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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꿈꾸는 교회 (III) [ 바른 신앙 고백이 있는 교회 ] / 마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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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우리가 꿈꾸는 교회 III [ 바른 신앙 고백이 있는 교회 ]
본 문 : 마 16:13~20
설 교 :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19C 중엽 일본 정부는 외국에서 오는 귀빈들을 맞이하기 위해 영빈관을 짓기로 결정했습니다.  미국 시카고의 프랭클린 라이드 라이트라는 사람에게 설계를 맡기기로 했는데, 그가 일본에 와서 영빈관을 짓기로 한 자리를 보니 지하 2.4m 밑에 18m의 진흙층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땅은 집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니 다른 곳에 영빈관을 짓도록 해달라고 일본정부에 요청했으나 일본 정부가 허락지 않아 하는 수 없이 호텔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기초공사만 무려 2년 정도가 걸렸는데 옆 건물은 준공되어서 벌써 끝나고 있을 때, 이쪽은 아직도 땅 파고 있고 기초공사 위에 건물만 짓는데도 2년이 걸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임페리얼 호텔 영빈관을 두고 사람들은 ‘가장 쓸데없는 돈을 많이 들이고 부질없는 시간을 낭비해서 지은 비효율적인 호텔’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원래 계획에도 없던 수영장을 만들어서 당시 일본 당국자들에게 이 호텔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52년 뒤 동경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동경시내의 모든 건물은 다 부셔졌습니다. 그런데 임페리얼 호텔만은 하나도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호텔 안의 물건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호텔은 1964년 철거됐는데 사용할 수 없어서 철거된 것이 아니라 좀 더 나은 건물을 짓기 위해 철거되었습니다. 이때 이후로 세계 건축학자들이 미국 시카고의 건축학자 프랭클린 라이드 라이트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보기 시작했습니다. 관심을 갖고 지켜본 결과 그의 건축비법은 바로 기초공사에 있었슴이 밝혀졌습니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건물은 무너지고 부셔지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기초를 잘못 세운 사람들은 원치 않는 어려움이 다가올 때는 곧 무너져 버립니다. 스스로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망가지는 인생들을 많이 봅니다.

IMF가 터졌을 때 불과 한 달 만에 우리나라의 만여 가정이 이혼으로 깨어졌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가정이 위기에서 가정의 불화를 종식시키고 하나 되어 복된 가족으로 변화된 상반된 현상들도 있습니다. 기초가 튼튼한 사람들과 가정은 어려움이 올 때 흔들림이 없습니다.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고 오히려 더 아름답게 빛나게 되는데, 그렇지 못한 교회나 가정, 개인은 무너져 내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갖가지 문제와 아픔들 가지고 흔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개인이 세웠던 꿈과 계획들이 흔들리고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지기 직전에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가정과 사업 터는 어떠합니까? 오늘 우리나라 경제와 정치의 기반들은 또 어떠합니까? 모든 것이 요동하여 균열이 생기고 흔들리고 있다면, 그 이유를 근본적인 문제 ‘나는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봐야 됩니다.

