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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에 복받는 가정 / 눅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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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성탄에 복받는 가정
본 문 : 눅2:1-14
설 교 : 배경락 목사 (서북교회)

(눅 2:1)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눅 2: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것이라
(눅 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눅 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눅 2:5) 그 정혼한 마리아아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눅 2: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눅 2: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 2: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눅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눅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눅 2: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탄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사이에 태어난 세 명의 천재들 덕분에 온 인류는 큰 혜택을 입고 또 많은 변화를 맛보았다는 기사를 어느 신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세 명의 천재들은 심리학자 프로이드와 화가 피카소,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탁월한  천재들이었기 때문에 20세기 과학과 문화 예술을 주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00여년 전에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전 인류가 어떠한 혜택과 축복을 누리게 되었는가를 누가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이를 다 끌어 모아 놓아도 그 내용을 다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개인이 받은 간증과 개인이 받은 은혜들을 다 기록하려 한다면 종이가 모자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에 싸여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우리  인류가 어떤 놀라운 축복과 은총을 입었는지 잘 모르고 있고, 알고있다 해도 말하는 것을 꺼리고 있습니다. 신문 한 모퉁이에라도 거기에 대해 감사하다고 쓰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라고 묘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무슨 용기가 필요합니까? 용기라는 덕목은 하나님에게는 해당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니 하나님 자신이 처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 세상에 오신 이야기를 성경에서 읽을 때면, '아무리 광대하고 크신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용기 없이는 그렇게 하시기가 참 어려웠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필립 얀시라고 하는 탁월한 저술가가 현대 의학의 지식을 빌려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설명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작아지시고 작아지시고 또 작아져서 마침내는 하나의 난세포가 되기까지 작아지는 형태로 오셨다.' 다시 설명을 하면 육안으로서는 식별이 불가능한 수정란이 불안에  떨고 있는 10대 소녀 마리아의 태중에서, 태아가 형성되기까지 세포 분열을 계속해서 커져 가야 될 난세포가 되어 세상에 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좀 심한 표현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탄생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전혀 과장된 말도 아니고, 지나친 상상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작아지실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런 모습으로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오실 수가 있었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그가 탄생할 때에 유대 나라에 있는 왕과 모든 귀족들이 정장을 하고 서서 무슨 환영 축제를 했습니까? 팡파르를 불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많은 시민들이 와서 축하를 드리기를 했습니까? 아무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마구간에 있는  짐승 몇  마리와 천사들의 말을 듣고 달려온 가난하고 천한 몇 명의 목자들 외에는 하나님이 그토록  작아지셔서, 그토록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놀라는 사람도 없었고, 영접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가 얼마 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행차를 놓고 많은 언론들이 호들갑을 떨며 경쟁하듯이 여왕의 의전품 목록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행사 때마다 2벌씩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고, 누가 죽었을 때를 대비해서 상복까지 가지고 왔으며 왕이 병이 들면 급하게 쓰려고 19l짜리 혈장액을 들고 왔고,  또 화장실에 들어가서 아무 변기에나 앉다가 세균에 오염될까 두려워서 변기 깔개까지 들고 온 것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 다 챙기다 보니 짐만 해도 2000kg이 넘었고, 게다가 전속 미용사 두 사람에 경호원과 수행원을 수십  명씩 데리고 왔습니다. 이 여행에 들어간 경비가 우리 돈으로 무려  26억원이나 되었습니다. 여왕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마다 유명하다는 사람은 다 모여서 그를 영접하느라고, 또 언론사들은 그 사실을 보도하느라고  이만저만 요란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영국이라는 나라는 먼지보다도 더 작을 것입니다. 천문학자들이 발견했다고 하는 은하계를 그린 지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펴놓고 보면, 그 안에서 태양계는 그야말로 모래알보다 작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태양계 중에서도 아주 작은 별 중에 하나인 지구, 그 중에서도 아주 작은 나라 중에 하나인 영국이라는 나라의 여왕이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데도 그렇게 요란을 떠는데, 하나님의 아들, 그 크신 분이 오신 것에는 누구 하나 주목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이처럼 비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가운데 10절이 바로 그 해답입니다.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

기쁜 소식의 첫째 내용은 "너희를 위하여"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함께 해 보십시다. 여기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은 물론 그 당시 밤에 들에서 양 떼를 지키던 베들레헴 성밖의 "목자들을 위하여" 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온 백성 즉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라는 말입니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불행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라는 말입니다. 여기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과 저를 위하여" 라는 말입니다.

