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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리아에게 임한 축복 / 눅 1: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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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마리아에게 임한 축복
본 문 : 눅 1:26-38
설 교 : 황요한 목사 (평안의교회)


지난 한 주간은 우리 나라 역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선택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세계의 많은 언론들은 한국민이 새로운 변화를 선택했다고 논평을 하였습니다. 더 마음에 감동이 되었던 것은 대통령 당선자의 인사 중에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이 우리 7,000만 국민 모두가 승자라는 말이었습니다. 이번 선거는 과거처럼 재벌들의 돈에 의한 선거가 아니라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모아진 성금에 의해 치루어져다는 점에서 가히 선거혁명이라고 까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선거 문화의 정착을 알려주는 희망적인 사건이었고 우리 모두는 당선자의 인사처럼 패자가 없는 모두의 승리를 만끽하며 기쁨으로 새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을 뽑는 일도 이렇게 어렵지만 잘 선택이 되어지면 모두에게 기쁨이 되는 것처럼, 오늘 저는 하나님께서 엘리사벳을 통해 세례요한을 허락하시고, 마리아를 통해 모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그리스도 예수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본문 말씀 누가복음 1장은 먼저 하나님께서 사가랴와 엘리사벳 가정에 주신 은혜의 말씀과 이어서 마리아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의 말씀이 잘 대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하나님의 은혜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아름다운 열매로 결론되어져 있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이런 아름다운 연관성을 생각해 보면서 지난 시간에 엘리사벳에게 임한 하나님의 축복과 오늘 이 시간에 마리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축복을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전달하는 일에는 메신저로 가브리엘이라는 천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외경 가운데 '에독서'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곳에는 여러 천사들이 소개되어져 있고, 하나님의 군대를 지휘하는 천사장으로 미카엘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메신저로서 가브리엘이 쓰여져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엘리사벳이나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는 천사는 가브리엘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서 엘리사벳이나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가감하지 않고 전하고 있습니다. 불가능한 수태 예고를 통해서 그들은 모두가 두렵고 놀라워했습니다. 사가랴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12절에 보면 무척 무서워하였다고 하였고, 마리아 역시 30절에 보면 천사가 무서워하지 말라고 함으로서 무서워하고 있는 마리아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본래 엘리사벳은 수태할 수 없는 그러한 구조를 가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나, 이삭의 아내 리브가, 그리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같은 경우에도 본래 수태할 수 없어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정년기를 훨씬 넘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놀랍게 그들에게 자녀를 주실 때 사용하신 표현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라의 태를 열어주시고, 리브가의 태를 열어주시고, 한나의 태를 열어주셔서 자녀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그리고 이삭은 60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엘리사벳의 경우에도 남편 사가랴와 함께 나이가 들어서 아이를 이제 기다릴 수조차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가브리엘은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임하여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을 때 엘리사벳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내가 늙고 나의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고맙기는 하지만 그건 어려운 일입니다"라는 불가능한 자신의 소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역시 천사가 자신에게 그런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 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물론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경우는 경우가 좀 다릅니다. 엘리사벳은 결혼한 부부로서 아이를 늦게까지 낳지 못한 경우이고, 마리아는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의 상황입니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지 못했던 사람은 늙어서 낳는 어려움은 있지만 기쁨은 말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일은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더욱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돌에 맞아 죽을 상황 중의 하나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히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거나 혹은 처냐가 아이를 낳으면 그건 돌에 맞아 죽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수용한다는 말은 죽음을 각오한다는 내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이라면 그러한 천사의 이야기에 여러분이 쉽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천사는 거듭해서 "은혜를 받은 자여, 은혜를 입은 자여, 하나님의 은혜가 네게 임하도다" 아무리 얘기하고 있지만 지금 마리는 그것이 은혜로 느껴지기보다는 두려움으로 느껴지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사명을 주실 때 아마 그런 느낌으로 다가오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어떤 분은 평생에 내게 이러한 사명을 주신 것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받아들이는 분이 있는가 하면, 이건 내게 너무 부담스럽고, 이건 내가 감당하기 너무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반응은 다양할 수 있어요. 다양한 반응은 어쩌면 정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엘리사벳도 그랬고,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확고한 뜻이 계속해서 전해지면서 이것은 너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이라는 끊임없는 설득과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능력이 임할 것이라는 마지막 권면에 그들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가랴는 엘리사벳과 함께 감사로 수용을 했습니다. "주께서 나를 돌아보셔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셨도다" 그들 부부는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이제 자녀가 없어서 부끄러웠던 우리 가정에 하나님께서 이 부끄러움을 면하게 해주셨다고 하는 감사의 결론으로 엘리사벳에게 임한 가브리엘 천사의 그 전달을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38절에 보면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결론을 내리기까지에는 사실 말할 수 없는 고민과 번뇌가 있었을 것이고, 천사의 위로처럼 두려움도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앙생활한다고 하는 말은 사실 때때로 우리가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을 믿음으로 아멘 해야 할 때가 많고, 우리가 세상의 경험과 상식으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들을 믿음으로 용납해야 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많은 것이 신앙의 영역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성과 경험으로만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하면 아마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기적과 표적은 아마도 거리가 먼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평안의교회 20년 역사가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인도하심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전폭적인 수용과 응답이 아니고서는 오늘 평안의교회는 이 모습을 가질 수 없었을 거예요. 그것은 다시 말하면 우리의 신앙이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때때로 큰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불가능하다고 했던 엘리사벳 가정이나 처녀로서 자신은 있을 수 없다고 두려워했던 마리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 그것은 자녀를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가랴와 엘리사벳 가정에는 세례 요한을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게 하셨고, 그 소리는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고 준비하는, 준비하는 자의 나팔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오늘 본문 말씀의 시작처럼 6개월 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위치는 분명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오심을 예배하는 자로, 하나는 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그러한 성육신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당신의 뜻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30세 동안 고향에서 묵묵히 때를 기다리면서 세상적인 때가 아닌 '카이로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주님은 인내하셨고, 그리고 세례 요한은 일찍 준비하는 자로서의 그 모습을 가지고 온 유대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분명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영적으로 준비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우리의 모습은 군더더기를 다 떼어버리면 결국 회개하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 회개의 모습이 아니고서는 결코 설 수 없고, 하나님 앞에 회개라고 하는 것이 십자가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그것이 직분이든, 그것이 한 시간이든, 그것이 장시간의 말씀이든 간에 십자가가 없는 말씀은 말씀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회개를 촉구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십자가의 결단이 없고서는 그것은 복음일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천국이 가까운 것은 분명하지만, 그리고 모든 사람이 천국을 사모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먼저 우리에게 선행되어야 할 성도의 모습은 회개라고 하는 것이지요.

