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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자(基督者)의 감사생활 / 살전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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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기독자(基督者)의 감사생활"
본 문 : 데살로니가 전서 5:16-18
설 교 : 고현봉 목사 (부산영락교회)


1. 본문과 제목

1) 본문

오늘의 성경본문은 요절 중의 요절로 교우 여러분이 익숙히 다 잘 아시는 데살로니가 전서 5:16-18입니다. 암송하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다 같이 한 번 암송해 볼까요. 소리내서 같이 시작합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2) 제목

예, 본문 성경 말씀은 잘 아시는데 오늘의 제목은 그렇지 못할 것 같습니다. "기독자의 감사생활"- 기독자라는 말은 흔히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말은 아니고 올바른 하나의 단어인 것입니다. 불교에서 부처의 제자를 불자(佛者〈子〉)라고 하면, 기독의 제자는 기독자가 되는 것이지요. 예수를 한문으로 기독(基督)이라 합니다. 예수교를 기독교라고 하지 않아요?

예수교, 기독교- 같은 말입니다. 또 하나 있지요. 예수교, 기독교 말고- 그리스도교, 그리스도도 예수의 이름입니다. 이처럼 예수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조직신학 기독론에서 “그리스도의 명칭”이란 제목으로 배우게 됩니다만, 우리 일반 신자들도 이런 것은 아는 것이 좋겠기에 말씀 드립니다.

예수는 히브리어 여호수아, 예수아에서 온 말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 1:21). 천사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말씀하신 대로 예수 라는 말은 구원한다는 뜻이고, 그리스도는 헬라어 크리스토스- 기름 부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보통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칭으로 많이 부르게 되는데 한문으로 번역할 때 기독이라 하므로, 예수교․그리스도교․기독교- 세가지 명칭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 밖에도 그리스도의 명칭으로 인자․하나님의 아들․주 들이 있습니다. 주라는 명칭은 여호와와 동격어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는 칭호로서, 한문으로 표시하면 主(임금 주)자가 되는 것을 보아서도 권위의 최고 함축어이며, 승귀(昇貴)된 인격을 표현하여 사실상 하나님과 동의어이며(막 12:36,37) 창조와 통치에 있어서는 창조주인 동시에, 우주와 만유의 소유주 또는 이를 주관 하시며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 되시며, 인류 구원에 있어서는 진실로 구주(救主)가 되시는 것입니다(눅 2:11).


2. 주일과 축도

1) 주일

그리스도의 명칭으로 주라는 용어가 나온 기회에 주일에 대한 의미와 성격을 한 번 분명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반적으로는 오늘을 일요일이라고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은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세상 만민을 구원하시는 구세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주일(主日), 세계적으로 사용하는 영어로 “The Lord"s Day", 주님의 날이지 우리 사람의 날이 아니예요. 1 주일 이레 가운데 엿새 동안은 사람의 날로 우리들이 일도 하고 공부도 하며 모든 활동을 다 하지마는, 이레 중 첫날인 오늘 주일은 주님의 날이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 감사와 경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6 일간을 열심히 일하고 활동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일이 1 주일의 첫날이고 토요일이 제 7일이 되는 것입니다. 최근 몇 해 전부터 새해 달력과 수첩이 나오는 가운데 어떤 것은 월요일을 한 주일의 첫날로 하고 일요일을 맨 마지말날로 배치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것은 사용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더욱이 수첩에 이런 잘못 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완전히 잘못된 순서를 바로잡아야 하겠으며 우리 기독 신자들은, 오늘의 주일을 한 주간의 첫날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받은 바 은혜를 따라, 내일부터 엿새 동안을 힘써 일하고 부지런히 활동하여 하나님께 축복받는 일상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상식적 이야기를 내가 새삼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교회 성도들이 주일에 대한 중요한 뜻을 잘 몰라서 그런지, 본 교회에 등록한 수천 명 신자들 가운데 주일날 교회 예배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성수주일 교회출석”은 수십 년 전부터 본 교회가 강조하는 실천 항목 중의 하나입니다. 주일을 범하고 다른 용무를 위하여 출타하든지, 밖에서나 안에서 육신의 일을 도모하며 세상 사물에 얽매여 주님의 날을 사람의 날로 오인해 버리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이 날은 반드시 예배당에 모여 예배하고 성도들과 교제하며 교회를 봉사하므로써 주의 날을 성수하는 동시에, 주일의 은혜와 축복을 흡족히 받는 데 빠짐 없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안식 지킴으로 새 은혜 입어서 영원히 쉬는 곳에 다 올라 갑시다” (57장 3절).