맥아더 장군은 「오늘 이 땅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전쟁과 다툼의 문제는 바로 그  이면 속에 경제적인 문제에 원인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 경제적인 문제도 조금 더 우리가 생각해보면 인간의 도덕과 윤리의 문제에 근거하고 더 나가서 이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것은 종교적인 문제에 귀착되고 있다」고 그는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다면 갖가지 문제에 부딪치고 있는 중에 원인이 종교적인 문제에 있다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던 질문 앞에, 함께 관심을 갖고 살펴보아야 되리라 생각되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2년 반을 함께 지내셨습니다. 이제 6개월 뒤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데 제자들이 대체 자기를 누구로 알고 있는지 궁금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이사 빌립보라는 휴양도시에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가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그때 제자들이 앞을 다투어 얘기합니다.
“엘리야입니다. 세례요한입니다.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대답 앞에 반응을 보이지 않으시고 또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님은 그때의 제자들에게만 던지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역시 동일하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헌금하고 교회 봉사 열심히 하는 이 모든 것의 기초가 어디에 있느냐?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느냐?’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 말은 곧 우리가 그렇게 봉사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어떤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냐 하는 질문과 동일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칭찬하시는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복은 이 땅에서 죽고 난 다음의 내세의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닌 이미 주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고 사는 사람에게 현재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고백을 하는 자체가 복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드릴 수 있다면,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복이 우리에게 올 뿐 아니라 미래에 약속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기쁨을 누리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기 전에 몇 가지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됩니다.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대답할 때에 대답 속에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그 메시야입니다. 헬라어 문법상으로 보면 우리가 기다렸던 메시야, 그 주님이 바로 당신입니다 그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표현, 크리스토스라는 이 단어는 ‘기름부음을 받다‘는 뜻이 있는데 구약에 기름 부음을 받는 사람은 세 종류의 사람이었습니다.  첫째는 왕을 세울 때, 둘째는 선지자(선생님)를 세울 때, 셋째는 제사장을 세울 때 기름을 부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라는 말의 뜻은 ’주님은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입니다‘ 하는 의미가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오늘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는 대답 속에 세 가지를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바로 왕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기다렸던 메시야 그 주님은 바로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왕으로 오셨습니다. 야곱의 집에서 왕 노릇하리라는 예언과 더불어 주님은 이스라엘의 왕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할 왕으로서 이 땅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네가 왕이냐 물었을 때 주님은 왕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할 때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왕 자손이여’ 하는 백성들의 환호는 왕의 족속으로 왔다고 공인하는 외침이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었습니다. 예수님 사역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였는데 곧 임할 나라의 왕국의 왕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왕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왕은 백성을 가지고 있고, 영토를 가지고 있고, 주권을 가지고 있는데 왕 되신 예수님은 예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 명령을 내가 순종하면 내 마음이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것이요, 내 이웃과 이웃사이의 관계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루어지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요, 가정과 교회도 하나님 명령 앞에 순종하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아주 절묘한 영토 개념을 갖고 계신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곳에는 어디든지 예수님 말씀대로, 뜻대로 순종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이 왕은 자기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을 징계하고, 채찍으로 다스리고, 세금을 거두는 그런 왕이 아닌 의와 희락과 화평을 나눠주는 ‘화평의 왕’ 입니다. 즉 주님의 통치를 받는 마음, 가정, 교회에는 하나님의 의가 살아나서 화평과 평강이 넘치는 모습이 됩니다.

게다가 주님은 능력의 왕입니다. 왕 되신 주님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질병에서 놓임 받게, 연약한자를 강하게 세우시며 보호하시는 권세 있는 능력의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서 “나사로야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시지 않고 만약에 그냥 “나오너라” 하셨으면, 그 근처에 있는 모든 시체들이 나왔을 것이라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라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나사로만 나왔지, 하마터면 모든 시체들이 부활해서 난리가 났을 거라 얘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말은 사망의 권세도 깨뜨리시는 주님, 어둠의 세력 마귀에게 명하시면 그 악한 사탄도 쫓겨나가는 능력의 주님, 자연에게 명령하시면 순종하는 주님, 이러한 주님이 바로 우리의 왕되십니다. 

