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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향력이 있는 사람 / 요 1: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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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영향력이 있는 사람
본 문 : 요한복음 1:19-23
설 교 : 이한규 목사 (분당사랑의교회)


< 영향력 있는 사람에 대한 비전 >

1999년 초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설교하신 임병철 목사님을 기억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1992년 임목사님은 목사 안수를 받고, 이듬해 1993년 괌 밑에 있는 축이라는 남태평양의 한 작은 섬으로 선교를 갔습니다. 냉장고도 없는 그곳에서 무더위와 싸우며 3년 동안 선교사로 지내며 그분의 몸은 거의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근육무력증과 함께 심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로 거의 죽을 몸이 되어서 그분은 1996년 자신의 제 2의 고향이었던 뉴욕으로 돌아갔습니다.

목사님은 그곳에서 대출을 받아 100년 된 귀신이 살 것 같은 집을 샀습니다. 그리고 교회개척을 했습니다. 담당 의사는 몸이 위험한 상태이니까 절대 무리하지 말고 약간의 운동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최소한의 설교 사역만 하고 나머지 시간은 집을 수리하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매일 땀을 흘리며 집을 수리하니까 1년만에 목사님의 건강은 엄청나게 좋아져서 심장도 거의 정상이 되고 근육무력증도 깨끗이 치유되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집이 살만한 집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개척한 교회는 선교 지향적인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동쪽 끝에서부터 서쪽 끝까지 선교하자는 의미로 이름을 뉴욕 동서 선교교회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집적 선교사로 있으면서 재정 후원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성도들에게 비전을 심어주며 수시로 성도들의 축복을 위해 기도해주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가 선교를 많이 하게 하시고, 우리 교회에서 선교를 위해 쓸 줄 아는 의로운 멀티 밀리어네어(억만장자)가 많이 나오게 하옵소서!" 성도들이 그 축복기도를 들으면서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가졌습니다. 눈빛이 뚜렷해졌습니다. '비전을 가지기 전'과 '비전을 가진 후'의 사는 모습과 일하는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지금 그 교회는 교인이 몇십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가 얼마나 선교를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성도들도 개별적으로 많은 어려운 분들과 선교사님들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임병철 목사님도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지만 성도들도 그렇게 변했습니다. 그러자 성도들이 베풀 수 있도록 하나님이 축복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비전을 가지고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그가 기대한 것 이상의 것을 채워주시는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임병철 목사님은 나이는 저보다 6살이 많지만 신학교 동기이고, 목사 안수 동기입니다. 그리고 매우 순수하십니다. 또한 욕심이 없고 어려운 사람만 보면 돕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긍휼이 있는 목사님입니다. 저는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이 참 기뻐하시는 목회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이 하나님께 수시로 "하나님! 우리 교회에 돈을 잘 쓸 줄 아는 멀티 밀리어네어가 많이 나오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욕심이 없이 구하는 줄 아시는데 그 기도를 외면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먼저 목사님을 재정적으로 부족함이 없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동생들을 큰 부자들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금년 초에 디자이너 출신인 그분의 여동생 임미숙 집사님 집을 방문했는데 몇백만 불이 넘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저택을 보고 비전의 놀라운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디자인을 해도 비전을 품고 디자인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거룩한 창조력'을 주셔서 놀라운 작품들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지금 그렇게 엄청난 부를 소유했어도 항상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고 개인적으로 많은 분들의 선교후원을 하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흐뭇했습니다.

목사님이 선교의 비전을 계속 강조하니까 그 비전을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받은 그의 가족 교인부터 축복해주신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성이 차지 않는지 내년 여름에는 직접 몽고로 선교를 나가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비전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받은 것을 거룩하게 쓰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쓸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을 주실 것이고, 이 시대에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렇게 살았던 한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오래 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그런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몇 가지 요소를 같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 사명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약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야생꿀)을 먹고 지내며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습니다. 그의 삶과 메시지는 당시 백성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몰려들었고, 어떤 사람들은 "혹시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에게 "네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19절). 그때 세례 요한은 자기는 그리스도도 아니고(20절), 선지자도 아니고(21절),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23절).

