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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짓 경건과 참 경건 / 약 1: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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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야고보서1:26-27
제 목 : 거짓 경건과 참 경건
설 교 :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기독교는 실제적인 종교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떠난 기독교는 의미가 없습니다. 삶이 변하지 않는 신앙생활이란 무의미합니다.

우리는 매 주일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특히 한 동안 우리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들어 왔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들은 말씀으로 인해서 여러분의 삶이 변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듣고 있는 말씀으로 삶이 바뀌지 아니하면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야고보 선생은 말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듣기만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배고 젖을 먹인 여인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 축복은 야고보에 의하면 자유케하는 온전한 율법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는 자에게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그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율법을 들여다보고 싶어하고 율법과 함께 지내고 싶어합니다. 깊이 들여다보면서 즐거워합니다. 이런 성도를 향해서 성경은 그 행하는 모든 일에 형통하리라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복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야고보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점검하도록 하십니다. 여기 26절에 '누구든지'라고 말하고 있지요? 우리가 목사든지, 장로든지, 우리가 누구든지 상관없습니다. 오래 믿은 사람이든지, 요즈음 처음 나온 사람이든지, 각자가 자기의 신앙상태를 살피도록 본문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6절과 27절을 통해 대조적인 두 유형의 종교생활을 부각시킵니다. 야고보 선생은 거짓 경건이 어떤 것이고 참 경건이 어떤 것인지 대조시킵니다. 두 형태의 신앙생활을 대조시켜 거짓 신앙이냐 참 신앙이냐를 들어냅니다.

먼저 거짓 경건을 살펴봅시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거짓 경건의 첫 특징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스스로 신앙이 좋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경건하다'는 것은 예배형식이나 종교적인 의식준수, 의무수행에 세세한 주의를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항목을 살펴보면 상당히 그럴듯해 보입니다.

매주일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라든지 주일헌금을 드리는 것이나 끼니마다 기도를 드리는 것이나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자기 평가는 근거가 있습니다. 교회 왔을 때 우리 옷차림을 본다든지 예배를 드릴 때 우리 모습을 보면 경건해 보입니다. 공적 예배에 사용하는 말씨를 가지고 보면 경건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런데서 경건의 실체를 파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당 안에서 예배 드리는 우리의 언행이나 모습을 가지고 신앙의 참과 거짓을 구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목적을 가지고 드리는 헌금의 액수나 행사에 참여하는 열심을 가지고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를 구별하려 하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영역에서 경건의 실체를 판단하는 대신에 세속적인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교회당 안에서의 처신이 아니라 거리와 시장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가지고 판정하려고 합니다. 특별한 종교의식에서가 아니라 일상적인 삶을 가지고 한 사람이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려합니다.

여기 거짓 경건이 폭로되는 구체적인 자리가 일상적인 언어생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경건의 진위를 판정짓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거짓 경건의 정체를 기도 드리는 태도나 말씨를 보아서는 매우 가려내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야고보 선생을 통해서 우리를 예배당 밖으로 이끌어 냅니다. 모든 종교의식과 계율을 떠나서 일상적인, 너무나 일상적인 삶의 한복판으로 우리를 데리고 나갑니다. 거기서 비로소 한 사람의 신앙여부를 판정지을 장소로 선택합니다. 거짓 경건의 정체는 거기서 비로소 드러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생활이 우리의 신앙을 저울질합니다. 헛된 경건인지 가치있는 경건인지, 모조품 신앙인지 순정품 신앙인지 말하는 것을 보면 드러납니다. 스스로 신앙인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자기의 혀를 제어하지 않는 것은 거짓 경건의 표라고 말합니다.