김포에서 오신 "김진담씨를 위하여" 일산과 원당에서 오신 "000씨를 위하여" 라는 말입니다. 아무도 나를 생각하지도 않고 아무도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데 "나를 위하여" 누군가가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누군가가 먼 곳으로부터 하늘로부터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메시지는 나의 가슴을 흥분시킬만한 놀라운 메세지였습니다. 성탄절의 기쁨의 소식은 "너희를 위하여" 즉 "우리를 위하여" 누군가가 찾아 오셨다는 메시지입니다.

천사들은 말하기를 이것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들을 찾아오신 날은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찾아 올 때 우리는 기쁩니다. 멀리 계시던 부모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때 우리는 기쁩니다. 따로 살던 자녀들이 부모를 찾아 올 때 부모들은 기쁩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들을 찾아오신 날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찾아오신 날입니다. 기독교는 성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는 종교입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오늘은 이 기쁨의 종교인 기독교가 시작한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뻐합니다. 그래서 메리 크리스마스 즉 즐거운 크리스마스라고 합니다. 한번 따라서 해 보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즐거운 성탄입니다! 기쁨의 성탄입니다.

성탄절 기쁜소식의 둘째 내용은 "구주가 나셨으니" 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구주가 나셨으니" 함께 해 보십시다. 구주라는 말은 영어로는 Savior 또는 Deliverer 라고 하는데 그 뜻은 건져 주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건져 주시는 분이 오셨다는 말입니다. 죄악에서 건져 주시고, 질병에서 건져 주시고, 절망에서 건져 주시고, 지옥에서 건져 주시고, 열등감에서 건져 주시고, 교만과 위선에서 건져 주시고, 그리고 모든 불행에서 건져주시는 구주가 오셨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어떤 종류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존재들입니다. 히틀러도 그렇고 김일성이나 박정희씨도 그렇고 정주영씨도 그렇고 우리 모두도 다 그렇습니다. 성탄의 두번째 메시지는 우리를 죄와 절망과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주실 구주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구주란 구원하시는 분 또는 구속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들을 죄와 사탄과 죽음에서 구원하시고 구속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날입니다. 우리들의 영혼과 우리들의 몸과 우리들의 시간과 우리들의 공간과 우리들의 문화와 그리고 우리들의 모든 삶을 구원하시고 구속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날입니다. 구속이란 말을 잠깐 설명하면 값을 지불하고 산다는 뜻입니다. 피 값을 치르시고 우리들의 영혼과 몸과 시간과 공간과 우리들의 모든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 문화혁명이요 인류 혁명입니다. 우리가 몸을 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바꾸어진 날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이 모든 것을 구속하셨습니다. 값을 치르고 사서 가치 있는 것들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탄절 기쁜 소식의 셋째 내용은 "평화로다" 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성탄의 기쁜 소식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임합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성탄의 기쁜 소식을 마음을 열고 받는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임합니다. 죄와 저주에서 벗어나는 평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평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인간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평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평화를 원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평화는 구주로 오신 아기 예수를 받아 드리는 데서 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정을 쌓는 데는 수 십년이지만 그 우정의 탑을 발로 차  버리는 것은 1분이면 족하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한번  틀어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 우정입니다. 1년이  넘도록 서로가 상종을 하지 않고 지냈는데 그 두 사람 중에  하나가 아마 교회를 다녔나 봅니다. 어느날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는데 마음에 가책이  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지 못해서 되겠는가?' 집으로  돌아간 후 그 옛날 친구와 다시 좋은 관계로 회복되기 위해서 노력을  무척 많이 했습니다. 편지를  5통이나 보냈는데도 그 친구에게는 일언반구 반응이 없었습니다.  고민하다 못해서 이 사람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느 날 밤, 도무지 그날 밤을 그대로 넘기면 안될 것  같아 눈을  맞으며 꽤 멀리 떨어진 친구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문을 두드렸습니다.  안에 있던 친구가 문을  열어 보니 자기 친구가 눈을 소복이 맞고 오들오들 떨면서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급히 그를 집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 두 사람이 다시 우정을 회복하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너무 낮아진 자리에서 자기와 평화하기 위해서 찾아왔기  때문에, 그 앞에 녹아지지  아니할 사람의 마음은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고 사람의 모습, 그것도 천한 사람의 모습을 입고 마구간에 탄생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바로 눈을 맞고 떨면서 문 밖에 서서 벨을 누르는 친구의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은  그 이상이다. 이건 비유가 안된다.'고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무엇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까? 원수된 우리가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가게 되는 것이 예수님이 주신 평화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만 나가면 모든  허물과 죄를 순식간에 용서받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드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우리 모두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면서 예배하고 있는데  이런 축복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무나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드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이유가 없는데,  그만한 구실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잘 보셨습니다. 우리만 보시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무조건 자기와 화목하시고 자기 품에 안으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라고 언제든지 부를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은 우리와 이세상 끝날까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얼마나 둘 사이가 가까워졌는지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이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마.'라고 약속하시게 되었습니다. 한순간도 나를 혼자 떼어놓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깰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평화를 흔들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평화를 주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만큼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없습니다