빌립보서 2장 9절~11절에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도 모든 무릎을 예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드리면서  ‘나라가 임하옵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고 시험에 들게 마시고 악에서 건져주십시오’ 하는 의미는 왕 되신 주님을 우리가 인정하고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한번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백세에 아들 이삭을 얻지 않았습니까? 백세에 얻은 아들은 얼마나 귀합니까? 자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 아닙니까? 그리고 이 아들은 약속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하나님 내가 다른 것은 다 드릴 수 있는데 이 아들만은 안 됩니다’하고 만약 그가 명령을 듣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못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순종할 수 없는 가운데서도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했고, 그에게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이루어졌으며 아브라함 자체로서 하나님 나라인 그에게 의와 희락과 축복과 평강이 또한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사 그로 하여금 인류를 사망과 어둠으로부터 건져내신 권세 있는 하나님을 우리는 바라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를 섬기면서 살아갑니까? 자존심을 섬기던 돈을 섬기던 우리 자녀를 섬기던 젊음을 섬기던 누구나 다 무엇인가를 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한제국멸망사>를 썼던 헐버트선교사가 그의 책에서 ‘조선 사람들은 사회생활 할 때 보면 유교가 지배하고 있고, 생각하는 철학적 사고를 보면 불교인데, 위기와 어려움을 만나면 샤머니즘, 즉 무속신앙가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외국사람들 눈에 비친 우리 모습 저변에는 무속 신앙적이고 미신적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일날 하루 빠지면 꼭 벼락 맞을 것 같지요? 길가다가 돌부리에 차이기라도 하면 무슨 잘못을 했는가 생각합니다. 물론 신앙 생활할 때 이러한 태도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만 그렇게 하다보면 하나님을 유치한 하나님으로 만들게 됩니다. 잘하면 상주고 못하면 벌주는 하나님은 내가 만든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정말 내 인생과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왕 되신 주님을 나의 왕으로 영접해야합니다. 권세 있는 주님이 백성 삼으실 때,  그 권세를 나를 위해서 쓰시고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한쪽 다리 없는 장애인이 기도하는 것을 보고 있던 주위사람이 수군거립니다. ‘하나님은 암이나 고치는 내과의사지 떨어진 다리를 붙이는 외과의사는 아닌데 저렇게 기도한다고 무엇인가 달라질까?’ 그때 장애인교우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요 지금요 저의 다리를 고쳐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 남은 다리한쪽 가지고도 내 인생을 불평, 원망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 뜻대로 살수 있을지 그것을 위해서 주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 사람의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오늘 어떠합니까? 내 삶의 현장에서 주님이 나의 왕 되심을 인정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까? 나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주님, 오늘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사망과 어둠의 권세를 깨뜨리실 수 있는 권세 있는 주님이 나의 왕 일진데, 주님은 나에게 명령하시고 나는 그 주님께 순종하며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에 대해서 자유함이 있어야 되고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담대함이 있어야 되고 나를 지켜주시는 왕 되신 주님께서 나의 왕이 되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됩니다. 

한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빠 왜 이 땅엔 전쟁이 일어나요. 사람들이 서로 왜 죽이고 살고 그래요.” 질문합니다. 아빠가 전쟁에 대해서 제1차대전은 이렇게 해서 일어났고 제 2차대전은 이렇게 해서 일어났고 6.25사변은 이렇게 해서 일어났고 그런데 아이가 잘 이해를 못하니까 주방에 설거지하던 엄마가 답답해하며 “여보 그렇게 설명하면 안 되죠 그렇게 설명하면 아이가 알아듣나요. 당신처럼 설명해서 알아듣는 아이는 천재겠네요.” 그랬더니  아빠가 얘기합니다. “참견하지 말고 설거지나 해.” 근데 아내가 또 반박을 합니다. “이왕 설명을 하려면 알아듣게 해야지 아이가 당신 같은 줄 아세요. 눈높이라는 것도 몰라요?” 그러니 남편이 “네가 해봐” 그러면서 방으로 들어갑니다. 아내도 화가나 그릇을 집어던지니 아들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겁니다.  “설명 안 해줘도 알겠어요. 왜 전쟁이 일어나는지.”

왜 전쟁이 일어납니까? 내 속에 내가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회의를 하다가 종종 언쟁이 일어납니다. 다툼이 일어납니다. 만약 우리 교회에서 회의를 하다가 다툼이 일어나면 회의를 중단하고 ‘하나님! 왕 되신 우리 주님 이 문제에 대한 주님의 뜻이 분명히 있는 줄로 압니다. 우리가 함께 복종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의 다툼과 우리의 나눠짐 앞에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함께 엎드려 기도하고 다시 회의를 시작 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다면 우린 분명히 왕 되신 주님의 지배를 받는 교회가 됩니다. 어떤 회의나 모임에서 나눠짐과 격렬함이 생길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기도를 드리면 주님께서 우리를 지배하실 것이고, 그 결과는 성령의 열매요, 의와 희락과 화평의 열매가 열릴 것입니다.