거짓 경건과 참 경건을 가름하는 시금석으로 혀를 재갈 먹이는 것으로 삼습니다. 말하자면 통제없이 마음대로 말이 튀어나오고 있다면 그 사람의 경건은 거짓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도무지 규제받지 않고 무슨 말이든지 그 입에서 튀어나오는 사람의 경건은 거짓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혀를 제어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인지를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칼빈 선생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일치하게 믿는 바로는 남을 비방하는 경우를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추어내어 비방함으로써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 듯 처신합니다. 고삐 풀린 짐승이 날뛰듯이 남을 함부로 그 혀로 비방하는 자는 거짓 경건의 표상입니다.

교회당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그것이 안방이나 길거리나 부엌이든지 우리의 혀가 제 마음대로 움직이면 그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런 자는 스스로를 속이는 삶을 살고 있다고 본문은 폭로해줍니다. 자기 마음을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의 비방만이 아니라 자기 자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십시오. 친구들과 대화할 때 녹음을 한번 해보십시오. 그리고 들어보십시오. 일상대화를 녹음을 해놓고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이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얼마나 빠른지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빠르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경건생활을 하는 증거입니다. 더 이상 자기를 속이는 신앙생활을 하지 맙시다. 그런 신앙 생활은 헛것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왜 드리고 왜 신앙생활을 합니까? 왜 종교적인 규칙을 지키고 준수합니까? 왜 세이레 특별새벽기도회는 모입니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정한 시간에 모여서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나아가서 기독교인의 삶을 사는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습니다. 자기는 신앙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혀를 재갈먹이지 않는 그런 신앙생활로는 하나님을 결코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탄식을 들어보십시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예배시에 부르는 찬송이나 기도는 다 존경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래서 실생활의 언어는 고삐풀린 말처럼 함부로 날뛰고 있습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나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찬양, 우리의 기도는 진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행동은 일상적인 삶에서 계속 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이 부모로서 자식에게 말할 때도 같은 경건을 유지해야 합니다.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이야기할 때도 해당됩니다. 상사로서 하급자에게, 어른으로서 아이에게, 가진 자로서 갖지 못한 자에게 말할 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혀를" 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남의 혀를 재갈먹이는 것은 크게 힘들지 않습니다. 가장이 무슨 대단한 자리입니까? 누구나 장가가서 가정을 이루면 가장이 됩니다. 하지만 가장들 가운데는 대단한 분들이 많습니다. 자기 식구들에게 "입 닥쳐"라고 너무도 쉽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통제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자기의 혀입니다. 아래 사람의 혀는 우선 통제할 수 있어 보입니다. 남의 혀는 재갈먹일 수 있는데 문제는 자기 혀에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자기 혀를 재갈먹이는데 실패하면 그 경건은 헛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거짓 경건의 정체를 먼저 폭로하고 나서 야고보는 이어서 우리에게 참 경건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이것이니라"(27절).

참된 경건이 결정되는 곳은 어디입니까? 자기 스스로의 마음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보는 곳도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경건이 판정되어지는 곳은 하나님 아버지 앞입니다. 겉으로 경건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떻게 보시느냐가 문제입니다.

경건한 표정은 내용 없이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입니다. 가사가 순수하면 할수록 거기에 여러분의 진심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그만큼 더 가증한 찬송은 없습니다.

성도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볼 때에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라고 했지요? 이런 삶은 오직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만이 살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그 온전하신 분이 나의 아버지일 때 가능합니다.

말에나 일에나 하나님 앞에서 처신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청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거짓 신앙일수록 예배 의식에 신경을 씁니다. 어떤 예배 장소에 가보면 예배 분위기에 지나친 신경을 씁니다.

참 설교의 생명력이 결여될수록 예배 의식으로 한 몫 보려고 합니다. 강대상 장식에서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해 보려고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면 제단도 만들고 큰 성경도 펴놓고 촛불도 밝힙니다. 뒤에 십자가도 크게 세우고 은은한 조명을 합니다. 온갖 종교의 외양적인 것을 가지고 분위기로 오는 사람에게 한 몫 잡으려고 합니다.

