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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덧없는 세월을 사는 지혜 / 고전 7: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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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덧없는 세월을 사는 지혜 (12/29)
본 문 : 고전7:29-31
설 교 :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오늘이 2002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2002년 신년주일을 지낸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송년주일입니다.

중국의 고사성어 가운데 백구과극(白駒過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흰 망아지가 빨리 달리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처럼 눈 깜빡할 사이”입니다. 장자의 ‘지북유편’에 보면 사람이 한 생을 사는 것을 이 백구과극이라고 비유한 것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밖에서 흰 망아지가 달린다고 해서 문틈 사이로 보려니까 벌써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이 흰 망아지처럼 빨리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한 해를 어떻게 계획도 세워보고 제대로 뭐 좀 하려니까 어느덧 연말입니다. 이제 인생이 무엇인지 알고 제대로 살아보려니까 백발입니다.

  우리는 이 연말이면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면서 인생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인생 무상을 절절하게 체감하게 됩니다.

  덧없는 세월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허무감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인생이 덧없는 것이고, 무상한 것이라면 인생 그 자체가 헛되고 헛된 것이 아니냐!’ 탄식하며 삽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허무주의란 최고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요, 목표를 잃어버린 것이요,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잃어버린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한 중학교 선생님께 들은 말입니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고 전과목이 거의 100점을 맞는 수재 학생이 있었답니다. 이 아이는 중학생 때 벌써 대학생들이 읽는 철학책에 심취해 있었답니다. 하루는 체육시간에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도중에 달리다 말고 뒤돌아 걸어 나오더랍니다. 하도 기가막혀서 선생님이 물었답니다. 도대체 왜 그러냐? 그 아이 대답이 더 기가 막힙니다. “이렇게 땀흘려 달려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덧없는 세월을 살면서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리고,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허무감에 사로잡혀서 살아갑니다.

  둘째는 애써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덧없는 세월에 허무감이 밀려들지만 어차피 생각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을 즐겁게 즐기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황진이의 시구 가운데 이런 것을 다 아실 것입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도라오기 어려오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수여 간들 엇더리.


물론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지만 문자 그대로 해석해 보면 이렇습니다. ‘세월이 저 심산유곡 시냇물처럼 빨리 흐르고,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러니 골치 아프게 이 일 저 일에 몰두하기보다는 나와 이 밤을 즐기는 것이 어떻겠느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애써서 인생의 허무감을 도망치듯 피해버립니다. 그렇다고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셋째는 지혜롭게 극복하는 것입니다. 덧없는 세월에 허무감이 밀려올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씀 속에서 지혜롭게 극복해야 합니다. 허무감에 허덕이는 것, 그 허무감을 애써 피하는 것 모두가 성령이 주시는 삶의 태도가 아닙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지혜롭게 이 밀려드는 허무감을 극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덧없는 세월을 지혜롭게 살 수 있을까요?

겸손을 배우는 것입니다.

  본문 29절을 보면 “때가 단축하여 진 고로”라고 말씀했습니다. 세상 만사에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가 있고, 또 죽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 우리 인생은 시작할 때가 있고 끝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지혜롭게 이런 덧없는 인생을 극복한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시 90편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선 그는 인생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90:6에 보면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들풀처럼 덧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90:9에 보면 “우리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라고 샜습니다. 우리 인생이 정말 백구과극처럼 지나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90:12절에 보면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우나탕에 가보면 모래시계가 있습니다. 들어가서 뒤엎어놓고 나갈 시점을 판단하라고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모래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갑니다. 위 편에는 남은 모래가 점점 줄어들어 갑니다.

  마치 모세는 이 모래시계를 보듯이 인생의 시간이라는 모래의 양을 셀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시간의 양을 셀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인생이라는 모래 시계를 보면서 전체 모래의 양과 남은 양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인생이 유한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면 인생이 끝이 날 것임을 보면서 인생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존재인가를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90:13입니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인생의 유한함과 연약함을 깨닫고 나서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여호와를 바라보고 그분 앞에 겸손하게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덧없음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는 교사입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하나님만 의지할 것을 가르쳐주는 스승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일생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큰 자라는 뜻의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배경도 좋았고, 학벌도 뛰어났고,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이였습니다. 그래서 목에 힘주고 살았고, 대단히 교만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면서 달라졌습니다. 이름을 작은 자라는 뜻의 바울로 바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니 자기가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 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주를 위해 봉사하면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 지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돌보심 없이 주님의 인도하심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또 깨닫기를 자신이 정말 주를 위해 무익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를 위해 헌신 봉사하지만 그것이 주께 별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또 깨닫습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은 죄인인데 그것도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이었던가를 뼈저리게 깨닫는 것입니다.

  인생의 덧없음을 점점 더 깊이 깨달으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비하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겸손을 깊이 배워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월의 덧없음 앞에서 우리의 겸손을 더 키워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덧없는 세월을 이기는 지혜입니다.


