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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사람을 입는 삶 / 골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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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골3:12-17
제 목 : 새 사람을 입는 삶
설 교 : 이승우 목사 (옥곡대죽교회)


[본  문]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위에 있는 것을 찾고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며, 분과 악의와 훼방과 부끄러운 말과 거짓말 입니다. 즉 율법 아래 있는 삶은 특별히 이러한 패덕의 행위를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러한 질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한 몸의 연합과 섬김과 봉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땅에 있는 지체 가운데서는 헬라인과 유대인, 할례당과 무할례당, 야인과 스구디아인, 종이나 자유인의 차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이 새 사람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좇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까지 새로움을 입은 자들인데 그 새 사람 안에는 만유시며 만유 안에 계신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 안에는 사람의 차이와 차별과 간격이 없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구체적인 덕목에 대하여 12절 이하에서 설명합니다. 그 덕목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입으라 말하는데 그 근거는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로서”입니다. 이 말씀은 가깝게는 3:1-4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며, 더 나아가 바울이 기도의 내용에서부터 밝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비밀의 일과 관계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선택은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과는 다릅니다. 이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아브라함 안에서 택하시고 열국 중에 장자 백성으로 택하여 거룩한 제사장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 아래 있었고 천사들의 손 아래 있었습니다. 그들은 천사들의 영광 밖에 있는 이방인들과 달리 천사들의 영광 안에 있음으로 인하여 택함을 받았고 거룩하다 말할 수 있었어도 그들은 우리처럼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 받고 거룩을 입은 백성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율법으로부터 천사들의 손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입어 거룩함을 입었습니다. 이 거룩은 천사에게 속한 거룩이 아니라 아들의 빛의 나라에 속하여 하나님께 속한 거룩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리심을 받아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인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리고 승리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함을 입은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 택함과 거룩은 구약 때처럼 이방인과 대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시며 만유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만유시며 만유 안에 계시는 주님의 몸이며 지체로 새 사람으로 택함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 때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장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백성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까지라도 온전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사들과 율법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하나님의 사랑도 배타적이고 차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온전한 사랑을 나타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며 만물보다 먼저 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만물의 으뜸이 되게 하셨고 하나님은 그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또한 멀리 떨어져 있었던 우리들은 하나님 보좌로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천사들과 율법의 지배로부터 아들의 지배로 부르셔서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 사랑 안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종이나 자유자 야만인이나 문명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따라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어야 합니다. 분명 구약 율법 아래서도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서는 땅에 속한 것이어서 음란과 부정과 탐심의 질서였습니다. 근본적으로 나누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는 긍휼과 자비는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긍휼과 자비는 온전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결국 분노와 거짓과 탐심과 음욕을 일으키는 것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 받은 백성으로 행하라 말하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삶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것은 위에 있는 것을 좇고 찾는 삶이며 새 사람을 입는 삶입니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그것에 토대를 둡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택함 받은 거룩하고 사랑을 받은 자로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때도 하나님은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특별히 금송아지를 섬긴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시면서 자기 이름을 모세에게 여호와로 알리면서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약 때 그것은 여전히 천사들의 종으로 살도록 하는 것이며 모세가 깨뜨린 그리고 다시 기록해 준 두 돌판에 새겨진 율법의 종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음성은 들어도 여호와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본 영광은 천사의 영광이었고 천사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온전히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난 백성들을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거룩하고 흠 없는 백성으로 부름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아들의 나라로 아들의 백성으로 삼음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차별이 없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지음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아들의 십자가의 자기 몸의 버리심의 겸손과 섬김을 통하여 율법의 저주와 정사와 권세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원 하심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를 입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입음으로 새 사람으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12절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덕목이 13절에서 교회의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됩니다. 그것은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입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허물을 두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골로새서의 문맥 안에서 이전에 예수를 믿기 전에 서로의 차이와 간격 때문에 생긴 허물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 때문에 이방인은 허물 있는 자였습니다. 종은 허물 있는 자였습니다. 여자는 허물 있는 자였습니다. 야만인은 허물 있는 자였습니다. 병든 자는 허물 있는 자였고 가난한 자도 허물 있는 자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허물을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죄 가운데 거하는 허물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용납하신 것처럼 형제의 허물을 용납하고 형제를 한 몸으로 받아 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공동체 안에서 죄를 범한 형제일 경우입니다. 구약 때는 스스로 형제의 허물을 용서할 수 없고 율법의 판단을 받도록 하여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에도 자기 스스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율법의 판단을 따라 손해에 대한 배상과 속건죄를 드리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새 사람 안에서는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너희도 그리하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에서도 주께서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형제의 허물을 일곱번까지 용서하리이까 물었을 때 말씀하시기를 일흔번에 일곱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천부께서도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였습니다. 또한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그 형제를 권하라고 말씀하면서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 말씀하였습니다.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고 범죄한 형제를 세움을 통하여 천국의 백성으로 살며 천국이 이뤄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때는 형제의 허물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형제의 허물이 사해진다 하더라도 간격과 차별이 있었습니다. 온전히 한 몸으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거룩의 간격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던 우리, 율법과 천사들의 지배 아래 있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유대인과 이방인 할 것이 그리스도의 지체와 새 사람으로 살도록 하는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되 주께서 우리를 그의 몸으로 삼으신 것처럼 하나님이 이제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혀 있던 율법과 천사들의 장막을 허시고 우리를 자기 자녀 삼으시고 품으신 것처럼 우리가 형제를 품을 수 있는 용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전한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용서와 화해인 것입니다. 