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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서주일] 다시 희망의 노래를 부르노라 / 행 27: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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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행 27:18-26
제 목 : "다시 희망의 노래를 부르노라"
설 교 : 박근호 목사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일까'를 가늠하는 것을 가리켜 '가치관'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가치관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 가치관에 있어서 피차에 동질적인 면도 느끼고 이질적인 면도 느끼며 살아갑니다. 인생의 여러 모임들은 대개가 이 가치관에 의해서 형성되어집니다. 즉 가치관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회를 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점에서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필요성, 하나님 나라의 소중함, 삶의 질의 고양 등등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모이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보물처럼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경입니다. 그래서 매년 12월 둘째주일인 오늘을 성서주일로 지키면서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하고 복된 은총의 선물인지를 다시 한번 상기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귀하고 중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경이 우리 인생들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으로 소개하는 것이 바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하는 인생의 필수품이라고 강조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리스도인에게는 무엇보다도 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항상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세상에는 이 세 가지의 가짜가 제일 많다는 겁니다. 진짜 믿음, 진짜 소망, 진짜 사랑보다 가짜 믿음, 가짜 소망, 가짜 사랑이 더 많다는 겁니다. 유사품이 많다는 것은 그 오리지날이 좋다는 얘기입니다. 명품에 대한 이미테이션이 등장하는 것은 명품이 좋긴 좋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믿음, 소망, 사랑,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정말 좋은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위조품이 적지않습니다. 우리 시찰 안에 소망교회라는 교회가 10여년 전부터 진평동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근래 그쪽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우리 시찰 소속의 두 교회가 개척을 해서 새롭게 들어섰는데 하나는 새소망교회이고 또 하나는 참소망교회입니다. 그러니까 한 500미터 반경에 우리 시찰 소속의 세 교회, 소망교회, 새소망교회, 참소망교회가 있는 겁니다.
왜 자꾸 이렇게 덧말이 붙여지는 겁니까? 소망이면 되었지 새소망은 뭐고 또 참소망은 뭡니까? 성경은 산소망이라는 표현도 쓰고 있습니다. 그건 진정한 소망을 찾는다는 것이, 또 생기있는 소망을 갖는다는 것이 그리 쉽고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겠지요 그럼 진정한 소망, 살아있는 소망이 무엇일까요?...

요즈음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매스컴의 보도를 보면 자살에 대한 보도가 심심치않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황망한 일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태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점차 희망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군가가 희망을 '그리스도인의 깃발'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희망하는 사람이요 희망을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희망은 주어진 삶에 대한 애착에서 나오는 샘물같은 것이며 하나님 안에서만이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피어나는 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은 곧 믿음의 근거와 사랑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희망이란 어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냈을 때 생기는 희열이요 동시에 그런 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희망을 노래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이 고해와 같은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고해와 같은 세상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어떻게 희망의 노래를 불러야할지를 예시해줍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우리 인생에 항상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노래했던 바로 그 바울사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지금 로마로 끌려가는 포로의 신세가 되어 지중해 한 가운데를 항해하는 배 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바로 그 무시무시한 유라굴로 광풍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0절 말씀을 보면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고 했습니다. 지금 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 가망이 없는 그런 절박한 지경에 처해 있는 겁니다. 한 마디로 절망의 상황입니다. '보이지 아니하고 다 없어졌다'고 하는 그 표현이 바로 저들의 현실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낮에 해가 보이지 않고 밤에 별이 보이지 않는 바다 한 복판의 여러날의 삶이 어떠했겠습니까? 