예배당 분위기와 예배 순서에서 장중한 연출을 합니다. 분위기가 그럴듯하면 할수록 내용이 뒤따르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배자의 심정이 결여되면 수백 수천만원을 들여서 파이프 오르간이나 전자 오르간을 준비하고, 그럴듯한 목사 가운도 사서 드리고 성가대 가운도 잘 입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예배가 될 수 있다고 본문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신앙이 있어 보입니다. 기도나 찬양을 들어보면 감동적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거기 진정한 소원이 결여되어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문구가 아름다울수록, 음성이 간절해질수록 하나님 앞에 더 가증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간절히' 기도한다고 말하기 전에 간절한지 아닌지를 알고 계신 분입니다. 간절한 목소리를 꾸미기 전에 간절한지 아닌지를 이미 아시는 분입니다.

마음으로 찬송을 부릅시다. 진정으로 기도합시다. 여러분의 진정한 소원이 없는 찬양만큼 하나님께 모독은 없습니다. 중심이 담기지 않은 기도만큼 가증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타오르는 연기가 적어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사는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거의 항상 제사는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분향과 아울러 아우성치는 백성의 원한 소리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분향은 아침 저녁으로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성전 안에는 드려지는 형식적인 기도와 아울러서 성전 밖에서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소리가 하늘로 상달되고 있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예배드리는 것과 가증한 삶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스스로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판단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시고 싶어하십니다. 마치 '네가 나를 섬기고 싶은 진정한 욕구가 있으면 이 예배당에서가 아니라 바깥 세상에 나가서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네 동료 인간을 실제로 섬기는 데서 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을 섬기는 데서 보여다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여기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대표적인 예로써 이들을 돌보도록 말합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고 해서 크리스마스 때에 고아원, 양로원에 찾아 가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남녀 전도회 사업보고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 계층의 사람이 있지만 고아와 과부만큼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불쌍한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변호해 줄, 아무도 돌봐 줄 사람이 없는 그들을 하나님은 불쌍히 여깁니다. 참 경건은 관심의 대상이 목사나 장로, 그럴듯한 믿음의 형제를 대접하느냐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참 경건이 확실히 나타나는 대상은 고아와 과부입니다.

참 경건이 나타나는 것은 어려움에 봉착한 그들을 돌아볼 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정하실만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경건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때는 어려움을 당하여 의지할 데 없는 자들을 돌볼 때입니다.

시편 68편 5절에서는 "거룩한 처소에 계시는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일찍부터 하나님은 자신을 자비하신 자로서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2장에 보면 "너는 고아나 과부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22장 23절에 보면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찌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하나님이 오죽하면 이런 심각한 말씀으로써 우리에게 경고하시겠습니까?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말며 변리를 받지 말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의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그 때 당시 유대인들은 겉옷이 외출복이자 이불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진 것 중에 그것이 가장 값나가는 것이라 저당 잡힐 때 다른 것은 잡힐 것이 없어서 겉옷을 잡히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밤이 되기 전에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거기는 사막지대가 아닙니까?밤낮의 기온의 차가 심합니다. 밤에 추워서 떨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이니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이니라"

인간 세상에서 도울 자 없는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가 닮아야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우리 삶에서 나타내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 삶을 보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자비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만나본 사람들이, 우리와 거래를 해본 사람들이 고개를 흔들면서 "예수쟁이들 지독하더라"라고 한다면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어떨 때 흥분을 하며, 어떨 때 인색하게 되는지 사람들은 다 압니다. 여러분이 사람들을 대할 때 좋으신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하게 되면 사람들이 여러분을 한번 더 쳐다보게 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손해를 보려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손해를 보면 보상이 안되는데 손해를 보려하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과 저에게 이 세상이 전부입니까? 우리에게 이 세상은 준비과정입니다. 우리는 오는 세상을 믿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손해를 봐도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했듯이 예수 믿는 사람은 앞으로 손해를 보고 뒤로 남기는 장사를 해야지 몇 푼 안되는 것으로 빡빡하게 굴어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고 그 분이 자비하신 분이신 것을 사람들이 눈치 채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좀더 자비하게, 여유롭게 대하십시오. 사람들이 의문을 갖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가진 것이 없고 돌봐줄 자가 없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늘 아버지의 성품을 여러분의 삶에서 드러내십시오.

