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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 학 2:1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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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본 문 : 학개 2:1 - 9
설 교 : 강구원 목사  (갈보리교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간(B.C. 605-538)의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바벨론 포로 이전에 있었던 영광스러운 솔로몬 성전을 목격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들이 바벨론에서 포로민의 한을 씹으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한 소망은 저들의 삶 속에 맥박처럼 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바벨론에서 저들의 화두(話頭)는 예루살렘에 있는 영광스러운 솔로몬 성전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솔로몬 성전에 대해 체험적이든지 역사적이든지 둘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돌아와 보니 꿈에도 그리던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은 이미 폐허가 되어 없어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성전 공사를 재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의 재흥을 두려워했던 사마리아인들을 비롯하여 주변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16년 동안이나 성전건축이 중단된 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세우고 유대인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성전 공사를 재개하게 하셨습니다. B.C. 520년 7월 21일 성전 공사가 재개된 지 약 한달이 지났을 때 백성들 가운데는 옛 솔로몬 성전에 비해 너무 초라한 새 성전의 규모에 낙심하는 자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백성들의 반응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학개를 통하여 지금 재건하고 있는 제 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규모 면에서나 외형적인 면에서는 솔로몬 성전이 비할 바 못되지만 이 성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새 성전의 영광이 과거 솔로몬의 성전보다 크고 더 영광스러울 것이라고 하시므로 백성들은 큰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Ⅰ. 외형보다는 본질의 중요성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2장 9절에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1) 솔로몬 성전은 우상숭배로 오염되었던 성전이었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운동에서 성전의 타락상을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23장 11-12절에 『또 유다 열왕이 태양을 위하여 드린 말들을 제하여 버렸으니 이 말들은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곳의 근처 시종 나단멜렉의 집 곁에 있던 것이며 또 태양 수레를 불사르고 유다 열왕이 아하스의 다락 지붕에 세운 단들과 므낫세가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세운 단들을 왕이 다 헐고 거기서 빻아 내려서 그 가루를 기드론 시내에 쏟아버리고』라고 했습니다.
요시야 왕은 애굽에서부터 시작된 태양신을 비롯해서 천체 숭배, 우상숭배에 의하여 더렵혀진 것들을 모조리 태워 버렸습니다.

2) 솔로몬 성전은 거짓된 제사가 드려졌던 성전이었습니다.

이사야 1장 12절에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소돔의 관원들이라고 했고 고모라의 백성들이라고 질타하셨습니다(사 1:10). 헛된 재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사 1:13). 절기가 오히려 무거운 짐이라고 까지 하셨습니다(사 1:14).

그래서 이사야 1장 15절에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7장 11절에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파괴된 것은 결코 보잘것없는 곳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성전이라는 공간에 제한되어 머무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기 때문에 그 곳을 떠나셨습니다.
진정한 성전이라면 그 곳에서 참된 예배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라야만 합니다. 바벨론 포로시대 이전의 사람들은 솔로몬 성전을 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때에 화려함을 생각하면서 지금의 초라한 성전의 본질까지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는 성전은 아무리 화려하다고 해도 그것은 성전이 아니라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마음은 솔로몬 성전의 영광스러움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건축하는 성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와 같이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Ⅱ. 장차 나타날 메시야적 소망을 알 려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2장 7절에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만국의 보배』는 세상 모든 나라와 민족이 대망하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사야 42장 6절에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49장 6절에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 건축을 말씀하시다가 그 성전이 충만한 영광을 얻게 된다고 하신 말씀은 그 성전의 영광을 신약에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2성전의 참 의미와 가치는 장차 오실 메시야 예수를 예표하고 상징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자신의 육체된 몸에다 비유했습니다.

요한복음 2장 21절에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성전이 되시는 분입니다. 예수는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행 4:11; 엡 2:20; 벧전 2:6).
성전은 그 건물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성전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장소라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성전이 화려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그것은 성전과는 무관한 건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규모가 큰 성전입니다. 여기에 비해 스룹바벨 성전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작은 성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성전과 함께 하신다면 외형과 관계없이 그것이 참 성전입니다. 스룹바벨 성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성전입니다.
이사야 53장 2절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충만했습니다(요 1:14).
예수탄생과 함께 천사들은 누가복음 2장 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영광으로 이전에 충만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완전히 채운다는 말입니다.

Ⅲ. 장차 신약 교회 운동의 본질을 알 려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2장 7-9절에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내 영광으로 이 전을 충만케 한다』는 말은 장차 신약에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택자 구원 완성을 예표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충만』은 솔로몬 성전 봉헌식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다는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대하 7:1).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새 성전을 솔로몬 성전과 같이 아름답게 장식하지 못함을 인하여 슬퍼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은도 금도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전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의 외형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 성전의 영광이 이전에 솔로몬이 지었던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전의 영광, 더욱이 충만한 영광은 장차 신약에 나타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운동에서 찾아야 합니다.

