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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잘 사셨습니까? / 마 2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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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잘 사셨습니까? (2001/12/30 낮설교)
본 문 : 마25장 1절-13절
설 교 : 강 목사 (창원한길교회)


종말에 대한 예언을 기록하고 있는 다니엘서 12장에 보면 말세에는 지식이 넘쳐나고, 사람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왕래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오늘 이 시대는 많고 많은 엄청난 지식이 굉장한 속도를 자랑하며 홍수처럼 달리고 있습니다. 뭐 하나 단순한게 없어요. 그 흔한 컴퓨터 프로그램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프로그램 하나를 익히는데 책이 한권 필요합니다.

요즘 누구나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닙니다만 사실 사십대 이상 되시는분들은 전화하면 걸고 받는 것만 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십대 이십대들이 사용하는 휴대전화를 보면 이건 전화가 아니라 아예 컴퓨터에 오락기까지 겸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제가 가지고 있는 휴대전화 사용법을 다 모릅니다. 전화기를 하나 사고 보니 설명서가 벌써 책이 한권입니다. 그걸 다 머리속에 다 집어 넣고 다녀야 되니까 얼마나 복잡하고 까다롭습니까?

세상은 갈수록 복잡하고 까다로와지는 것 같습니다. 지식에 지식이 더해져서 지금 안다고 자만하고 있지만, 잠시 잠깐만 한눈 팔고 있으면 금새 내가 가진 지식은 낡은 지식이 되어서 박물관에나 들어가야하는 것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알려지기로는 지금 현재의 정보나 지식이 배로 증가하는데에는 옛날에는 천년 혹은 수백년이 걸렸는데 요즘에는 꼭 6개월 걸린답니다. 그러니 얼마나 복잡하고 빠른 세상입니까?

전에 어느 첨단과학분야의 박사님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까 자기들은 마음놓고 아플 수도 없답니다. 병이 들어서 한 3개월만 자리에 누워 있으면 금방 도태되어 버린답니다. 자기가 누워있는 3개월 사이에 지금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은 벌써 오래된 낡은 것이 되기 때문에 어떻게 자리를 펴고 누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만큼 세상은 복잡하고 또 빠르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빨리 달려가고 있는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한가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둘러서 빨리 달려가고 있기는 한데 과연 지금 내가 바로 나아가고 있는가? 빨리 달리기는 하지만 과연 제대로 달려가고 있는지...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인디언의 지혜가 생각이 납니다.
서부 개척시대에 한 백인이 인디언의 안내를 받아 서부로 서부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달려가던 이 인디언은 꼭 사흘을 달린 후에는 더 이상 가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하루를 쉬는 것입니다. 그 다음 또 사흘을 달린 후에 또 하루를 꼬박 쉬면서 더 이상 빨리 가서는 안된다고 가는 길을 자꾸 멈추더랍니다. 개척시대에는 누가 먼저 달려가서 깃발을 꽂느냐?에 따라 자기 땅이 결정되기 때문에 조급해진 이 백인이 물었습니다. '왜 더 빨리 가면 안된다고 그럽니까?' 그러자 이 인디언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너무 빨리 말을 타고 달렸더니 아직 내 영혼이 미처 따라 오지 못했습니다. 여기 쉬면서 내 영혼이 도착할 때 까지 기다렸다 가야 합니다....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르게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육신의 걸음만 빠르게 달려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혼도 함께 가야하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달려가야 합니다.

복잡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복잡하기 때문에 우리는 나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고, 내 영혼과 내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목표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연말의 시기에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서서 내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고 또 정신을 똑바로 차려서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오늘 본문은 복잡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아야 할 나침반과 같은 말씀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나침반을 부지런히 살피는 것이 여행자가 가져야할 지혜의 태도입니다. 열심히 가기는 가는데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내 걸음은 아니감만 못한 걸음이 될 것입니다. 본문은 종말의 날에 있을 최후의 심판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가야할 최종 목적지는 이 최후 심판의 자리입니다.

