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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우리가 꿈꾸는 교회(I) / 엡 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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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섬마을에 위험하게 파도 치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배가 자주 난파되어 구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파도와 함께 쓸려들어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뜻있는 청년 서너 명이 모여서 구호소를 만들었습니다. 풍랑이 이는 날이면 배가 부서져서 물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을 건지곤 하였습니다. 구호소를 생명을 건진 사람들이 꽤 많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감사함으로 많은 돈을 구호소에 기부하면서 건물을 넓히고, 부서진 의자를 고치고, 지붕을 단장하게 되어 점점 좋은 시설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자선음악회, 자선 파티등을 열어서 운영기금을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회원간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힘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풍랑에 배가 파선하게 되었습니다. 구호소 회원들은 많았지만 정작 파선된 배를 구조할 구조요원들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호소 예산을 들여 사람을 모집해 구조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호민 중에 에이즈 환자 같은 전염병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환자들을 구호소 안에 들이느냐 밖에 놓아두느냐를 두고 회원 간에 논란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또 그 건진 사람들 중에는 흑인도 있었습니다. 백인이 사는 곳에 흑인을 들이느냐 마느냐로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이후 총회에서 환자들과 흑인들은 구호소 안으로 들이지 못한다는 결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구호소가 생길 때 원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며 몇몇 사람들이 따로 나가 조그마한 구호소를 만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 구호소 역시 같은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답니다. 이 이야기는 본질을 잃어버린 공동체를 이야기를 할 때 자주 인용되는 예화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섬기는 동안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무엇 때문에 하님께서 세워주셨습니까? 대체 나와 이 교회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나는 이 교회를 통해서 무엇을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나는 동안교회를 어떤 교회로 알고 섬겨야합니까? 어떻게 하면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변하는 시대에 적응하고,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교회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을 포함하여 우리교회의 비전과 뜻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고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이 교회는 주님께서 하셔야 할 일을 대신 해야 할 곳이어야 합니다. 즉 생명을 넘치게 하고, 더 풍성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면, 교회를 통해서 생명을 공급받아야 하고, 교회에 예배를 드리면 정말 살 맛 나야 하며, 인생의 의미를 교회에 와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와서 공동체를 이룰 때 인생이 더 풍요로워지고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 교회를 바라보는 밖같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서 생명의 공급을 받는, 인생이 새로워지고 풍요로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교회가 바로 교회의 본질을 제대로 갖고 있는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에 나와 그냥 뒷자리에 앉아 설교만 듣고 예배 드리고 종종 걸음으로 사라지면서 이것이 교인의 생활이요, 교회의 생활이라고 생각 한다면 분명 교회가 잘못되었던지 그렇게 생각하는 여러분이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를 향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비젼을 세워갈 것인가에 대해, 말씀을 따라가면서 설계해 나가길 원합니다. 어떤 교회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명이 있고 살 맛 나는 교회일까요?

첫째는 치유와 회복이 있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며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치유와 회복이 있어 생명력 있고 살맛나는 교회입니다.

인생은 문제의 연속입니다. 우리교회는 어른에서 어린아이까지 약 5천명의 성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5천개의 문제 근원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한분 한분이 모두 문제를 가지고 있고, 한 문제가 끝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잘 풀어서 치유되고 회복되면 용기와 지혜를 얻고,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를 풀지 못하게 되면 낙담하게 되고, 살 맛이 나지 않습니다.

어느 은행에서 중역으로 근무하다 오십 초반에 명예퇴직을 하신 남자분이 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IMF초기에는 ‘고개 숙인 아빠를 살리자’는 캠페인 등으로 인해 가족들이 잘 대해주었다고 합니다. 갑자기 목돈도 생기고 해서 잘됐다고 생각했답니다. 명퇴 후 전철을 타고 다니고 등산도 가봤지만 일시적인 것이었고, 곧 한참 일할 시기에 갑자기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초조하고, 앞날이 막막해서 가족들에게 짜증내기도 했답니다.

