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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의 베들레헴 / 마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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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당신의 베들레헴 
본 문 : 마태복음 2:1-10
설 교 : 임대식 목사 (평화교회)


힘들고 답답했던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이때, 우리에게 희망을 약속하는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매년 새 해를 맞이하기 한주일 전에 성탄을 맞이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탄생으로 새 해를 맞이할 때 진정한 새 해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절망의 세상에 희망으로 오셨습니다. 죽음의 세상에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죄악의 세상에 구원의 주로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사건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사건입니다. 베들레헴 하늘을 울리던 아기 예수의 울음은 온 인류의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심으로 우리 인생에게는 하늘의 길이 열리게 되었고 역사는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온 우주 만물은 제 기능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이신 예수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셨지만, 이 사건의 엄청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분을 만날 수 있는 특권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탄을 바르게 준비하지 못한 인물로 먼저 헤롯 왕이 등장합니다. 당시 유대 땅을 통치하고 있던 헤롯은 메시야가 유대 땅에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경배하러 왔습니다” 물었습니다.

이에 헤롯 왕은 박사들을 불러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가서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나에게 고하여 나도 그를 경배하게 하시오” 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헤롯 왕은 어떻게 했습니까? 사람을 보내서 베들레헴과 그 주위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를 다 죽여 버렸습니다.

나 이외에 다른 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늘의 왕이 그리도 못마땅 했습니다. 역사와 삶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만이 역사의 주인이요 통치자라고 고집했습니다. 이 독선과 오만과 아집으로 살륙의 칼을 가지고 성탄절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 헤롯의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신의 참 구주와 주님으로 탄생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경배하지도 않는 불신이 바로 헤롯적인 요소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요, 하나님의 간섭과 사랑과 역사도 거부하는 인간의 교만이 바로 헤롯적인 성품입니다.

어떤 이는 교회에 나가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헌금을 드리는 것이 재산의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나는 어떻습니까? 예수 믿으면 손해 볼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시간도 재물도 양보하지 않은채 그저 일주일에 한번 교회 출석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내 삶의 주인이어야지, 예수님이 나를 주장하는 것을 거부하는 오만한 생각은 없습니까?  역사와 삶의 주관자로서의 예수님을 과연 나는 인정하고 이 예수님을 진정 경배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내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성탄을 잃어버렸던 헤롯의 비극을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서기관들을 들 수 있습니다. 서기관이란 당시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헤롯 왕이,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었을 때, “유대 땅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구약 성경에 예언된 바입니다” 대답했습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에 통달한 사람들입니다. 대단히 박학박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 가운데 이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아는 지식으로 그치고 만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 탄생 장소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까지 찾아갈 발이 없었습니다. 아기 예수님 앞에 내어놓을 손이 없었습니다. 손도 없고 발도 없고 다만 머리만 있는 단순한 지식, 이것이 서기관들의 비극이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다 보면, 소위 종교적 지식은 저절로 늘어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리고 성경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아는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아는 지식에 따라 내 삶을 바꾸어 보고자 하는 의도가 없습니다. 마음이 없는 머리만의 종교의 비극입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그러나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을 마귀 사단도 압니다. 그래서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 떨 뿐이지, 예수님을 경배하지도 찬양하지도 않습니다.

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행동에 옮기지 않는 싸늘한 지식은 마귀 사단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탄절이 예수님 탄생하신 날임을 많은 이들이 압니다만, 예수님을 경배하지도, 내 마음에 모셔 들이지도 않는 이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알기는 알았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던 서기관들의 비극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똑같은 종류의 얼굴들을 우리 교회에서 발견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삶에 의미와 변화를 주지 못하는 싸늘한 지식으로 만족하는 어리석은 자리에 있지 말아야 합니다. 삶의 변화와 행함이 있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셋째로 여관 주인을 들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7절을 보면, “어머니 마리아가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베들레헴에는 호적 신고를 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관 방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말구유에서 탄생하십니다.

많은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던 여관 주인은 얼마나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평화의 왕, 만유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이 여관 주인은 맞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역사는 기원 전과 기원 후로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역사를 다시 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또 많은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삶이 변화되었다고 입술을 모아 증언합니다.