세례 요한은 그 일을 통해서 모든 유대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광야에 나가서 이 말씀을 증거할 때에 사람들이 광야로 나아와서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어요. 그래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 말합니다. 그의 영향력은 놀라워서 당대의 헤롯 왕 조차도 그를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인기도, 지명도에 있어서 놀라운 그러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어느날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러 나오셨을 때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말합니다. "나는 주님의 신의 신 끈을 풀기도 나는 적절한 사람이 아닙니다" 본래 노예들만이 주인의 신을 신기고 벗기면서 가죽 신의 끈을 매고 풀렀는데 나는 그러한 위치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그런 세례 요한의 말에 사람들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무명의 예수께서 등장하셨을 때에 세례 요한, 그는 당시에 가장 유명한 자였고,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세례 요한은 자기의 위치와 영역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의 영광과 지금까지 자기의 명성과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주님에게 모두 드렸어요. 심지어는 주님의 12제자의 대부분이 세례 요한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아십니까? 자기의 제자들조차도 다 주님에게 보냈습니다. 준비하는 자로서의 모습, 철저하게 무대 뒤에서 주인공을 위해서 헌신하는 세례 요한의 모습, 마치 구약에서 모세를 위해서 무대 뒤에서 헌신했던 갈렙과 같은 역할입니다. 모두가 주인공이 되고자하는 욕심 많은 생활 속에 그를 위해서 헌신하는 손길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이 세례 요한을 먼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엘리사벳 가정에 주셨고, 그리고 마리아에게 천사를 통해서 수태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를 통하여 모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겠다고 하시는 주님의 의도를 마리아를 통해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육신이라고 말합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지요. 성육신의 도구로서 마리아의 태를 빌리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리아를 복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뜻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도구로 쓰신다면 얼마나 영광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사명을 주실 때 감격과 고마움의 모습보다는 "내가 또 이 일을 함으로서 또 1년 동안 시간 많이 빼앗기게 되었구나. 또 피곤하게 되었구나" 심지어는 "골치 아프게 생겼구나" 이런 생각을 혹시 하는 분은 안계신가요? 마치 어린 아이가 선생님의 심부름에 왜 내가 그걸 해야 되느냐고 대드는 아이의 모습 같이 그런 마음을 갖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다시금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순수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순수한 심령에 너무나도 많은 찌꺼기와 때가 끼어 있어요. 공해로 찌들어 있어요. 정말 유리가 끼어 있는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투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기만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지시기만 해도 그저 기쁘고 감사해서 "주님, 오실 것도 없어요. 말씀만 하세요. 주님, 오실 거 없습니다. 사도여, 오실 것 없습니다. 그저 손만 들어 주셔도, 손수건만 들어주셔도 우리는 만족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치유의 은혜가 임한 줄로 믿습니다. 뭐가 놀라운 거예요? 손수건이 위대합니까? 아니잖아요. 그들의 순전한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이루는 키가 된 줄로 믿습니다.

순수함, 지금 마리아와 엘리사벳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이성이나 사회적인 환경보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야되겠다고 하는 순수함이 지금 요구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일에 세상적인 어려움도 그들에게는 당연히 생각되어졌지만 결국 그들은 감사함으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부끄러움을 면하게 해주셨도다. 내가 주의 여종으로서, 내가 주의 일꾼으로서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면 그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최종적인 결론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세례 요한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고자 하는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줄 믿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는 곧 사랑이요,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이제 3일 후면 성탄절입니다. 여러분들은 벌써 성탄절에 축하하는 카드를 주고 받았을 것입니다. 늘 안타까운 일은 저도 수많은 성탄 카드를 받지만 때때로 요즘은 이메일로 축하 카드를 받지만 상당수는 아직도 성탄과는 관계가 없는 그런 카드라고 하는 것이 '근하신년' 성탄절에 근하신년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성탄절과 새해를 맞이하여' 이렇게 나가면 그건 애교로 봐 줄 수 있지만 지금 성탄절에 무슨 근하신년이예요? 정신 나간 사람들이 많아요.

여러분, 작년까지만 해도 시청 앞에 성탄 트리라고 시청에서 수천만원 들여서 만들어놓는 그 성탄 트리, 그것이 성탄 트리입니까? 제가 신문 1면에 늘 나올 때마다 보면 성탄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전화를 겁니다. 신문사 아무개 담당이 밑에 나오잖아요. " 사람 좀 바꿔 주십시오" "무슨 일이십니까?" "당신들 눈이 있으세요?" "무슨 일이신데요?" "지금 성탄 트리라고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그것도 칼라로 내놓은 이 사진 좀 봐요. 그게 성탄 트리 맞습니까?" "왜요? 뭐가 문제입니까?" "자세히 좀 보세요. 거기에 성탄에 관계된 이미지나 문자가 하나라도 있습니까?" "정말 그렇네요....."

얼마전에는 파주 국가대표축구 트레이닝 센타에서 개최된 전국 목회자축구대회에서 축사하시러 오신 회장님께 이 이야기를 했어요. 그분도 매우 안타까워 하시면서 지혜를 구해보자고 하셨는데 어제 받아본 신문에는 분명 달라진 시청앞 성탄트리가 있었습니다. 그 사진이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가 분명하고, 축 성탄이라는 글씨가 사면에 분명한 진정한 성탄절 트리가 시청 앞 광장에 세워졌습니다. 할렐루야!

기사 내용을 읽어볼까요.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식이 20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이번 크리스마스 트리는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가 서울시에 정식으로 요청하여 설치 비용 등을 일체 부담한 가운데 세워졌다." 무엇이든지 일을 반듯하게 하려면 희생이 따르지요. 입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한기총 회장님께 참으로 감사하고 싶습니다. 많은 예산이 들어가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성탄 트리가 시청앞 광장에 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탄절이라고 하면서도 주님은 없는 성탄절, 성탄절이라고 하면서도 구유에 정작 예수는 계시지 않은 그런 빈 성탄을 우리는 지금까지 보내오지 않았습니까? 성탄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진정한 성탄의 주인은 주님이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번 성탄도 여러분의 생각과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그리고 드려지는 모든 예배, 예배의 중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중심이 되시고, 그분을 높이시고, 그분을 송축하는 성탄의 시간, 시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성탄을 허락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엘리사벳에게 세례 요한을 주셔서 그의 가정에 부끄러움을 면하게 하셨던 주님,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 예수를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거룩한 주의 도구로 사용됨이 얼마나 복인지를 알게 하신 주님, 이 시간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때마다 마리아처럼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믿음과 감사의 수용이 우리의 삶의 결론이 되게 하옵소서. 성탄의 기쁨과 감격이 우리의 삶 속에 충만하기를 원하옵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0 엘리사벳에게 임한 축복
본문: 눅 1:39-45 (12월15일 설교)

이번 주간 강림절을 맞이해서 주님의 오심을 여러분들이 마음으로 그리고 깊은 믿음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뻐하는 성도들의 모습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 중에는 가정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녀가 사랑으로 만나서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가정을 이루고 또 가정에서는 하나님이 반드시 자녀를 주셔서 태의 열매가 기쁨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가정의 모든 희망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준비하시는 은혜가 여러분들 모두에게 임하는 줄 믿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가정에서의 축복의 열매이기도 한 자녀를 얻지 못해서 고민하고 또 힘들어하는 그러한 가정들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랬고,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그랬고, 삼손을 낳은 마노아의 아내가 그랬고, 또 사무엘을 낳았던 엘가나의 아내 한나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 소개되어져 있는 제사장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도 그랬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본래 잉태치 못한 자더라" 그랬습니다. 낳지 않으려고 안 낳은 것이 아니라 정말 낳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사모하지만 낳을 수가 없는 그런 여성들이었습니다.

