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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자 / 롬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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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자 
본 문 : 롬 7:6
이 름 : 강성찬
 

교육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로서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자는 표어 아래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달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일으키는 율법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율법 아래의 상태와 복음 아래의 상태의 차이점을 결혼하는 비유로써 설명합니다.

결혼 법은 어느 쪽이든지 간데 둘 중의 어느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만 유효하고 그 이상은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한다고 합니다(1절)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수가 유대인들이었으므로 그들은 율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속력이 있습니다. '율법은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데 특별히 결혼법이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의 의무나 율법의 정죄가 죽음 후에까지 계속 되지는 않습니다. 죽음은 죽음의 율법의 끝입니다. 아무리 가혹한 율법이라도 몸은 죽일 수 있을지언정 그 후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결혼법도 그와 같습니다(2절). 여자가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남편에게 매어 있어서 다른 남자에게 갈 수 없습니다. 만일 다른 남자에게 간다면 그녀는 음부가 됩니다(3절). 이같이 우리도 처음에는 율법아래 있었습니다(5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죄의 물결에 휩쓸려 내려가고 있었고 율법은 한낮 불완전한 둑에 지나지 않아 그 물살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물만 더 높이 불어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욕망이 죄를 향해 있었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지배하였습니다. 아내가 결혼 법아래 매여 있는 것처럼 죄와 죽음의 법아래 매여 있었습니다. 이 결혼의 산물은 죽음에 이르는 열매였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잉태된 정욕은 죄를 낳고 죄는 장성하여 사망을 낳았습니다(약 1:15).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함 같이(3절)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는 죽음에 의해서 하나의 계약인 율법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서 자유케 되었습니다(4절). "율법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너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고 합니다(6절).

이렇게 하여 율법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마치 남편이 사라진 것처럼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이제 율법이 죽었습니다. 즉 그 효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4절) 즉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당하신 고난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의 몸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과의 연합에 의해서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죽은 종이 주인의 명예와 상관이 없듯이 율법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그를 의지하는 생활과 그에 대한 의무에 들어가게 됩니다.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죄와 율법에 대하여 죽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에 일치하는 것처럼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서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일치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여 높아지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습니다(4절).

이 연합의 한 가지 목적은 열매를 많이 맺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중대한 목적은 사랑과 은혜와 선한 모든 행실 가운데서 열매를 많이 맺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가졌던 죄와함께 하는 생활이 사망을 위한 열매를 맺었던 것처럼 두 번째로 갖는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생활은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선한 행실은 새로운 성품의 산물입니다. 우리가 어떤 신앙 고백과 주장을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 일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가운데서 행해졌다는 이 사실이 신자의 선한 행실과 위선자와 자기 합리화를 하는 사람의 선한 행실을 구별 짓습니다.

우리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의문은 묵은 것으로 아니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습니다(6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다'는 진술은 율법에서 벗어난 방법에 대한 설명입니다(Murray). 율법은 사람을 얽매는 것이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죽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범죄 하는 영혼은 죽으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율법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우리가 여전히 누군가를 섬겨야 하지만 죄를 섬기는 일이 몹시 고된 것이었던 반면에 지금의 섬김은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가운데 행하는 섬김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일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일은 '새 시대의 지배 원리를 따라' 섬김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은 '의문'(儀文)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의문'이 옛 시대의 지배 원리였던 것과는 반대로 '영'은 새 시대의 지배 원리입니다.

 

