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앙성숙의 요건 / 마 11:29

  • 잡초 잡초
  • 367
  • 0

첨부 1


제 목 : 신앙성숙의 요건(겸손)
본 문 : 마 11:29
설 교 :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성장과 성숙은 다릅니다. 성장(growth)은 사람의 양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몸이 커가고 지식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장은 우리말로 “자란다”라고 표현합니다. 이에 비해서 성숙(maturation)은 사람의 질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사고의 깊이가 쌓여가고, 마음의 폭이 넓어가고, 인격이 고상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은 우리말로 “무르익는다”라고 표현합니다.

  유대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은 아무도 어른이 되지 않는다. 아이로서 나이를 먹을 따름이다” 아이들이 성장해서 키도 다 크고 배울 것도 다 배워 알아도 성숙하지 못하면 여전히 아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얼굴에 깊이 주름이 패인 아이, 수염을 기른 아이, 지팡이를 짚은 아이들이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성장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성숙해야 합니다. 벼가 다 자라도 알곡이 누렇게 무르익어서 고개를 숙여야 추수를 합니다. 우리 인간도 성장할 뿐 아니라 성숙해야 사람구실을 합니다. 어른다운 어른, 인간다운 인간이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성장과 신앙성숙은 다릅니다. 신앙성장이란 신앙의 외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신앙에 관해 아는 것이 늘어납니다. 교회생활에 이력이 붙습니다. 점점 직분도 높아집니다. 이에 비해서 신앙성숙이란 신앙의 내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신앙인격이 원숙해 집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나게 됩니다.

  신앙이 성장했다고 신앙이 성숙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성장했지만 신앙이 성숙치 못한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너무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교회생활 오래해서 직분은 남보다 높고, 맡은 일은 많은데 그 사람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성장과 또 다른 신앙성숙에 대한 바람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성숙을 위한 특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성숙의 열매를 맺혀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신앙성숙의 요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거스틴은 신앙성숙에 가장 필요한 덕목을 묻는 사람에게 첫째가 겸손이라고 답했습니다. 둘째는 무엇이냐 묻자 둘째도 겸손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면 셋째는 무엇이냐고 묻자 역시 셋째도 겸손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성숙의 우선적인 덕목 즉 요건은 바로 겸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겸손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겸손이란 무엇인가?>

  겸손이란 한 마디로 자기를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특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

  겸손은 비굴함이 아닙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들 밑에서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며 굽신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보신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비굴함은 결코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은 자기학대도 아닙니다. 이상 심리자들 중에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학대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새디즘, 또는 매저키즘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것들 역시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은 자기 가장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천함으로 자기를 가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모습으로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교묘한 위선을 자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자기 가장 역시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은 진정으로 상대를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전북 김제군 금산리에 가면 한국교회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우선 교회 건물이 ‘기억자(ㄱ) 형’ 교회로 유명합니다. 남녀석을 구분하기 위해 예배당을 기억자로 지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어있습니다.

  이 교회는 초창기에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전주에서 선교하던 미국 남장로교 테이트 선교사가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때 그 마을의 유지요, 재력가요, 한학자로 이름을 떨치던 조덕삼씨와 그 집에서 마부로 머슴 생활하던 이자익이라는 사람이 함께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양반과 머슴이 함께 교회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해서 장로를 선출할 때 재미있는 것은 머슴인 이자익은 피택이 됐는데, 양반이던 조덕삼은 떨어졌습니다.

  주인이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또 얼마나 질투심이 생길까요? 조덕삼은 머슴 이자익이 훌륭하다고 높이며 잘 도와서 교회를 섬겼습니다. 다음해 이 조덕삼은 장로로 피택되어 장로가 되었습니다. 조덕삼은 자기 집의 종인 이자익을 선임 장로로 섬기며 교회를 잘섬겼습니다.

  후에 조덕삼은 자기 돈으로 이자익을 신학공부를 시킵니다. 목사가 되도록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후에 이 이자익은 목사가 되고 나아가 우리 교단의 총회장이 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한번도 힘든 총회장을 13회, 33회, 34회 세 번이나 역임하게 됩니다. 한국교회 유래가 없는 것입니다.

  이 가문에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 조덕삼씨 손주가 바로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세형 장로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진심으로 남을 인정해 주고 높여주고, 자신을 바로 깨닫고 낮출 줄 아는 것 이것이 겸손입니다.


<겸손하려면?>

  우리가 겸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바로 알 때 비로소 겸손은 시작됩니다.