현대 과학은 자녀를 얻지 못할 때 부부 모두를 클리닉해서 남자에게 문제가 있는지, 혹은 여자에게 있는지를 분명하게 가려주고 또 문제를 해결하도록 치료의 방법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아마 과거에는 그런 과학적인 그러한 분석은 어려웠을 것이고, 우리 나라의 전통을 보면 아이를 낳지 못하면 거의 대부분 그것은 여자의 몫으로 그래서 쫓겨나기도 하고, 평생토록 기죽어 살기도 하고 그랬던 것이 과거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한 것은 이들 여성들이 잉태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견디기 어려운 정신적 고통을 겪고 가정의 불화가 생기기도 했고, 그리고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었다는 사실입니다. 한나 같은 경우에는 본인이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는 그런 케이스였고, 또 이삭 같은 경우에는 리브가가 아이를 낳지 못했을 때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간절하게 이삭이 하나님께 구함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심으로 아내의 태를 열어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의 기도가 더 힘을 얻었든지, 아니면 남편의 기도가 더 상달되었든지 중요한 것은 그 부부가 하나님 앞에 자녀를 위해서 눈물겨운 기도와 사모함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1장에 보면 사라는 자기의 남편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던 해에 아들 이삭을 낳았고, 창세기 25장에 보면 리브가는 남편 이삭이 60세가 되던 해에 야곱과 에서를 낳았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낳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마노아의 아내는 삼손을 낳았고, 한나는 사무엘을, 그리고 엘리사벳은 세례 요한을 낳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 평안의교회 안에도 자녀를 사모하지만 얻지 못했던 사랑하는 평안의 가정들 위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본래 잉태치 못한 자였지만 사모하며 간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그들을 통해서 이루기를 원하시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그들 가정에 임함으로 태를 열어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살았고, 세례 요한의 부모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나사렛에서 무려 130㎞나 떨어진 예루살렘 근처의 아인카림이라고 하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오늘 제가 봉독해 드린 말씀은 마리아가 그 먼길을 떠나서 친족이기도 한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그리고 그 방문한 마리아를 맞이하면서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축복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봉독되어졌습니다.
마리아를 보면서 엘리사벳은 말합니다. "여자 중에 복이 있는 자로다" 많은 여성들 중에서 여러분 자신이 "나는 여성들 중에 복이 있는 여성이다"라고 자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반대로 "나는 많은 여성들 중에 그 많은 행복하고 정말 살 맛 나는 그 많은 여성들 중에 왜 나만 이럴까?"라고 스스로 자신을 학대하고 자기를 평가 절하하는 그래서 마음 아파하는 여성들이 계실 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갈 때 그리고 그들의 대화 속에서 축복이 선언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를 만난 엘리사벳은 만나자마자 마리아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여자 중에 복있는 자로다" 얼마나 마음에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겠어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고민하셔야 합니다. 어떤 말로 상대방을 축복할까? 만나자마자 속상하고 김새는 소리하지 말고 아무리 말을 할 줄 모른다고 해도 그렇지요. 기분 좋게 차리고 나왔는데 말 한마디 때문에 그날 기분을 온통 망가뜨려 놓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참 안타까운 일들이지요.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을 어떻게 축복할까? 어떻게 세워줄까? 어떻게 그들에게 삶의 의욕을 돋구어줄까?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들은 마리아가 얼마나 행복했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처녀로서 이 앞에 제가 소개한 이 여성들은 결혼한 아내로서 가정으로서의 고민이었는데 마리아는 전혀 차원이 달랐습니다. 정혼만 해놓은 상태였는데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네가 복이 있는 자로다"하면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아들을 낳게 할텐데 그 아들을 예수라고 해라. 모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가 네게서 나올 것이고, 그는 왕 중의 왕이 될 것이고, 다윗의 위를 이어갈 것이고, 모든 사람이 그로 인하여 기뻐할 것이다" 너무 엄청난 말씀을 했을 때 마리아는 그저 당황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그것을 이성적으로 반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난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성경은 짧게 말씀했지만 아마도 천사 가브리엘과 마리아는 많은 대화가 오갔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일이 주어졌다고 했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성령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능력의 덮으심이 너와 함께 한다고 했을 때 그냥 그 자리서 "아멘!"하고 받아들일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겠어요? 아마 저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성 논리적으로 말하겠지요. "내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아직 나는 아이도 기다리지 않았는데.." 여러 가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성적인 이유들이 제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부분을 보면 주님께서 이 마리아의 대화 중에 여러 대화 중에 결론적으로 가브리엘 천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다시 말하면 지금 내가 하나님의 이 놀라운 뜻을 너에게 전하는 것은 물론 메신저로서 전하는 사명을 가졌지만 분명히 네가 알 것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이성이나 과학이나 이런 부분에서 접근해야 할 부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신앙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결론으로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의 부활하심을 결론적으로 마리아에게 전하고 있어요. 그리고 마리아는 38절에 보면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리이다" 결론은 마리아도 믿음으로 받은 줄로 믿습니다.

결론이 중요하지요. 주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십자가를 지셔야 할 부분에 대해서 고민하고 힘들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참 하나님이셨지만, 반면에 참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주님은 피곤하실 때 피곤해 하셨고, 슬프실 때 눈물을 흘리셨고, 괴로울 때 마음 아파하셨어요. 십자가를 진다고 할 때에 육신을 가지신 그 주님으로서 감당해야 할 그 고통도 그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합니다. "할 수 있거든 이 십자가의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지만 주님의 결론은 아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제가 성도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결론을 가지고 오는 사람입니다. 다 자기 맘대로 해놓고 와서 보고의 형식은 갖지만 사실 보고는 아니예요.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할텐데 목사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맞으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으면 얼굴색이 변하지요. 그런 사람들은 제일 목회하기가 피곤한 사람들이예요. 결론을 가졌으면 가져올 이유가 없어요. 그냥 하시면 돼요. 자기 뜻대로 자기 멋대로 하면 되는 거지 그걸 뭐 또 체면치레로 가지고 옵니까? 준비 과정에서 기도하는 과정에서 그때 와서 상의를 해야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기도하면서 나눌 수 있고, 그중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우리가 함께 순종해 나갈 수 있어야 하는데 결론을 다 지어놓고 그리고 형식 차례를 치루는 사람들은 참으로 힘든 사람입니다.

주님의 결론, 중요합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원대로 하겠다고 하는 말은 이것은 이성으로 되어지는 결론은 아닙니다.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되어지는 결론도 아닐 것입니다. 마리아가 주님 앞에 고백하였듯이 이것은 바로 믿음의 고백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향해서 축복을 몇 가지 하는 중에 마지막 45절에서 이렇게 축복합니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네가 지금 성령으로 잉태되고 하나님의 능력의 덮으심을 입는다고 하는 사실을 네가 말씀으로 받아들인 바로 너가 놀라운 하나님의 복이 임할 거다" 엘리사벳으로서도 자기의 친척인 마리아가 그런 믿음으로 그런 상황을 감당하였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대견하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삶 속에는 믿음으로 고백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배는 그래서 언제나 사도신경으로 시작합니다. 성경 66권 전체 중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주님에 대하여, 성령에 대하여, 그리고 교회에 대하여,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짧게 짧게 되어 있지만 그 하나 하나가 그냥 지나갈 것이 없어요. 예를 들어서 여러분, 제일 먼저 뭐라고 고백하십니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천지창조에 대한 고백이 안되면 사도신경은 시작할 수가 없지요. 그것까지는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오셨습니까?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게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지요? 그거 고백이 안되면 그 다음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냥 예배 자리에 자리만 하나 차지하고 있는 것이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이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그 한 소절 한 소절, 끊어서 읽지요? 저는 사도신경을 보면서 읽습니다. 못 외워서가 아니라 예배를 인도하는 인도자로서 단 한마디라도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함께 따라하면 다같이 하는 것은 쉬운데 마이크 앞에서 크게 하려면 한 마디라도 틀리면 예배에 덕이 되지 않아요. 그래서 사회할 때는 늘 제가 보고합니다. 그리고 읽을 때 가능하면 한 소절, 한 소절 끊어서 읽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리고 숨을 한번 쉽니다. 숨을 한번 쉬는 것은 육신의 호흡이지만 그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해요? 마음으로 아멘! 아멘이 되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로 못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도신경이 한 소절 소절마다 계속 믿음으로 믿음으로 되어진 다음에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하고 마지막 아멘은 최종적인 거예요. 그것이 신앙고백으로 되어지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으로 내게 다가왔을 때 그것이 다른 이성이나 과학적인 방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복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그것을 전하고 있어요. "믿은 여자에게, 바로 너에게,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인 너에게 하나님의 복이 있도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아인카림에서 생활하면서 그해 대제사장의 반열에서 그는 반차에 따라서, 순서에 따라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가정도 나이가 많이 들어감에도 자녀가 없어서 늘 안타까워했습니다. 성경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인데 놀라운 일은 두 사람이 모두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더라" 그랬습니다. 남편 신앙과 아내의 신앙이 하나님 보시기에 다 좋았다는 말입니다.