우리 당회 할 때도 한번 그렇게 해 봐야겠습니다. 장로님 두 분이 종을 들고 있다가, 의견이 격렬하게 일어나 도무지 안 되겠다 싶을 때 종을 땡쳐서 잠시 중단하고 기도한 후에 다시 토의하는 것 말입니다. 이것은 미국 퀘이커 교도들이 영성 수련할 때 하는 방법입니다. 너무나 진지한 문제라서 쉽게 대화로 할 수 없을 때, 또 종을 치면 다시 엎드려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으며 하나님의 지배와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받고자 할 때 분쟁은 끝날 것입니다. 거기서 의와 희락과 화평이 일어납니다. 가정에서도 실습해보십시오. 가족 회의하다가 엄마,아빠가 싸우기 시작하면 아들이 종 딱 치고 회의를 잠시 중단하고 다같이 기도합니다. 화난 모습으로 기도하면 주님 응답하실까요? 저는 믿습니다. 화나서 기도해도 주님은 엎드리는 그 모습보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두 번째,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의 의미 속에는 주님은 나의 예언자(선생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언자의 예자는 ‘미리 예’자도 있지만 ‘맡을 예’자의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분으로써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속에는 거짓된 지식들이 적지 아니합니다. 우리를 죽이는 지식이 있습니다. 또 우리를 살리는 지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지식이 있는 반면에 우리를 무익하게 만드는 지식이 있습니다. 돈 들여가면서 소매치기 하는 법 배우려는 분 있으십니까? 우리를 죽이는 지식을 가지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원치 않게도 죽이는 지식, 잘못된 지식을 나의 것으로, 그것이 마치 내게 희망을 주고 생명을 주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따라가면 때로는 고난처럼 보이기도, 어려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말씀의 궁극적인 결과는 생명이요 소망이요 희망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바로 ‘주님은 나의 선생님입니다. 주님은 나의 예언자입니다.’하는 고백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같지 아니하고 권세 있는 자처럼 가르쳤다는 말씀은 주님의 가르침 속에 자유함과 삶의 방향 그리고 삶의 의미가 있었고, 주님의 가르침 속에 자기의 삶을 돌아보는 새로운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책망과 교훈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합당한 귀한 말씀 따라 우리 를 고쳐나가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의 선생님이라고 얘기하면서도 진실로 주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한 사공이 강 이편에서 저편까지 배를 저어서 사람들을 데려다 줍니다.

노숙한 사람이 사공에게 “사공 사공”
“왜 그러십니까?”
“사공은 논어를 읽어봤소?”
“못 읽어봤습니다.”
“아 논어도 못 읽고 사는가! 그럼 맹자를 읽어봤소”
“못 읽어봤는데요.”
“아! 비극이구만......”
잠시 후에 돌풍이 몰아치고 풍랑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사공이 “선비”
“왜 그러시오?” 
“수영할 줄 아시오.”
“못합니다.”

이 땅을 살면서 필요한 수많은 지식을 익히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우리의 생명과 관련된 일인지, 우리를 살리는 지식인지, 소망을 주고 희망을 주는 지식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 귀를 열어야 됩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긴장하셔야 됩니다. 저도 긴장을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 말씀이 진리라면 진리의 말씀 앞에 나를 변화시키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 듣는 말씀 때문에 지금까지 편안하게 해주던 나의 것을 버려야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긴장감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지탱해주던 것을 한꺼번에 버리고, 새롭게 하나님 말씀을 쫓아가야 된다는 위기의식을 갖는 것이 말씀을 듣는 사람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뒤에 앉아서 ‘오늘 설교 잘한다, 웃는 얘기도 좀하고, 울리기도 하고 괜찮네, 들을만하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에게 어떤 변화도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의 그리스도라는 ‘크리스토스’ 즉, 구세주라는 고백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멀리서 구경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태도입니다.

