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람이 되신 하나님 / 마 1:18~25

  • 잡초 잡초
  • 397
  • 0

첨부 1


제 목 : 사람이 되신 하나님
본 문 : 마 1:18~25
설 교 : 옥한흠 목사 (사랑의교회)


성경을 읽을 때면 가끔 기적적으로 출생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아마 가장 먼저 기적적인 출생을 경험한 부부가 있다면, 아브라함과 사라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부부는 둘 다 100세에 이르는 노령의 몸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때까지도 무자했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이제 자녀를 가질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사라의 태를 여시고 이삭이라는 위대한 인물을 탄생시키셨습니다. 그밖에 위대한 지도자인 삼손이나 사무엘도 비슷한 출생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 부모가 오랫동안 자녀를 낳지 못해 고민하다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인물들입니다.

신약으로 넘어와서 가장 먼저 이 기적적인 출생을 체험한 사람은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부모는 다 늙었습니다. 자연법칙 상 자녀가 태어날 가능성이라고는 거의 없는 노령의 부모였습니다. 비록 자녀를 달라고는 계속 기도하고 있었지만 이미 마음으로는 '틀렸어'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세례 요한을 아들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옥동자가 태어나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위대한 선지자의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몇몇 기적적으로 태어난 인물들이 있지만 초자연적인 출생의 절정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끌고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이유는, 그가 자연법칙에 의해서가 아닌 처녀의 몸을 통해 태어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600여 년 전 이사야에 의해 이미 예언된바 있습니다.

오늘 다룰 본문 중 23절에도 이사야가 예언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은 잘 납득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미 예수님께서 오시기 수백 년 전부터 그분이 처녀의 몸에서 탄생할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한 관계에 있으면서 아직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하게 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정혼이란 유대나라 관습 중 하나로, 자녀들이 어릴 때 부모들끼리 서로 혼인을 약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 집 딸 아이를 보니 참 귀엽네요. 우리 집 아이가 자라면 둘이 결혼시킵시다." 이런 말이 처음에는 부모들 간에 장난 삼아 오가다가 그 다음에는 "그럴 바에야 정식으로 두 아이를 엮어주도록 양가가 약속을 합시다." 하고 합의를 봅니다. 당시 정혼한 관계의 남녀는 15-16세가 넘어가면 언제든지 부모의 허락을 받아 동거할 수 있었으며, 결혼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이미 10대 후반에 접어든 성인으로서, 그들을 결혼시키기로 정혼한 부모들의 승낙 아래 언제든지 동거할 수 있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고 동거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리아가 요셉에게 찾아왔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요셉, 내 말 좀 들어봐." "날 믿지? 꼭 믿어야 돼. 그리고 나를 의심하면 안돼. 내가 하는 말을 꼭 믿어줬으면 좋겠어. 나를 사랑하지?" 그러자 요셉이 대답했습니다. "무슨 말인데, 말해 봐." 그리고는 마리아에게서 "나 임신했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순간 요셉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어서 마리아가 정신을 가다듬고 메마른 입술을 축여가면서 요셉을 설득시키려고 자신이 경험했던 이야기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갑자기 가브리엘이라는 천사가 내게 나타나서, 느닷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성령이 네게 임하셔서 성령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할 것이고 그 아들이 태어나면 다윗의 위를 이어받아 만왕의 왕이 될 것이다." 나는 너무 놀라서 "나는 남자를 아직 모르는데요. 결혼도 안 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어. 그러자 천사가 말하기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네가 잉태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낳는다는 거야. 너무나 확실하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면 그렇게 되어지리다." 하고 허락을 했어. 그런데 얼마 지나서 정말 내가 임신을 한 거야. 내 말 믿을 수 있겠어?" 

과연 요셉이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그 뒤로 요셉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일을 어떻게 하지? 마리아가 틀림없이 실수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한다지. 이 사실이 온 동네에 알려지면 옛날 율법대로 그녀는 돌에 맞아 죽을 텐데...그래,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어버리자.'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이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리아가 잉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니라." 그것도 두 번이나 요셉에게 확인시켜주시면서 그의 마음에서 의심을 쓸어내셨습니다. 그리고 머뭇거리지 말고 마리아를 데려와서 동거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시를 받고, 다음날 당장 마리아를 데리고 와서 동거했습니다.

