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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러브스토리 / 호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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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제목 :  하나님의 러브스토리 
> 설교자  :  황요한 목사  (평안의교회)
> 본문: 호 1:1-5

200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성경에서는 주님을 목자로, 우리를 양으로 표현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만 양의 해인 올해는 더욱 더 온 성도가 주님의 기르시는 양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공동체가 되어 진정으로 목자 되신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의지하며 주님만을 따라가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오늘부터 호세아서를 중심해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호세아서는 참으로 마음을 뭉클하게하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도 "하나님의 러브스토리" 로 정했습니다. 70년대 같으면 무슨 경박한 제목이냐고 말하겠지만, 21세기를 사는 분들 중엔 그런한 분이 한 분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호세아서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그 끈끈한 사랑을 저와 여러분들이 주일 아침마다 나누기를 원합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께서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를 통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잃었던 사랑을 회복하고 그 사랑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테레사 여사는 진정한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로 가게 한 것은 로마 군인의 위협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으려면 해산의 고통을 해야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아내가 해산을 할 때 남편이 옆에서 지켜봅니다. 우리 남편들은 그거 남사스러워서 어떻게 지켜보냐며 아내가 해산할 조짐이 보이면 친정 어머니에게 맡기고 자기는 직장으로 출근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내가 해산하려고 하면 남편도 함께 산부인과로 출근을 하지요. 그리고 옆에서 지켜 해산의 고통을 같이 나눕니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어요. 해산의 고통을 같이 느끼고 목격한 부부일수록 가정에 대한 애착이 크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한 생명을 얻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소중한 일인지를 실감하는 것이지요. 사랑 중에서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감당해야 할 사랑의 대명사로 해산의 수고를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 평안의교회도 지난 20년동안 해산의 수고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과거의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자면 눈물 없이는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런 해산의 수고들이 추억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있게 하는 교회의 원동력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내일을 힘있고 도전적이며 때로는 모험적인 일을 감당하게 만드는 동기가 되는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사랑하셨습니다. 본래는 통합적으로 이스라엘이라고 해야 되지만, 솔로몬 이후에 솔로몬의 아들은 남왕국 유다의 왕이 되었고 그를 반대했던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북왕국을 창설했습니다. 웃시야, 요담,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유다 왕으로 왕조가 이어 내려오는 가운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때에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주신 말씀이 호세아서의 시대적 배경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여로보암은 북왕국 초대 왕 여로보암 1세와 구별하여 여로보암 2세라고 말하는데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부분에서 가장 강력하고 풍성한 시기였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여로보암 2세는 정치를 잘한 성공한 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라는 충격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그 말은 그 전에는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하나님의 종이었는데, 여로보암 2세가 왕으로서 모든 면에서 잘되고 있다는 바로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했을 때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가정에 아들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꿈에 부풀었고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생기지 않았고 고민하던 그들은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우리가 너무나 바보스럽게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나보다. 우리 집에 젊은 여종 하갈이 있는데 왜 그걸 생각을 못했을까?"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스마엘이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응답인데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방법을 통해서 나오는 건데.."라고 생각하고 좋아했는데 놀랍게도 이스마엘이 13세가 될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제단에 엎드려도, 단을 쌓아도, 번제를 드려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침묵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부부가 싸우고 치고 받는 것이 차라리 낫지요. 말 안하기로 작정을 하면 그건 지옥입니다. 친구끼리 서로 치고 받는 것이 차라리 낫지요. "난 지금부터 쟤하고 말하지 않겠어"하고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참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침묵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면에서 보면 상대방에 대해서 무관심이 아니라 가장 예민하게 관심을 지금 가지고 있는 상황이지요. 관심을 갖지 않으면 침묵이 깨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행위에 대해서 너무나도 분노하시면서 13년 동안 아브라함의 제단의 제사를 침묵으로 일관하셨어요. 그 말은 지금 가장 아브라함의 가까이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면서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지금 제 정신이냐?" 그 말이지요. 13년 만에 응답하시면서 주님의 첫 마디는 놀라운 것입니다.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너 경고 망동하지 말라" 그 얘기입니다. 그제서야 인간의 방법으로 얻은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를 통해서 비로소 입을 여셨습니다. 놀랍게도 호세아에게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얻어서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것입니다.

저는 학생 시절에 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에 주일 성수와 성경 50독 작정을 하고서 중고등학교 시절 5년 동안 성경을 50독 했습니다. 어떤 학교에서의 어려움과 역경을 견디고도 주일을 성수하려고 했고, 주일을 성수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올 첫 주에 주일 성수하시면서 올 52주까지 끝까지 성수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어요. 여러분들은 이미 절반의 승리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은혜가 큰데 사실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저도 학생 시절에 이 본문을 보면서 "참 이해가 안되는 말씀을 하신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해다가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 순결한 아내를 얻고, 순결한 자식을 낳으라고 해도 당연한 일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을 보니까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함이니라"라고 말씀을 하심으로서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조금 알려주셨습니다.

