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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늘의 동방박사들! / 마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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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오늘의 동방박사들!
본 문 : 마 2:1-12
설 교 :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약간 차이가 납니다.

  마태복음에는 먼저 아기 예수의 탄생 과정이 설명되고 있고, 이어서 동방박사들이 별의 인도를 따라 찾아와서 경배한 과정이 설명되고 있고, 이어서 헤롯의 박해를 피해 애굽으로 피난하는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에는 아기 예수의 탄생 과정이 설명되고 있고, 이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따라 목자들이 찾아와 경배하는 과정이 설명되고 있고, 이어서 성전에서 할례를 받으시고 고향 갈릴리로 돌아가는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물론 이 차이는 마태와 누가가 그 많은 내용 중에 필요한 것만을 자신의 관점에 따라 기록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기록에 공통된 것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아기 예수가 탄생하신 뒤에 경배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동방박사들에게 경배를 받으셨고, 누가복음에는 목자들에게 경배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배하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 보면 proskunevw (proskuneo)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에게 가까이 가다’라는 뜻의 pros와 ‘입맞추다’라는 뜻의 kunevw가 합성된 말입니다. 그러니까 글자 그대로의 뜻은 ‘다가가서 입맞춤으로 존경심을 표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에 기초해서 일반적으로 ‘엎드려 절하여 존경심을 표하다’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당시에 이 경배하다는 말은 두 가지 경우에 쓰였습니다. 하나는 부름을 받은 신하나 백성들이 왕 앞에 나와서 문우를 여쭐 때 경배한다는 말을 썼습니다. 다른 하나는 신 앞에 나와서 예배드릴 때 경배한다는 말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다는 것은 이 아기 예수가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탄생하신 이 아기 예수가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뜻이고, 메시야로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아기 예수가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알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아기 예수가 이 세상에서 경배 받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당시에 메시야로 아기 예수가 이 땅에 탄생하셨지만 이것을 알고 자기 발로 찾아와 경배한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4-5를 보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메시야가 오신다면 베들레헴에 오실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찾아와서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를 경배할 사람들을 준비하셨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에게 천사를 보내어 베들레헴 마구간으로 가서 경배하게 하셨습니다. 동방박사들에게 별로 메시지를 보내셔서 그 먼 거리를 마다 않고 와서 경배하게 하셨습니다. 전혀 뜻밖의 사람들을 보내셔서 경배케 하셨습니다.

  오늘도 이 성탄 절기에 하나님께서는 아기 예수께 경배할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 땅에 오신 메시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구세주께 경배할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실 왕 중의 왕께 경배할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맞으면서 진심으로 이 땅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를 저 동방박사의 심정으로 저 목자들의 심정으로 경배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의 성탄절을 맞이하는 성도들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그러면 본문을 살피면서 아기 예수를 경배한 동방박사들이 주는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늘을 살폈다>.

  1절을 보면 ‘동방으로부터 박사들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박사라고 번역한 말은 헬라어 원어 성경을 보면 mavgo"(magos)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은 종족의 이름이기도 하고 직책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고대 역사학자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바사 곧 페르시아의 제사장직을 맡은 족속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레위지파 족속들과 같은 의미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 마고스 즉 박사들은 지혜의 사람들이며 특히 과학 분야에 전문가들이었습니다. 당시 과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던 천문분야에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주로 밤하늘의 별을 연구하며 그 안에서 세상 이치를 깨닫고 일기 변화라든지 세상의 변화를 예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특별한 징조를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특별한 별 하나가 하늘에 나타난 것입니다. 다른 별들처럼 일정한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9절을 보면 또 특정한 곳에 멈추어 서기도 했습니다. 박사들은 이 분야에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특별한 징조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어떤 곳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별의 인도를 따라 그 먼 거리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박사들은 남들과 다른 세계를 보며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남들은 낮에 무엇인가를 보지만 이 박사들은 밤에 무엇인가를 보며 살았습니다. 남들은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찾지만 이 박사들은 저 하늘에서 무엇인가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밤하늘에 이상한 징조가 나타났지만 아무도 그 징조를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밤하늘에 메시지를 보내셨지만 아무도 그 메시지를 듣지 못했습니다. 이들만 그 징조를 보았고, 이들만 그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요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책 가운데 조이 도우슨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자는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다고 여겨질 때 생각해 보아야 할 것 12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제 마음 속에 와 닿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의식 중이든 무의식 중이든 당신이 지정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응답하기를 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라는 문항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방식만을 고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는 지적입니다.