사명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덧없는 세월에 허무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 인생의 짧고 덧없음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큰 허무감은 그 짧은 인생 속에서 살아야 할 이유, 존재할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인생을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 자신의 존재 이유 앞에서 성실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비록 인생이 짧더라도 허무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등산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도로 내려올 것 뭐하러 산을 오르냐고 빈정댑니다. 그러나 죽음의 고비도 넘기고 남들 오르지 못했던 저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산 사나이들은 산에 오르며 그 안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무릎 쓰고 산에 오릅니다. 내려오면서 허무감을 느끼기보다는 큰 보람과 인생의 의미를 찾습니다.

  빌 1:24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조만간 자기가 순교를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순교 이후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감격을 맛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살아있어야 할 이유를 새삼 찾게 됩니다. 바로 빌립보 교인들 때문입니다. 아직도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삶을 사는 바울은 평생 한 번도 인생의 무상함과 덧없음에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고,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그에게 허무가 찾아 들어올 마음의 빈 공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TV 프로그램을 보는데 70이 넘은 할머니 한 분이 40이 넘은 딸을 그 품에 안고 통곡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알고 보니 그 딸은 지체 부자유자였습니다. 누군가 곁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노모가 정말 한 평생 돌봐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이제 노모는 자신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깊이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고 나면 이 딸은 어떻게 될 것인가 때문에 안타까워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자기 딸이 자기를 필요로 하는데 자기는 점점 늙어가고 죽음이 다가오니 안타까운 것입니다.

  이 할머니는 오늘도 자기가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에 성실하게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인생의 허무는 찾아들지 못합니다.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선교사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오지를 탐험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정말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가 그런 경험을 토대로 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은 자기 사명이 끝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사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사명이 다하는 날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명이 아직 남아있는 한 결코 이 세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허무주의에 빠져 인생을 허우적거리지 않습니다. 될 대로 되라며 인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덧없는 세월이라도 그 사명을 향해 치열한 삶을 살면서 보람과 의미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퇴직하시며 집에서 쉬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아침에 눈을 뜨고 나면 ‘오늘은 뭐하고 보내나!’ 한숨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십니다. 이런 분은 하나님께서 바로 불러  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하루 하루를 지옥처럼 보내게 됩니다.

  또 다른 퇴직하신 분이 계십니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았습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중보기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전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사회 봉사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동안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살았다면 이제 홀가분하게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살게 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새로운 사명을 찾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살아야 할 이유가 있으십니까? 이것이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덧없는 세월에 허무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 인생이 무로 끝이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허무주의를 영어로는 니힐리즘 [nihilism]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라틴어 무(無)라는 뜻의 'nihil'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있는 것 같으나 없는 것이라는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의 주장에서부터 이런 사조가 생겼습니다.

  실제로 영웅호걸들의 무덤에 가보면 이런 생각이 절로 듭니다. 세상을 호령하고, 그 이름을 떨치고,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고 하나 지금 다 썩고 흙이 되고 나니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노년이 되어 자기 인생을 돌아볼 때 “도대체 나는 한 평생 뭐하고 살았나?”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그저 아등바등 먹고사느라고 자식 공부시키느라고 허리가 다 휘었지만 이제 와서 남는 것이 무엇인가?” 안타까운 회한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발달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나이 먹어 중년이 되면 한 차례 위기를 겪는답니다. 마치 사춘기 때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것처럼 중년기 때도 심각한 위기를 겪는답니다.

  그동안 정신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직장에서도 자리를 잡았고,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을 얻었습니다. 자식들도 키워 자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 자신을 보니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더랍니다. 어느덧 노년기가 문턱 앞에 찾아왔습니다. 노안이 와서 돋보기를 써야하고, 폐경기가 와서 몸에도 변화가 옵니다. 자녀들이 바빠지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외롭고 허전하고... 그동안 내가 한 것이 무엇인가 다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허무감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 안에서 이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살전 2:19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웠습니다. 전도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얻었고 저들을 말씀으로 양육하여 믿음의 사람들을 키웠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소망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장차 자기가 받을 면류관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이 덧없는 세월을 보내고 하나님 앞에 설 때 주님 앞에 내 놓을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입니다. 자기 인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데살로니가 교인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딤후 4:8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바울은 자기가 주를 위해 달려갈 길을 다 달렸기 때문에 이 덧없는 인생을 마치는 날에 마치 마라톤 경기 후에 시상식에서 메달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을 소망 중에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같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를 위해 애쓰고 땀흘린 그 모든 것들은 물거품처럼 헛되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 하나님 나라의 면류관이 되어 장차 우리를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저 하나님 나라에게서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주를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주를 위해 땀 흘리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들이 면류관이 되어 우리를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결코 우리 인생이 헛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거나 무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미 여러분의 면류관이 저 하늘에 준비되고 있고, 장차 여러분의 더 큰 수고로 더 귀한 면류관들이 쌓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소망 중에 바라봐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겉으로 볼 때 우리 인생은 백구과극과 같아서 덧없이 무상하게 지나갑니다. 한 해를 돌아볼 때 더욱 그런 심정이 깊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지혜롭게 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 덧없음 속에서 우리의 한계를 깨닫고 참된 겸손을 배우며, 하나님 주시는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여 사명에 살며, 또한 우리의 수고가 면류관이 되어 우리를 기다림을 깨닫고 소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 기도/

    덧없는 세월 속에 겸손을 배우게 하옵소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게 하시고, 소망 중에 면류관을 보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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