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년] 우리가 꿈꾸는 교회 (ii) / 계 2:1- 7

  • 잡초 잡초
  • 550
  • 0

첨부 1


제 목 : 우리가 꿈꾸는 교회 ii
본 문 : 계 2:1- 7

우리는 지금 동안교회가 앞으로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비전을 나누고 있습니다. 개인과 가정, 인간관계, 우리 민족의 상처와 아픔이 교회 생활을 통해 치유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교회, 그리고 살아가면서 우리 마음과 육체가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신앙이 아름답게 성장하는 교회 그리고 아름다운 유산을 후세에 물려줄 수 있는 교회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있는 중에 오늘은 우리가 꿈꾸는 교회의 두 번째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어느 한 작가가 이상적인 교회에 대해 쓴 글을 먼저 소개 합니다.

모이는 회중이 500~700명을 넘지 않는 교회가 성도의 교재와 제자훈련과 선교적인 면에서 가장 적당할 것이다. 구성원은 가능하면 전문직을 가진 젊은 층과 설교를 바로 이해하려고 하는 장년층, 풍부한 경험을 가진 노년층, 각 지역 출신들이 골고루 모여 아름다운 일들을 할 수 있는 교회일 것이다.  그리고 찬송하는 교인, 참여하는 교인, 웃음이 있는 교인으로 신앙의 연륜은 7~10년 정도일 때 비교적 순수하여 말씀을 잘 받을 것이다. 담임목사는 교인과 교회를 사랑할 줄 아는 설교가이고 최신의 신학도 말할 줄 아는 신학자, 능률 있는 행정과 유능한 교육자 지혜로운 상담자, 끊임없는 노력과 유머가 있는 현대인이기를 바란다. 선교, 행정, 교육 등 각 분야에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부교역자들을 확보하는 교회는 균형있게 부흥할 것이다.  유명한 회사의 전무이사와 같은 활동력 있는 장로, 어렸을 때 돌아보면 기억되는 고향 이모님 같은 권사, 중대선임하사와 같은 집사, 생명보험을 내게 설명해 주던 전문 보험인 같은 구역권찰, 야전 사령탑 같은 남녀 선교회 회장, 고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 같은 교회학교 교사, 남녀 공학 중학교의 학급대항 합창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중3 어느 학급과 같은 성가대가 가장 이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그 교회는 조용한 교회일 것이고 평화로운 교회일 것이며  전체의 분위기가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도록 썩 마음에 드는 교회일 것이다.

참 표현을 잘했다고 생각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섬기는 동안교회 모습도 이럴 수 있다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성경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삼는 교회를 몇 교회로 들 수 있습니다마는 그 중에서도 저는 에배소 교회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습니다.
 
에배소 교회는 지역적으로 유리한 곳에 위치한 교회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목이 좋아야 하는데 교통이 편리하고 사람이 찾아오기 쉽고 주차 공간이 넓어야 합니다. 에배소 교회는 소아시아에 위치해서 아프리카와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곳이며 무역과 상업의 요충지였습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복음의 영향력이 어디든 퍼져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곳에 위치한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설립한 목사님, 담임한 목사님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해박한 신학적 지식과 분명한 회심의 경험, 복음에 입각한 신앙과 말씀 교육이 가능한 그리고 한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뜨거운 열정, 선교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아깝게 여기지 않는 목회자의 헌신이 머물러 있는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문화와 문명의 지식에 탁월하고 두란노 서원을 세워서 교인들에게 3년 동안이나 가르칠 수 있었던 능력있는 목회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는 목회자이었습니다. 좋은 목회자가 있는 교회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영락교회가 영락교회 된 것은 한경직 목사님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또 에베소 교회는 박해와 고난 중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교인들이 헌신과 수고와 인내로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박해를 받으면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조금만 어려워도 신앙생활을 그만두는 교인들이 많은데 그러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붙드는 성도들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지적으로 뛰어난 교회입니다. 교회에 이단사상이 들어왔을 때 분별하여서 이단을 밝히고 축출시켰던 능력있는 교회입니다. 이단(異端)이라고 하는 것은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단은 우리 삶 속에 애매한 부분에서 명쾌한 답을 주기 때문에 속기도 쉽습니다. 교회에 이단이 들어오면 동조하는 교인들이 많이 생기면서 어려워집니다. 그러다 교회가 분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영적이고 성경적인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분별해 내어던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상적인 교회라고 생각할 때, 주님은 이 교회를 떠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훌륭하고 좋은 목회자가 있고 전통이 있고 신앙의 수고와 헌신이 있다해도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야말로 생명력을 잃은 교회요 소망이 없는 교회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작아도 주님이 계시면 그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주님이 떠나시려고 했던 교회. 아니 어쩌면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또한 동안교회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진정한 위기가 아니겠습니까. 내 신앙생활의 진정한 위기는 주님이 내 곁을 떠날 때, 우리 가정을 떠날 때가 아니겠습니까?