  우리가 텔레비전을 시청할 때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으면 그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채널을 선택해야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채널에 고정해 놓고는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자기가 선택한 채널에서 방영해 주기를 기다린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그 프로그램을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채널로 채널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채널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동방박사들처럼 하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집착하고, 이 땅만 바라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땅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찾으려 할 때가 많습니다. 이 세상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이 세상 것에 집착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조이 도우슨이 말하는 것처럼 세상의 잡음이 하나님의 음성 듣는데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동방박사들처럼 하늘을 관찰하는 전문성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천문학에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밤하늘에 별을 봐도 별들의 이름도 별 자리도 모릅니다. 어느 별이 어떤 방향으로 돌고, 어느 별의 밝기가 몇 광년이고...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내용을 잘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면 훈련을 통해 전문성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들을 귀’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고 그래야 하나님의 뜻대로 주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먼 길을 왔다.>

  본문 1절을 보면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라고 되어있습니다.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서 출발했던 곳은 저 머나먼 페르시아 땅입니다. 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 땅이니까 박사들이 별을 따라 이동한 거리는 이란에서 이스라엘까지 수천 키로가 넘습니다. 말이나 낙타를 탔다고 해도 여러 달이 걸렸을 것입니다. 또 그 길이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수많은 산을 넘어야 했습니다. 사막을 횡단해야 했습니다. 별을 따라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낮에는 방향을 알 수 없어서 밤에만 길을 가야 했을 것입니다. 저들의 여정이 정말 고난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진정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서는 고난이 필요합니다.

  금번 중국 가가교회 헌당예배를 다녀오면서 또 한가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헌당 예배에 재적 교인 1500명 거의 전원이 참석했습니다. 저는 두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헌당예배 드린 날이 수요일 오전이었습니다. 참석할 수 없는 사정이 참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거의 전원이 참석했습니다.

  우리 교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수요일 오전에 특별 집회를 한다고 했을 때 재적 교인들 가운데 얼마나 참석할 수 있을 것인가? 정말 자신이 없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수요일 오전에 특별 집회를 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가가진은 우리나라로 볼 때 시골 조그만 읍입니다. 인구가 얼마 되지 않은 곳입니다. 그곳에 1500명 교회가 들어선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 마을에 그 많은 사람들이 예배드리러 모일 수 있을까? 예배드리기 위해 대부분 한 시간 이상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어떤 할머니는 두 시간 이상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그 날 예식이 후속 프로그램까지 포함하면 4시간 가까이 진행됐습니다. 2시간 걸어왔고, 4시간 예배드리고, 또 2시간 걸어서 집에 갑니다. 하나님께 예배 그리기 위해 하루가 꼬박 지나갑니다.

  우리 교회를 생각했습니다. 한 시간 걸어서 교회 올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니 차 타고 한 시간 이상 걸려서 교회 올 사람이 얼마나 될 까? 물론 우리 교회에 저 포천에서 저 수원에서 저 인천에서 1시간 이상 걸려서 교회 오시는 분이 일부 계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어떨까요?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한편으로 놀라면서 또 한편으로 두려웠습니다. 혹시 이러다가 한국교회의 초대가 이 중국 땅으로 옮겨가는 것은 아닌지? 중국교회가 이런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큰 역사가 더 할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런 열심을 잃는다면 앞으로 소망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고난과 유혹을 이기고 열심으로 드리는 경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물론 시대가 점점 다원화 현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잣대로 주일 성수나 교회 봉사를 판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과거처럼 주일을 지키고 교회를 봉사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생기고 피치 못할 사정들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주님께 경배 드리는 것보다 그런 이유들이 우선시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이런 이유와 핑계를 통해서 신앙 편이주의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이 다원화 되어가는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이 찬송을 부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 예수 보다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주 예수 보다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주 예수 보다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예수 보다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예물을 드렸다.>

  본문 11절을 보면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귀중한 예물을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박사들이 준비한 예물은 세 가지입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입니다.

