역사가 토머스 칼라힐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역경을 극복하는 사람이 백 사람이라면 번영의 시절에 잘 처신하는 사람은 한명에 불과하다” 왜 그렇습니까? 없을 때는 하나님께 매달리며 간구합니다. 그러나 얻고 나면 돌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요구했던 것을 얻어서 누릴 줄은 알지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사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쓰시기 원하는 사람은 그가 평안할 때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반드시 훈련시키십니다. 여러분! 이 땅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사람이 없어서 이만큼 빈곤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받은 은혜대로 삶의 현장에서 섬기며 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시대가 어두워져 가는 것입니다.

현 시대의 흐름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고 남다를 축복을 받았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만큼 책임지셔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축복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축복의 삶의 현장에서 내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라고 하나님께 질문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원하십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오십육 년간을 기다리면서 영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하나씩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윌버포스를 인격적으로 또한 내면적으로 다듬어 가시면서 그로 하여금 영국의 다른 문제들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치하지 못하겠다는 유혹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비전과 꿈을 심어주셨던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사람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때를 살아가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주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고난과 괴로움이 많은가에 대해 생각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인위적으로 일을 처리해 나간다면 하나님의 때에 그 결과는 가장 큰 고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인내하며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프로그램 앞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가만히 기다리는 기다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은혜를 주셨다면 우리는 지금 또 다른 하나님의 때를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축복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릴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 어려운 때를 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제 손으로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다윗은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통일한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통일한 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둘째,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회개하는 자의 모습 때문입니다. 다윗의 인생은 오십까지는 아름다운 인생이었습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의지하며 외로울 때 하나님께 의지하는 풍요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십 세에 뜻하지 않은 결정적인 죄를 범하게 됩니다. 이 일은 다윗의 운명을 바꾸어 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더욱 사랑하셨고 그의 인생을 끝까지 붙들어 주셨고 그의 지도력을 회복시켜주셨고 그의 구원의 즐거움을 주시기를 멈추지 않으셨고 그의 삶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럴까요? 바로 다윗의 회개하는 모습 때문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열 가지 계명을 정확하게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함으로 밧세바의 자녀를 통해 메시아가 오실 조상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실패와 실수까지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 역사의 동참하는 기회를 허락하신다는 뜻입니다.

회개라고 하면 기독교 용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를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병에 걸렸다고 다 죽는 것은 아닙니다. 넘어졌다고 다 주저앉는 것은 아닙니다.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병에 걸렸어도 회복하고 살아날 수 있는 길을 아는 사람은 살아납니다. 인생이 실패와 낙심과 죄 가운데 주저앉은 것과 같이 있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이 회개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인생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다윗은 알았습니다.

시편 51편, 다윗의 회개를 보면서 어떤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회개는 진실한 회개였다고 말하는데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핑계대거나 방어적이지 않았고 시인했습니다. 두 번째로 이 시를 통해서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나서, 나이 들어 몸이 차가워졌을 때 신하들이 그의 몸을 따뜻하게 해 줄 처녀를 그 방에 들였습니다. 그 때 다윗은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철저하게 돌이켰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죄로 인해 깨지고 부서짐으로 철저한 겸손과 진지함이 있었습니다. 나아가 철저하게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으며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바른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 중에 완벽한 리더가 누가 있을까요? 이 자리에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영역을 본다면 온전히 설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완벽한 사람이 있을까요?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죄 짓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는 사람일까요? 오늘 다윗은 바로 그 죄와 실패 속에서 주저앉지 않고 그 실패 속에서 다시금 하나님께 돌아갈 방법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바로 그것은 회개의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계속해서 쓰셨습니다. 여러분! 누구나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은 번영과 안락함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죄가 싹트고 어느 날 그 죄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죄가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 죄 때문에 다시금 일어서지 못하는 인생도 많습니다. 반면에 실패와 죄에서 회복된 인생도 많습니다. 다윗은 철저하게 자신을 용서하시는 분, 회복시키시는 분, 다시 쓰시는 분을 알았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어떻게 합니까? 사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 점쟁이에게로 갑니다. 여러분 점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진정 회복될 길을 몰랐다는 것이 결정적입니다. 점쟁이는 우리를 회복시키지 않습니다. 사람은 우리를 세우지 못합니다. 사람을 세우기도 하고 넘어뜨리기도 하고 회복시키기도 하고 쓰시기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회개를 할 수 없습니다. 진실로 인생이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시편 51편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죄를 범함으로 나왔습니다. 다윗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주옥같은 시편 51편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바로 회개하는 자의 회개하는 모습까지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 미국 교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목회자요 설교자요 학자였던 고든 맥도날드가 있습니다. 그의 강의는 기가 막힐 정도로 잘 했고, 설교를 듣는 사람은 곧 구세주를 영접하게 되는 달변가요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도덕적인 잘못으로 교계에서도 잊혀져가고 사람들에게도 잊혀져갔습니다. 한때 장래가 촉망되었던 그는 돌아가야 할 자리를 알았습니다. 회개하고 나서 쓴 책이 ‘내면세계의 성장과 영적 성숙’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미국의 신학생들이 졸업하고 목회를 시작하면서 읽어야 하는 필독서로서 제시되는 책입니다. 자기의 연약함과 실패를 토대로 회개하는 과정을 통해서 얻은 회복의 길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삶을 비교해서 보여줍니다. 업적중심의 사울이 아니라 다윗처럼 철저하게 하나님께 돌아가는 인생이 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쓰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베드로를 보십시오. 어떻게 보면 가룟 유다보다도 더 교활하고 나쁜 죄질의 사람이며 인격적으로 결함이 많은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고 자기 양심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유다의 양심은 그를 자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돌아갈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더 흉악하고 파렴치한 베드로는 그가 죄를 범했을 때 돌아갈 길을 알았습니다. 주님 앞으로 돌아가는 회개의 통곡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깊은 실패와 좌절에서 죽을 수도 있고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회복될 수 있는 길을 찾으십시오. 진심으로 회개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우리의 인생을 다시 사용하시고 존귀하게 쓰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절대 넘어지지 않습니다.