그렇게 두 세달 지난 후 대학생 딸이 와서 한다는 말이 “아빠, 직장 잃어버리면 그게 다야? 직장 잃어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아빠는 우리한테 신경질을 내고 짜증만 내고 그래. 지난 3개월 동안 지옥 같았어. 아빠 우리에게 너무 하지 않아?”라며 소리치곤는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또 아들 녀석이 “아빠 맘은 이해하지만 우리 가족들한테 너무 그러지 마세요.” 라고 말하고 제 방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때 이번에는 부인 역시 아무런 힘이 되어 주지 못한 체, “당신 우리한테 너무 심했어요. 우리는 그동안 숨도 못 쉬고 살았어요. 이제 당신 정신 좀 차려요” 라고 말하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아파트 거실이 실제로 그리 넓지도 않고 난방이 되어 따뜻했지만, 그 분에게는 황량한 시베리아 벌판과 같이 추운 곳으로, 고독과 외로움이 가득한 곳으로 느껴졌다고 합니다.

‘나는 온갖 모욕을 견디며 밤잠 안자고, 직장생활해서 먹여 살리고 강남 학군 좋은 곳으로 이사해서 좋은 학교 보내놨더니 자식들이 한다는 소리가 바로 저거야? 나는 뼈 빠지게 일하는데 계모임 다니고 동창모임 다니면서 좋은 음식점들 찾아다니면서 재밌게 보냈던 마누라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여러분! 낮에 고급 식당에 모여 밥 먹는 사람들은 전부다 여자들입니다. 남자들 정말 불쌍합니다.) 그분은 가족이 함께 있지만 배신감 때문에 정말 외로웠던 것입니다.

문제가 풀어질 곳이 없으며, 내 마음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외로울 때는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교회 안에 군중과 같이 있지만 하소연 할 곳 없어 홀로 외롭게 떨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교회를 통해서 이 문제가 풀어져야 합니다. 치유함이 있어야 하고, 교제를 나누면서 서로에게 소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교인 한분이 피아노 한 대를 기증했습니다. 그 피아노를 놓고 강대상 위에 놓을 것인지 아래 놓을 것인지에 대해 장로님 두 분이 의견이 나뉘어졌습니다. ‘강대상 위에 올리면 거룩한 곳을 해치지 않느냐?’, ‘아래는 좁아서 놓을 곳이 없지 않느냐?’ 위에 올리건 아래에 놓건 상관 없건만, 안수집사들 역시 두 편으로 갈라지고, 교인들도 양분되어 결국 교회가 양분되었다고 합니다. 5년 뒤 슈퍼마켓에서 두분 장로님이 우연히 만나 겸연쩍게 악수하면서, “그때 내가 피아노를 강대상 위에 놓자고 했냐? 니가 위에 놓자고 했냐?”고 했다고 합니다. 몇 년 지나면 이렇듯 잊혀지고 마는 것을 문제가 불거졌을 때는 죽기 살기로 다투고 문제를 가지고만 있으면 그것으로 인해 분열되고 맙니다. 

어떤 때 여러분의 마음은 치유되십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셨던 방법은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신 것입니다. 마음을 알아줄 때 우리의 마음은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통로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문제에만 급급하기 때문에 남의 마음을 알아 줄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제게 7살 난 조카가 있습니다. 그 조카는 5살 난 자기 동생을 얼마나 때리고 못살게 구는지 모릅니다. 어느 해 성탄절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자면서 산타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쓴 것을 부모가 보게 되었습니다.