데오도시우스 로마황제가 데살로니가 시민 1500명을 살해하고 교회활동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러던 중에 황제가 성 밀라노성당을 건축하려고 하자 암브로우시스 감독이 거절했습니다. 황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다윗도 죄를 범하지 않았냐고 내가 범죄한거 가지고 뭘 그러냐고 얘기할 때, 암브로우시스는 ‘당신이 다윗의 범죄를 모방했다면, 다윗이 죄를 범한 후에 베개가 젖고 침상이 젖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회개했던 그 모습도 본받으시오’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우리 임의대로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지 맙시다.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마음속에 받아들일 때에, 하나님 말씀 앞에서 우리들이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새해가 되면 토종비결 보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이사할 때도 결혼할 때도 궁합을 봅니다. 주로 연세 많은 권사님들이 토종비결 잘 보시기에, 여쭤보았습니다. “권사님 토종비결 왜 보세요?”, 그러니 권사님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도 좋아하고 인간도 좋아하면 좋잖아요. 좋은 게 좋아서 봅니다.” 나의 미래를 거짓된 지식에 맡기고, 미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할 바른 삶의 모습이겠습니까?

악한 영이 내려 단군교 교주를 했던 분이 예수를 믿고 난 다음 썼던 <난 사탄의 왕관을 벗었습니다> 라는 책에 보면, 서울시내 유명한 그리스도인들의 상당수가 자기 고객들이었다는 사실을 얘기합니다. 이름을 이야기하면 알 수도 있는 유명한 그리스도인들이 귀신을 추종하고, 신통하다고 소문이 난 자기에게 와서 미래를 물어보고 장래를 구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히려 우리를 죽이는 지식이 참 지식인줄 알고 따라가고, 아는 그 지식이 전부인줄로 알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가르침이 나에게 있어서 참 생명의 말씀인줄 알아야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며 말씀 앞에 나의 삶을 내려놓고, 그분께 주권을 내어 맡기며, 하나님 말씀대로 자신을 고쳐나가는 사람 고쳐지지 않을 때는 금식하며 몸부림치며 ‘하나님 내 삶을 하나님 생명의 말씀처럼 살아가길 원합니다.’ 하는  그런 사람들이 바로 ‘주님이 나의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진짜 고백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주님은 나의 대제사장이 되신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신 분으로 또한 죄에 대해선 용납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함으로 주님의 약속으로부터 멀어진 백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심으로 하나님과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역할을 대신해 주신 대제사장이 되어주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4~16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주님께서 나의 제사장이 되어주시고 나의 허물과 죄와 인생의 무거운 짐을 능히 짊어지시고 해결해 주실 분이라는 고백이 되어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그 분 앞에 기도합니다. 내 죄를 위해서 돌아가신 주님을 향한 감격과 기쁨이 마음속에서 솟아납니다.

흑인노예해방을 위해서 일했던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 링컨이 브스 존 윌크스라는 사람에게 암살당하고 난 후, 장례식 행렬이 지나갈 때에 한 흑인 어머니가 “애야, 저분을 보아라! 저분이 너를 구속해서 자유하게하신 분이다.” 감격해서 소리쳐 외쳤다고 합니다.  여러분 노예에서 해방시킨 링컨의 시신을 향해서 외쳤다면, 우리는 오늘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모두 ‘저 주님을 보라! 저 십자가의 주님을……. 나를 영원한 죄와 형벌 가운데서 구원하사 자유 주시고, 오늘 내 인생을 인도하신 주님을 보라’ 라고 외치는 감격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스펄전 목사님이 어느 날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여보 당신 왜 울어요.”, “내 마음이 병들었어. 내가 주님의 십자가 보혈 얘기를 들어도 마음에 감격이 없어. 감격이 없고 기쁨이 없어. 내 심령이 병들었어.”

내게 아무 의미 없이 보이는 십자가 때문에 가슴을 치며 울어본 적 있습니까? 대제사장 되시는 주님 앞에 우리의 문제를 정말 주님이 담당하시는가 아닌가 두 마음을 품는 것  아니라, 온전히 맡겨드리는 믿음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정신력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종교에 어떤 정신과 의사가 한 분 있었습니다. 두통이 심한 환자에게 간단한 약을 주면서 이렇게 외치라고 했답니다. ‘나는 두통이 사라졌다 나는 두통이 사라졌다’ 하루에 열 번 이상 외치면 두통이 없어질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나 아무리 외쳐도 사라지지가 않아, 열흘 뒤에 다시 왔습니다.  의사가 좀더 계속 외쳐야 하겠다고 하면서, 60달러를 치료비로 달라고 하니 이 사람이 20달러짜리 세장을 주었다가 도로 가져가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 왜 치료비를 안 주십니까’ 하고 물으니 당신도 집에 가서 열흘 동안 ‘난 60달러를 받았다 60달러를 받았다‘ 외치면 60달러 받은 것으로 믿게 될 것이라고 했답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 이야기에서 보여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정신력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내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나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십니다.