셋째,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섬김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말하는 이 제사장과 장로들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사울과 함께 있으면서 다윗을 죽여야 한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 때문에 다윗은 십삼 년 동안 쫓겨 다녀야 했고 아내를 빼앗겨야 했습니다. 우리에게 뼈아픈 아픔을 준 사람들에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용서하지 못해…….’ 그러나 다윗은 이런 사람들을 품었습니다. 믿음의 여유에서 나오는 넉넉함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섬기는 자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찾아내어 왕의 밥상에서 밥을 먹게 하였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애도하며 금식하기까지 섬기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밥 얀디안이라는 사람이 쓴 책 ‘다윗 섬기는 리더십’에서 시편 31편을 분석하면서 다윗의 리더십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로 다윗은 교만을 철저하게 배제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지나치게 질투심이 강하고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지도 않고 타인의 장점을 무시합니다. 그에 비해 다윗은 겸손하게 남의 장점을 인정했습니다. 남에게 인정을 베풀었습니다. 부족한 사람을 세워주고 격려해주며 책임은 자기가 지고 공적은 다른 사람에게 돌렸습니다. 그가 목마르다고 했을 때 병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물을 가지고 왔을 때 그 물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 만큼 섬김에 대한 삶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다윗은 감정을 잘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감정이 불안하면 신뢰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바로 다윗은 자신의 정서적인 면을 다스릴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읽어서 다른 사람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자기의 삶을 잘 조절했던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조상들이 남긴 유산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찾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로부터 배웠고 조상으로부터 배웠고 적으로부터도 배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섬기는 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갑니까? 좀 더 영향력을 미치는 자리에 서기위해 우리는 살아가지 않습니까? 쉽게 말해서 내 말이 잘 먹히는 그런 자리에 앉길 원하지 않습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자리에 서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진정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섬기는 자리에 서라고 말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십시오. 오늘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는 사람의 삶의 자세는 무엇일까요? 바로 끝까지 섬기는 모습에 있습니다. 

제자들의 발까지 씻기셨으며 죄인 된 인간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살리시어, 예수 그리스로 이름 앞에 모든 권세를 무릎 꿇게 만드신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얼마나 살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를 가정에도 두셨고, 직장에도 두셨습니다. 그 곳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내가 준 것 가지고 누리며 잘 살아라.’ 그렇게 말씀하실까요? 주님은 심판하시면서 반드시 물으신다고 하십니다. 내게 주신 삶의 현장, 내게 주신 귀한 달란트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오십육 년을 기다리며 갈등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사람답게 서기 위해 몸부림쳤던 윌버포스, 그가 이 땅을 떠나기 삼일 전에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뤄지는가를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은 그의 삶을 온전히 받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며 살아갑시다. 가정, 교회, 직장 그리고 민족과 나라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영적 지도자로 우뚝 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