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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너를 도우리라 / 사 4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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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내가 너를 도우리라 
설 교 : 황요한 목사
본 문 : 사 41:8-14 

올해 마지막 주에 발행된 'TIME'지는 올해의 인물로 '줄리아니' 뉴욕 시장을 선정하여 표지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9월11일 세계 무역센터 테러 이후 1,000만 뉴욕 시민들이 몸서리치며 고통을 받았을때 복구 작업을 진두지휘 하면서 헌신적인 모습으로 시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그가 시장의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는 그에게 'TIME'은 줄리아니를 가리켜 'Tower of strength'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무역센터는 무너졌지만 줄리아니 시장은 오히려 뉴욕 시민들의 새로운 희망과 재기의 상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동안 여러분들의 삶 속에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때로는 눈물겨운 고난도 있었을 것이고 고통스러운 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파스칼은 "모든 것의 출발은 항상 좋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작이 나쁜 법은 없지요. 심지어는 술판도 시작은 좋게 하기 마련입니다. 형님, 아우 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나중에는 난장판이 되지요.

여러분들도 지난 한 해를 잘 시작하셨을 것입니다. 기분 좋게, 소망 넘치게 시작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52주가 다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후회되고 속상한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괴테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을 때 결국 모든 단추를 잘못 끼우게 된다" 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첫 단추를 잘못 끼웠으니까 끝까지 고집피우며 가라는 말이 아니라, 잘못 끼운 시점을 빨리 발견하여 깨닫고 돌아가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좋은 교훈 중에 "늦었다고 할 그 때가 가장 좋은 출발점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40-50세에 한글을 공부하는 분도 있고, 어떤 분들은 60세가 넘어서 수능시험을 보는 분들도 있어요.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70세가 넘은 분들이 학원에 와서 자판을 두들기면서 어렵게 배워가는 분들도 보았습니다.

시작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나는 늦었다"라고 하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형편과 처지에 관계없이 시작은 파스칼의 말대로 언제나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좋게 출발한 우리의 삶의 모습이 마무리를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성경 66권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고 든든하게 세워 주시는 말씀 중에 가장 강력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도 위로받지 못하고, 이 말씀을 가지고도 새 힘을 얻지 못한다면 더 이상 위로 받을 말씀은 없어요.
주님께서 8절과 14절에서 한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씀은 아주 근본적인 부름입니다.

보통 한국인의 정서나, 동양적인 정서는 사람을 평가할 때 본인보다는 그의 부모나 집안을 통해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저 사람 누구야?"라고 물어보기 이전에 "누구 아들이야? " 이렇게 먼저 물어보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이라고 하는 자연인을 부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 야곱아"라고 말씀하고 계심에 주목해야 합니다.

창세기 12장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놀라운 선교적 축복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냥 축복이 아니고 선교적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셨는데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그리고 나서 말씀하시기를 "너로 인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 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관계에서 복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복이 전해질 수 있는 그러한 메신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선교적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자신과 여러분들 가정들이 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선교적 축복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어제 9시 뉴스시간에는 대통령께서 국무총리와 장관들에게 "학연과 지연을 떠나서 공무원 인사를 하라" 고 당부하는 장면이 방영되었습니다. 새해가 되면 부처마다 인사 이동이 있기 마련인데 그때마다 학연, 지연 등으로 능력과 소신을 가진 인재들이 소외되는 일들이 이젠 흔한 일이어서 대통령의 당부의 말씀도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음이 안타까웠습니다.
지난 수 십년 동안 특정 지역이라고 소외되었던 인사 문제를 4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메꾸려다 보니 편중인사, 한풀이 인사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또 다른 인사의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킨 것입니다.
군대 가면 한번도 본 적이 없어도 고향이 같다는 이유만으로도 뭐 형제처럼 챙겨주지요. 동향이라는 끈끈함도 꽤 매력이 있어 보이지만 제대하고 나면 그만이예요.
외국에 가면 한국 사람이라고 하는 것만으로도 가까워집니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면 또 그만이예요. 결국은 이러한 반가움과 정은 결국 이기적인 만남의 또 다른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은 그러한 이유와 수준이 아니라 문화를 건너뛰고, 문명을 건너뛰어 어떤 민족이든지 나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을 우리는 선교적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야곱을 말씀하시면서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근본적인 하나님의 약속을 지금 끄집어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야곱은 그런 선교적 축복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늘 자기 중심이었어요. 자기를 위해서 내게 유익이 되고 내게 출세가 된다면 형제도 사기치고, 부모도 거짓하고, 삼촌도 친척도 다 거짓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야곱입니다. 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의 대명사적인 이름이 야곱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들은 야곱과 같이 살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어요. 야곱,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늘 입에 하나님을 달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고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늘 이기적이예요.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의 한계가 여기 있어요. 야곱의 수준에 머물러 버리는 거예요.