  어떤 아파트를 임대해서 산다고 생각해 봅니다.  임대한 아파트의 주인은 엄청나게 비싼 집세를 부과합니다. 지불할 수 없을 때 그는 무서울 정도의 고금리로 돈을 빌려주어 더 심한 빚에 빠져들게 할 뿐 아니라 임대 조건을 지키지 않았다며 벌금을 물립니다. 그러던 중 어떤 사람이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아파트를 인계 받았소. 원한다면 언제까지나 여기서 공짜로 살 수 있어요. 집세는 지불되었소.” 얼마나 좋습니까! 옛 집주인의 가혹한 수중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려서 문을 열었더니, 거기에 옛날 주인이 서 있습니다. 집세를 받으러 왔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자신 있게 말하면 됩니다. “그 문제는 새 주인과 말씀하시죠.” 만약 그가 온갖 협박과 논쟁과 법률적 서류로 보이는 문서를 흔들지라도 단순히 이 말만 해주면 됩니다. “그 문제는 새 주인과 말씀하시죠.” 그는 단지  으르고 위협하고 속여서 새 집주인이 모든 것을 실제로 처리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였으면 하고 바랄 따름입니다. 그러한 그를 새 주인, 예수님께 보내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실 때,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분에게 복종케 하실 때 우리는 영적으로 무적의 상태가 됩니다. (새롭게 된 마음-예화뱅크-섬기는 삶은 이처럼 아름답다-찰스 R. 스윈돌)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일을 감당하되 새 시대의 지배 원리에 따라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가 됩시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일은 성령 안에서 섬김입니다.




  새 시대의 지배 원리는 '성령'에 의해 주도됩니다. 성령 안에서 섬길 때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

한 장로님이 한 때 자신의 부끄러웠던 불신앙과 허물들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자신과 같은 상태에 있는 성도들에게 소망을 갖게 했다는 간증이 있습니다. 집사 때, 교회가 건축을 앞두고 부흥회를 열었답니다. 집회 마지막 날에는 틀림없이 건축헌금을 작정할 것인데 그 날만 빠질 수도 없고 처음부터 나가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답니다. 교역자들과 성도들이 전화를 하거나 가게까지 찾아와서 왜 부흥회에 나오지 않느냐고 할 것 같아서 아주 기도원으로 들어가 버렸답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답니다. 답답한 심정으로 기도를 시작했답니다. "하나님, 헌금을 얼마나 하면 됩니까? 1백만 원 하면 되겠습니까?"하고 어려운 결심을 해보았답니다. 20여 년 전이니까 상당히 큰 금액이었답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성령의 감동이 왔답니다. "그러면 하나님, 5백만 원입니까... 그러면 1천만 원이요..." 했지만 확신이 오지 않았답니다. 고민하고 또 기도하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전 재산을 다 바치기로 결단했답니다. 주택과 점포를 포함하면 3천만 원 가량 되었답니다. 결혼 할 때 아무 것도 없이 시작해서 모았던 것을 전부 드리기로 마음을 정하고 돌아와서 아내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답니다. 아내는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하고 깜짝 놀랐지만 집사님의 결심을 눈치 채고는 "당신 생각대로 하세요" 하고 승낙했답니다. 그 날은 부흥회 마지막 날이었답니다. 교회로 향하는 발걸음은 하늘을 나는 것 같았고 그 날 밤 헌금을 작정하고는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답니다.

그 후로 복을 받아서 사업을 잘하다가 한 번은 건축 사업에 동업을 했는데 몽땅 망하고 빚보증까지 짊어졌답니다. 부엌도 없는 사글세 단칸방에 짐을 쌓아두고 살면서 몸까지 병들어 눈물 골짜기에 주저앉아 로뎀 나무 밑의 엘리야가 되었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집사님을 비록 연단을 하시지만 그렇게 망하도록 버려두지 않았답니다. 몸도 사업도 기적적으로 회복시켜 주셨답니다. 전도주일에 1026명을 교회로 초청했답니다. 이런 일이 알려지면서 간증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국내외로 2천5백 여 교회에서 집회를 했답니다.

이 장로님을 모시고 전도 집회를 했던 어느 교회에 큰 도전과 확신이 되어서 많은 분들이 전도를 위해 2천명 만나기를 다짐했다합니다. 장로님이 권하는 대로 집회 시간마다 감사헌금을 드리기도 했지만 마지막 날에는 전도를 위한 특별헌금을 작정하였다합니다. 집회 시간마다 그러니까 여덟 번이나 감사헌금을 드린 일도 어려운 훈련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은 당황했다합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힘에 겨운 헌금을 작정하신 분들이 많았다합니다. 장로님이 작정 액을 집계해서 발표할 때는 예상 밖의 결과에 감격하게 되었다 합니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였다고 합니다.