게다가 풍랑은 잦아들 줄을 모르고 여전히 휘몰아쳐와 배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공동번역으로 옮기면 '살아 돌아갈 희망을 아주 잃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저들이 이런 절망의 자리에 떨어진 과정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사실 처음부터 이 항해를 원칠 않았습니다. 무모한 항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절에 보면 항해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미항에서 겨울을 나고 석달 후에 출항할 것을 제안합니다. 지중해의 9월, 10월, 11월은 풍랑이 심해서 항해에 위험한 기간이었기에 이 3개월 동안은 바람으로 가는 범선의 지중해 항해가 중단됩니다. 이미 바울은 지중해 상에서 세 번이나 파선의 경험을 갖고 있었기에 항해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선장과 선주는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나자며 항해를 주장합니다.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의 하나로 서북풍을 막아 무척 온화하고 따스한 항구였습니다. 그곳에 비하면 미항은 겨울 지내기에 여러모로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겨울을 지내기에 편한 항구 뵈닉스로 가기를 강행했던 것입니다. 11절에서 보듯이 로마 백부장은 바울보다도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서는 그들의 말을 따라 항해를 계속합니다. 그가 볼 땐 바울보다는 뱃사람들이 전문가라고 본 것입니다. 게다가 남풍까지 순하게 불자 사람들은 이제 됐다 생각하고 닻을 올려 항해를 시작합니다. 사실 일기만 좋으면 하룻만에 뵈닉스 항구로 옮겨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되었습니까? 빈약한 촌락인 미항보다 번화하고 따스한 뵈닉스에서 겨울을 지내기를 원해서 미항을 떠났던 저들은 얼마 못가 풍랑을 만나 보름동안이나 광풍에 시달리며 거의 초죽음이 되는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일시적 고통을 피하려다가 돌이키기 어려운 큰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지중해 최대의 폭풍이 유라굴로, '동풍과 북풍이 만나 일으키는 미친 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인간적인 안위와 즐거움을 앞세우고 나아가는 인생길에 이런 유라굴로가 들이닥칩니다. 좀 더 편하고, 좀 더 안락하고, 좀 더 즐길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그 길목에 유라굴로가 기다리는 겁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니느웨로 가라는 사명을 저버리고 땅끝 다시스로 내빼는 요나에게도 광풍이 불지 않았습니까?
내 인생에 광풍이 불어올 때에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사명의 길을 저버리고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의 안위와 즐거움을 앞세우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나 보십시오. 그 광풍 앞에 저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저들이 광풍 속에서 대처한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일단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저들은 배가 가는대로 흘러갑니다. 왜냐하면 어설프게 대처했다가는 스르디스라는 모래 수렁에 말려들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광풍이 불어오면 섣불리 행동할 게 아니라 생각에 잠겨야 합니다. 전후좌우를 잘 살펴 사태의 추이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 다음 저들이 한 행동은 배에 있는 짐들을 바다에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금방 버린 게 아니었습니다. 18절에 보면 저들은 하루를 버티며 애를 씁니다. 그러다 이튿날 드디어 짐들을 바다에 풀어버립니다. 어쩔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난 사흘째되는 날에는 배의 기구들까지도 저들 손으로 다 내어버립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이 배에 오른 276명, 저들은 나름대로 자기의 꿈을 가지고 이 배에 올랐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포로들도 많았지만 저들에게도 나름의 꿈과 희망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꿈이 여지없이 사라집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잠언기자는 '사람이 그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부자가 창고에 잔뜩 쌓아놓고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하지만 '그 날이 하루밖에 안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 장로 또한 먼곳에 가서 장사하여 이익을 남기겠다고 하는 자에게 '당신 생명이 아침 안개 같은 것임을 잊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저들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구원의 여망이 사라졌습니다. 얼마나 잘 살아보려고 몸부림쳤습니까? 얼마나 뵈닉스에서의 달콤한 꿈을 꾸었겠습니까? 그 배 안에 가득 실린 물건들이 의미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저들은 이 배에 저들의 희망을 싣고 항해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희망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희망은 한 순간에 다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참소망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 바울을 통해서 그 절망의 자리에 새로운 희망의 노래를 부르게 하십니다. 바울은 살아날 가망이 없어 절망한 이들에게 '이제는 안심하라'며 용기를 북돋웁니다. 입맛을 잃은 저들에게 먹고 힘을 낼 것을 종용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풍랑 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그 위기를 헤쳐가는 자가 누구였습니까? 