그의 신분은 대단했습니다. 레위 지파의 후손으로 제사장 집안이었고,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게다가 말씀에 은혜가 넘쳤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데 정작 그는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과 자신의 본질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보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더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위해 헌신했고, 인기가 조금 높아졌다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오면 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또한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예수님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처럼 사명을 인식하고 살면 삶의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면 생활에 활력이 넘치고, 자신감이 생기고,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됩니다. 여유가 생깁니다. 그러나 삶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자신감이 없어지고, 나태하게 되고, 상처를 받으면 우울하게 변하거나 반대로 난폭하게 변합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분명한 목표를 발견하고 그 목표를 위해 사는 자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시나니." 하나님은 일을 하실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소원을 주십니다. 그 소원을 가지고 나가면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해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전을 바로 알고 그 비전을 위해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사명이 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구원받도록 우리의 모든 것을 투자해야 하고, 광야에서 외쳤던 세례 요한처럼 우리도 이 분당 지역에서 외치는 소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적이라는 화려한 이름으로 다가오는 이상한 소리에 현혹되지 말고 우리 자신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가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요새 이상한 소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영적 주파수를 잘못 맞추고 사명을 놓치면 그 소리들에 현혹될 수 있습니다.

어떤 권사님이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생긴 것도 별로이고, 학벌도 변변치 않고, 혼수품도 제대로 장만하지 못해서 며느리를 구박하다가 자기 화를 이기지 못해 기도하러 가겠다고 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기도원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밤중에 회오리바람 소리와 함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데 "권 권사야! 더 늦기 전에 아들을 이혼시켜라!"고 하더랍니다. 정말 하나님의 음성이었을까요? 마귀도 치사해서 그런 소리는 안합니다. 며느리에 대한 미움을 이기지 못해서 생긴 자기 소리를 자기가 듣고 하나님의 소리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벗어나고, 사명에서 벗어나고, 자기의 위치에서 벗어나면 마귀의 소리를 듣거나 자기의 소리를 듣고도 하나님의 소리라고 착각하고 우기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혼하라고 하셨다!"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혼한 사람을 이해하시고 용서하시기는 하지만 "이혼하라!"고 음성을 들려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 있어야 하고, 사명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은 우리도 좋아하게 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은 우리도 싫어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만 하고, 하나님께서 침묵할 때는 우리도 침묵하게 되고, 하나님의 꿈과 비전이 우리의 꿈과 비전이 됩니다.

사람들은 돼지꿈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꾸어야 할 꿈은 그런 돼지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꿈과 비전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 어떻게 주님 가신 길을 나도 갈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신령한 꿈, 신령한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성도의 가야 할 길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꿈과 비전과 사명을 가지고 욕심 없이 살 때 우리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생각하며 복잡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여행하는 사람이 너무 짐이 많으면 여행이 힘들어집니다. 인생 여행에서도 가진 것이 너무 많으면 영성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여러분! 돼지를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돼지가 먹는 것만 밝히는 것 같아도 자기 양의 80% 이상은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위장병에 걸려도 돼지는 위장병으로 고생하지 않습니다. 학은 자기 양의 40%만 먹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날씬한 모습으로 활기차게 삽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양의 150%를 먹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세계에 복잡한 갈등이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욕심을 제어하는 것! 이것은 순교만큼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삶이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하는 순교의 삶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선교와 구제에 힘쓸 수 있다면 영성도 맑아지고, 내일의 축복도 예비되고, 삶의 보람도 생기고, 영향력도 미치는 다방면의 축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교(宣敎)의 삶은 거의 순교(殉敎)의 삶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상 그 삶은 엄청난 축복을 예비하는 삶입니다. 항상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그 사명을 위해 더욱 힘쓸 수 있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2. 둘째,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삶이 영향력이 있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바로 그의 '겸손한 삶' 때문입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로 착각할 정도로 그의 영력과 권세와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헤롯왕도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인기에 자기의 정신을 빼앗겨 교만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예수님의 신들메를 풀 자격도 없다고 믿었습니다(요 1:27).