부부 신앙은 수레바퀴와 같아요. 같은 수준에서 가야 합니다. 뭐 100% 같을 수는 없겠지만 비슷한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수레바퀴 하나가 그 지름이 짧으면 어떻게 돌아갑니까? 이상하게도 큰 바퀴 중심으로 돌지 않지요? 작은 바퀴 중심으로 돌게 되어 있어요. 이게 우리가 알 수 없는 놀라운 비밀입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이지요. 아마 고등학생들은 다 들어본 이야기입니다 만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그럽니다. 사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헌신적이고 충성한 진실된 사람들이 많지만 잘못된 사람이 하나 문제를 터뜨리면 온 세상이 그곳으로 흙탕물이 튀깁니다.

예를 들어서 경찰관이 무슨 총을 가지고 강도질을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럽니다. "요즘 경찰관들 다 썩었어" 그렇게 말을 하지요. 그러나 경찰관의 99.9%는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정직하게 살고, 시민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목사 중에 한 사람이 잘못되어서 신문에 나면 "요즘 목사들 다 썩었어" 이렇게 말하지만 그런가요? 99.9%는 정말 주님을 위해서 자기의 일생을 내어놓고 헌신하는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그 작은, 잘못된 작은 부류들이 전체에 흙탕물을 튀겨놓는 것이지요.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아내가 뒷받침해주지 못하면 신앙적으로 가정은 발전이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내가 아무리 눈물겹게 헌신을 하려고 해도 남편이 뒷바라지, 신앙적인 도움을 주지 않으면 정말 그것은 가시밭길이 아닐 수 없어요. 그래서 부부는 늘 함께 믿음의 길도 함께, 소망의 비전도 함께, 언제나 함께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하나님께서 그들 두 사람이 모두 의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7절에 보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의인이고 주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삶을 살은 그 가정에 수태치 못하더라" 그랬습니다.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부부가 의롭게 사는 가정이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았던 가정인데 그런데 왜 아이를 못 낳습니까? 이런 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고민을 주고 때때로 힘들게 하는 거예요. 신앙생활 잘하는 의인의 가정이면 아이도 잘 낳아야 되는데 "주님, 이번에는 아들주세요"

그러면 아들을 쑥 낳고, "주님, 이번에는 딸입니다" 그러면 딸을 쑥 낳고 그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이 부부를, 사람들이 존경하는 이 부부를 왜 하나님은 수태하지 못하게 하셨을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의인도 가질 수 있는 고통과 고민이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주의 종의 가정에도 고통이 있고 고민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고 위해서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반열에 따라, 차례를 따라 제사장 직무를 행합니다. 기분 나쁘겠지요. 아무리 헌신되게 주의 일을 했어도 자녀가 없으면 아마 실족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 사가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하고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이 자리에 나와 계신 분들은 다 행복하신가요? 여기 계신 모두는 모두가 다 만사형통한 분들만 오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는 제목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고민을 말할 수 없는 고민을 가지고 있는 분도 있어요. 그렇지만 주님께서 내게 주신 그 사명은 반차에 따라, 순서에 따라 신실하게 감당하는 이 모습이 정말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이 이 사가랴 가정의 모습과 같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잘될 때만 잘하는 것은 누구나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형통할 때 기뻐하는 것은 아무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그렇게 평범한 존재가 아니잖아요.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노라" 하나님이 정말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당신의 자녀로, 특별히 삼으셨는데 지나가다가 그냥 만난 사이가 아니잖아요. 그런 특별한 존재인, 하나님 앞에 너무나도 중요한 존재인 내가 하나님 앞에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때로 고민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그 사가랴 가정에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서 말씀합니다. "내가 너의 가정에 아들을 줄 거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가정에 큰 은혜를 주셔서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 그러면서 그 낳아야 할 아들 요한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 아들을 낳으면 너도 기뻐하고 너를 아는 모든 이웃들이 기뻐할 거다"

우리의 태어남의 존재가 기쁨의 존재가 되어야겠지요? 생일 축하할 때 장난삼아 이런 노래합디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우리 크리스챤들은 장난으로라도 그런 노래하면 안됩니다. 우리 성도로서는 입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지요. 아무리 코미디이고 장난이라도 해야 할 것이 있고, 안 할 것이 있어요. 부부가 앉아서 장난한다고 "여보, 우리 이혼 한번 해볼까?" 그런 얘기를 농담으로 합니까? 그거 무덤까지 갈 동안 정말 그 단어는 쓰지 말아야지요. 그 단어를 쓸 때에는 천지가 개벽해야지요. 조그만 말다툼마다 그런 단어가 나온다면 그건 정말 곤란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의 태어남에 대해서 그 자신도 기쁨이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도 기쁨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축복이예요. 자녀의 주심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사가랴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저가 태어나면 우선 너희들이 기뻐할 것이요,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태어날 그 아들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요...."

여러분, 자녀를 축복하실 때 좀 크게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제 어느 방송을 들으면서 제가 우리 친구 목사님 딸 결혼식을 다녀왔는데 딸 결혼식을 다녀오며 제 생각에 "아, 나도 이제 곧 이 자리에 서겠구나" 생각을 했어요. 자, 다녀오는 동안에 라디오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어느 주부가 글을 써서 게스트가 읽는데 자식이 이뻐보이는데 그것을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그 아이의 귀에 점이 있으면 "얘, 귀에 점이 있으면 복이 있는 자라고 그러던데 어쩌면 너는 귀에 점이 있어서 이렇게 복이 있니?" 뭐 자기의 손의 모습이 아주 동글동글하면 "야, 손이 동글동글하면 재능이 있다던데 넌 어쩌면 그렇게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니?" 그냥 하나 하나를 모두 뜯어서 그렇게 축복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자식이 늘 잘하지 만은 않지요? 속을 썩이고 아주 힘들게 해도 이 어머니는 그렇게 욕을 한다고 합니다. "이 크게 될 놈,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큰 일을 할 놈" 이러면서 욕을 한대요. 그건 욕이 아니라 축복이지요. 저는 그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그분이 상담대학원을 나왔나..." 보통 수준의 어머니가 아니지요?

자식을 축복할 수 있어야 되는데 우리는 대부분 축복보다는 저주를 많이 하고 살았습니다. 우리 한 세대 위의 부모님들, 일반적으로 자식에게 퍼붓는 욕은 저주에 가깝지요? 제가 이 강단에서 할 수가 없는 욕들입니다. 기가막힌 욕들을 우리는 밥먹듯이 들으면서 대부분의 한민족 자손들이 듣고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 달라져야지요?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향한 말들은 축복이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요한을 축복하십니다.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요한은 이스라엘 자손을 주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는 "이스라엘 자손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데 엘리야의 능력과 심정을 가지고 그 일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차를 운전하실 때는 주로 우리 맹집사님과 민전도사님이 하시지만 가끔은 성도들이 할 때도 있지요. 운전할 때는 늘 목회자의 심정으로 하기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차가 사고가 나거나 교통 법규를 위반했을 때 얼마나 하나님 영광을 가릴 것인지까지 생각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자손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엘리야의 심정을 가지고 일할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대강대강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세례 요한을 사가랴 가정에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냥 늙어서까지 아이가 없으니까 "한번 너희들 품에 아이를 한번 안아봐라" 그런 의미에서 아이를 주신 거예요? 그건 아니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녀를 주실 때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의 자녀들은 다 주님의 뜻이 있어요. 그 뜻을 분별키 위해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이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그리고 그 뜻에 여러분들이 늘 맞추어 가면서 살기를 원해야 합니다.