2) 축도(柷禱)

거룩하고 복된 주님의 날 주님 몸 된 교회에 나와 주 하나님과 구세주 그리스도 및 성령님- 성삼위 존권에 엎드려 경배하는 주일 예배가 그렇게도 귀중하고 은혜로운 시간이며, 기독 성도들에게 주어진 특권과 축복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함에 있어서, 한 가지 특기할 일은 예배순서의 말미를 장식하는 축도라 하겠습니다. 축도는 곧 축복 기도를 의미하는데, 교회마다 예배 순서는 좀 다를 수 있으나 마지막 순서만은 축도로 통일 되어 있습니다.

이 축도 순서는 기독 교회의 예배에만 있을 뿐이고 기타 다른 종교 의식에서는 찾아 볼수가 없는 독특한 순서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축도 내용의 첫 구절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라는 말로 거의 통일되어 있습니다. 이를 쉽게 간추리면 “예수님의 은혜”라는 말인데 그리스도의 다양한 명칭을 네 나라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순수한 한국말이고, “주(主)는 한문자로 중국말이며, ”예수“는 히브리어, 그리고 ”그리스도“는 헬라어입니다. 이 4 개국의 말은 전 세계 언어를 대춘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축도가 왜 기독교 예배에만 있고 다른 종교에는 없을까요? 찬송가 36, 37장의 가사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주 예수 이름 높이어 다 찬양하여라. 금면류관을 드려서 만유의 주 찬양”. 그렇습니다.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가장 귀하고 높은 이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므로 그 이름은 높이 찬양을 받으셔야 하며, 금면류관을 쓰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어(계 19:16) 그의 백성들을 의롭게 통치하시며 주 믿는 성도들을 구원하시고 은혜와 진리로 축복하실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만복의 근원 되시고 모든 복을 내려 주시는 주님이시므로 그 이름을 힘입어 기독교 예배의 마지막 순서로 축도를 할 수가 있으나, 다른 종교는 이런 축복을 내려 주실만한 아무 명분이 없으므로 축도의 순서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감사의 개념 차이

1)일반 불신자의 감사

이제 기독자란 말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기독은 예수 그리스도란 말이므로 기독자는 예수 믿는 사람 또는 그리스도인이란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기독자의 감사생활”은 곧 예수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감사생활이란 말입니다. 감사란 말은 같으나 그 실제 개념에 있어서는 일반 세상 불신자들의 감사와 우리 기독자의 감사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일반 불신자들의 감사는 감사할만한 어떤 이유와 조건이 있게 마련입니다. 아무런 이유와 조건이 없다면 감사할 일도 있을 수 없고 감사해야 할만한 원인이 생기므로, 결과적으로 감사하는 행동이 나타나게 되는 매우 합리적인 것이 일반 세상 사람들의 감사 개념인 것입니다.


2)기독교인의 감사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무슨 이유나 조건 없이 그저 무조건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떤 감사할만한 일이 있을 때에는 물론 기독교인도 감사하지만 이런 감사는 모두 다 하는 것이고, 무슨 이유나 조건이 없어도 무조건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감사개념이라는 말입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여러분 기억을 하시는지요?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이였지요. 거기에 무슨 감사할만한 이유가 조건이 있나요? 아무 것도 없이 무조건 감사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공동번역에는 “항상 감사하는 믿음으로 사십시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라는 말은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감사하는 자가 될 것이며, 감사하는 자가 되면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될 것이므로, 이 두 가지 성경의 번역은 결국 원문의 뜻을 다 같이 잘 표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찌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만 살 수가 있겠습니까? 감사는 커녕 불평과 불만 또는 원망스런 마음이 생길 때도 종종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항상 기뻐하라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고,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으며, 모든 일에 감사 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독교가 일반 다른 종교와 같지 않은 것처럼, 우리 기독교인의 실천생활 역시 다른 종교인들이나 불신자들과 같지 않고 독특한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이치를 따지면 맞지 않고 상식으로나 과학적으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교훈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4. 기독교의 본질