우리 주님께서 놀랍게도 14절에 야곱을 이렇게 평가하셨습니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지렁이 하니까 무슨 생각나요? 밟아도 꿈틀하는 것이 지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렁이는 요즘에 잘 보기 어려운데 우리 시골에 보면 길이나 논이나 밭이나 어디든지 뚫고 돌아다니는 징그러운 그 뱀같이 생긴 그것도 시골에서 보면 큰 지렁이들은 정말 소름이 끼쳐요.

사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이 지렁이가 많은 토양은 공해가 없고 건강한 토양입니다. 지렁이가 자꾸 쑤시고 다니면서 구멍을 뚫어내야 땅이 순환이 되어서 농사도 잘되고 영양분도 자꾸 재생산되기 때문에 지렁이가 있는 땅은 오염되지 않은 땅이라고 생태적으로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하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했을 때의 이 의미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부정적입니다.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도움이 되지 않는, 같이 있고 싶지 않은 그런 의미에서의 지렁이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누구도 중요하고 존귀하게 여겨주지 않는 그런 의미에서의 지렁이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성취한 사람입니다. 적어도 자기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아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더 이상 야곱에게 있어서는 소원이 없을 정도였어요. 사람, 물질, 어떤 영적인 축복권까지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기고만장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면서 주신 칭호가 무엇입니까?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아주 근본적으로 뿌리부터 우리 하나님께서 다시 시작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야곱을 그렇게 부르실 뿐 아니라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그리고 야곱으로, 그리고 이스라엘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변화된 후에 천하장사가 된 타이틀이 이스라엘이예요. 주의 사자와 싸웁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자기를 죽이러 온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정신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끼었던 단추가 잘못 끼웠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야곱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는 형 에서의 군사가 자기를 죽이러 오는 위기에서 제 정신이 든 거예요.

여러분, 위기는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고난받는 것이 유익이라"는 바울의 고백은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정신 못 차리는 사람에게는 위기가 우리를 제 정신으로 돌아오게 만들어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외형적인 형식만 가졌던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제 자리에 오게 하는 것은 위기라는 말이예요.
그러므로 "너를 알고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광야가 나쁘지만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창세기 말씀을 듣고 나서 설교집을 낼 때에 제목을 "광야는 축복입니다"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 말이 이해가 되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그 책이 10,000원 짜리가 아니라 100만원, 천만원 그 이상의 가치가 있어요. 하지만 그 의미를 모른다면 화장지 정도 밖에는 안될 것입니다.

야곱이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평생 자기의 지혜와 지식을 동원해서 이루었던 것, 물질, 사람,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야곱 홀로 남았다고 그랬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왔습니다. 시험합니다. 그전에 하나님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어요. 교회, 다녀도 그만 안 다녀도 그만이었어요. 신앙생활,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었어요. 그런데 얍복강에서 야곱은 이제 그럴 수가 없었어요. 떠나려는 주의 사자를 붙잡고 늘어집니다.
환도뼈, 엉덩이뼈를 부러뜨려서 힘을 빼놓는 데도 질질 끌려가면서도 붙잡고 "이제는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이 한 고백이 나오기까지 우리의 교만이 꺾어야 하고, 우리의 인간적 자랑이 꺾어야 하고, 인간적 욕심이 꺾어야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는 그게 나올 수 없어요.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은 쉽게 나오지 않아요. 결국 야곱은 그 고백을 하고 맙니다. "하나님, 내 인생에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어요"