주님은 세례 요한을 사가랴의 가정에 주신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자, 그 말씀이 바로 17절에 나와있습니다.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으로 사역을 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주신 이유는 첫째로 주 앞에 앞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연령으로 보면 6개월 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사역을 앞서서 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30세가 되어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까지 조용히 고향에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6개월 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그는 이미 30세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 지역에서 아주 능력과 권위가 있는, 백성의 존경을 받는 그런 선지자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유대인들도 그를 두려워했고, 심지어는 헤롯 임금도 그를 두려워할 정도의 영적인 파워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는 늘 자신 뒤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일을 위해서 그의 사역을 감당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그의 가정에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사가랴 가정에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축복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예비하는 축복, 예비하는 자의 축복입니다. 그렇지요.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주인공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탄절이 되면 연극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연극에서는 예수님이나 혹은 마리아나 요셉, 이런 사람들은 주인공에 버금가는 위치입니다. 그런가 하면 동방의 박사들도 나올 것이고, 헤롯 왕도 나올 것이고, 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그런 목자들이 사람들도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을 지 몰라요.

늘 교회에서 이런 연극을 이렇게 배역을 맡기다 보면 우리 선생님들은 고민이지요. "누구에게 이 배역을 줄까?" 사실 저의 가정은 보면 목회자의 가정이라고 너무 플러스 알파가 아니라 마이너스 알파의 어려움이 많아요. 맨날 우리 아들 사탄을 시키고, 뭐 지나가는 사람 시키고, 속상해 해요.

사실 세상적으로 하면 아빠가 담임목사니까 요셉을 하고 마리아를 하고 해야 하는데 저는 그런 것을 원치 않지요. "야, 사탄이라도 있어야 천사가 돋보이지. 열심히 해보아라... 오히려 격려합니다. "아마 선생님이 너는 목사님 아들이라고 너는 그것 시켜도 시험에 안 들 것 같아서 그거 시켰을 거야. " 늘 마이너스 알파이지요. 손해가 많습니다. 배역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장로님의 아들들이나 권사님 딸들을 다 마리아를 시키거나 다 요셉을 시킬 수는 없겠지요. 모두가 주인공이 되려고 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만은 그러나 우리는 더 중요한 것을 배워야 합니다.

준비하는 자의 축복, 이 세례 요한은 자기의 그 명성과 권위와 능력을 주님이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러 오셨을 때 송두리째 주님 앞에 내어놓았어요.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조차도 모두 다 주님께 보냈어요.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나는 아니라" "그러면 누구입니까?" "내 뒤에 오시는 바로 저 분이다"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것들이 다 그 분을 위해서 준비된 것이라고 하는 것, 다시 말하면 그는 사역을 출발하면서 사역의 의미를 알고 있었어요. 영광을 자기가 가로채지 않았습니다.

주인공이 되는 것도 기쁠 지 모르지만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 주님을 위해서 준비하는 자로서의 삶을 철저하게 살았고 그리고 그는 가장 헌신적인 주의 일꾼으로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우리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줄로 믿습니다. 사가랴 가정에 주신 자녀는 그와 같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가랴를 말을 못하게 하셨어요. 아이가 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하게 하셨어요. 말을 하지 못하면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사람들이 말 못하는 사가랴를 보고 얼마나 많은 추측을 하고 여러 가지 억측을 했겠습니까? "저 사람이 갑자기 말을 못하나?" 제사장이, 목사님이, 왜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나? 아이를 낳는 동안 얼마나 정신적인 어려움이 많았겠어요? 하지만 그는 묵묵히 그 일을 감당하다가 아내가 세례 요한을 낳은 후에야 주께서 그 입을 열어 주신 줄 믿습니다.

오늘 '엘리사벳의 임한 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의로움과 신실함으로 살지만 때때로 우리에게 수태치 못하는 것과 같은 고통과 고민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 가운데에도 하나님 앞에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말없이 감당했던 사가랴와 엘리사벳, 그들에게 하나님은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놀라운 주의 일꾼을 그의 가정에 주셨고, 그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를 준비하는 앞서 준비하는 은혜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 엘리사벳을 통하여 허락하신 놀라운 뜻을 분별케 하시고, 순종케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언제나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주의 종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199 가서 제자 삼으라
본문: 막 16:19-20 (12월8일 설교)

최근 미국 교계에서 여성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조이스 마이어'는 그의 저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에서 "오늘날 믿음을 가진 자들 중에서 구원의 기쁨을 상실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자문하면서 그것은 바로 그 기쁨의 근거를 잘못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70명의 제자들이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하러 나갈 때, 주님은 그들에게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와 병자를 치유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힘입어 세상을 향해 나아갔고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명하니 귀신이 쫓겨가더이다"라며 승리의 체험을 만끽하며 크게 기뻐하였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너희가 귀신이 쫓겨간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충고하셨습니다. 곧 기쁨의 근거를 보다 분명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3장 18절에서,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선언함으로서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의 동기가 하나님이어야 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기쁨의 근거를 잘못 설정함으로 인해 믿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기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 바로 그 믿음 때문에 기뻐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믿음과 의심이라는 요소는 정말 한 자리에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에 의심이라고 하는 이물질이 개입되면 삶이 복잡해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를 가졌던 아담과 하와에게 사탄이 의심을 불어넣었을 때 신뢰가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의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주는 것인 줄 믿습니다.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두려움과 염려가 사단이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안을 주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인데 이 사실은 얼마 후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핍박을 받아 순교가 임박했을 때 확증해 주었습니다. 행 7:55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주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직전에 귀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20절입니다. "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하시니라" 이 말씀 속에는 세 가지의 과정이 점진적으로 전개되어 있습니다. 먼저 나아가는 삶의 시작입니다. 믿음의 생활을 하면서 진전이 없는 생활이라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마치 한 달란트를 가진 자가 그것마저 잃어버릴까 두려워 땅에 파묻고서 주인이 계산하자고 할때까지 기다리다가 한 달란트를 손상시키지 않고 온전하게 보관하였노라고 가져온 경우와 같습니다. 하지만 이 종은 칭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큰 책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실수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실수할 수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 자세로, 성도의 입장에서는 실수를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일을 하면서 "실수하면 어떻게 할까?" 염려할 필요가 없어요. 문제는 실수할까봐 두려워하는 두려움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실수하였다고 해서 그것으로 책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실수할까봐 두려워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하는 악하고 무익한 종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사업하는 분들은 사실은 그 자본금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에 늘 노출되어져 있습니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지향적인 용기를 가지고 앞을 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에 그들은 문을 박차고 이제는 나아가는 적극적인 성도의 삶, 제자의 삶을 살게 된 줄로 믿습니다. 나아가야 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면 축도합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새로운 결단과 용기를 가진 저 백성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에 하나님 저들과 함께 하옵소서.