바다를 집삼고 사는 선주와 선장과 사공들도 넋을 잃었고, 용맹을 자랑하는 로마 친위대도 맥을 못추는 광풍 속에서 오직 바울만이 정신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 풍랑 속에서도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했고 기도 중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그는 그 요란한 바람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바울아, 무서워하지 말라! 너는 반드시 살아서 가이사 앞에 설 것이다...' 바울은 바로 그 절망의 밤, 절망의 자리에서 희망의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의 행적이 기록된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은 밤에 주님을 만난 경험이 네 번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소아시아를 향한 전도의 문이 막혀 드로아 항구에 이르렀을 때 거기서 '이곳으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손짓하는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두 번째는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다 핍박을 받을 때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는 계시를 받습니다. 세 번째는 '환난과 결박이 나를 기다린다 하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며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 감옥에 갇혔을 때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할라"는 주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바로 이 지중해 풍랑 속에서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이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들을 다 네게 주셨다"는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절망 속에, 어둠 속에 처해 있다고 여겨질 때가 있습니까? 그런 처지에서 우리가 희망의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는 비결은 바로 기도에 있댜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나님과 연결된 줄을 붙들고 사는 자에게는 구원의 여망이 있습니다.
희망은 그 자신의 바람이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고자 하는 것들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희망이 무너져내리고 사라져버리는 그 자리에 진정한 희망이 들어섬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그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때 체험되는 새로운 감격을 사도 바울처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길에도 유라굴로와 같은 광풍이 휘몰아칠 때가 있습니다. 스스로 추스릴 수 없는, 어떻게 대처할 수도 없는 난감한 그런 현실의 한가운데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속수무책, 그냥 바람에 밀려갈 뿐입니다. 사공들처럼 끌어올리고 줄을 가지고 둘러 감고 애를 써도 어쩔 도리가 없는 그런 인생의 구비가 있습니다.
그럴 때 바울처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희망가를 부르게 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런 고난 속에서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신앙의 세계를 체험하게 하시고 당신을 알게 하시고 새로운 믿음의 시작을 잉태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올바른 가치관을 세워가십니다. 그래서 생명과 무관한 것들을 놓아버리게 하십니다. 무엇이 진정 소중한 것인지를 깨우쳐 주십니다. 사공들처럼 짐들을 바다에 풀어버리고 배의 기구들조차도 다 버립니다. 38절에서 보듯이 식량까지도 배불리 먹은 후에 다 바다에 내던집니다. 그리고 40절 이하에서 보듯이 닻을 끊어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저들은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들이 있고 또 인간의 목숨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그러고 보니 바울은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다시금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은 바로 다시 불리워진 희망의 노래 아니었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형편, 어떤 처지에서도 절망하거나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자포자기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대림절은 바로 그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 인생의 풍랑을 잔잔케하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희망하는 절기입니다.

먼저 인생이 파선하는 삶, 신앙이 파선하는 삶을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 번씩이나 파선의 경험이 있는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 1:19절에서 신앙의 파선 원인을 '선한 양심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욕심이 인생에 풍랑을 자초한다는 겁니다.
인생이 순항하기를 원하십니까? 무엇보다 욕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욕심 대신 선한 양심을 버리면 풍랑을 맞는 겁니다. 그리고 어떠한 이유에서건 인생의 태풍이 닥쳐온다할지라도 당황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문제를 풀어가십시다.

오늘 이 풍랑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44절 말씀에 보면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20절과 44절은 너무도 상반된 현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진 상태'에서 '모두가 구원을 얻은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절망하며 삽니까? 왜 우리가 좌절하며 삽니까?... 희망의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오시는 주님은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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