인간 역사와 나의 삶을 뒤바꾸어 놓으신 그 분, 이 구원의 드라마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지만, 그 분은 바로 문 밖에 계셨을 뿐입니다. 여관 주인은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몹시 바빠서 그랬을 것입니다. 많은 손님들이 찾아오니 오죽 바빴겠습니까? 온 가족이 부산을 떨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방을 정리한다, 식사 준비한다, 말이나 당나귀의 죽을 쑨다, 이부자리 심부름이다, 물 심부름이다, 아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것입니다.

그런데 뒤늦게 찾아온 초라한 나그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못하고 동정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팁을 두둑히 주는 귀빈들을 맞이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정말 중요하고 귀한 손님이신 예수님을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2001년 성탄절이 내일 모레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정말 얼마나 바쁩니까? 살림살이에 바쁘고, 사업에 골몰하느라 바쁘고, 먹고 사느라고 바쁘고, 진학 문제로 바쁘고, 성탄 행사 준비에 얼마나 바쁩니까?

그러느라고 성탄에 대한 참 의미를 되새기지 못하고, 준비도 못하고 있다가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무심코 놓치고 마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연중 행사로 성탄절을 보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쁜 이유는 돈을 벌어야 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손님을 맞이해 돈을 버는 재미에 여관 주인은 몹시 바빴을 것입니다. 물론 요즈음같이 어려운 때에 어찌 돈 버는 일에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땀흘려 일하는 것이 어찌 귀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살아 가려면 돈 버는 일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가장 중요한 문제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내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는가? 이 짧은 삶이 끝날 때에 나는 저 영원하신 분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 내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는 이 순간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답할 생각은 않고, 눈 앞에 삶, 생활의 문제, 돈의 매력에 빠져있는 비극이 오늘도 내 삶에 계속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여관 주인은 피곤하고 곤해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 일에 바쁘고 분주하다보면 심신은 피곤하고 고달프게 되기가 쉽습니다. 피곤하고 지치면 만사가 다 귀챦아집니다.

한참 피곤한 늦은 밤에 요셉과 마리아가 찾아와서 아무리 안타깝게 호소해도, 지칠대로 지친 여관 주인에게는 그 사정이 들려지지 않았나 봅니다. 세상 일에 시달리고, 생존경쟁에 시달리고, 이래저래 지치고 피곤한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성탄절을 제대로 맞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하늘로서 내려 주시는 참 기쁨과 영광의 계절을 육신의 피곤과 정신적 권태와 무관심과 부주의로 말미암아 첫 번 성탄절처럼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리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나의 생명의 길과는 별 상관이 없는 하나의 공휴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복된 계절로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베들레헴의 첫 번 성탄절을 놓쳐버린 사람들의 모습을 닯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헤롯처럼 이기심과 욕심과 교만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이가 없기를 바랍니다. 서기관처럼 알 것은 다 알면서 행동이 없는 죽은 믿음을 소유한 이가 없기를 바랍니다. 여관 주인처럼 일상적인 세상 일에 바빠서 예수님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이가 없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가장 슬픈 구절 중의 하나는 요한복음 1장 11절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이 땅에 오셨으나 많은 사람들은 그 분을 맞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여기서 끝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다음 구절은 이렇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과연 오늘 당신의 성탄절은 어떻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나는 2001년 성탄절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바라기는 이 땅에 새롭게 탄생하시는 예수님을 나와 역사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살아계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감동과 기쁨과 감사를 회복해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의 종은 바로 이러한 우리들을 위해 울리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방박사를 통해서 성탄을 맞이하는 바른 신앙의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첫째로 동방박사들은 정성을 드려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멀리 동방에서 별을 보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사막을 가로질러 왔을 것입니다. 별을 따라 가야 했으니 낮에는 방향을 알 수 없었고 밤길을 걸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루 이틀에 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고 많은 시간이 흘렀을 것입니다. 물질적인 경비 만만치 않았을 것이며, 사막의 모래가 앞을 가로막을 때 죽을 고비를 여러 번이나 넘겼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 정성이 지극했습니다.