『산타 할아버지 저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매년 빠지지 않고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산타할아버지를 참 사랑합니다. 제가 갖고 싶은 것은 팽이와 야구게임CD 입니다. 다른 것은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이 편지를 본 부모는 다른 선물을 준비했다가 당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디서 착한 일을 해야 선물을 준다는 말을 들었는지) 그런데 한 가지 죄송한 것이 있습니다. 제 동생을 때리지 않고 사이좋게 나누어 갖고 잘 지내겠습니다. 저를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맨 아래 별표로 강조하면서 쓴 말이) ★ 흰 조끼를 입고 있는 아이가 바로 저입니다. ★』조금 전까지 회개해 놓고 혹시 동생에게 그 선물이 갈까봐 자기 존재를 산타할아버지께 알린 것입니다. 그것이 어린아이의 마음이자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남의 마음을 알아 줄 시간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 여인은 남편을 5명이나 갈아 치우고 이제 또 갈아 치우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무슨 동정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정죄하기 전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 알아주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7절에 보면, 주님은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9절 ~ 10절에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의 대화장면이 나옵니다.  ‘유대인 남성이 왜 나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합니까?’. ‘니가 내가 누군 줄 알았더라면 오히려 내게 물을 달라고 했을 것이다.’ 내가 너의 인생의 갈증을 안다, 네가 왜 그렇게 방황하는지 이해하고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4장 29절에 보면 과부가 마을로 돌아가 ‘메시야다, 메시야다’ 하고 외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을 아시며 내 마음을 알아주셨다는 표현입니다. 또한 중풍병자가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중풍병자를 볼 때 그 사람이 몸이 불편해서 왔구나 라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중풍병으로 인해 몸도 아프지만 그 전에 마음도 상하고 낙심한 것을 보셨습니다. 그로인해 인간관계가 깨지고 사람만나기 싫어하는 것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도 보셨고, 그 육체적인 문제로 시작해서 그 삶 전체가 무너진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네 죄가 사함을 얻었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죄를 사하여 주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고,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함으로써 온전한 자유함을 주셨고, 걸어가라고 하심으로 다른 사람 앞에서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인간관계를 다시 맺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치유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를 하나하나 다 살피시면 여기 앉아 예배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은 정죄하기 전에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알아주셨습니다.

여러분! 장세동씨가 전두환씨에게 왜 그토록 충성했는지 아십니까? 저도 본인을 통해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장세동씨는 전남 고흥출신으로 큰 꿈을 안고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지만, 당시 호남출신들은 출세의 길이 막혀있었기에 불투명한 미래로 인해 답답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월남전에서 전두환씨는 대대장이었고, 장세동씨는 중대장이었는데, 전두환씨가 장세동씨를 불러, “세동아, 내가 니 아픔을 안다. 내가 니를 이끌어 줄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 한마디 때문에 장세동씨는 자기 방에서 밤새도록 울었으며, 마음으로 내가 저 사람을 위해 죽으리라 결심햇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그 곳에서부터 치유는 시작됩니다. 자기를 알아주는 한 사람을 위해서 헌신하게 됩니다. 가족이 함께 있고, 부부가 함께 있어도 함께 있다는 것이 곧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있다는 것을 포함하지는 못합니다. “형님의 부인을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형수입니다.”. “그럼 동생의 부인은요?”. “네, 제수입니다”. 그럼 내 부인을 ‘○수’로 표현하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바로 ‘웬수’라고 합니다.

정말 부부 사이, 자녀와 부모 사이, 친구 사이, 교인 사이에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는 주님처럼 그런 교회가 되고 있습니까? 오히려 교회로 인해 상처 받고, 그 아픔 간직하며 떠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습니까? 적어도 우리 동안교회만은 치유와 회복이 있는 교회,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주시고 치유하시는 것처럼 오늘 나와 만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마음에 동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교회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치유가 풍성한 교회는 바로 여러분 자신, 한사람 한사람입니다.