어떠한 환경과 사람 그리고 교회를 주님은 떠납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릴 때 주님은 떠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사랑을 버렸느니라(요계 2장 4절)”

처음사랑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처음사랑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자주 보는 드라마에서 희생과 애환과 죽음등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은 가슴 속에 와닿습니다.

가시고기라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아버지가 자신을 떠난 아내 없이 혼자서 키운 아들의 백혈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장기를 팔아 수술비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곧 자신은 간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장기를 팔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아내가 자기 아들을 데려가겠다고 왔을 때 가슴 찢어지는 부자간의 헤어짐의 슬픔을 겪지만 사랑하면서도 아들을 떠나 보내는 장면에서 우리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과 우리와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입니까. 단순히 장기를 떼어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모진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그러한 사랑입니다.

저는 가끔 이렇게 묵상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도 용서해 주시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공을 많이 들이셨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래서 참고 인내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내하고 사랑하지 않으시면 우리 가운데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처음사랑은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처음 사랑했을 때 어떠한 마음이었습니까? 주님 한 분만으로 내 인생을 만족합니다. 다른 것 어떤 것보다도 주님의 사랑이 최우선입니다. 다른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내 죄를 사해주시고 영생을 주시는 그 구속의 은혜를 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시간과 물질을 드리지 않을 수 없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지 않을 수 없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보니 처음 사랑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잘 아는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 집사님은 의과대학 본과 1학년 때 자기 아내가 될 자매를 만났습니다. 강릉에서 돌아오는 길에 앞자리에 앉은 여학생이 마음에 들어 사과 한 개를 주면서부터 사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도착해서 뒤를 따라가다가 빵집에서 만나 다음날 만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자매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 전날 대화 중에 들었던 사직동 어느 곳에 살고 있다는 것과 성이 주씨라는 사실만 가지고 온 동네를 샅샅이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주씨 성을 가진 어느 한 집을 발견하여 전화를 해봤더니 바로 자매 집이었습니다. 자매는 집사님이 어떻게 자기 집을 찾았는지 궁금해서 만나게 되었고 그 후 사랑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집사님은 자매가 시키는대로 모든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그 여인밖에 없었습니다. 의대는 공부할 양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시험 전 날 만나자고 하면 어김없이 나가서 만났습니다. 서울대학병원 수련의로 남으려고 했는데 성적이 모자라서 수련의로 남지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다른 아무 것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오직 이 여인 하나만 얻으면 되었습니다. 바로 이분이 지난해 서울대 의대 우수한 졸업생에게 주는 함춘 의학상을 수상한 이관희 집사님입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정형외과 의사로서 유전자 공학을 하시고 물렁뼈를 자라게 하는 벤처를 성공시켜 기업을 운영하시고 계십니다. 이러한 모습이 처음사랑의 모습이 아닐까요?.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내게 돈을 주는 주님, 내 기도를 들어주는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조건이 붙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첫사랑이 멀어질 때 드는 마음이 있습니다. 비교하는 마음, 서운한 마음이 찾아오면서 그 사랑이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교회 일에서나 신앙생활을 할 때 주님과의 첫사랑이 남아 있으면 힘들지 않습니다.
여러분 누구나 첫사랑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돈을 써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만 가질 수 있다면 뭐든지 다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신앙생활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지는 처음 사랑 속에 친교, 봉사, 헌신과 용서가 나옵니다. 그 사랑이 끊어질 때 용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지치고 힘들고 기쁨 없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 한 분이 있었습니다. 월요일 오후가 되면 결혼한 딸과 공원을 산책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의 낙이었습니다. 11월 어느 날 딸이 이야기 합니다. 몇 주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그 이유를 12월 25일 알게 되었습니다. 아빠를 위해 예쁜 장갑을 짰던 것입니다. 장갑을 받은 아빠는 딸에게 말했습니다. “이 장갑도 맘에 들지만 나는 너와 함께 월요일 오후 대화하며 산책하는 것이 더 좋단다.”
 
첫사랑은 함께 있고 싶고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대할 때 우리는 옛날 사랑으로 대해도 주님은 우리를 첫사랑으로 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만나기 원하십니다.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덧 기도하는 것이 의무가 되어버렸고 말씀 보는 것이 귀찮아지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위해 봉사 할 때도 혹시 일이 바빠 기도 없이 말씀 보는 것 없이 할 경우, 그 일로 인해 우리가 상처받게 되기가 쉬워집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주님과의 사랑, 주님과의 관계에서부터 나와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일이 창조적이고 생명력 있게 하게 됩니다.

이렇게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기도하는 것과 말씀 보는 것보다 일을 더 많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생하고 상처만 받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도하고 말씀보는 것이 부담이 되기 시작할 때 그때가 나의 신앙이 병들 때입니다. 주님께서 한 번 마음 먹으면 우리가 수고하고 봉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만나기 원하십니다.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봉사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에서 나오는 봉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에 감격하여 행하는 봉사 말입니다.