스탠리 존스라는 분이 마하 트마. 간디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마하 트마 간디씨 당신이 아시다시피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당신과 당신의 운동을 서구사회에 알리려고 애썼습니다. 나는 당신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이제는 바꿔야 될 것 같습니다. 당신은 약간의 원리를 파악하였고 당신의 원리들은 당신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또 그 때문에 당신은 그만큼 유명해졌습니다. 당신은 캘커타에서 위로 받기위해 산상수훈을 의지하지 않고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트기타를 의지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물론 나도 산상수훈을 의지해서 위로받진 않습니다. 나는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그분을 의지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당신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원리를 파악했지만 바로 그분을 놓쳤습니다. 그 원리를 넘어 그 분을 만나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후 다시 와서 당신이 찾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십시오…….

기독교인의 원리를 발견하고 그 원리대로 살기는 쉽습니다. 마하 트마 간디는 산상수훈을 근거로 인생철학을 펼쳤으나,  생명의 주님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는 나의 왕이라는 사실, 주님은 나의 선지자라는 사실, 주님은 나의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그의 삶 속에는 주님이 그의 진정한 구세주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고백을 삶의 현장에서 분명히 가지고 있는 한 초등학생의 편지를 읽어드림으로써 든든한 기초가 되는 바른 신앙 고백에 대한 메시지를 마감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예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구로동에 사는 용욱이에요.
구로초등학교 3학년이구요. 우리는 벌집에 살아요. 벌집이 뭔지 예수님은 아시지요.
한울타리에 55가구가 사는데요. 방벽에 1 2 3 4 5번호가 써있어요. 우리 집은 32번이예요.
화장실은 동네에 공중변소를 쓰는데요. 아침에는 줄을 길게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해요. 줄을 설 때마다 저는 21번방에 사는 순이 보기가 부끄러워서 못 본척하거나 참았다가 학교 화장실에 가기도 해요.
우리식구는요 외할머니와 엄마 내 동생 용숙이랑 네 식구가 살아요. 우리 방은 할머니 말씀대로 라면 박스만 해서 네 식구가 다 같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구로 2동 술집에 나가서 일하시는 엄마가 술집에서 주무시고 새벽에 오세요. 할머니는 한달에 두 번 그것도 운이 좋아야 치료사업장에 가서 돈을 버시구요, 아빠는 청송감옥소에 계신데 엄만 우리보고 죽었다고 그래요.

예수님 우리는 참 가난해요. 동회에서 구호양식을 주는데도 도시락 못 싸가는 날이 더 많아요. 엄마는 술을 많이 먹어서 간이 나쁘다는데도 매일 술 취해서 어린애마냥 엉엉 우시기를 잘하고 ‘이 애물들아 왜 태어났니. 같이 죽어버리자’ 하실 때가 많아요.

