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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신앙 / 롬 4: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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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아브라함의 신앙 
본 문 : 로마서 4장 16∼25절
설 교 :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
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
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
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
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
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버드대학이나 프린스턴대학 출신이 아닙니다. 더구나 동경대학이나 서울대
학교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명문대가의 자손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
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상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브
라함은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평범한 목동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IQ가 높은 천
재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만큼 인류문명에 막대한 영향을 미
친 이는 없습니다. 그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문명의 조상이며 현대 서구 문명의 기원
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처럼 사랑하시고 복을 주셨는지 그 이유를 찾아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아브
라함은 어떠한 믿음을 가졌을까요?

1.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은 아브라함

오늘 본문에는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
을 믿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을 아브라함은 믿었습
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나 상상의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는 것입니다. 아무
리 과학이 발달해도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지는 못합니다. 오늘날 복제 인간을 만들어서
그 어린아이가 태어난다고 하지만 죽은 자를 살렸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런 일은 창조
주 이외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흙으로 인간을 빚으사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이 되게 하실
뿐 아니라 또다시 죽은 자도 살리시는 것입니다. 지구상 약 1백20만종의 동물과 약 50만종
의 식물을 주님께서 돌보시고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만이 역사하
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엘리야의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 놓으셨습니다.
열왕기상 17장 17절로 24절에 보면 마지막 가루 한 줌과 기름으로 떡 한조각을 만들어 엘리
야를 대접했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아들을 품에 안
고 다락에 올라가서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 위에 몸
을 세 번 펴서 엎드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 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혼이 떠나게 하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혼이 돌아오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사
람은 혼이 떠나면 살았어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몸은 사람의 형체지만 혼이 떠나면
생기가 없기 때문에 죽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떠난 혼을 다시 불러오는 것은 어떠
한 사람의 기술로도 안되고 의학으로도 안됩니다. 하나님만이 혼을 몸에 다시 돌아와서 살
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하나님도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는 역사를 베풀었습니다. 열왕기하
4장 17절로 37절에 보면 엘리사에게 종종 음식을 대접하고 남편과 함께 엘리사 일행이 쉴
방을 예비한 그의 부인이 수넴 여인이었는데 그 남편은 늙었고 그 부인은 자녀가 없었습니
다. 엘리사가 그들의 정성을 고맙게 여겨서 축복한즉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밖에서 있다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서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어머니 무릎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엘리사가 침상에 어린아이를 뉘어 놓고 그 위에 올라가 엎드려 엘리
사의 얼굴과 손을 아이의 얼굴과 손에 대니 몸이 조금씩 따뜻해졌습니다. 엘리사가 두 번
째 대었을 때 아이가 재채기하고 눈을 뜨며 살아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물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 주님이 가서 ‘달리다굼
딸아 일어나라’하니 살아서 일어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어서 상여에 얹혀 장지로 가던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
다. 죽음의 행렬이 지나가는 곳에 예수님의 행렬이 오다가 만났습니다. 여러분 놀라운 일
이 아닙니까? 여기에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어서 관 속에 들어간 채 상여에 매여서 장지
로 가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행렬입니다.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렬과 만나자 죽음의 행
렬은 생명의 기쁨으로 넘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관 뚜껑을 열게 하시고 죽은 자
를 보고 ‘청년아 일어나라’하니 청년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도 인생의 죽음의 행렬이 예
수 그리스도의 행렬을 만나면 살아나게 됩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오장육부
가 부패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살아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나서 살리라’고 해도 마르다와 마리아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데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니 그가 온몸에 수의를 동여맨 채 살아서 걸어 나왔
습니다. 도저히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
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조주 하나님, 즉 기적의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
은 합리적인 일, 이성적인 일은 할 수도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합리적이고 비이
성적이며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일은 못합니다. 하나님만 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을 알고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 즉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
다.