신약을 보면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기록한 본문은 하나도 없습니다. 먼저 1장 1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말을 시작으로 예수님의 족보, 혈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부터 이어진 예수님의 족보 안에 4명의 여자 이름이 등장합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특별히 그 여자들을 언급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다음 몇 가지 구절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3절을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말합니다. 5절에 가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6절 중간에 가면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기록합니다. 이처럼 여자가 나올 때는 누가 어떤 여자를 통해서 누구를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6절에 가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원래대로 말하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며,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았다고 해야 정상적인 패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위에서 기록해 내려오던 패턴을 완전히 깨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요셉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나오신 것뿐이지, 요셉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로 인해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절대 지칭하지 않습니다. 다만 마리아에게서 낳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은 위대한 여성입니다. 그녀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나시면, 그 뒤에 지불해야 될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자신을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런 마리아의 위대한 자세를 높이 평가한 나머지, 나중에는 마치 그녀를 하나님처럼 우상으로 섬기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죄가 없다', '마리아는 영원한 동정녀다. 절대 결혼한 일이 없고 자녀를 낳은 일도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는 나중에 승천했다.'고 말하면서 지난 수천 년 동안 마리아 상 앞에서 기도하고 손을 비비면서 법석을 떠는 것을 봐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런 주장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 가톨릭이 부패할 때 생겨난 잘못된 유전입니다. 하지만 이런 잘못된 현상들이 마리아가 하나님 앞에 헌신한 위대한 여성이었음을 부인하진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점을 마음에 두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사실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꼭 묻고 넘어가야 될 중요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마음으로는 예수님의 동정녀 마리아 탄생을 안 믿는 분도 꽤 있을 것입니다.

다음은 버클리 대학에서 미국 교회를 대상으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를 조사한 결과입니다. 놀랍게도 가장 복음적이라고 하는 침례교회에서만 해도 31%가 나왔습니다. 곧 10명 중 3명은 안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장로교는 43%, 감리교는 66%까지 나왔습니다. 따라서 감리교의 경우 10명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 그 중 7명은 예수님이 처녀의 몸을 통해 탄생하셨다는 사실을 안 믿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신앙적인 내용으로만 받아들일 뿐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인 데는 부인합니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 이런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믿게 되면 치명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분명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이 동정녀 탄생을 통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면,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예수님의 무죄설-를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요셉의 아들이면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되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십자가의 죽음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부활은 절대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기독교의 중요한 복음의 핵심들을 절대 믿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동정녀 탄생을 안 믿는다면 우리는 벌써 믿음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안 믿으시는 분들께 참고로 말씀 드리면 성경에는 초자연적인 이적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최고의 이적은 천지 창조입니다. 창세기 1장을 펴자마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과 함께 6일 동안의 천지 창조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든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는 것만큼 어려운 기적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처녀의 몸을 통해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을 믿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는 처녀의 몸을 빌려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구주로 보내시는 것이 절대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처녀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을 주저 없이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법칙은 암수가 결합해서 새끼를 낳는 것입니다. 남녀가 결합해서 한 생명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법칙을 벗어나는 예외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단 한번 자기가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시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자연법칙을 벗어나는 일을 하셨습니다. 위대한 기독교 문학자 C.S. 루이스는 그 일을 두고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단 한번 자기가 사람이 되는 신비스러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생명창조의 도구라고 하는 남자의 역할을 하나님이 옆으로 제쳐놓고, 대신 자기의 손가락을 처녀 마리아에게 대서 임신을 하게 하셨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께서 단 한번 자연의 거대한 장갑을 자기 손에서 벗어버리고 맨손으로 마리아에게 손을 대셨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장갑이라고 하면 남녀가 결혼해서 자녀를 낳는 자연법칙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것을 그런 법칙에 구애 받지 않는 순수한 하나님의 손으로 마리아를 터치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이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나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천사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런 신비한 방법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하셨습니다. 성령이 마리아를 감동하고, 성령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매우 힘있고, 신선케 하는 능력이 있어 마리아를 통해 태어날 하나님의 아들에게 죄가 오염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 없는 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면서 완전한 사람입니다. 사람이시면서도 죄가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중심 교리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고 믿을 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마음에 묵상하면서 특별히 2가지 사실이 은혜가 되었습니다. 첫째는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3절) 멀리 계시는 것처럼 보이던 하나님께서 우리 가까이 오셨습니다. 교제할 수 없을 것 같이 높아 보이던 하나님이 맘껏 친구처럼 교제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가까이 오셨습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우리 귀로 들을 수 있으며,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곧 우리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 곁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모른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다만 유대인처럼 구약에 있는 하나님만 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에게서 어떤 이미지를 느끼게 됩니까? 높이 그리고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 아닙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두려우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시내 산에서 우레소리와 함께 연기와 구름가운데 임하시던, 도무지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면 3, 4대까지 징벌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까? 설혹 죄를 용서하신다고 할지라도 그 죄 값을 반드시 갚으시는 철저하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만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하나님으로만 알 것입니다.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이요, 너무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요, 너무나 크고 거룩하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이 안 계셨다면 우리는 이런 하나님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항상 조마조마 해야 되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되고,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14:11)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확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 된 그 하나님이 어떻게 마음에 와 닿습니까? 어떤 하나님의 모습으로 그려집니까?