사실 세상을 나아간다고 하는 건 두려운 일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 흔히 하는 말이 사회에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그 나아갈 사회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지요. 모든 학교에서 배운 대로 질서정연하고 그리고 정의롭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사회가 아니지요. 그래서 처음 사회에 나가면 혼란을 겪습니다. 분노하기도 합니다. 많은 고통도 받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내어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마치 이리떼가 우글거리는 것과 같아요.

'피터 와그너' 박사는 말합니다. 이 시대는 특별히 21세기는 영적 전쟁이 극심할 세계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육신의 정욕과 세상적인 모든 인간의 모습들이 하나님의 사람들과 정면으로 충돌할 어느 세기보다 가능성이 많은 세기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나아가면 도처에 사단의 세력들이 눈을 부릅뜨고 우리를 대적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여러분들이 세상을 향해서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사실 두려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실 때에 부활의 주님을 그들이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나아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나아가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지난 한해동안 여러분의 입술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우리가 증거하는 이 예수가 당신의 구주이심을 믿으라고 여러분의 입을 열은 기회가 몇 번이나 되시나요? 365일 가깝게 오는 동안 그렇게 입을 열지 못했던 여러분들, 주님을 만나지 못했던 제자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지요. 주님을 만난 이후에,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달라져야지요.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본문 말씀을 보면 두루 전파하는 사역을 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무엇을 해보려고 하는 연약하고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이제는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는 것입니다. 전해도 두루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라고 했습니다. 사실 사도행전 13장 이전만 해도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는 그저 자신들만의 부흥과 성장으로 만족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 능력있었습니다. 그 교회를 섬기는 사도들은 주님과 함께 했던,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그러한 사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원 사도라고 말합니다. 은혜가 넘쳤고, 기적이 일어났고, 날마다 그 수가 더했습니다. 더 바랄 것이 있나요?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에는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만, 예루살렘에서만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주님은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입니다.

오늘날 사마리아는 어디입니까?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여전히 핍박과 환란이 있는 곳입니다. 중국이 그러한 곳이고 북한이 그러한 곳입니다. 중동이 그러한 지역입니다. 사마리아로 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사마리아는 유대와 상종도 하지 않던 곳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기 전에는 당신과 상종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들과 상종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고 나서는 그들이 상종할 이유가 있는 그런 이웃이 된 것입니다. 북한을 왜 도와야 하는지, 왜 중국 선교를 해야 하는지, 왜 동남아의 가난한 나라들을 우리가 선교해야 하는지, 저 모슬렘의 중동권을 왜 우리가 위험을 무릅쓰고 평신도 선교사들이 전문 사역자로 들어가야 하는지, 이유가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사마리아까지 가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땅끝까지 주님은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시에 땅끝은 로마를 말합니다. 지금의 땅끝은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어요. 우리가 가기 어렵고 갈 수 없는 곳들, 그런 곳들을 주님은 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선교사님들이 먼저 앞장서서 십자가의 군사로 그 앞길을 향해 나아갑니다. 선교사를 보낸다고 하는 것은 곧 우리가 전파하는 일에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책임을 갖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교라고 하는 것은 이제 선택 과목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전공이요, 필수 과목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IMF가 오기 전에 우리 한국 교회는 선교의 거품 현상이 일었습니다. 너도 나도 선교에 대해서 바람이 불었습니다. 교회 주보에 선교사라는 이름이 최소한 파송은 못해도 단 몇 푼이라도 보내면서 협력 선교사 이름을 올려놓아야 체면이 서는 줄 알았습니다. 동남아시아에 몇 백만원 들여서 조그마한 교회, 엉터리라고 하나 지어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IMF라고 하는 경제적인 환란이 오고 나니까 제일 먼저 거둬치운 것이 선교였어요. 선교비 보내는 것을 중단하고, 선교사 보낸 것을 파송을 취소하고 귀국시키고, 국내외의 선교의 부분이 제일 먼저 상처를 입었습니다.

사실 선교사에게 선교비를 보내다가 "우리가 어려우니까 못 보내겠습니다"라고 통보하는 것은 선교사에게 사망 선고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요. 그렇게 한국 교회는 선교의 거품 현상이 IMF라고 하는 경제 환란을 통해서 한번 거둬졌어요. 그리고도 선교가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이요, 전공 과목이라고 여겨지는 교회들만 선교가 계속되게 되었습니다. 선교는 희생입니다. 선교는 눈물입니다. 선교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선교는 곧 하나님의 일인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 제자들은 주께서 함께 역사하시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고 해서 그들이 이전과 달라진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고 달라진 것이 뭐가 있어요? 여러분들의 얼굴이 달라집니까? 여러분들이 외형이 달라집니까? 뭐가 달라집니까?

여러분 결혼을 하고 나면, 그리고 신혼여행 갔다오면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전 세상이 다 내 것 같아요. 그러나 사실은 내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이지 세상은 여전히 그 자리입니다. 뭐가 달라진 거예요? 내가 달라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늘 어려운 환경, 여러 가지 환경적인 어려움을 이야기할 때마다 늘 세상적인 부분들을 이야기합니다. "이 놈의 세상이 바뀌어야지. 이 놈의 제도가 바뀌어야지" 사업이 안되면 늘 그럽니다. 경제적인 여러 가지 시스템이 바뀌어야 돼요. "이 땅에 어떤 법률이 바뀌어야 이 세상이 잘 될거야" 아니면 얼마 후에 있을 대통령 선거처럼 "사람이 바뀌어야 돼. 대통령이 바뀌어야 돼" 자리만 바뀌면 됩니까? 그렇게 수없이 바뀌어왔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16대이지요? 그 말은 16번 대통령 자리가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연임을 한 것까지 포함을 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뭐가 달라졌나요? 구조가 문제가 아니고, 시스템이 문제가 아니고, 법이 조항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람, 사람이 달라져야 할 줄 믿습니다. 사람이 달라지면 안에서 숨어 벌벌 떨던 사람들이 문을 박차고 나아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한 마디 못하던 벙어리 성도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당신의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기쁨과 구원의 기쁨은 없노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그들은 이제 홀로 살아가는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 주께서 함께 하시는, 주님이 동행하시는 그러한 당당한 주의 백성들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이 시대에 여러분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이제는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만 두렵지 않고 외롭지 않아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은 매주일 세상을 향해 나아가서 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고 돌아오시면서 여러분 손에는 여호와 닛시의 승리의 깃발이 늘 높이 들려져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때때로 실패하고 돌아오실지라도 또다시 주의 말씀과 주의 은혜에 힘입어서 세상을 향하여 다시금 나아갈 때는 용기 백배하여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당회가 있는 날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주의 일꾼들을 새롭게 임명하고 새로운 자리에서 주님의 일에 충성을 새롭게 하는 날입니다. 여러분들은 기대하지요. "내가 어느 자리에, 내가 어느 부서에 일을 하게 될까?" 아직까지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어느 부서의, 어느 일을 하게 될 지 모를 것입니다. 내가 속장이 되었는지, 내가 강사가 되었는지, 내가 교육부인지, 선교부인지 잘 모르실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연약하고 소극적인 그러한 삶의 모습을 가졌다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졌을 거예요. "좀 좋은 자리 가면 좋은데..." 좋은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갈채가 있고, 박수가 있는 자리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얼굴을 내밀기 좋은 자리일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힘이 좀 덜 들고, 경제적으로 씀씀이가 필요하지 않는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좋은 자리인가요?