히브리서 11장 17절로 19절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
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
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
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
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자기의 외아들을 재물로 드
리라고 할 때도 두려워하지 않고 재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
음을 가지면 아브라함처럼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우리들도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의 하
나님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안에 사는 유한한 존재이므로 항상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나누어서 생각하
는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지만 순식간에 현
재는 과거로 지나가고 언제나 마음은 미래에 두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
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는 지금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도 하나님은 지금으로 볼 수 있고 지금은 지금이고 영원한 미래도 하나님에게는 지금
입니다. 하나님은 영원의 하나님이신데 영원이란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가 창조적으
로 결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항상 현재만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한 말씀도 예수님은 하
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과거의 예수님, 미래의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현재에 살아계신 예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히브리서 1장 10절
로 11절에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분리해서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
에 언제나 영존하시고 항상 동일하신 것입니다. 언제나 현재에 계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적 사건을 현재에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음속에 꿈을 꾸는 길밖에
는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미래로 뛰어나가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
므로 장차 될 일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마음속에 꿈을 통해서 받아들일 수가 있
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받아들이는 것은 꿈 혹은 비전을 통하는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미래적 사건을 현재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하
셨습니다. 창세기 13장 14절로 15절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
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
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눈에 보이는 그 땅은 아직까지도 아브라함이 한평도 소유로 삼지 못한 곳입니
다. 그러나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바라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평생 그 땅을
소유하지 못했지만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그 땅
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5절로 6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
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아직 아
들이 없는데 하늘을 쳐다보고 뭇별을 헤아리게 하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
셨습니다. 장차 하늘에 별같이 많은 자손들을 하나님은 지금 별을 바라보시고 네 자손이 지
금 이처럼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어떻게 용납합니까?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꿈으로 마음속에 없는 것을 있
는 것처럼 바라보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미래적 사건을 현재에 받아들여야 하나님
과 함께 역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미래적 사건을 현재에 있는 것처럼 말씀하기 때문
에 우리도 현재에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꿈으로 마음
속에 소유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우리도 같이 믿으려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
는 것같이 부르시는 그 역사를 받아들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기적을 믿어야 됩니다. 현재
마음의 캔버스에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받아들여서 바라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2.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아브라함

로마서 4장 18절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
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
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다’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끝장났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도
저히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지경에 처해 바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절대 긍정적이고 희망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다는 것은 절대절망을 절대희망으로 절대부정을 절대긍정으로 받
아들인 것입니다. 그는 무조건 좋으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
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절망밖에 없더라도 하나님은 절대 좋은 하
나님이시므로 내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에 합력하여 종국적으로는 좋게
만들어 준다는 희망을 마음속에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고 시작과 끝
이 되시므로 하나님이 결국 운명과 역사를 다스리시고 하나님께서는 종국적으로 우리에
게 좋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하나님께로부터 묵시받고 난 다음
에도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
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
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
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하박국 3장 16-19절)고 고백하였습
니다.
하박국의 선지자의 노래처럼 우리가 소망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
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바랄 길이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이 한계점에 처하면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러
나 우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박국의 노래처럼 무화과나무가 무성치도 못하고 포도나
무에 열매도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도 없고 밭에 식물도 없고 우리에 양도 없고 외양간에 소
도 없고 절망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
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눈에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
는 것 없고 내 앞길이 칠흑같이 어두워도 나는 소망을 가질 수가 있다’는 절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도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됩니다. 인
간적인 생각에는 절망이라도 하나님 안에서는 언제나 희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
린도전서 2장 9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
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
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많은 것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눈에는 안보이고 귀에는
들리지 않고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할 그러한 것을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았기 때문에 하나
님 안에서 희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
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캄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큰 비밀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깜짝 놀랄 비밀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그러
므로 우리에게는 절망이라도 하나님은 절망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바랄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계시므로 우리는 계속 마음에 바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절대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감각에 의존해서 살지 않았습
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이 믿음인데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
아 장래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때 갈 바를 모르고 나갔던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될지 모
르지만 하나님이 가라고 하니까 믿음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이는 우
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도 바쳤습니다. 바쳐서 제물을 만들어도 하나님
은 잿더미 위에서 그 아들 이삭을 도로 부활시킬 줄로 믿은 것입니다. 믿음은 엄청난 힘입
니다. 믿음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도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고 했는데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삶에 실천해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말씀을 바라보고 말
씀을 듣고 말씀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
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
로 말미암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소망을 품고 살 뿐 아니라 믿음
을 마음에 품고 실천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는 그저 입술로만 ‘믿습니다’하는 것
이 아니라 실제로 행함으로써 살았던 것입니다.

3. 영적 전쟁에서 계속 이긴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며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아는 것과 믿음과
의 전쟁을 끊임없이 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4장 19절에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
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는 것과 믿음이 싸움
을 했습니다. 자기의 지식으로는 나이 백 세나 되어 몸이 죽은 것 같았고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지식으로 볼 때는 절대로 어린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린아이를 낳을 것을 믿었습니다. 때문에 영적 전쟁
입니다. 아는 것과 믿음과의 전쟁입니다.
사람들은 ‘아, 내가 아니까 안된다’며 믿음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리 자기
의 현실이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었어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믿었습니다. 우리도 지
식과 믿음의 전쟁에서 이겨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지식과 감각과 믿음의 전쟁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끊임없이 경험하는 바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2
절로 24절에도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
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
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기록되
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식과 믿음의 전쟁을 끊임없이 계속합니다. 우리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아, 이건 희망이다. 아, 이건 절망이다’라고
생각할지라도 성경은 ‘할 수 있다. 해보라’고 말합니다. ‘내가 지식을 따를 것이냐 믿음을 따
를 것이냐’하는 영적인 전쟁을 치러야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영적전쟁에서 지식과 감각과 이성을 따르지 아니하고 믿음 편을 들어서 믿음
에 우뚝 섰던 것입니다.