어떤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진짜 심각한 필요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실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인품을 가지셨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며,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한가를 깊이 깨닫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깨닫고, 예수님을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하나님의 진면모를 확인한 사람에게는 혁명이 일어납니다. 오늘 이 혁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 세상에 오신 하나님, 내 곁에 오신 하나님,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 내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그 사람의 인격 안에 혁명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처음 대중 앞에 나타나셨을 때 어떤 모습이셨습니까? 우리가 얼마든지 가까이 가서 그분의 옷자락을 잡고, 그분의 눈에 눈동자를 맞추면서 얼마든지 친구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평범하고도 평화로운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대중 앞에 나타나셨을 때 가난한 자들, 고통 당하는 자들, 세상에서 짓밟히는 자들에게 제일 먼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들을 일일이 찾아가 가까이 하며 함께 식사하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해주마.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비록 세상에서는 고생하고, 고통하고, 짓밟히지만 하나님은 너희를 사랑하셔서 그분의 자녀로 삼으시고 나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고 하시면서 그들의 가슴 속에 소망을 불러일으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내가 울 때 내 곁에서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하나님, 내가 좌절하고 앉아서 일어나지를 못할 때 내 곁에 와서 내 손을 붙들고 일으켜주시는 하나님. 그러나 전에는 이런 하나님을 감히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제는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 때문에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발견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의 심령을 흔들어 깨움으로, 우리의 감성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감정을 달구시는 하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느낌을 통해 가까이 접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게 임마누엘 하나님입니다. 옛날처럼 멀리 보이던 하나님, 높이 보이던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 안에 나와 함께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알게 해주셨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 쌓일 때 위로하고 힘주실 이 주 예수"(찬송93장)

이 찬송은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찬송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부를 수 있는 찬송입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근심에 짓눌려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그 옆에 와 계시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아니다. 진짜 사랑의 하나님은 네가 울 때 네 옆에 있단다. 너의 눈물을 씻어 주신단다. 어떤 때는 너와 함께 울기도 하시지. 네가 근심에 쌓일 때 그 근심을 덜어주려고 네 곁에 다가오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우리에게 알게 해주신 분이 바로 임마누엘 예수님입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 쌓일 때 위로하고 힘주실 이 주 예수"
이 찬송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벌써 내 곁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움직여 놓았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완전히 들끓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머리로만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는 하나님입니다.