우리는 찬송가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렇게 불러야 할 것입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골라서 가오리다" 뭘 골라요? 여러분이 하기 좋은 일을 골라서 다닙니까? 여러분의 기분에 맞고 정성에 맞는 일을 골라 다닙니까? 그러나 주님은 진정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디든지 가오리다" 오히려 주님, 어려운 자리, 힘든 자리, 경제적으로 많이 물질이 필요하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자리에 저를 사용해 주세요. 진정으로 새롭게 예수 안에서 거듭난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모습은 정말 달라질 줄 믿습니다. 이 달라진 모습으로, 달라진 사명감으로 새해를 힘차게 달려나가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 한해 동안도 연약한 가운데 우리를 인도해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부끄럽게도 한 달란트를 땅에 꼭꼭 묻어두고도 잘 간수했다고 오히려 부끄러움 없이 주님 앞에 나온 저희들도 있을 지 모릅니다. 주님 분노하시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셨는데 원하옵건대 주님, 새해에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은 결단코 그러한 일이 있지 않도록 생명을 다하여, 시간을 다하여, 물질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주님 앞에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충성된 청지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 어떤 사명을 맡기시든지 어디든지 가고자 결단하고 기뻐하는 평안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8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
본문: 막 16:12-18 (12월1일 설교)

마태복음 28장19절-20절은 '주님의 지상 명령'이라고 일컫는 말씀이 있는데, 오늘 본문 15절은 그 지상명령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이것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주님의 명령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이 복음전파 명령을 하신 내용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크게 2가지로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장소입니다. "온 천하에 다니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역에 대한 것이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는 모두 다릅니다. 직장이든지 사업현장이든지, 가정이든지 동네이든지 모든 삶의 자리가 다양합니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일을 하기 위하여 직장이 동료들이나 업무와 관계되는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그 장소가 복음 증거의 장소가 되어야 하고, 이웃을 만나는 사회활동 그 자체가 복음증거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때때로 "오늘은 전도대회를 하는 날입니다"해서 전도지나 주보를 들고 1 - 2시간씩 전도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때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오늘 행사가 끝나고 나면 "이제 전도는 끝났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 오해때문에 저는 전도대회라는 형식의 "행사"는 지금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도 형식적이고 행사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지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전도의 영역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을 모두 포함하는 "삶의 자리" 그 자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상명령의 두 번째 의미를 보면, "만민에게....." 라고 하셨듯이 이것은 복음 전파의 대상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전도란 관계를 만들어 가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관계를 통해서 전도라는 열매가 거두어지게 됩니다. 최근에 전도된 사람들을 조사했을 때 놀랍게도 85%의 사람이 아는 사람에 의해서 전도가 되어졌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통계가 나와 관계를 통한 전도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일깨워 주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람에게 전도지를 주면서 "예수 믿으세요"해서 교회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말이지요. 부흥회를 한다고 신문지에다가 전단지를 수만장을 넣어 뿌려도 전단지 보고서 은혜받으러 온사람 손들라고 하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진정으로 전도는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줄 믿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주님을 찾아와 만나 말씀을 들었을 때에 변화되었듯이, 니고데모가 밤중에라도 주님을 만나 거듭남의 비밀을 듣게 되었을때 제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삶에 다양한 자리에서 이웃들과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어야 하고, 신뢰받는 관계를 만들어야 하고, 인정받고 인정하는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예수 믿읍시다. 교회 가십시다" 했을 때 비로서 그의 마음은 움직이는 거예요. 하지만 자신이 인정할 수 없고 신뢰할 수 없다고 여긴 사람이 예수 믿자며 아무리 좋은 전도지를 내보인다고 한들 그들은 끄떡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전도하라면 디자인 좋고 칼라플한 전도지가 없다며 이런 것만 탓하는 사람들이 있읍니다만 사실 전도지가 시원치 않아서 전도가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방법과 종류는 개선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전도에 관한한 핵심은 아니예요.

오늘 주님께서 주신 지상 명령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는 말씀은 대상이 누구든지, 장소가 어디든지 전도의 사명은 중단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빌라가 많이 건축됩니다만 전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의미있는 일이지요. 그들은 빌라가 몇 세대가 들어오는지, 언제 준공이 되며 언제 입주가 되는지 긍금해서 집에 앉아 있을 수 없어 입주도 되기 전에 입주 사무실에 가서 물어봅니다. "얼마나 입주가 되었나요? 언제쯤 입주가 끝나나요?"

관계를 만들어 가려고 고민하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전도의 열매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자기 집 옆에 아무리 큰 아파트나 빌라가 생겨도 한번 들여다보지도 않습니다. 심지어는 우편함에 주보나 전도지 조차 꽂아놓지 않아요. 그렇게 한 해를 소비하듯 보내지요. 사실 생각해 보면 주님 앞에 너무 심한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마가복음을 마무리하면서 또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의 첫 날을 시작하면서 여러분의 삶 속에 주님 주신 이 마지막 명령이 다시금 여러분의 삶을, 여러분의 사명을, 여러분의 열정을 회복시키는 복된 계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그냥 등떠밀듯 맨손으로 세상에 보내신 것은 아닙니다. 17-18절에 보면, 4가지의 중요한 약속을 해주셨어요. 첫째는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입니다." 둘째는 "새 방언을 말하는 은사입니다" 셋째는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는 체험입니다." 네 번째는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낳는 치유의 능력입니다. 주님은 복음증거를 위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제자들에게 믿는 자에게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전도의 사명을 회복하고 전도자로서 세상을 향해 나갈 때 적어도 이런 4-5가지의 주님 약속하신 하나님 자녀의 권세와 능력을 우리가 나타내어야 하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 말씀은 또 일부 사람들에게 제일 오해가 되고 있고, 왜곡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야, 성경보니까 뱀을 집어도 괜찮고, 독을 마셔도 괜찮다더라. 야, 한번 먹어보자" 그래서 농약을 마시면 어떻게 되겠어요? 죽어야지요. 독사를 만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독에 물려서 몇 시간 못 가서 죽겠지요. 어떻게 보면 순수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아주 불신앙적인 행동이지요.

자, 우리는 왜 주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만민에게 천하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면서 이런 중요한 말씀을 약속했을까? 그 배경을 우리는 먼저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생각합니다.

1세기 초대교회 상황은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은 참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결심과 그리고 사람들에게 내가 예수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알린다고 하는 것은 적게는 모든 사회적인 삶의 활동에서 제외됨을 의미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그 사업의 그 조합에서 제외 당하는 거예요. 길드 조합에서 배제 당하는 겁니다. "당신은 더 이상 우리 조합원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물건을 공급받을 수도 없고, 물건을 내다 팔 수도 없어요. 만약에 학교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드러났을 때 그는 더 이상 학교에서 자유롭게 공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동지역의 모슬렘 국가들은 대외적으로는 우리도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슬람을 믿지 않으면 거의 사회활동은 어렵지요. 신분증에다가 종교란을 만들어서 모슬렘이냐? 크리스챤이냐? 그런 것들을 기록하게 만드는데 그 신분증에 크리스챤이라고 되어있으면 취직도 안되고, 학교에 입학도 되지 않아요. 대외적으로는 종교에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결국은 이슬람이 아니고서는 모든 삶에서 완전히 제외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21세기에도 그런 국가가 있는데 1세기 로마가 지배하는 당시에 황제를 숭배하고 수많은 우상을 숭배하는 그러한 시대에 예수의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런 의미에서 전도를 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예수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일이 되는 거예요. 그 말은 "네가 전도하겠느냐?"라는 말은 "너희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겠느냐?"라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직장이나 개인적인 일 때문에 주의 일을 놓는 사람이 있어요. 젊은 중고, 청년 대학부들이 예배 참석을 잘 못합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학원에서 주일날에도 오라고 해서 특강받아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어른만 도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도 그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등하고 고민합니다. 그럴 때 부모라도 "애, 너 공부도 중요하지만 주일날은 예배 드리러 가는 것이 좋겠다. 엄마, 아빠 생각에는 주일날 예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렇게 지원해 주면 이 아이가 신앙적인 결정을 하거나 결단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것입니다.