그제야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통해서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아시면서 묻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에 있는 지 아시면서도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그 자리에 지금 네가 있어야 할 자리냐? 너 거기 있으면 안되는데 왜 거기 있느냐?" 아시면서 묻는 거예요. 각성시키시는 것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인데요. 저 도둑놈인데요. 저 못된 인간인데요" 원래 야곱이라는 이름이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그런 이름을 가지고 살지 않았어요? 여러분, 예수 믿기 전에 여러분의 이름은 어떤 의미인가요? 다 이기적인 뜻을 가지고 있잖아요. 여러분 개인적으로, 여러분만 잘되라는 의미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 믿고 나서 의미가 바뀌는 거예요.

야곱에게 주님이 묻는 의미는 그것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인데요. 나 밖에 모르고 살았는데요" "이름을 바꾸어라. 이제부터는 널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주의 사자와 싸워서 씨름하다가 이겼기에 천하장사가 된 야곱, 천하장사 타이틀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이라. 이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우리 하나님 져주셨어요. 우리를 복주시기 위해서 우리 하나님께서 져주셨어요. 그 무슨 얘기입니까? "이제는 네가 네 입으로 기도하면 내가 들어주고, 네가 네 입으로 구하면 응답하고, 들어주신다는 얘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져 주시겠다는 얘기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 하나님과 교통하셨습니까? 하나님과의 신통이 꽉 막혀 있는 가운데 인통, 인간적인 교제만 부지런히 하지 않았습니까? 먼저 하나님과 신통해야 될 줄 믿습니다. 그 다음에 인통이예요. 인간이 먼저가 아니예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먼저입니다.

야곱이 이 비밀을 이제야 안 거예요. 그러나 우리 주님은 늦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깨달은 그때가 가장 적절한 때입니다. 이제 그 야곱, 넓은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야곱처럼 그렇게 살았던, 그러나 이제는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한 당신의 백성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9-13절까지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 됨이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도와주시겠다고, 붙잡으시겠다고, 세워주시겠다고, 함께 하시겠다고 우리 주님께서 몇 번씩 반복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두려움으로, 육신의 두려움으로, 인간적 두려움으로 고난 속에 있는 성도님들이 계시다면 오늘 이 주님의 말씀에 위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주님의 위로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아요. 주님 주시는 평안은 세상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고난 가운데 인도하신 줄 믿습니다. 고난 가운데에도 때때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고난 가운데에도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고난 가운데에도 우리를 평탄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은혜들이 온상 속에서 바람 막아주고, 비 막아주고, 추위 막아주는 온상 속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시면서 거기에서 잔잔한 물가로도, 푸른 초장으로도,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거기에서 샘물로도 우리를 인도하신 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강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 하나님은 우리를 온상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기 원치 않아요. 우리를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가난하신 것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청년 때까지는 참으로 가난한 삶속에서 생활했어요. 아버님이 개척교회 목회자이셨으니까... 그런데 저는 그것을 너무 감사하게 생각했어요. 제가 목회하면서 가난한 분들이 등록하고, 심방 가려고 그러면 "아휴, 목사님 심방 오는 것 좀 부담스러워요" "왜 그럽니까?" "집도 변변치 않고 보여줄 것도 없고..."
제가 뭐 40인치 슈퍼비젼 구경하러 가요? 어려운 분이 등록하면 저는 마음에 "내게 또 사명이 생겼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가나한 분들 기죽지 마세요. 가난한 것은 불편하지만 가난함은 우리에게 강함을 선사하지요.