중동성전 정현희 성도의 간증을 들어보면 바로 이 지식과 믿음의 전쟁을 치러서 이긴 사건
입니다. 성도님과 남편은 믿음이 미지근했는데 문제는 둘째 아이를 갖기 원했으나 여러번
유산이 되었어도 병원에서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8월에 몸에 이상이 있어 병원에 갔더니 임신이라고 하며 조심하라고 신신당
부했는데 며칠 뒤에 계속해서 하혈이 있었습니다. 6일 뒤 병원에 가니 의사는 뱃속의 아이
에게서 박동이 사라졌다고 하면서 아이가 죽은 이상 빨리 수술을 해서 어린아이를 적출해
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준비를 하지 않아 남편에게 연락하니까 일단 집으로 돌아오라고 해서 수술
일을 3일 뒤로 잡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지식과 감각을 초월해서 믿음으
로 태아가 살아날 것을 믿고서 남편과 결사적으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서 태아가 죽었으니 빨리 수술해서 죽은 태아를 끄집어 내야 된다고 하는데 그 현실
적인 지식을 초월해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기 때문에 믿음으로 결투하자고 다짐했습
니다.
그래서 남편과 결사적으로 기도하고 또 셀원들에게도 부탁해서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수
술 하루 전 날 정 성도의 집에 셀식구들이 모여서 간절히 기도드리고 합심으로 부르짖은 후
에 수술하는 날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해보았는데 뱃속의 태아가 살아 났습니다. 태아
의 심장 박동소리가 힘차게 들리고 의사도 입을 딱 벌리고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기적이 일
어난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3일 뒤 주일설교 시간에 제가 신유기도를 할 때 일어났습니다.
아픈 데 손을 얹고 기도하라고 하자 둘이서 배에 손을 대고 아멘 아멘 하며 눈물로 기도했
는데 기도 후 ‘태아의 유산으로 고통받고 있는 자매님이 오늘 완전히 고침을 받고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시작해서 몸은 건강하고 태아
는 뱃속에서 잘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만일 믿음이 없었더라면 수술을 해버렸겠지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부부간에 결사적으
로 지식과 감각을 초월해서 믿음으로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어린아이가 적출되지
않고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지식과 믿음의 투쟁에서 믿음 편을 택하고 믿음에 굳세게 섰던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실함, 즉 약속에 대한 의심과 믿음의 전쟁을 했습니다.
로마서 4장 20절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
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기도의 응답이 늦어지고 역풍이 불어올 때 느끼
는 번뇌 즉 ‘과연 하나님께서 살아계실까? 과연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까?’하는 마음의 문제
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런 마음의 번뇌를 많이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어린아이를 주신다
고 했는데 과연 주실까?’ 하며 한때 시험에 들어서 하갈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습
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그가 잘못한 것을 알고 회개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믿었
습니다. ‘약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신지라 식언치 아니하
시고 인자가 아니신지라 거짓이 없으시로다 어찌 그 말씀을 이루지 아니하시며 그 하신 말
씀을 성취하지 아니하랴’라며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의지했습니다. 말씀에 의
지해서 하나님은 거짓이 없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
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심, 그리고 하나님이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 이 투쟁에서
아브라함은 이겼던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1절에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11절로 12절에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
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
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의심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믿음의 전쟁을 불가불 치러야만 한 것입니다. 그는 ‘믿음이냐, 감각이냐, 하나님은 거짓말
의 하나님이냐, 참말의 하나님이냐’에 대한 마음의 투쟁과 ‘하나님이 과연 할 수 있냐? 없느
냐’에 대한 마음의 투쟁에서 언제나 믿음의 편을 택했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잡히는 것 없어도 스스로 볼 때는
인간적으로 안되어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도응답을 늦게 해주시고 너무 오래 기다리기 때문에 ‘과연 살아계신
가? 과연 응답하실까’라며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대한 의심이 생겨날 때라도 의심과 싸워
서 하나님은 절대로 거짓이 없으시고 성실하시다는 편에 서서 믿었습니다.
그 다음 ‘하나님은 능력이 없어, 이런 일은 못해, 안해’라는 비난에 대해 끝까지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굳세게 서서 또한 믿음으로 이긴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고 말한 것입니
다. 갈라디아서 3장 9절에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
께 복을 받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태도, 영적 전쟁을 거울 삼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우
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면 비록 시련과 고난은 많을지라도 종국적으로 하나님
은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 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은 우리와 타고난 본성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
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아브라함처럼 복을 받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
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
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수 없는 중에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끝까지 믿고 의심하지 않고 영적 전쟁에서 믿음의 편을
택했습니다. 단호하게 이성보다 믿음을, 지식보다 믿음을 택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보다 믿음을, 하나님의 능력을 못 믿는 의심보다 믿음을 택하여서 하나님과 동행한 것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본을 따라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
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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