유대 지역은 광야지역으로 먼지와 돌이 많아서 발을 보호하려고 군화와 같은 신을 신다 보니까 신을 신고 벗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노예가 주인이 신을 벗을 때 신발끈을 풀어주는데 그 일은 노예 중에서도 최하층의 노예가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비해 자기는 최하층의 노예와 같다고 비유한 것입니다. 그처럼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찾으면 자기보다 더 귀하신 예수님에게로 보냈습니다. 안드레도 처음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35-37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40절 말씀을 보면 세례 요한의 두 제자 중의 하나가 바로 안드레였습니다. 안드레가 스승인 세례 요한을 배반하고 예수님께 간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이 안드레를 예수님께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예수님께 유능한 제자를 다 보내니 자신은 얼마나 초라해집니까?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이 세례 주는 데 사람들이 다 그분에게로 갑니다"라는 말을 해줍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질투심으로 얼굴빛이 변했을 것입니다. 질투심 이전에 그런 상황을 당하면 참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때 "역시 사람들은 믿을 게 못돼!"라는 말이 입에서 나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 말합니다(요 3:20). "그분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 예수님께 가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주인공이 아니라 예수님의 종이요, 길잡이임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그는 예수님만 위해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영향력이 줄었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영적인 영향력은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이 가장 큰 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11). 우리가 주님을 최대한 높여드리면 주님도 우리를 최대한 높여주실 것입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과 같은 고백을 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낮아져도 좋고 무너져도 좋습니다. 오직 주님만 영광 받는 길로 가게 하소서!" 그렇게 살 때 내 인생도 살고, 내 가정도 살고, 내 교회도 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는 것이 주님의 축복을 받는 가장 최선의 길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리가 높아지고 인기가 높아지면 종종 주님을 잊어버리고 우쭐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재능이 있다면 그 재능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우리에게 물질이 있으면 그 물질로 하나님을 높이고, 우리에게 권세가 있으면 그 권세로 하나님을 높일 줄 알아야 합니다. 때로 기적이 일어나면 그때는 하나님은 더욱 철저히 높이고 자기는 더욱 철저히 낮춰야 하는 때입니다. 그런 삶이 바로 사명자의 삶이요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는 비결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치는 기적이 일어나자 그 지역 사람들이 그를 신처럼 여기려고 할 때 그는 옷을 찢으며 자기도 똑같은 사람이라고 사람들의 인기를 곧 바로 물리쳤습니다(행 14장). 사도 바울이나 세례 요한이나 사람들의 인기를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능력의 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교만 중에서도 신앙적인 교만은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반역한 마귀대장 루시퍼를 가장 닮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기도한 대로 되지 않을 때를 만납니다. 그때 더 감사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한 그대로 다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오히려 불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한 것 중에 정욕대로 구한 것, 어리석게 구한 것, 엉뚱하게 구한 것, 내 뜻대로 구한 것도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새로운 불행의 시작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한 대로 다 응답되어 능력의 종인 척 하는 것보다 겸손한 종의 모습을 가지는 것이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요즘은 자기 PR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런 것 같지만 역시 우리 시대에 진정으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하나님도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믿는 길도 겸손에 있고, 우리가 물질 축복을 받는 길도 겸손에 있고, 인간관계를 잘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며 행복하게 사는 길도 겸손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행복이 있는 줄 아는데 진짜 행복은 낮은 자리에 있습니다. 높은 자리를 추구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삶의 위치와 자리'는 높아져도 '삶의 태도와 자세'는 낮아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의 위기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지만 가장 큰 이유는 마음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낮아질 때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행복도 찾아오게 됩니다. 사람은 겸손해야 사람들의 마음을 끌 수 있고, 진실로 매력적인 사람,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항상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그리고 사람 앞에 설 수 있기를 힘써야 합니다.

3. 셋째, 성령충만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을 보면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죄를 다 지고 가실 수 있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니 그 고백은 예수님에 대한 최고의 찬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구세주임을 확실히 믿고 증거했습니다. 그 믿음이 그의 사명적인 삶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누구로 보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때 우리에게는 엄청난 권세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때 우리에게 천국 열쇠가 주어지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마 16:16-19).

세례 요한은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과 인격과 생각과 마음 안에는 온통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가 어머니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마리아의 뱃속에 있는 6개월 늦게 잉태된 예수님을 만나고 기뻐 뱃속에서 뛰놀았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 성령 충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능력 있는 삶을 살려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신앙인들은 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너무 보잘것없었습니다. 통찰력도 없었고, 지도력도 없었고, 높은 지위도 없었고, 조직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짧은 세월에 세계를 뒤집어 놓을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성령에 붙잡혀 살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불면 옥수수 떼가 흔들리는 것처럼 그들은 그 시대에 불어닥친 하나님의 권능으로 흔들려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 속에 성령의 능력을 받아들임으로 자기를 극복하고 '자기 혁명의 역사'를 이루는 일은 약속된 하나님의 선물 중의 최고의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기적은 자기 혁명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비전이 임하고 자기 극복이라는 놀라운 길로 들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를 포기한 자는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누가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며 살려면 자기로부터의 혁명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내가 변화되고, 어떻게 내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성령에 붙잡혀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생각과 하나님의 비전에 사로잡혀서 자기 혁명의 역사를 이루면 자기로부터 놀라운 가능성이 생기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약점과 단점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약점은 극복되면 강점이 되고, 우리의 단점은 극복되면 장점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연약한 사람도 성령 충만하면 그 시대의 누구보다 영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두 성령 충만하여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삶, 누구보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사랑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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