내가 제대로 살았는지, 아니면 엉뚱하게 살았는지는 이 최후의 심판대앞에서 판정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혜있는 사람은 종말을 바라보며 삽니다.
마지막 날 있을 최후의 심판대앞에서 '너는 참 잘 살았다'는 칭찬의 평가를 받아야 성공한 인생이 됩니다. 아무리 잘 살았다고 자부해도 이 심판의 자리에서 쫒겨나면 그는 실패한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종말의 날을 바라보며 사십니까? 인디언의 말을 빌면 영혼을 돌아보며 산다는 게 뭐겠습니까? 육신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영혼이 심판받는 최후 심판의 자리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영혼을 돌아보며 산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올 한해 육신의 삶을 빨리 달려가는 거기에 집중해서 사셨다면 이제 잠시 이 연말에 멈추어 서서 영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마태복음 25장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영혼의 삶을 점검하고 돌아보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세가지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1절- 13절; 열처녀비유
14절-30절; 달란트 비유 31절- 46절; 양과 염소의 비유

이 세가지비유는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비유들이 모두다 마지막 날 심판의 때에 벌어질 일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25장 1절: '그 때에 천국은'--24장은 종말을 예언한 것, 그 종말의 때에 천국은 마치........과 같다.....
14절: '또...........과 같으니'
31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이 비유들은 이 종말의 날에 심판이 있어서 두 종류의 사람으로 구분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다섯처녀, 미련한 다섯처녀
잔치에 들어간 종, 쫒겨난 종// 오른 편 양과 왼편 염소.....

심판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 아닙니까? 이긴 자와 진 자를 판가름하는 것이 심판입니다. 옳은 자와 틀린 자를 찾아내는 것이 심판이고, 잘한 사람과 못한 사람을 가려내는 것이 심판입니다.

최후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는 천하 만민을 심판대 앞에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날에는 모든 사람이 자기가 살았던 생을 가지고와서 하나님앞에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거기서야 비로소 잘 산 인생인지 아니면 못나게 산 인생인지가 판가름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심판이 어떤 기준에 의해 이루어지는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보고 우리 인생을 평가하시는가? 하나님이 잘 살았다고 칭찬하시는 기준이 무엇인가? 이것을 오늘 본문은 마치 수험생들에게 보여주는 예상문제처럼 미리 보여주고 계십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이 될까요?

본문은 관계의 문제로 세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기준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열처녀비유가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옛날 유대인의 결혼식에는 신부 친구들이 들러리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 들러리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밤중에 오는 신랑을 맞이할 등불을 켜 들고 있다가 신랑이 오게 될 때 나가서 등불을 들고 맞이하는 역할입니다.

유대인의 결혼식은 보통 며칠씩 진행이 되는데 그 가운데 신랑이 신부집에 와서 벌이는 잔치가 아주 큰 의미를 지닌 잔치입니다. 이 잔치는 주로 밤에 진행이 되는데, 그 잔치의 하이라이트가 무엇인가하면 신랑이 드디어 신부집에 잔치하러 오는 그 시간에 맞추어서 들러리들이 손에 손에 등불을 켜들고 나가서 신랑을 맞이해서 모셔들이는 예식입니다.

이 때 신랑은 밤새 자기를 기다리며 등불 들고 환대해준 들러리들을 잔치자리에 귀빈으로 초대해서는 아주 융숭한 대접을 합니다. 본문은 바로 그 잔치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열명의 신부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지금 밤에 오는 신랑을 맞이할 등불을 손에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다섯명은 그릇에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 놓고 있었고, 나머지 다섯명은 등불은 준비했어도 그릇에 따로 기름을 준비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신랑이 빨리 올거라고 생각을 했든지 아니면 나중에 천천히 사오든지 아니면 빌리든지 하면 된다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신랑은 그들 생각처럼 빨리 오지를 않았습니다. 5절을 보세요.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은 깊었고 졸음에 겨운 처녀들은 하나 둘씩 졸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소리가 나면서 신랑을 맞으러 나오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다섯처녀는 꺼져가는 등불에 준비한 기름을 부어서 환하게 밝히고 신랑을 맞으러 나갑니다. 그러나 나머지 다섯은 준비한 기름이 없어 그제서야 바쁩니다. 10절을 보십시다. '저희가 사러간 동안에..' 신랑이 지금 와서 지금 등불을 밝혀야 하는데 이제서야 기름을 사러 좇아 갑니다. 미리미리 준비해놓지 않고 방심하고 있다가 뒤늦게 부산을 떨어보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10절입니다.........문이 닫힌 뒤에 등불을 밝혀봐야 이미 때는 늦은 뒤입니다. 등불은 문이 닫히기 전에 밝혀야 의미가 있고 소용이 있지 문이 닫힌 뒤에 가서야 기름을 준비한다, 등불을 밝힌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대로 끝이 나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이땅에 다시 오시는 주님과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잔치에 들어간 자와 들어가지 못한 자를 구분지은 것이 무엇입니까?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얼마나 잘 하고 있었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신랑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등불과 기름이 평소에 얼마나 잘 준비되어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이것은 신랑에 대한 이들의 관심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잔치의 주인공은 신랑입니다. 이 처녀들은 이 신랑을 위해 여기 나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랬다면 신랑을 위한 일에 최우선의 관심을 두었어야 했습니다. 신랑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 밤에 여기 나와 서있는 이유가 바로 신랑때문인데 이 신랑을 맞이하는 일에 소홀하고, 이 신랑을 맞이할 등불에 기름이 있는지 없는지, 충분한지 않은지조차 제대로 살피지 않고서 서 있다면 도대체 왜 여기 온 것입니까?