1) 교회가 택자 구원의 센터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했습니다.
사실상 이 교회운동은 여인의 후손과 뱀의 씨가 반목을 시작하던 순간부터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운동이 언제나 동일한 형식을 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족장시대의 교회운동은 주로 경건한 가정에서 보존되었습니다.
이 가정을 통한 교회운동은 모세 시대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다음은 한 국가 조직 안에서 중앙 성전을 중심하고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이스라엘 국가로부터 떠나서 새로운 우주적 교회로 전환하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택자 구원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는 교회를 통하여 성취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나 누룩의 비유(마 13:31-32)와 같이 교회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확산된다는 말씀입니다.
화려했던 솔로몬 성전에 비해 재건되는 스룹바벨 성전의 모습은 보잘 것 없지만 그 곳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한 택자 구원운동 입니다.

2) 교회를 통하여 택자구원이 완성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라고 했습니다(고전 12:27; 엡 1:23; 골 1:18).
교회를 가리켜 성령의 집이라고 했습니다(고전 2:16; 벧전 2:15). 교회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했습니다(갈 2:26).
교회를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했습니다(히 12:22).
새 예루살렘이라고 했습니다(계 21:9).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습니다(딤전 3:15).
큰집이라고 했습니다(딤후 2:20).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딤전 3:15; 히 3:6).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했습니다(요 3:29; 마 25:6 계 9:7; 엡 5:24-25).
이전 영광보다 크다는 말은 택자 구원에 대한 비밀한 내용입니다.

① 이방인들 가운데 있는 충만한 수입니다.
로마서 11장 25절에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충만』(Pleroma)은 '완전'을 가리킵니다. 즉 부족이 없는 완전수입니다.
이방인 중에서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의 완전한 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곧 이방 복음 운동의 완성을 말합니다. 이방의 복음 운동이 택자를 완전히 구령하는 시기까지를 말합니다. 따라서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복음을 받아 다 믿게 되는 시기입니다(행 13:48). 그 시기는 이 세상 종말 즉,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기가 될 것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때까지 선택받은 자, 곧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됩니다. 이러한 사이에 이스라엘이 더러는 완악해지고 또 더러는 복음을 영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②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입니다.
로마서 11장 26절에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이스라엘은 이 땅의 인류 가운데 구원의 전 대상입니다. 로마서 11장 25절에 이미 이방인의 구원의 총 수를 말했습니다. 여기는 분명히 유대인의 총 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유대인의 충만한 수를 의미합니다.

예수 재림 직전에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남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그들의 회개함으로 유대인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됩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유대인의 충만한 수가 바로 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이라는 구원받은 택자들의 상징적인 숫자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유대인의 충만한 수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솔로몬 성전의 영광보다 더 큰 영광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안에 구원받은 성도들이 참성전임을 보여줍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각자의 몸을 거룩하게 유지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몸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딤후 2:11).
예수를 만난 성도들은 거룩한 성전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영광은 그의 몸된 교회운동을 통하여 나타나고 발산됩니다.

4) 교회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

우리는 이 땅에 화려한 교회를 정죄하거나 백안시(白眼視) 하지 아니합니다. 그렇다고 작고 초라한 외형을 가진 교회를 경건하다고 하지 아니합니다. 다만 외형이나 규모에 관계없이 그 교회가 교회적 사명을 성실히 다하고 있느냐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상과 죄로 깊이 빠진 세상은 성전이 아닙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그 곳에는 예배도 없고 섬김도 없고 거룩함도 없고 하나님의 기적도 없습니다. 이미 도둑 당한 영광입니다. 빼앗긴 영광입니다. 파괴된 영광입니다. 탄식하고 마는 영광입니다. 점령당한 영광입니다.
이사야 42장 8절에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회복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은 모두가 이전 영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의 성분들은 모두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영광은 원시 아담의 영광입니다. 원시 아담의 영광은 잘못될 수 있는 영광입니다. 실지로 타락했습니다.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광은 타락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따라서 첫째 영광보다 더 나은 영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은 것이 하나님의 나중 영광이었습니다. 마귀에 의해 점령당하고 파괴당한 것은 반드시 회복되어야만 합니다.

창조적 영광은 이미 폐허가 된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주님의 몸된 교회적 거룩성을 파수하는 교회가 나중 영광입니다. 육체주의가 아닌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나중 영광에 참예한 교회입니다. 인본주의가 아닌 신본주의로 충만한 교회가 나중 영광에 참예한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택자 구원 운동이 우리 교회가 받은 나중 영광입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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