그러나 "애, 평생 믿을 건데 중3 때, 고3 때 공부 안하면 언제 하느냐 면서 다그친다면 곤란하겠지요. 오히려 믿는 부모가 그쯤되면 말도 못하는 것이지요. 눈 앞의 성적이 더 급하다고 생각하고 신앙적이고 인격적인 부분을 소홀히 한다면 희망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그런 부분에 철이 좀 든 부모라면 이 아이를 원만한 인격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음을 알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나아가서 복음을 전파하라.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네가 가다가 군인을 만나거든 군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네가 가다가 너의 거래처 사람을 만나거든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여러분, 사업하는 분들은 여러분 사업장에 교회 주보와 전도지를 쌓아놓고 여러분이 거래를 하면서 상담을 다하고, 물건을 팔고 나서 마지막 "어떻게 하면 이 사람에게 전도지를 줄 수 있는 좋은 분위기를 만들까?" 고민하고 기도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그런 것을 부담스러워해요.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손님 떨어질까봐 그렇답니다. 그정도 자신이 없으면 사업을 하지 말아야되는 것 아닌지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가지고 사업을 하겠다고 말하면서 그 정도의 자신이 없으면 하지 말아요. 구두를 닦아도 "아저씨, 아저씨 구두 참 멋있네요. 제가요, 좋은 선물 하나를 드리고 싶은데요" 그러면서 구두를 닦으면서도 구두 닦는 분에게 전도해서 그 교회에서 전도왕 된 사람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많이 배우고 높은 지위에 있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손해 볼 마음을 가지고, 희생할 마음을 가지고 주의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열정을 가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4-5가지의 특별한 권세를 주신 이유는 당신의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에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칠 것은 손바닥 보듯이 뻔합니다. 불 보듯이 뻔한 거예요. 그러면 피해야 되느냐? 포기해야 되느냐?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말씀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전도의 열정을 가진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 말씀이 실현되도록 주님께서 뒷받침해주겠다는 거예요. 당신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실족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도록 권세를 주시겠다는 거예요.

그 권세의 첫째는 전도 중에 많은 방해를 받는 사탄 마귀를 대할 때이지요.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난 이후에 복음의 문을 열어주셨고, 그리고 기도하러 가다가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났습니다. 그 여종은 귀신이 들린 것으로 인해서 주인에게 점을 쳐주고 주인을 유희롭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정말 그 여종이 불쌍히 여겨졌어요. 사도 바울이 그 여성을 향해서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와라" 그 여종을 사로잡고 있는 사탄 마귀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나오기를 선포했을 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16장 18절 "귀신이 즉시 나가니라" 귀신 쫓는 권세를 주신줄로 믿습니다.

전도하다 보면 문화적인 장벽도 생깁니다. 언어의 장벽도 생깁니다. 주님께서 전도를 통해서 새 방언의 역사를 주시겠다고 약속했어요. 이 새 방언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언어를 말합니다. 우리가 영어를 배우고, 일어를 배워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새 방언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의 문을 열기 위해서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는 방언의 역사를 말합니다.

20세기에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쓰셨던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모스크바 집회를 계획했습니다. 당시는 미국과 소련이 냉전시대에 가장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던 시대예요. 서로 누구 힘이 크냐를 키재기하면서 핵폭탄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전 세계 집회를 하던 중에 모스크바 집회 신청을 했어요. 당시에 서기장이 고민합니다. 대외적으로는 소련도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선포해 놓았는데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모스크바에서 집회를 하겠다고 하니까 막을 방법이 없어요. 막자니 종교의 자유가 없는 것이 드러나는 일이고, 허가하자니 공산주의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질까봐 두렵고, 결국은 허락을 했습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과 많은 스태프들이 얼마나 많은 기도의 준비가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집회가 열렸습니다. 러시아어 통역이 말씀을 통역합니다. 그냥 원만하게 크게 충돌하지 않고 지나갈 수도 있을 거예요. "여기는 소련이고, 여기는 공산주의의 심장이고, 여기서 집회가 된 것만 해도 은혜지" 이러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복음에는 십자가가 선포되어야 하고, 우리의 회개와 결단이 선포되지 않고서는 그것은 복음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설교하는 중에 아주 중요한 선포를 합니다. "미국 사람들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통역이 신이 나서 통역합니다. 자기 나라와 원수의 나라가 멸망한다는데 얼마나 신납니까? "미국 사람도 예수 믿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소련 사람도 예수 믿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통역이 아무 소리 안하고 가만히 있습니다. 못 들은 지 알고 한번 더 얘기합니다. 그래도 조용합니다. 그때 목사님 생각에 "지금 이 사람이 그 말씀을 통역했다가는 끝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지도 모른다. 아마 그런 두려움 때문에 지금 통역을 못하는구나"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다시 그 말씀을 선포할 때 그 말씀이 러시아 방언이 되어 선포된 줄 믿습니다. 다 들었어요. 모스크바 광장의 수많은 사람들이 소련 사람도 예수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말씀을 러시아 방언으로 듣게 되었어요. 그것을 새 방언이라고 그래요. 하나님께서 생명을 걸고 주의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면 길을 열어주시고, 방법을 열어주시고, 해답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는 뱀을 집으며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고 했어요. "해를 받지 않는가 보자"라고 독을 마시면 죽을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주의 종들이 복음을 증거하는 극한 상황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겠다고 하는 주님의 강력한 의지가 거기 담겨져 있는 거예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7배나 뜨거워진 풀무에 던졌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 자리에 보내셔서 내 사람이 되게 하셨고 불에 던질 때에 군사가 데어서 죽는 그 뜨거운 풀무불, 그 세 사람은 전혀 옷자락과 머리카락도 눋지 않았다고 그랬어요. 사자굴에 다니엘이 던짐을 받았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통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들을 보내어 저들을 나를 지키는 도구로 사용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받기 위해서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병자를 만날 때에 치유의 능력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환자들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니라" 치유의 은사지요. 베드로와 요한이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 앉은뱅이를 향해서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왜 없겠어요? 그 앉은뱅이 거지에게 동전 한푼 주는 것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에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의 근본적인 삶, 앉은뱅이 인생이 아니라 일어나 걷는 인생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그가 걸은 줄로 믿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종들의 기적과 역사의 중요한 공통점이 있어요. 그것은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이나 누구든지 기도하러 가던 중에 이런 역사가 일어난다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기도의 사람에게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거예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세상 얘기가 될 것입니다. 평생을 믿어도 남의 얘기가 될 거예요. 저는 소원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이 이 기적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어떤 사람을 만나든, 어떤 형편에 있든 여러분들은 내가 예수의 사람이며 내가 믿는 그 예수님을 내가 당신을 위해서 소개하고 싶고, 전하고 싶고, 내가 나가는 교회에 옆자리에 당신을 앉히고 싶은 그 열정과 그 열망이 때때로 내게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려움이 주어지고 손해가 된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라면 나는 기꺼이 이 일을 하겠노라고 그렇게 결심하고 실천해 나갈 때 주님께서 험한 세상에 그냥 우리를 떠밀어 내미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이적과 기적과 표적을 주셔서 오히려 승리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 능력, 이 증인의 삶을 여러분들이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능력의 하나님,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이 얼마나 놀라운 지를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하는 일에 이제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게 하시고,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게 하시고 담대히 주의 능력 힘입어 주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사용하는 증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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