동방박사들에게 예수님 탄생을 알린 사건은 아마도 하나님은 정성과 마음을 잃어버리고 형식주의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 의식에 싫증을 내셨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만연된 병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 문명의 발달로 인해 평안함과 나태함에 빠져 생활에 감격이 없이 살아가는 병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소중한 것은 정성과 마음입니다. 그리고 나의 삶을 던지는 헌신과 열심입니다. 우리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우리의 정성없는 예배가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기에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10리, 20리 걸어서 교회에 나오셨습니다만 요즈음에는 집 앞 대문까지 교회 버스가 오지 않았다고 교회 출석을 포기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차 타고 교회에 왔는데 주차를 못해 짜증이 났다고 다시는 그 교회에 안 가겠다고 큰 소리치는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오늘 우리는 너무 쉽게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그러나 동방 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이 인류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이라 생각했기에 온갖 희생과 정성을 쏟어 예수님을 찾아가는 귀한 본을 보였습니다.

둘째로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나 경배했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경배한다는 말이 3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경배한다는 말은 무릎꿇는다는 의미입니다. 상대방을 최대한 높이며 존경할 때 행하는 마음의 표시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당대 최고의 학식을 갖추고, 높은 지위와 명예와 부를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먼 길을 달려와서 예수님이 온 인류의 구주이심을 믿으며 무릎을 꿇고 경배했습니다. 이처럼 성탄절은 만 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경배하고 그 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셋째로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나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빈 손으로 오지 아니하고 귀한 예물인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황금은 왕권을 의미하고, 유향은 제사장의 제사를 의미하며, 몰약은 썩지 않는 영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탄생하신 베들레헴 말구유는 비록 비천한 곳이지만, 받은 선물은 가장 귀하고 아름다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드리는 예물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황금처럼 변함없는 믿음, 유향처럼 향내나는 사랑, 몰약처럼 영원한 소망을 지금 내 마음의 베들레헴에 탄생하시는 아기 예수께 드리는 일이 귀한 일인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동방박사들의 본을 받아 올바른 성탄절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기뻐하심을 입은 이 땅 위에 하늘의 평화를 일구어 나가는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하나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기에 역사는 의미를 찾게 되었고, 나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줄 믿습니다. 성탄이 있기에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며,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살게 된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한 휴일로서 성탄절이 아닌, 내 영혼 깊은 곳에 우러나오는 설레임과 찬양으로 이 성탄의 계절을 맞이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감사와 감격 속에 기쁨의 성탄절을 맞이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웃을 바라보는 슬픔 속에 복음을 가지고 나아가 전하는 성탄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2001.12.23.

마태복음 2:1-10
당신의 베들레헴

힘들고 답답했던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이때, 우리에게 희망을 약속하는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매년 새 해를 맞이하기 한주일 전에 성탄을 맞이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탄생으로 새 해를 맞이할 때 진정한 새 해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절망의 세상에 희망으로 오셨습니다. 죽음의 세상에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죄악의 세상에 구원의 주로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사건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사건입니다. 베들레헴 하늘을 울리던 아기 예수의 울음은 온 인류의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심으로 우리 인생에게는 하늘의 길이 열리게 되었고 역사는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온 우주 만물은 제 기능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이신 예수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셨지만, 이 사건의 엄청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분을 만날 수 있는 특권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탄을 바르게 준비하지 못한 인물로 먼저 헤롯 왕이 등장합니다. 당시 유대 땅을 통치하고 있던 헤롯은 메시야가 유대 땅에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경배하러 왔습니다” 물었습니다.

이에 헤롯 왕은 박사들을 불러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가서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나에게 고하여 나도 그를 경배하게 하시오” 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헤롯 왕은 어떻게 했습니까? 사람을 보내서 베들레헴과 그 주위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를 다 죽여 버렸습니다.

나 이외에 다른 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늘의 왕이 그리도 못마땅 했습니다. 역사와 삶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만이 역사의 주인이요 통치자라고 고집했습니다. 이 독선과 오만과 아집으로 살륙의 칼을 가지고 성탄절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 헤롯의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신의 참 구주와 주님으로 탄생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경배하지도 않는 불신이 바로 헤롯적인 요소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요, 하나님의 간섭과 사랑과 역사도 거부하는 인간의 교만이 바로 헤롯적인 성품입니다.