찬송가 469장을  여러분은 다  잘 아실 것입니다.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 남은  주의 축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얼마나 우리 예수님이 좋은지요.  우리 중에 아직도 믿음이 없어서 이 평화의 주님을 마음에 모시지 못하고 있는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 용서 받고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를 청산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아직 잘 몰라서 이 평화를 소유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십시오. 그분 앞에 더 가까이 나가서 그의 영광을 보십시오.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너무  무거워 이 평화를 잃어버리고 있는 자가 있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평화의 왕입니다. 근심, 걱정을 그에게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염려와 근심을 다  책임져 주시는 분이시오,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을 때는 반가이 맞이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여관집도 만원이요 그 어느 누구하나 만삭된 부인을 위하여 방을 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말구유에 나셔야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말하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베다니의 한 작은 가정을 생각합니다. 그 가정은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세 형제자매가 살던 집이었습니다.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의 가정입니다. 이 가정은 예수님을 잘 영접했습니다. 비록 형편은 넉넉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모시기만 하면 정성을 다해서 대접하려고 힘을 다했습니다. 결국 그 가정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죽을병에서, 아니 죽음에서 부활하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는 복된 가정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예수님을 모실 가정이 어디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우리 가정은 누추해서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어떤 분은 외적 형편은 괜찮은데 마음이 마치 짐승과 마귀들의 소굴처럼 느껴져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말구유는 바로 짐승들이 먹이를 먹던 곳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마음 문을 여시고 주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여러분의 가정에 베다니 나사로의 가정에서 경험했던 놀라운 기적과 같은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여러분의 형편 처지가 아무리 말구유 같을지라도 그곳을 깨끗이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예수님을 모시면 그 순간 여러분의 가정은 황금보좌로 바뀌어지는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평화의 왕이 오셨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가정을 위하여 평화의 왕이 오셨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구주가 오셨습니다. 이날은 우리를 건져주시는 분이 오신 날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과 불행에서 건져주시는 분이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하여야 할 일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목자들처럼 성탄의 기쁜 소식을 듣고 아기 예수를 새롭게 만나는 일입니다. 둘째는 동방의 박사들처럼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하며 예물을 드리는 일입니다. 셋째는 목자들과 박사들처럼 성탄의 소식을 온 세상에 널리 전하는 일입니다. 성탄의 기쁨과 성탄의 평화와 성탄의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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