이번에 대선을 치르면서 노무현씨가 당선이 되었다는 확정 보도를 함께 들었습니다. 그리고 2, 30대 젊은이들이 광화문 네거리와 민주당사 앞에서, 그 밖에 도시 이곳 저곳에서 노란 모자를 쓰고 노란 풍선을 들고 노란 머플러를 두르고는 좋아서 열광하는 모습을 TV를 통해 지켜보았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면서 제게 한가지 숙제가 있었습니다. 무엇이 저 젊은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저 젊은이들의 정서를 움직여 열광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흔히 말하는 노 후보의 정치경력, 곧 원칙과 정직을 평생 신조로 삼은 채 고난을 무릅쓰고 지금까지 외길로 걸어온 그의 정치 경력이 주는 감동일까? 물론 그런 부분도 약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한 해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노 후보는 멀리 보이고, 높아만 보이던 대통령의 이미지를 젊은이들의 가슴에 닿도록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젊은이들의 정서, 감정을 움직이는데 성공했습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두 사람을 보면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자리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볼 때 상당히 귀족적인 인상을 받았습니다. 거기에 비해 노 후보에게는 서민적이고, 고생을 많이 하고, 많은 실패와 고통과 좌절을 맛보면서 걸어온 어떤 감동적인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젊은이들의 감성을 흔들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노 후보의 홍보 영상물을 통해 보아 왔듯이 리어카를 들고 추운 겨울날 골목을 올라가면서 땀을 뻘뻘 흘리는 이미지, 사회 부조리를 쳐다보면서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는 이미지 등을 통해 젊은이들의 감성에 호소했습니다. 따라서 젊은이들은 '저 사람이야말로 우리 젊은이들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우리의 애환을 알아주는 사람이다. 우리 마음에 숨기고 있는 열등감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사람이다.' 하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의 곁에 와 있는 대통령 후보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임마누엘의 은혜도 바로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멀리 보이고 높이 계시는 거룩하신 분이지만, 그 하나님을 우리 가까이에 접근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우리 가슴으로 느끼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그 하나님 때문에 울고, 웃고, 찬양하고, 어떤 때는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도록 만든 배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곁에 와 계시다는 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런 하나님을 알고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을 움직이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다일공동체를 운영하고 계시는 최일도 목사님을 많이 아실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서울 청량리 역 근처에서 소외되고 굶주리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신학대학원 졸업반 때, 평소 시를 잘 쓰시던 목사님은 이 일을 위해 춘천으로 가려고 청량리 역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청량리 역 마당을 지나갈 무렵, 갑자기 자기 앞에서 어떤 노인이 푹 하고 쓰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침 갈 길이 바빠 다른 사람이 와서 도와주겠지 하고는 그냥 스쳐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춘천에 가서 하루 종일 시를 쓰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또 다시 기차를 타고 저녁 나절이 되어 청량리 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광장으로 나오면서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날 아침에 쓰러졌던 노인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려가 그를 일으켜 세우고, 하루 종일 이렇게 있었는지, 뭐라도 드셨는지 물었더니 아무것도 못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노인을 부축하고는 근처 식당에 가서 식사를 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이 목사님의 가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내가 앞으로 목사로서 어떤 사역을 해야 될까? 이렇게 굶주리고 외롭고 힘들게 사는 사람을 위해서 내 인생을 바치자." 그래서 독일로 유학 가려던 꿈도 접고 청량리 역 근처를 자신의 목회지로 삼고는 지금까지 사역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굶주린 노인들, 부랑아들, 창녀들을 위해 손수레에 버너와 라면을 싣고 다니면서 그들을 먹이는 사역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최일도 목사님을 통해서 목사를 만난 그 사람들이 갖는 목사의 이미지는 과연 무엇일까요? 아마도 청량리 역에서 최목사를 만난 사람들은 목사 하면 가난할 때 가까이 와주는 사람, 먹을 것이 없을 때 먹을 것을 가져다 주는 사람, 자기들과 같이 울어줄 수 있고 웃어줄 수 있는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목사를 떠올릴 때면 정서적인 따뜻함을 마음 속으로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가까이 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에서 어떤 분인가를 세밀하게 느끼도록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임마누엘 하나님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하나님을 성탄을 통해서 만나게 되었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게 된 것입니다. 이 임마누엘의 은혜를 우리가 마음에 꼭 담기를 바랍니다.

또 한가지 성탄을 통해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은혜는 속죄양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서 세상에 오신 속죄양이었습니다. 죄를 위해서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제물이 바로 어린양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도 21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그가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어린양 되신 예수님으로 우리는 주님을 다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은혜입니다.

C. S. 루이스의 말을 다시 인용합니다. "우리 인간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하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가 세상으로 내려간 것은 죄로 인해 폐허가 된 온 세상을 자신과 함께 들어올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복잡한 짐 아래로 자신을 넣으려고 몸을 굽히는 인간을 그려보십시오. 짐을 들어올리기 위해서는 몸을 굽혀야 합니다. 죄로 인하여 저주 받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죄 많은 세상 밑으로 내려오셔서 마치 무거운 짐을 들어올리기 위해서 짐 밑으로 기어들어가 어깨에 짐을 받치고 일어서려는 사람과 같은 역할을 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 짐을 친히 짊어지고 일어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을 취해서 자기 몸을 삼으셨습니다. 우리의 살을 자기의 살로, 우리의 뼈를 자기의 뼈로 만들어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뿐이라면 그는 죽음을 느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사람뿐이라면 죽음을 정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 사람이시요, 참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죄를 대속하는 데에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었고, 죽음과 싸워 승리한 데에는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권세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어린 속죄양이 되시려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사야 53장에서 이사야가 오래 전에 예언한 내용의 성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멸시를 받고 싫어 버림을 당할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허물을 위해 찔림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위해 상함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해 징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나음을 위해 채찍에 맞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시기에 우리의 모든 죄를 한 몸에 짊어지실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속죄양의 은혜입니다. 이 예수님 때문에 우리 죄가 용서 받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성탄을 맞아 우리가 2가지 은혜를 마음에 담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임마누엘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가슴 뜨겁게 체험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속죄양의 은혜, 곧 십자가에서 내 죄 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마음에 모시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한 주간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시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통해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 하나님과 더불어 세상을 살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우리 죄를 위한 어린양이 되게 하시고, 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가 용서 받아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번 성탄절을 통해 이 크신 은혜를 다시 한번 마음으로 반추하고 고백하고 찬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구주로 주신 하나님 앞에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성도들이 되도록 축복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