어떤 이는 교회에 나가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헌금을 드리는 것이 재산의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나는 어떻습니까? 예수 믿으면 손해 볼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시간도 재물도 양보하지 않은채 그저 일주일에 한번 교회 출석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내 삶의 주인이어야지, 예수님이 나를 주장하는 것을 거부하는 오만한 생각은 없습니까?  역사와 삶의 주관자로서의 예수님을 과연 나는 인정하고 이 예수님을 진정 경배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내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성탄을 잃어버렸던 헤롯의 비극을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서기관들을 들 수 있습니다. 서기관이란 당시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헤롯 왕이,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었을 때, “유대 땅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구약 성경에 예언된 바입니다” 대답했습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에 통달한 사람들입니다. 대단히 박학박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 가운데 이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아는 지식으로 그치고 만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 탄생 장소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까지 찾아갈 발이 없었습니다. 아기 예수님 앞에 내어놓을 손이 없었습니다. 손도 없고 발도 없고 다만 머리만 있는 단순한 지식, 이것이 서기관들의 비극이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다 보면, 소위 종교적 지식은 저절로 늘어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리고 성경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아는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아는 지식에 따라 내 삶을 바꾸어 보고자 하는 의도가 없습니다. 마음이 없는 머리만의 종교의 비극입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그러나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을 마귀 사단도 압니다. 그래서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 떨 뿐이지, 예수님을 경배하지도 찬양하지도 않습니다.

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행동에 옮기지 않는 싸늘한 지식은 마귀 사단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탄절이 예수님 탄생하신 날임을 많은 이들이 압니다만, 예수님을 경배하지도, 내 마음에 모셔 들이지도 않는 이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알기는 알았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던 서기관들의 비극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똑같은 종류의 얼굴들을 우리 교회에서 발견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삶에 의미와 변화를 주지 못하는 싸늘한 지식으로 만족하는 어리석은 자리에 있지 말아야 합니다. 삶의 변화와 행함이 있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셋째로 여관 주인을 들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7절을 보면, “어머니 마리아가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베들레헴에는 호적 신고를 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관 방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말구유에서 탄생하십니다.

많은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던 여관 주인은 얼마나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평화의 왕, 만유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이 여관 주인은 맞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역사는 기원 전과 기원 후로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역사를 다시 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또 많은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삶이 변화되었다고 입술을 모아 증언합니다.

인간 역사와 나의 삶을 뒤바꾸어 놓으신 그 분, 이 구원의 드라마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지만, 그 분은 바로 문 밖에 계셨을 뿐입니다. 여관 주인은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몹시 바빠서 그랬을 것입니다. 많은 손님들이 찾아오니 오죽 바빴겠습니까? 온 가족이 부산을 떨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방을 정리한다, 식사 준비한다, 말이나 당나귀의 죽을 쑨다, 이부자리 심부름이다, 물 심부름이다, 아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것입니다.

그런데 뒤늦게 찾아온 초라한 나그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못하고 동정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팁을 두둑히 주는 귀빈들을 맞이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정말 중요하고 귀한 손님이신 예수님을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2001년 성탄절이 내일 모레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정말 얼마나 바쁩니까? 살림살이에 바쁘고, 사업에 골몰하느라 바쁘고, 먹고 사느라고 바쁘고, 진학 문제로 바쁘고, 성탄 행사 준비에 얼마나 바쁩니까?

그러느라고 성탄에 대한 참 의미를 되새기지 못하고, 준비도 못하고 있다가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무심코 놓치고 마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연중 행사로 성탄절을 보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쁜 이유는 돈을 벌어야 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손님을 맞이해 돈을 버는 재미에 여관 주인은 몹시 바빴을 것입니다. 물론 요즈음같이 어려운 때에 어찌 돈 버는 일에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땀흘려 일하는 것이 어찌 귀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살아 가려면 돈 버는 일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가장 중요한 문제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내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는가? 이 짧은 삶이 끝날 때에 나는 저 영원하신 분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 내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는 이 순간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답할 생각은 않고, 눈 앞에 삶, 생활의 문제, 돈의 매력에 빠져있는 비극이 오늘도 내 삶에 계속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여관 주인은 피곤하고 곤해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 일에 바쁘고 분주하다보면 심신은 피곤하고 고달프게 되기가 쉽습니다. 피곤하고 지치면 만사가 다 귀챦아집니다.