1)합리적이 아닌 종교

그렇습니다. 기독교 자체, 성경 말씀 자체가 과학적이 못되고 합리적이 아닌 기사와 이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가 이북 평양에서 사범학교에 다닐 때 논리학을 배운 기억이 납니다. 논리학의 기본이 되는 삼단논법을 보면, (1)첫째 대권제가 “사람은 다 죽는다” (2)둘째 소권제가 “갑(甲)은 사람이다.” (3)셋째로 결론은 “그런고로 갑은 죽는다.” 이것이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올바른 논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람은 다 죽고 다시 살지 못한다는 것이 상식이고 과학이지만, 기독교는 이 법칙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죽은 자가 다시 사는 부활과 생명의 종교이기 때문에, 우리 기독 신자들은 예수를 구주로 믿고 그의 부활을 믿으며 따라서 우리도 마침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믿는 사람들이며, 이것이 진정한 기독자이고 그들의 신앙 교리인 것입니다.


2)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

신약성경의 편집과 거의 같은 시대에 교회 통일의 요소가 된 것이 사도신경이었는데, 주후 150-175년 사이에 이런 신조가 로마교회에 있었던 것으로 교회사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기록된 내용이 곧 주님 당시의 12제자들(사도)이 믿고 고백하였는 신앙의 조목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본래의 명칭은 사도신조(使徒信條)인데, 조목 조목의 신앙 내용을 문서로 작성하여 하나의 경문(經文)이 된고로 사도신경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수십 년간 주일 예배 시간에 낮에는 사도신경을 밤에는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는데, 사도신경 가운데 사도들이 믿고 고백한 신앙의 조목이 얼마나 되는지 잘 알고 외우시기를 바랍니다.

대지 일곱 가지와 소지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대지는 오른 손가락으로 소지는 왼 손가락으로 꼽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양 손가락을 잘 바라 보십시오. 먼저 오른 손으로 대지를 꼽기 시작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오른 손가락 하나를 꼽음),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며(두 번 꼽음), 이제부터는 왼 손으로,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왼 손가락 하나 꼽음),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두 번 꼽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세 번 꼽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네 번 꼽음), 장사 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시며(다섯번 꼽음),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여섯 번 꼽음),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일곱 번 꼽음), 이제는 다시 오른 손으로- 성령을 믿사오며(세 번 꼽음),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네 번 꼽음),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다섯 번 꼽음), 몸이 다시 사는 것과(여섯 번 꼽음),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일곱 번 꼽음). (이렇게 일곱 번씩 꼽은 양 손을 들어 보이면서) 이렇게 양 손가락을 일곱 번 꼽은 대로 사도들이 믿었던 신앙의 조목이 일곱 대지와 예수에 대한 일곱 소지가 되는 것을 확인하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조금 전에 제가 말한 것을 복습하는 뜻으로 물어 봅니다. 이 사도신경은 언제 누가 믿었던 신앙 조목 즉 신조라고요? 예, 2,000년 전 예수님의 12사도들이 믿었던 신앙 조목 곧 신조입니다. 지금은 누가 그대로 믿고 이 사도신경을 외우지요? 예 우리 기독자들이 그렇게 믿고 외우며 고백합니다.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2천 년전 12제자들이 믿었던 그대로, 글자 한 자 안 틀리고 그대로 암송하며 그대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다르고 변하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이렇게 변치 않고 영원한 진리의 종교가 기독교 밖에 어디 또 있겠습니까? 우리는 참으로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할렐루야!