지난 4월 부활절날 제가 엄마생각하고 회개하면서 운 것을 예수님은 아시지요. 저는 예수님이 저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걸 정말 이해 못했거든요. 저는 죄가 통 없는 사람인줄만 알았단 말이에요. 근데 그날은 제가 죄인인줄 알았어요. 친구들이 우리 엄마보고 술집 작부라고 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고 매일 술 먹고 술주정하며 울면서 같이 죽자고 하는 엄마가 미운 적이 많았거든요. 부활절날 ‘엄마 미워한 거 용서해주세요’ 하고 예수님께 기도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면서 ‘용욱아 내가 너를 용서한다’ 고 말씀하시는 거 같아서 저는 그만 눈물을 와락 흘리고 말았지요. 그날 교회서 찐 계란 두 개를 부활절 선물로 주시기에 집에 갖고 와서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드리면서 생전 처음 전도를 했어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요. 몸이 아파서 누워계시던 어머니가 화난 목소리로 ‘흥 구원만 받아서 사니’ 하시면서 ‘집주인이 전세금 50만원에 월세 3만원을 올려내라는데 구원만 말고 50만원을 내면 내가 예수를 믿지 말래도 믿겠다’ 하셨어요. 저는 엄마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너무 신이 나서 기도하기 시작했지요. 제가 기도드린 거 예수님은 아시지요. 학교 갔다 올 때 몰래 교회 가서 기도했잖아요. 근데 마침 어린이날 기념글짓기 대회가 덕수궁에서 있다면서 우리 담임선생님께서 저를 뽑아서 보내주셨어요. 저는 청송에 가계신 아버지와 서초동에서 꽃가게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던 때 얘기를 그리워하면서 글을 썼어요. 청송에 계신 아버지도 어린이날에는 그때를 분명히 생각 하실 테니 그날만은 엄마도 술 취하지 말고 울지도 않고 그때만을 생각해주신다면 5월 달은 진짜 내 세상이 될꺼 같다고 썼어요. 예수님 그날 제가 1등 상을 타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시지요. 

5월 5일 엄마는 너무 아파서 술도 못 드시고 울지도 못하셨어요. 그런데 그날 뜻밖의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글짓기대회 날 심사위원장을 맡으셨던 노할아버지 동화작가 선생님께서 물어물어 우리 집을 찾아오신 거예요. 대접할게 없으시다고 할머니 동네 구멍가게에 급히 내려가셔서 사이다 한 병을 사오셨지요. 동화작가 선생님께서는 엄마에게 똑똑한 아들을 두었으니 힘을 내라고 위로해주셨어요. 엄마는 줄줄 눈물만 흘리면서 엄마가 일 나가시는 술집에 내려가시면 약주라도 한잔 대접하겠다고 했습니다. 동화할아버지는 대접은 이다음에 받겠다고 하시면서 할아버지께서 지으신 동화책 5권을 놓고 돌아가셨습니다. 밤 늦게까지 할아버지께서 주신 동화책을 재미있게 읽던 저는 그만 깜짝 놀랐어요. 동화책 갈피에서 흰 봉투하나가 툭 떨어지는 게 아니겠어요. 펴보니 저는 생전처음 보는 수표였습니다. 엄마에게 보여드렸더니 세상에 이럴 수가 하시면서 제 양어깨를 잡으시면서 ‘고마우신 분이다. 세상에 아직도 이런 분이 계시구나’ 하셨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만 할아버지께서 가지고 오셨지만 ‘예수님이 주신 거예요.’ 라고 말했는데 엄마도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채셨는데 ‘애 용욱아 예수님이 구원만 주신 게 아니고 50만원을 주셨구나’ 큰소리로 말씀하시면서 울음을 터트렸어요. 할머니도 울고요 저도 왠지 눈물이 났어요. 동생 용숙이도 괜히 따라 울면서 ‘오빠 그럼 우린 안 쫓겨나고 여기서 다시 사는 거야’ 했어요. 너무나 신기한 일이 주일날에 또 벌어졌어요. 엄마가 주일날 교회를 가겠다고 화장을 엷게 하시고 나서신 거예요. 대예배에 가셔서 얼마나 울으셨는지 두 눈이 솔방울만해가지고 집에 오셨어요. 나는 엄마가 우셨을 때 같이 죽자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는데 ‘용욱아 그 할아버지한테 얼른 편지 써라 엄마가 안 죽고 살아서 전세금은 꼭 갚아드리겠다고……. 난 못 죽어 이젠’ 하셨어요. 엄마가 안 죽겠다는 마음을 먹으신게 전 너무나 기뻐서 야호 소리를 지를 뻔했어요.

고마우신 예수님 참 좋으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사랑으로 주신 수표는 저도 이 담에 커서 꼭 갚아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어른이 될 때까지 동화할아버지께서 건강하게 살아계시도록 예수님께서 꼭 돌봐주세요. 이것만은 약속해주세요. 예수님.
너무나 좋으신 예수님 이 세상 최고 예수님을 용욱이는 찬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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