한참 피곤한 늦은 밤에 요셉과 마리아가 찾아와서 아무리 안타깝게 호소해도, 지칠대로 지친 여관 주인에게는 그 사정이 들려지지 않았나 봅니다. 세상 일에 시달리고, 생존경쟁에 시달리고, 이래저래 지치고 피곤한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성탄절을 제대로 맞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하늘로서 내려 주시는 참 기쁨과 영광의 계절을 육신의 피곤과 정신적 권태와 무관심과 부주의로 말미암아 첫 번 성탄절처럼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리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나의 생명의 길과는 별 상관이 없는 하나의 공휴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복된 계절로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베들레헴의 첫 번 성탄절을 놓쳐버린 사람들의 모습을 닯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헤롯처럼 이기심과 욕심과 교만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이가 없기를 바랍니다. 서기관처럼 알 것은 다 알면서 행동이 없는 죽은 믿음을 소유한 이가 없기를 바랍니다. 여관 주인처럼 일상적인 세상 일에 바빠서 예수님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이가 없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가장 슬픈 구절 중의 하나는 요한복음 1장 11절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이 땅에 오셨으나 많은 사람들은 그 분을 맞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여기서 끝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다음 구절은 이렇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과연 오늘 당신의 성탄절은 어떻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나는 2001년 성탄절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바라기는 이 땅에 새롭게 탄생하시는 예수님을 나와 역사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살아계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감동과 기쁨과 감사를 회복해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의 종은 바로 이러한 우리들을 위해 울리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방박사를 통해서 성탄을 맞이하는 바른 신앙의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첫째로 동방박사들은 정성을 드려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멀리 동방에서 별을 보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사막을 가로질러 왔을 것입니다. 별을 따라 가야 했으니 낮에는 방향을 알 수 없었고 밤길을 걸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루 이틀에 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고 많은 시간이 흘렀을 것입니다. 물질적인 경비 만만치 않았을 것이며, 사막의 모래가 앞을 가로막을 때 죽을 고비를 여러 번이나 넘겼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 정성이 지극했습니다.

동방박사들에게 예수님 탄생을 알린 사건은 아마도 하나님은 정성과 마음을 잃어버리고 형식주의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 의식에 싫증을 내셨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만연된 병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 문명의 발달로 인해 평안함과 나태함에 빠져 생활에 감격이 없이 살아가는 병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소중한 것은 정성과 마음입니다. 그리고 나의 삶을 던지는 헌신과 열심입니다. 우리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우리의 정성없는 예배가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기에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10리, 20리 걸어서 교회에 나오셨습니다만 요즈음에는 집 앞 대문까지 교회 버스가 오지 않았다고 교회 출석을 포기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차 타고 교회에 왔는데 주차를 못해 짜증이 났다고 다시는 그 교회에 안 가겠다고 큰 소리치는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오늘 우리는 너무 쉽게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그러나 동방 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이 인류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이라 생각했기에 온갖 희생과 정성을 쏟어 예수님을 찾아가는 귀한 본을 보였습니다.

둘째로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나 경배했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경배한다는 말이 3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경배한다는 말은 무릎꿇는다는 의미입니다. 상대방을 최대한 높이며 존경할 때 행하는 마음의 표시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당대 최고의 학식을 갖추고, 높은 지위와 명예와 부를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먼 길을 달려와서 예수님이 온 인류의 구주이심을 믿으며 무릎을 꿇고 경배했습니다. 이처럼 성탄절은 만 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경배하고 그 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셋째로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나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빈 손으로 오지 아니하고 귀한 예물인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황금은 왕권을 의미하고, 유향은 제사장의 제사를 의미하며, 몰약은 썩지 않는 영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탄생하신 베들레헴 말구유는 비록 비천한 곳이지만, 받은 선물은 가장 귀하고 아름다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드리는 예물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황금처럼 변함없는 믿음, 유향처럼 향내나는 사랑, 몰약처럼 영원한 소망을 지금 내 마음의 베들레헴에 탄생하시는 아기 예수께 드리는 일이 귀한 일인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동방박사들의 본을 받아 올바른 성탄절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기뻐하심을 입은 이 땅 위에 하늘의 평화를 일구어 나가는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하나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기에 역사는 의미를 찾게 되었고, 나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줄 믿습니다. 성탄이 있기에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며,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살게 된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한 휴일로서 성탄절이 아닌, 내 영혼 깊은 곳에 우러나오는 설레임과 찬양으로 이 성탄의 계절을 맞이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감사와 감격 속에 기쁨의 성탄절을 맞이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웃을 바라보는 슬픔 속에 복음을 가지고 나아가 전하는 성탄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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