3)기적을 나타내는 종교

기독교 신앙 교리의 핵심이 되는 위 사도신경의 내용을 보면 잘 알수 있는 대로,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어서 우리의 이성(理性)으로 이해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고, 그저 믿음으로써만 성립되는 기사와 이적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그의 창조 사역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사람이 어떻게 잉태되며 동정녀가 어떻게 아이를 낳습니까? 죽었던 예수와 그를 믿는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산단 말이며 예수님의 재림을 어떻게 압니까? 그저 믿을 수 밖에 없는 기사와 이적을 나타내는 종교인 것입니다. 그저 믿고 순종하며 실행할 것뿐 합리적으로 이것 저것 따지거나 무슨 조건이나 이유가 없는 것이 기독자의 신앙 원리이며, 이 원리를 감사에 적용할 때 기독자의 감사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5. 오늘의 성경교훈

1)금년의 한국 상황

금년 우리 한국은 태풍 루사의 엄청난 파괴력으로 전쟁을 방불케 하는 큰 피해로 인하여, 혈육과 가옥과 권답을 잃고 하늘을 원망하며 망연 자실하고 있는 동포들 앞에서, 감사는 무슨 감사냐고 생각하는 것은 일반 불신자들의 사고와 감사의 방식이고, 우리 기독자의 감사생활은 이런 역경과 천변 지재 가운데서도, 고난을 통해서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 모든 일이 합동하여 유익하게 하시는 오묘한 신의 섭리를 기억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감사생활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세계 월드컵에서 획득한 4강의 승리, 37억 아시아인의 한마당 잔치였던 부산 아시아게임에서 우리가 목표하고 기대했던 대로 월등한 성적으로서의 종합 2위확보, 2만여명의 합창단원들이 불렀던 아태 지역 부산 합창 올림픽의 음악 멜로디는, 태풍 루사가 할퀴고 간 상처를 싸매주고 쓰다듬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위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올해 우리 나라 쌀 생산량이 3,422 만섬, 평년의 3,658 만섬보다 6.5% 감량선에 머물고 있다니 예상보다는 참으로 다행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직 150 만섬이 넘는 묵은 쌀이 창고에 쌓여있어, 관리비만도 엄청나서 가축의 사료로 쓰려다가 40 만톤을 굶주린 북한 동포들에게 보내기로 했다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할렐루야!
최근 북한의 핵 개발 문제로 인하여 동북아시아의 안보문제가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견해도 있지만, 미국과 일본 중국 그리고 우리 한국과의 공동 협상을 통하여 북한이 개방되고, 통일이 앞당겨지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여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2) 세 가지의 엽합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세 가지- 희락․기도․감사는 각각 다른 내용이면서, 실제로는 서로 다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항상 언제나 늘 기뻐하고, 쉴 새 없이 계속 기도하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입니다. 그 반대로 언제나 걱정 근심에 쌓여 기도생활을 게을리할 때에는 감사할 일은 전혀 없고, 불평 불만의 결과가 될 것 뿐이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상반된 것 가운데서 양자 택일하여 어느 편을 취함이 현명한 처사인가를 옮게 판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범사 감사

범사에 감사하라고 오늘의 본문 성경은 교훈하고 있습니다. 범사(凡事)란 말은 모든 일이라는 뜻입니다. 범백사(凡百事)란 말이 더 구체적 표현이 되겠습니다. 하나에서부터 10가지, 100가지 다- 그리고 만이면 만 가지, 만사(萬事)하는 말과도 같습니다. 영어 성경은 더 분명해요. “in every thing give ( )." 어느 것이나 다 모든 것, 사사 건건(事事 件件)- 모든 일 모든 사건 모두 다 포함되지 않는 것 하나도 없이 전부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의 뜻은 영어로 “give ( )."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감사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 등 모든 환경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욥의 경우를 보면 이 두가지가 잘 나타납니다. 그는 본래 순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로 하나님의 곧 축복을 받아 자녀가 7남 3녀, 양이 7천, 약대가 3천, 소가 500겨리(1,000), 암나귀가 500, 남녀 종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10남매가 맏형의 집에서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실 때, 한 종이 와서 주인 욥에게 보고하기를,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또 한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기를,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보고하기를,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자녀들 위에 무너져 그들이 다 죽었나이다 하였습니다.