교회 처음 나온 사람 -인생 살다가 맘대로 되지 않아 옆에 사람이 교회 가자고 해서 교회 문을 들어오긴 했는데, 서먹하고 어색하고, 찬송가 몇 장을 펴야 하는지, 성경본문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모르는 초신자-의 심정이 되어 예배 드려 본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교회는 그런 사람의 마음을 읽어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표정이 어두우면 무슨 일이 있는지, 기도제목은 무엇인지 등 안부를 물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안부를 묻다가 그들과 대화 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요셉이 감옥을 나가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을 통해 치유함을 받은 사람은 경험한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읽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들의 마음을 읽어줄 수 있는 교회, 우리 조국을 위해 눈물로 호소하며 기도할 수 있는 교회, 그리고 시대의 고독한 선지자처럼 기도할 수 있는 교회, 바로 이런 교회가 살아 있는 교회이고 우리가 꿈꾸는 교회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에베소서 13절, 14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처럼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성장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름다움과 균형을 유지하며 자라는 성장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이고 괴로움과 고통이 따르며 자라는 성장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전자의 성장을 말합니다.

어릴 때는 젖만 먹던 사람들이 커서는 단단한 음식도 먹을 수 있듯이, 전에는 내 마음 속에 걸려서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여유있게 풀어 나갈 수 있고, 전에는 좁은 시야를 가졌던 사람들이 이제는 넓고, 깊게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교회, 내가 이 교회에서 소속되었는데 인생을 보는 눈도 성숙해 지고, 인간관계도 성숙해 지고, 내가 내 삶을 살아가는 힘도 얻더라 하는 교회가 생명력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장에는 요소가 있습니다.

성장의 첫째 요소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 가치 없고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시켜 보여주셨던 그 사랑을 선포하고, 체험하고, 고백하여 복음의 소식들이 나눠져야 합니다. 나눠지고 개개인에게 소유될 때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아서 친한 친구가 대구에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려갔더니 가족들을 모두 모아놓고선 비장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너 혹시 우리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 식구 좀 맡아다오. (두 딸에게) 그리고 얘들아, 삼촌이 있지만 너희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김목사님과 상의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경북대 병원에 자기 신장을 기증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믿지 않는 가정에서 자라나, 고등학교 때 혼자 믿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격해서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헌신했습니다. 이미 신학교에 입학할 때 결핵이 있었지만, 워낙 성적이 좋아서 입학이 허락되었고, 1년간 기숙사생활을 했는데, 결국 견디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휴학 중 군영장이 나와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무종판정이 나왔습니다. 무종판정은 판정보류를 의미합니다. 이걸 세 번 반복해서 받으면 입영이 면제되는데, 이 친구는 삼년을 기다리다 사년 째 되던 해 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역으로 입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카투사로 차출되었으나 결핵이 있었다는 것이 알려져, 최전방으로 배치되었습니다. 그러다 쓰러져서 야전병원에서 치료받다, 마산통합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증세가 완화되면 자대복귀하고, 또 악화되면 병원에서 치료받는 등 이러한 일을 두세 번 반복하다보니 마지막 때에는 죽는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거기서 그 당시 간호장교였던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통해 남다른 사랑을 받으면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제대 후 거창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보건소장을 하면서 친구를 경북대 박사과정 공부 뒷바라지를 했고, 작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더랬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자기 사십여 인생을 쭈욱 돌아보니 주님을 알지 못하는 가정에서 주님을 알게 되었고, 죽을 자리에서 다시 구원을 받는 등 정말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데, 자기는 하나님을 위해 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 심방을 가게 되었는데 신장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고는, 아는 병원장을 찾아가 자기 신장이 맞는 사람 누구에게라도 주고 싶다며 신장을 기증했다는 것입니다. 그 친구랑 같이 목욕을 갔는데 수술자국을 보니 가슴이 찡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신장 하나가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을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그 크신 사랑을 받은 사람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 사랑을 간직하고 느끼고 체험해야 그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것이라고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망성 없는 인간을 향해서 기대를 건다는 것은 무모한 짓입니다. 희망이 없는 인간을 바라보고 참아야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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