지혜있는 처녀들은 모든 일의 촛점을 신랑에게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릇도 필요했고 충분한 기름도 준비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들은 관심의 촛점을 신랑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등은 대충 가지고 나왔지만 그릇도 기름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거나 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서 자기들의 일에만 바빴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잘 산다는 것은 중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삶의 촛점을 맞추고 산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삶의 우선 순위를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촛점을 맞추고서 세상과 인생을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기 살 길을 먼저 챙깁니다.그래서 먹고 사는데 바빠서 하나님 찾을 시간이 없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이익과 자기 발전에는 온 마음을 다하고 온 힘을 집중하는데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짜투리 시간을 내고, 짜투리 헌금을 드립니다. 이것은 삶의 중심을 잘못 놓고 사는 것입니다. 그릇도 없고 기름도 없습니다. 겉으로 등불을 가지기는 했지만 막상 밤을 밝힐만한 기름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올 한해 하나님중심으로 사셨습니까? 하나님께 삶의 제일 우선순위를 두고 그 분의 필요, 그 분의 관심, 그 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시간과 정성을 쏟았습니까? 하나님은 장차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았는지에 따라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이것은 우리 손에 주신 은사와 재능, 혹은 직분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다섯달란트를 받았고 두달란트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달란트를 받자마자 바로 가서 장사해서 열심히 일한 결과 또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남겼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잘 사용했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땅에 묻어 두고서 세월만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핑계 하기를 '나는 받은 그대로 안 까먹고 그대로 돌려 드립니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주인은 책망은 무섭습니다. 26절-27절입니다.
주인의 책망은 왜 남기지 않았느냐? 가 아니라 왜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느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땅에만 묻어 두었습니다. 재능을 받았고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가지고 열심히 사용하지 않고 시간만 보냈습니다. 간혹 보면 평상시엔 열심히 안 한 것 같았는데 직분을 맡고 나니까 사람이 달라져 보일만큼 열심히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책임감이 있고 사명감이 있는 사람입니다. 무엇 하나를 맡았으면 걱정 없이 잘 해내고, 또 실수를 하더라도 열심히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직분을 맡기전이나 맡고 난 다음이나 똑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저 사람에게 직분을 줬는지 안 줬는지 변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꿀먹은 벙어리가 답답하다고 하는데 직분먹은 벙어리도 있고, 은사먹어버린 벙어리도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은사도 재능도 직분도 다 줬는데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사용하는건지 안 하는 건지 구분이 안 갈만큼 답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최후 심판의 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맡기신 은사와 재능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살펴 심판하실 것입니다.
올 한해 여러분의 재능은 어디에 사용되었습니까? 여러분의 은사는 제대로 발휘되었습니까? 땅에 묻어둔 채 시간만 보내버린 것은 아닙니까?
달란트 비유는 은사와 재능과의 관계를 따라 분명한 심판이 있을 것을 예고해 주는 비유입니다.

세째로 양과 염소의 비유는 우리와 우리에게 주신 이웃, 혹은 작은 자들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기억하세요, 우리곁에 보내신 작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사느냐?에 따라 이것이 최후 심판의 날에 심판의 제목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생각하기를 구제나 봉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선택사항이라고 생각해서 하면 좋고 안해도 그만인 것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경고하십니다. 이건 의무이다, 선택사항이 아니다. 34절,35절입니다.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천국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뭐라고 하셨습니까? 40절입니다.

반대.....41절

이걸 보고 천국은 믿음으로 가지 선행으로 사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선행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마태복음 25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구원얻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충성하고 사명에 충실하고 무엇보다 이 땅의 작은 자들을 행한 긍휼과 사랑의 수고를 기꺼이 하는 것으로 그 믿음이 증명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함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주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통해서 구원얻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루어야 할 세가지 분야에 대해 말씀하시고, 이 세가지가 바로 마지막날 심판의 제목이 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해 어떻게 사셨습니까? 이 세가지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부끄러움이 없이 사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연말의 때에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 기준들을 가지고 우리의 종말을 준비하는 지혜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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