저도 동안교회에 새로 부임하여 보니 일이 아주 많습니다. 기도하는 시간, 말씀보는 시간, 설교 준비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어 저에게 무언가 이상신호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위기는 처음사랑이 식어지기 시작할 때 온다는 것입니다.

사랑만 있으면 만족하게 되는 것이 처음 사랑의 특징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처음사랑을 회복하는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새벽기도회, 주일저녁 찬양예배, 수요일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 그리고 말씀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그런 첫사랑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첫사랑을 회복시키기 위한 방법을 주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행위를 가지라(요계 2장 5절)”

여기에 ‘생각하라, 회개하라, 처음행위를 가지라’ 라고 3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은 주님 앞에 칭찬받을 일만 했습니다. 문제는 칭찬받을 만한 일만 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잘 생각해 볼 대목입니다.

처음사랑이 멀어지기 쉬운 사람은 남들 보기에 신앙이 좋은 사람,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한다는 사람이 처음사랑이 식어지기 쉽다는 사실을 예베소 교회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인 듯 가장하는 사람들, 거짓을 진실인 양 포장해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분별해 냈습니다. 분별 있고 신앙의 열정이 넘치는 교인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면 이단성이 있는지 없는지만 분별하려고만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앞에서면 불안해지게 되고 점차 대화를 줄이게 됩니다. 말을 만들어서 안 걸릴 만한 형식적인 말만하게 됩니다. 이러한 속에서는 관계가 메말라지게 됩니다.

여러분 가장 좋은 친구는 어떤 친구입니까? 욕을 할 수 있고 반말을 할 수 있는 친구가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격식과 예의를 차려서 성경에 있는 것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이야기하면 그 속에 정이란 없는 것입니다. 일의 관계 속에서만 대화하게 되고 다른 이야기를 하면 분별을 하려고 하니 삭막한 분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일은 열심히 하되 그 속에 기쁨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찾아야 할 균형 감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라고 하는 이단과의 어려운 도전에 직면하면서 성장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것이 진리인가 아닌가 판단하고 정죄하는 데는 앞장서왔는데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인 목양의 관점을 잃어버렸습니다. 옳다 그르다만 판단하다 보니 잘못한 사람이 잘못하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아픔과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한 것만 보고 정죄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 어떠한 사람들이 와야 합니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의인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으러 왔노라(마태 9장 13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는 죄인이 와야 합니다. 죄인이 주님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죄인이 오면 저 사람은 술집에 나간데 하고 수군거리지는 않습니까? 물론 죄인이 와서 교회가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죄인이 올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 가운데 변화되고 하나가 되어서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면서 삶이 변화되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간음한 여인이 왔을 때 주님께서 그를 먼저 살려주시고 품어주시고 이해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문제 앞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깊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옳고 그름도 따져야 하겠지만 보다 소중한 것은 영혼을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교회는 용서와 사랑과 관용을 갖고 그리나 진리 안에서 바르게 서는 것이 병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칭찬받는 두 번째 이유는 핍박과 환란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환란 가운데서 믿음 생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직장생활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란과 핍박 가운데 믿음을 지켰을 때 나도 모르게 우쭐한 생각이 들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정죄하고 비판했습니다. 에배소 교회는 박해와 어려움을 견뎌내고는 견뎌내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비난하고 조롱하였습니다.

우리가 왜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합니까? 거룩하고자 구별되고자함이 목적이 아니라 구별되어 섬기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리하고 정죄하려 합니다.

우리 나라가 해방이후에 옥중성도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일제 압박 시에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 옥중에서 젊음을 불태우고 순교를 당하고 고통을 당한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가정과 꿈을 잃어버리고 믿음 하나만을 지켰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귀한 일을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러한 분들이 감옥에서 나와 일제에 협력해서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신사참배하는 교회와 성도를 보고 이러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과는 다르지. 당신들과 함께 목회할 수 없지.” 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고려파와 재건파입니다. 이것이 교단 분열이 된 원인입니다. 좀 더 생각을 깊게 했더라면 비록 타협을 했지만 그래도 흩어진 교회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부분을 인정하면서 용서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하나가 되었다면 한국교회의 토양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갈라지는 틈새를 타고 악한 영들이 들어옵니다. 이간질과 다툼과 분열을 초래하게 합니다.

내가 의롭고 귀하게 살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이끌어 주고자 해야 합니다.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다면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가르치고 그들을 도와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설 수 있도록, 사명감과 사랑을 가지고 도울 때 진리에 바로서면서도 의와 희락이 입맞춤하는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구현이 바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자랑하는 것, 우리 교회가 자랑하는 것 때문에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일수록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떠난 허울 좋은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소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이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요계 2장 7절)” 

인생을 살며 우리가 처음 사랑을 간직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주님은 아십니다. 처음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간직하는 것도 어려운데 그 간직하는 방법은, 바로 성령의 외침 앞에 끊임없이 우리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위로의 말씀, 격려의 말씀, 권면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는 말씀입니다. 낙담치 않고 일으켜 세우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환경이 우리에게 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나에게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이가 주는 말이 있습니다. 공부한 지식이 나에게 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