  전통적으로 황금은 왕에게 바치는 예물로 알려져 있던 귀한 보물입니다. 아기 예수를 탄생하신 왕으로 경배드리기 위해 이 예물을 준비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유향은 고대 사회에서 제사에 빼 놓을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며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도록 사용한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경배 드리기 위해 이 예물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리고 몰약은 고대 사회에서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사용하던 값비싼 보물입니다. 아기 예수를 장차 십자가에서 우리 위해 돌아가실 분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로 경배드리기 위해 예물을 준비한 것입니다.

  이 예물들은 박사들이 이미 주님의 요람에 경배하기 위해 가져온 것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주님의 탄생 때부터 주님께서 참된 왕이 되실 것과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실 것과 마침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구주가 되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예물들은 단순한 축하 예물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예물들입니다. 박사들의 최고의 정성이 담긴 예물들입니다. 왕이요 대제사장이요 구주께 드리는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물이 그래야 합니다. 주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물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최고의 정성이 담긴 예물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예물입니다. 쓰다 남은 것을 드리거나 마치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적선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인색함에 드려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헨리 밴 다이크라는 분이 쓴 “네 번째 동방박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설을 기초로 해서 정리해 놓은 책입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페르시아의 한 지도자였던 알타반은 친구들로부터 전갈을 받고는 다른 동방박사 세 사람을 만나려 길을 떠났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자기도 고생 끝에 베들레헴에 도착해 보니 삼일 전에 3명의 동방박사가 이미 경배를 마치고 돌아가 버렸고, 아기 예수도 애굽으로 피신하셨다는 소식만 듣게 됩니다.

  허탈해서 쉬고 있는 중에 갑작스런 말발굽 소리와 비명소리 그리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에 놀라 주인집으로 들어갔습니다. 헤롯의 군인들이 아이를 빼앗아 죽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왕께 드리려 준비한 청옥을 꺼내 군인에게 주며 살려달라 부탁했습니다. 아기를 구했지만 왕께 드리려던 한 가지 예물을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알타반은 아기 왕을 찾아 애굽으로 달려갔습니다.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다 절망 속에 생계를 위해 또 하나의 예물인 루비를 팔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빈민촌의 사람들과 나누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33년이 되던 해 그는 아직도 예루살렘에서 그 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예수가 사형당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자기가 찾던 왕이 돌아가신다는 소식을 듣고서 골고다 언덕으로 달려갔습니다. 막 시장을 빠져나온 그는 한 소녀가 채찍에 맞으며 노예로 끌려가는 비명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왕께 바치려던 또 하나의 예물인 진주를 주고 그 소녀를 구했습니다.

  왕께 드릴 예물을 다 써 버린 알타반은 예수의 처형과 함께 지진이 일어나자 무너져 내린 집 더미에 깔려 죽게 됩니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구나 안타까움 속에 죽어 가는 알타반에게 어디선가 은은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알타반이 대답했습니다. “제가 언제 병드셨을 때, 목마르실 때, 옥에 갇히셨을 때 도와 드렸나요...“ 다시 은은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니라...”

  그 순간 알타반은 미소를 지으며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예물을 어떻게 드려야 할 지를 말씀해 줍니다. 다른 세 동방박사들처럼 주님 앞에 직접 예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가진 소중한 것들을 나누는 것 그것을 또한 귀한 예물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려운 이웃들과 가진 것을 나누는 일에도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것도 소중한 예물로 받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성탄절기는 주님께 경배 드리는 절기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아기 예수께 경배드릴 동방박사들을 찾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의 동방박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늘 하늘을 바라보며 아기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고난을 이겨내며 경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준비한 예물을 들여야 하겠습니다.


  # 기도/

      늘 하늘을 바라보며 살게 하시옵소서.
      고난을 무릎 쓰고 주님께 경배하게 하옵소서.
      정성을 다하는 예물을 주께 드리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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