골로새서는 물론 두번째의 경우도 가능하지만 첫번째의 경우가 더 타당하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율법 아래서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 종과 자유인의 차이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연합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용서와 용납이 온전한 한 몸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14절에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말씀합니다. 이 사랑은 우리를 온전하게 매는 띠 입니다. 이 사랑은 앞에서도 말씀 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에 기인합니다.즉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주의 몸과 지체로 새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 우리는 그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유시며 만유 안에 계시는 주만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유대인과 헬라인 종이나 자유인이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연합 안에는 분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반면 구약의 사랑은 배타적인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차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르며 남자와 여자가 다르며 종과 자유인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랑은 15절에서 평강으로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평강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 평강의 내용은 우리를 사랑하사 한 몸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이 안에는 나뉨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가 없습니다. 율법 아래서 평강은 나뉨 안에서의 평강이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평강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나눔의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질서를 무너뜨리면 하나님의 평강도 무너지고 백성들 사이의 평강도 무너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평강은 장자를 통하여 유대인을 통하여 레위 지파를 통하여 제사장을 통하여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강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과 화평의 언약 평강의 언약을 맺으셨고 우리와 맺으셨습니다. 그 평강의 언약은 만물을 천사들의 지배로부터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두는 것이며 우리를 율법의 지배로부터 그리스도의 지체로 두시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지체의 차이가 없습니다. 한 몸을 이룹니다. 왜냐하면 만유시며 만유 가운데 계시는 주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하여 한 몸을 이뤄야 됩니다. 한 몸을 이루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름을 받았음으로 하나를 이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골로새서에서는 특별히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내용이 강조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의식과 제도 안에서 천사들을 섬기는 것으로 그들을 비난하고 판단하는 거짓된 교훈 때문에 그러합니다. 다시 말해서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지혜와 지식과 대비되기 때문입니다. 이 감사하라는 말씀은 17절 마지막과 짝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감사하라는 말 사이에 위치한 16절과 17절 상반절의 내용이 감사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출되는가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들은 예배적인 내용으로 다시 말해서 한 몸의 공동체로 모임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를 이루는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예배와 한 몸을 이루는 토대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말씀인 그리스도 자신을 알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직무를 설명할 때도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실지로 골로새 교인들은 하늘에 쌓아 둔 소망 즉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날부터 성도에 대한 사랑이 풍성히 넘친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더욱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고 그 안에서 자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특히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강조를 하는 것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며 세상의 초등학문인 율법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으로 그들을 판단하고 미혹하는 자들 때문입니다. 율법을 좇아서는 온전하게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로 자랄 수 없으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감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예배의 내용을 보면 몸의 연합과 섬김에 강조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말합니다. 모든 지혜는 그리스도의 말씀인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라기를 원한 것처럼 그들 스스로 그리스도를 가르침으로 서로 서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권함으로 자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배는 다릅니다. 구약 때는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 아래서 차이와 구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이 이방인을 가르치며 레위지파와 제사장이 일반 백성을 가르치며 남자가 여자를 가르치며 자유인이 종을 가르치며 나이 많은 자가 어린 자를 가르칩니다. 이처럼 정해진 질서 안에서 서로를 섬기며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들은 천사들의 지배 아래서 천사들을 섬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신약의 예배는 그러한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한 몸을 이루며 하나님을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가르치고 권면하며 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들고 나와 교회에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은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혹은 교회 안에서 여자가 목사가 되어도 된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맥을 모르는 경우입니다. 에베소서는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가르치는 은사를 통하여 교회가 장성하게 한 몸으로 자람을 말하기 때문에 가르치는 은사를 말합니다. 디모데전서는 교회를 어떻게 조직하여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로 세워질 것인가를 말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남자가 가르치고 주관하며 여자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렇지만 골로새서는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의 문제나 공적인 직무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과 지체로 부름을 받았고 한 몸으로 섬기고 봉사하며 한 몸의 연합 안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가를 말씀하기 때문에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차 가르칠 뿐만 아니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안에는 3:5-8에서 말하였던 패덕은 들어 올 수 없습니다. 음욕과 탐심과 악의와 훼방과 거짓의 말이 들어 올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몸의 연합 안에서 신령한 노래를 부르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예배에서는 찬양하며 노래 부르는 자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레위 지파가 그 일을 합니다. 그렇지만 이제 한 몸으로 온 회중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17절에서는 이것을 더 일반화 시켜서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늘의 지체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말과 일은 3:5-8에서 말한 패덕의 두 부분 소위 행위와 입술의 패덕과 대비를 이루며 전 모든 삶을 통틀어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삶은 한 몸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 서로를 섬기는 모든 삶에 있어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는 것은 그의 권세로 그 이름에 나타난 주 예수 자신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께서 주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만물의 으뜸이며 우리의 주이며 머리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로 하나를 이루게 하는 평강의 왕이요 지배자입니다. 그의 이름으로 하면 온전한 하나가 가능합니다.

또한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면서 마무리를 짓습니다. 따라서 감사하는 것은 곧 한 몸의 연합입니다. 형제를 섬기고 한 몸의 섬김 가운데서 온전히 하나를 이루는 자 만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그렇지 아니한 자는 어둠에 속하고 천사를 숭배하며 우상을 섬기는 자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고 사랑을 받았고 거룩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아들의 나라로 부르시고 자녀 삼았습니다. 우리를 새 사람으로 지으사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셨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의 몸과 지체로 부름을 받아 흠 없고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주께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고 받으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가졌던 허물들은 이제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차별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만유시며 만유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평강이 여러분을 지배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은 평강을 위하여 주의 한 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말에나 일에다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몸 된 교회를 봉사하고 형제를 한 몸으로 섬김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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