  덴마크의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단독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단독자란 하나님 앞에 홀로 선 존재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들은 모두가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체험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느끼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여기서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참다운 겸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창 18:27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기도 현장에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느끼면서 자신을 티끌과 같은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겸손이 바로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겸손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로 깨닫고 난 뒤에 사람들 앞에서의 자신의 모습도 바로 깨닫게 될 때 참된 겸손을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바울은 신앙이 성숙하면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더욱 깊이 느껴갔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질적 차이를 기초로 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날로 성숙되어 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고전 15:9을 보면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자신을 고백했습니다. 자신은 사도인데 하나님과의 질적 차이를 깨닫고 나니 사도 중에 정말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엡 3:8을 보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앙이 성숙하다보니 자신을 차마 사도 반열에서 이야기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믿는 성도들 반열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딤전 1:15을 보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자신을 고백했습니다. 신앙이 성숙하다보니 자신을 차마 성도의 반열에서 이야기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죄인의 반열로 더 내려갑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죄인들 중에서 괴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질적 차이를 뼈저리게 느낄수록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 자신의 모습도 점점 바로 깨닫게 됩니다. “내가 정말 별 것이 아니로구나!” 이런 점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눈으로 보니 다른 사람들이 다 나보다 낫게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참다운 겸손이 꽃을 피우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 그대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단계에 비로소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네델란드 출신의 코리텐 붐이라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나치의 핍박 속에서도 살아남은 감동적인 간증으로 세계적인 영적 부흥을 일으켰던 분입니다. 한 번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저들이 큰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간증이 끝날 때 청중들이 기립하여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 그 때 이 코리는 전혀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기자가 물었습니다. “코리 여사님 기쁘지 않으십니까?” 이 때 코리 여사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귀가 착각하면 쓰겠는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연도에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를 외칠 때 주님이 타셨던 나귀가 자기보고 환호하는 줄 안다면 착각이 아니겠는가? 라는 말입니다. 자기는 단지 주님께서 타신 나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이 누구인 줄 바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착각을 하게 되고 교만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첫 아담의 후손입니다. 우리의 존재 뿌리가 바로 아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아담의 성품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아담의 성품을 대표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 남들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 이런 교만이 아담의 성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태어날 때 주어진 존재로 태어난 것처럼 이 교만 역시 내 안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뿌리로부터 교만의 양분이 올라와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후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 뿌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담의 성품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훈련을 통해서 우리 안에 채워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주님의 겸손을 배워서 우리의 성품 안에 이 겸손을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우리의 모델 삼아서 본 받고 배워가되 특히 주님의 겸손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주님의 겸손 몇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낮은 곳에 마음을 두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주님의 모습은 철저하게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이 낮고 천한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왕이신 분이 종의 형체를 입고 섬기셨습니다. 저 높은 예루살렘 왕궁이나 성전에 계시지 않고 저 낮은 갈릴리로 오셨습니다. 지도자들, 부자들, 권력자들 그들 곁을 버리시고 병자들, 죄인들, 소외된 사람들 곁으로 오셔서 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주님의 철저하게 낮은 곳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겸손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높은 곳에 마음을 둡니다. 그 곁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낮은 곳에 마음을 쓰지 못합니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들처럼 되고 싶어합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무시합니다. 여기서 교만이 싹트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어느 날 한 어린이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웃의 한 주민이 다가와서 이렇게 물었답니다. “수녀님 잘 사는 사람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 때 테레사 수녀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허리를 굽히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겸손은 주님처럼 낮은 곳에 마음을 두고 살 때 실천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낮은 곳을 따뜻한 마음으로 살피고 그곳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낮은 곳에 마음을 두고 사는 것 이것이 겸손입니다.


  2) 멍에를 매라는 것입니다.

  빌 2: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 철저한 순종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순종하는 사람을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아버지께서 죽으라 하셨을 때 시늉만 하신 것이 아니고 정말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멍에가 무엇입니까? 멍에는 짐승들을 길들이고자 할 때 쓰는 도구입니다. 소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도록 하기 위해 씌운 것입니다. 주인이 끄는 데로 가도록 하기 위해 어깨에 씌운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 주님도 멍에를 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멍에를 쓰신 주님 바로 순종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이제 주님께서 쓰신 그 멍에를 우리에게도 함께 쓰자고 말씀하십니다. 그 멍에를 메야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멍에를 메고 사는 것 이것이 겸손입니다.


  3) 섬기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정말 섬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섬기셨고, 병자들을 섬기셨고, 소외된 이들을 섬기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 찾아가셔서 기꺼이 친히 섬겨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한 주님의 겸손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요 13장을 보면 주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드시는 중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요 13:4을 보면 구체적인 주님의 섬김의 행동이 묘사되어있습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오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리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셨습니다. 이 모든 행동은 종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요 13:14-5을 보면 주님께서 이런 일련의 행동을 이렇게 평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씼겼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이 섬기면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충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가 섬기면 그것이 겸손입니다. 선생이 섬기면 그것이 겸손입니다.

  일산의 한 교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6, 700명 모이는 일산서는 제법 큰 교회입니다. 제직회에서 관리집사를 두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관리는 누가할 것인가? 장로님들과 안수집사님들, 특히 은퇴 장로님들이 팀을 짜서 교회 관리에 필요한 여러 업무들을 맡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장로님들이 앞장서서 화장실 청소하고, 권사님들이 예배 전후에 교회 본당 청소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섬기며 사는 것 이것이 겸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고 직분도 많이 맡고... 그러나 거기서 머물면 안됩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이 더욱 성숙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성품 속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새겨져야 하겠습니다. 특히 주님의 겸손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낮은 곳에 마음을 두고, 멍에를 메고 살며, 섬기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