이런 이웃을 돌아보는 실제적인 행위와 함께 참 경건은 거룩에의 추구를 계속하는데서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경건의 한 영역은 대인 관계에서 나타나는 영역이라하면 다른 영역은 자기 자신 안에서 자기의 마음을 어떻게 지키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신앙은 이웃 사랑의 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세상에서 자신을 지킬 의무도 있습니다. 이 두 영역은 항상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만약 동료인생을 향한 실제적이고 동정적인 봉사가 수반되지 않고 세상 풍조에 자신의 마음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결심이 없다면 어떤 예배도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 밖에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정당은 늘 노동자 농민을 앞세웁니다. 그러나 실상인즉 그 지도자는 자기의 이익을 구합니다. 세상에는 가난한 민중을 앞세워서 자신의 배를 불리며 살아가는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웃을 향해서 나타나는 행동에서 보여지는 동시에 우리 심령이 이 세상 풍조에서 지켜WU야합니다. '세속에서 물들지 않는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세상의 사조에 따라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풍조에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라디오를 통해서 T.V를 통해서, 잡지를 통해서, 신문을 통해서, 온갖 눈을 뜨고 거리에 나가면 세상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message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실패하면 다 실패한다는 이야깁니다. 어째든 출세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남을 짓밟더라도 잘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사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영광과 보좌를 버려두시고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자기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하늘 영광을 포기하신 주님의 걸음을 따라서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여러분이 부자가 되면 가난한 사람이 적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난하면 부자가 원수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섬기려고 하면 달라집니다. 여러분이 부자가 되면 섬길 사람이 많아집니다. 여러분이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하나님의 진리대로 살면서 누리는 유익을 여러분은 얻을 수 있습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의 유행을 뒤쫓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속에서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정신, 사조, 풍조에서부터 우리를 격리시킨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자랑에서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바울은 로마서에서 표현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불의한 세상에서 우리를 지킨다는 것은 소극적 방어만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우리의 삶을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삶은 이웃을 섬기기 위한 삶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제물로 드려지는 어린 양처럼, 흠없는 소원으로 가득해질 때 우리가 세상에 물들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의 삶의 특징이 솟아나고 있는 샘물이라면 홍수가 아무리 그 위에 덮치고 있어도 물들지 않습니다. 이 샘물 주위에는 항상 깨끗한 물이 넘쳐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거룩한 욕망이 샘솟게되면 세상의 사조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침체되면 세상의 물이 넘쳐들어오게 됩니다.

말씀 맺습니다. 인생길에는 두 가지 삶 밖에 없습니다. 신앙도 두 가지 유형 밖에 없습니다. 거짓 경건이냐 참 경건이냐, 진실된 신앙이냐 거짓된 신앙이냐입니다. 거짓 경건의 모습에서 하루하루 멀어지십시오. 참 경건의 모습이 여러분의 매일매일의 삶에서 구체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소원만으로 부족합니다.

그 참된 경건을 이루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의 삶에 성취됩니다. 주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죽을지라도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큰소리쳤던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거룩한 소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거룩한 소원을 성취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거룩한 간구가 있어야 합니다. 세이레 특별 기도기간을 그냥 흘려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일 새벽 여러분을 기다리는 하늘 아버지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오셔서 부르짖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소원하는 삶을 살아갈 능력을 간구하십시오. 하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삶은 하늘 능력을 사모하는 자에게 성취됩니다. 간절히 부르짖는 또 한 주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야보고 선생을 통해서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먹이지 아니하고 살아갈 것인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가운데서 돌아보며 자기 마음을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삶을 살 것인지 판정짓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거룩한 소원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소원대로 살 수 있는 거룩한 간구가 계속되는 성도의 삶을 살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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