저는 그래서 청년 때까지 그렇게 어렵게 가난했던 시절이 얼마나 제 삶에 힘이 되는 지 몰라요. 여러분, 출세하지 못했다고 해서 불평하지 말고 여러분이 지금 낮은 자리에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낮은 자리에 있어 봐야 됩니다. 그래야 높은 자리가 귀하게 보입니다.
왜 재벌 2세들이 흥청망청합니까? 100만원 짜리 돈 다발을 왜 술집에서 뿌리고 다녀요? 귀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가난이 뭔지 모르고 낮은 것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모쪼록 여러분들은 가난을 모르고 고생도 모르게 자녀를 키웠다고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범치않기를 바랍니다.

손가락에 물을 튀기고 살지 않았다고 그렇게 살았다고 말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 천치 바보예요. 그렇게 자랐으면 평생 입다물고 살아요. 부끄러운 얘기예요. 수고의 땀을 흘리면서 고난의 빵을 씹으면서 살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물질의 가치도 알고, 우리가 세움을 받았을 때 세움의 귀한 것도 아는 거예요. 지난 한 해 동안 형통한 것만 여러분 생각하고 불평하지 말고,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시고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를 도우리라" 우리 주님은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어요. 그 광야의 길에는 애굽을 나와야 되는 갈등도 있었어요. 애굽이 뭡니까? 우리 육신의 자리입니다. 영적으로는 죄악의 자리입니다. 그 죄악의 자리, 그 육신의 자리, 그러나 우리는 늘 그 자리가 편안하고 재미있지 않았습니까? 그 자리를 나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이 드는 일이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서 여러분이 새 사람이 되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하는 것 쉽지 않잖아요.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일 아닙니까? 그것이 죄악의 길이고 육신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거기가 재미있고 괜찮았어요. 아직도 대한민국의 3/4은 아직 애굽에 있어요.
그런데 애굽에서 나오라고 해도 거기가 좋기 때문에 안오는 거예요. 애굽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결단이 있어야 해요.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애굽에서 광야의 길로 나오시기 위해서 참으로 눈물겨운 결단을 하신 분인 줄 믿습니다. 끊을 것 끊어야 되고, 얼마나 결단이 필요합니까?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홍해에서 건너가게 하셨어요. 이제 예수만 믿으면, 교회 등록만 하면, 교패만 붙이면 만사가 형통하리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예요. 홍해가 딱 가로막고 있어요. 깜깜합니다. 예수 믿은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기냐고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저주하면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홍해를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건너가게 하셔서 모세가 지팡이를 들었을 때 홍해를 갈라 주셨고, 성경에 보니까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넜더라"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너는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것 건너고 나서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백성들 입에 입에 찬송이 넘쳤어요. "우리 하나님은 위대하시도다. 우리 하나님은 크시도다"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러나 광야 길을 가다 보니까 배고픔도 있었어요. 목마름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또 원망하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위기가 오면 원망부터 하는 사람이 있고, 위기가 왔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메시지를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시고 만나를 40년간이나 주셨어요. 거기서 승리한 사람들이 약속했던 가나안으로 들어간 줄 믿습니다.

가나안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광야의 길을 가는 동안에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는 말씀을 합니다. 10절의 말씀, 너라고 하신 말씀에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서 봉독하기를 바랍니다. 5번 나오는데 다같이 봉독합니다.
"두려워말라. 내가 000 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000 의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000 을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000 을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000 을 붙들리라" 아멘!

이렇게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해서 읽으면 은혜와 감격이 넘쳐나 눈물이 펑펑 쏟아져요. "내가 너를 도우리라" 아무개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만난 하나님이예요. 그전에 야곱은 아버지의 하나님이었고, 할아버지의 하나님이었고, 삼촌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얍복강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야곱,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

지난 한 해동안 너무나도 하나님의 은혜가 큰 줄 믿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내가 너를 도우리라" 여기까지 도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2002년에도 변함없는 소망의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출발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해를 바라보는 우리의 연약하고 부족했던 모습들을 가리워주시고 주님만 의지하며 새 출발 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가 되어 선교적 축복의 삶을 살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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