이상 네 가지 사건이 생겼으니 이것은 한 가지 한 가지 사건이 생겨 그 많던 자녀들과 재산을 졸지에 잃고 거지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는말이,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고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였으니, 이는 한 가지 한 가지 당하는 모든 일 즉 범사에 감사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2장에 와서 보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악창이 나서 죽을 지경이라,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는 처참한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때 하나 밖에 없는 그의 아내가 와서 그 곤경을 보고 하는 말이, “당신 그 꼴이 되어 뭘 더 살겠다고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겠단 말이요. 그만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 버리세요.” 이것은 하나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는 그가 당한 가련한 형편과 상황 또는 환경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런 가운데서도 불평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욥이 하는 말이, “당신 어찌 그렇게 어리석은 여자 같은 말을 하느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 하며 그 입술로 죄를 범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 하나 당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나 그 당한 환경에 있어서 두 가지 면에서 모두 감사하므로,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의 교훈을 완전히 지키고 승리한 모범적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6. 기독자의 감사생활 (결론)

오늘의 짧은 본문 중에서 결론적으로 고찰 할 가장 중요한 부분은 18절 하반절입니다. 처음에 여러분 암송 하 실때 16, 17절과 18절 상반절까지는 모두 다 잘 외우셨는데, 그 하반절에 가서는 좀 머뭇거리는 듯 하였습니다. 18절 하반절을 잘 기억하고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 선택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기를 통하아ㅕ 우리를 구속하셨지요. 천하보다 귀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그 대가를 요구하신다면 아무도 그것을 감당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우리를 향아여 바라며 요구하시는 뜻이, 오늘 본문의 세가지 내용- 항상 희락․불식 기도․범사 감사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8절 하반절은 이처럼 16․17․18 상반 세 가지와 다 연결되어 있으면서, 특별히 18절 상반의 범사 감사에 직결되고 있다는 것이 성경 학자들의 지배적인 표준 구석입니다. 그렇다면 범사에 감사하는 기독자의 감사생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며, 이는 결국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을 성취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끝으로 감사생활을 실천하는 방법에는 사(思)․언(言)․행(行)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막중하고 감사하다고 하는 마음의 생각으로 감사는 시작되고, 이를 말로 표현하게 됩니다. 제가 미국에서 여러 해 살았고 일본에도 여러 차례 여행해 본 대로, 한․미․일 삼국의 감사하다는 말의 인사를 비교해 볼 때 가장 뒤떨어진 나라가 우리 한국입니다. 왜 그렇게 감사하다는 말에 인색한지, 안하는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택시 운전사들 보면 손님이 타도, 돈을 줘도 그리 침묵을 지키고 아무 말이 없단 말이요. 미국과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65세 이상된 국민들에게 우리 정부에서는 경로증을 주어 지하철 무료 승차권을 받게 되는데 저는 그 혜택을 입고 있지요. 매표소에서 무료권을 받으면서 고맙다는 말로 인사하는 노인을 보기가 힘듭니다. 저는 언제나 감사합니다. 또는 고맙습니다란 말의 인사를 빠뜨리지 않고 늘 합니다. 본 교회 경로대상 되시는 여러 교우들 앞으로 승차권을 받을 때 감사 인사을 하시기 바랍니다. 차내에 들어가 젊은 승객들로부터 자리 양보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에 피곤한 학생들, 하루 일에 지친 젊은이들이 앉았던 자리를 내어 주는데, 아무 말 없이 그저 앉는 노인이 거의 전부인 듯한데 그럴 수가 있습니까? 반드시 고맙다는 말 인사를 해야지요. 나는 반드시 “아 이거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 인사를 잊지 않고 실행합니다.

말로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감사의 뜻을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부모님께 감사한다며 음식 한 번, 옷 한 벌을 해 드리지 않으면 감사의 실천이 없는 것입니다. 골 3:17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하였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일 년간 받은 은혜를 감사한 마음과 생각으로 하나님 존전에 감사의 찬송과 기도를 올리며, 응분의 감사 예물을 정성껏 드립시다. 그리고 아무 이유나 조건 없는 기독자의 감사생활을 실천하시며, 어떤 일에나 범사에 감사하며 어떤 환경에서도 욥과 같이 감사 생활을 실천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영광을 돌려보내고 크게 축복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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