전도헌금을 작정한 한 고등학생은 대학에 진학하면 장학금으로 매월 10만원씩 드릴 것이라 하고 또 3십 만원을 작정한 대학생은 겨울에 봉사를 해서 드릴 것이라 하니 그 믿음과 정성이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여자 집사님 한 분은 예배가 끝난 후에 자리를 떠나지 않고 울고 있어 "집사님, 헌금하고 싶어서 그러시지요? 형편대로 하면 되요."하고 위로했다고 합니다. 집회가 끝나고 성도들과 얼굴을 마주칠 때면 함박같이 환한 미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 은혜의 잔치이며 드리는 일 또한 즐겁고 기쁜 일임을 확인하게 했다고 간증합니다.(부흥회 비켜가기)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일을 감당하되 성령 안에서 섬길 때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줄 믿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일은 자원하여 섬김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은 자유의 길로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섬김은 쉽고 재미있고 가치가 있고 보람을 느끼게 되고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섬김의 길에 두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는 억지로 하는 섬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원하여 일하는 섬김입니다. 이를 옛 길과 새 길로 말합니다.

옛 길은 율법에 따른 강제적 요구에 순종하여 억지로 하는 섬김입니다. 섬겨야만 거룩해지고 의로우며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요구가 늘 있습니다. 이런 섬김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업적은 쌓을 수 있을지 몰라도 보람을 느끼지 못합니다.

섬기는  모델이 히브리서 3장의 모세와 예수님입니다.

모세는 비록 노예(slave)는 아니었지만 사환(servant) 곧 일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들로 섬기셨다고 했습니다. 즉 주인의식을 가진 섬기는 자였습니다. 주인의식은 책임감이고 자원하는 마음이고 자유의 길이요 신령한 영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원하는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말씀을 하십니다.

"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 :17-18) 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고 합니다.


  윌리암 스티져 씨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어떤 곳에 아이들의 마음을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이 가득 들어 있는 한 궁전이 있었습니다. 여러 어린이들이 그 궁전에  들어가는 열쇠를 얻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어떤 날 한 소녀가 궁의 문지기에게 "저는 제 머리카락이 금과 같이 빛나도록 잘 빗었고 그리고 세마포를 많이 짰습니다.  들어갈 수 있습니까?""소용없단다. 매일 아침 남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단다."그래서 그 아이는 도와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는 여러 주일 동안에 모았던 값있는 동전들을 한 늙은 거지에게 모두 주었습니다. "자, 이제야 되겠지." 생각하며 소녀는 문지기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문지기는 머리를 흔들면서"다시 노력 하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좀 낙심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한 절름발이 부인의 등에 무거운 보따리를 지고서 고통스럽게 언덕길을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와줘야지 그러면 이번에는 꼭  열쇠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소녀는 절름발이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문지기에게  달려갔을 때 다시 서글픈 표정으로 "다시 한번 더 힘써 보아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아주 낙심 하였습니다. 그래서 천천히 집으로 걸어오면서 열쇠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무 있는 곳을 지나가다가 어디서 가냘픈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와 가보니 어린  강아지가 덫에 걸려있었습니다. "아, 불쌍한 강아지." 그는 덫을 풀려고 애를  썼다. 손에서  피가 나기까지 하였습니다. 개를 덫에서 풀어서 상처를 싸매주고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늙은 문지기가 손에 열쇠를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그 아이는 놀란  표정으로 "아닙니다. 그 열쇠는 내게 합당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열쇠를 얻으려고  강아지를 도와 준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열쇠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얘야, 이 열쇠는 자신을 모두 잊어버리고 봉사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란다." 하면서 그 열쇠를 그에게 주었습니다. (열쇠가 있어야)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함이니라."(막10:44-45)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삶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 드리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자는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압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날까지 보존될 것을 압니다. 그러기 에 삶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한 감사와 찬송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룩함과 함께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중요한 일은 자신을 이해서가 아니고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삶의 동기는 끝없는 사랑과 자비의 긍휼로써,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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