호세아서는 영적인 의미의 해석을 해야 할 성경입니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요하고, 국가적으로 군사력이 막강하더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 그것은 훅~ 불면 날아가는 검불과 같아요. 도울 힘이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했는데 지금 여로보암 2세는 인생을 너무 의지하고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지금 여로보암 2세가 새롭다고 하는 그 성과 그 모든 물질적 풍요는 하나님의 눈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들은 그 풍요와 그들의 인간적인 것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금송아지를 섬기고, 바알 우상을 섬기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그것을 영적으로 의미할 때에 하나님을 신랑으로 생각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사모하며 살아야 할 지조를 가져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신부된 그들이 그 남편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 바알과 금송아지 세상 우상을 남편 삼고 바람을 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백성이 크게 행음함이니라"

호세아에게 말씀합니다. "이 사랑하는 남편, 오직 평생 바라보아야 할 그 남편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향해서 행음하고 있는 저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 그 백성을 아내 삼아서 아들을 낳으라"는 것이지요. 자식은 무엇입니까? 부부의 사랑의 결실 아닙니까? 누가 그런 여자를 아내로 맞고 싶겠습니까? 사귈 때에는 별 짓을 다해도 결혼 대상자는 순결을 원하는 그것이 남자들의 요구 아닙니까? 그래서 결혼 대상 따로, 연애 대상 따로잖아요. 그래서 문란해지는 것 아닙니까? 이상한 구조이지요. 연애할 때는 정말 자유로운 여자를 좋아하지요. 그리고 결혼할 때는 순결하고 정숙한 여자를 좋아합니다.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가치관입니까? 그리고 결혼한 자기 아내는 처녀이기를 원합니다.

성경에서 행음하는 여자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으라고 합니다. 호세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해서 남편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의 행음한 그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해서 고멜이라고 하는 여성을 이스라엘의 대명사로 사용했습니다. 그를 데려가다 아내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나요? 아내로 맞을 수 있습니까?

어떤 남편이 그랬답니다. 결혼하고 첫날 밤, 신혼여행에 가서 "여보, 이제 우리는 결혼해서 부부가 되었으니 이제 당신과 나는 뭐 감출 것이 뭐가 있겠어. 그러니 무슨 얘기든 다 해보시오. 내가 다 들어줄테니까..." "어머. 당신 정말 마음이 넓은 남자네요. 사실은요, 저 결혼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다 얘기해 보라니까 이 아내는 편한 마음으로 다 얘기를 했어요. 얘기를 다 듣더니 "그런 일이 있었어?" 그리고 그 부부는 이혼을 했답니다. 혹 그런 일이 있어도 무덤까지 가셔야지요. 입을 열면 안됩니다. 우리 한국인의 가치관으로는 그것을 알고 평생을 같이 갈 남자가 없어요.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를 보면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서 고멜에게 그 행음한 만신창이가 된 그 여자를 네 아내로 삼으라고 할 때 이것이 쉬운 얘기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주님은 고멜에게 사랑의 콜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스라엘으로 상징된 고멜에게 주님은 사랑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하니 아내로 내가 맞기를 원하니 나의 품으로 돌아오라"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인 줄 믿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사랑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도 커요. 그 사랑을 우리가 갚을 수 있나요? 사람들은 시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닷물을 먹물 삼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한들 바닷물이 모자란다는 것이지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먼저 입은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우가 몇 가지 있습니다. 오늘 1절에서 왜 유다 왕들을 이렇게 소개해놓았을까? 지금 이스라엘 왕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호세아에게 이스라엘의 왕인 여로보암 2세 시대의 말씀인데 왜 남왕국 유대 왕들을 그렇게 소개해놓았을까? 아마 호세아의 중요한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남왕국에 소개되어 있는 왕들은 하나님과 관계가 원만했던 대표적인 왕들입니다. 이 왕들은 때때로 하나님 앞에 잘못을 했을 때에는 눈물로 하나님 앞에 회개했던 그래서 응답을 얻었던 왕이고, 때로는 육신에 질병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세상적인 방법보다는 간절히 기도함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병을 치료했던 체험을 가진 왕들입니다. 왕이라고 하는 지존의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평범한, 그저 눈물로 기도해야 할 자신의 모습으로 그들은 자신들을 분명히 자리매김했어요.

사회적인 지위가 있다고 해서 교회에 와서 그 지위대로 행세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가끔씩 보게 합니다. 대통령도 교회 오면 그저 성도에 불과합니다.
어느 아름다운 교회에 취임식에 가보니까 강단 위에 국회의원이 올라와 앉아계시더라구요. 아마 그 교회 목사님 생각은 그 지역의 유지니까 대우를 한 것 같은데 거기에 참석한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어요. "정신 나간 사람 같으니라고..." 그렇지요. 정신나갔지요? 하나님의 교회의 기준은 세상의 지위에 있지 않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장로로서 정동교회에 매주 예배를 참석할 때 언제나 회중 석에 앉았습니다. 대통령으로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용서받고 하나님의 사랑의 그 은혜로 새 힘을 얻어야 할 성도로서 오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이 이 제단에 올라와서 기도하며, 사회하며, 말씀을 봉독하는 순서가 대통령도 할 수 없는 소중한 직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대강대강하고 올라와요? 준비도 없이 올라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우리는 벌써 알아요. 기도를 들어보면, 사회하는 모습을 보면, 성경을 읽는 것을 보면, 이미 우리는 압니다. "저 사람, 준비하지 않았구나"

여러분, 성경을 더듬지 마세요. 여러분, 성경을 잘 읽기가 어려우면 집에 가서 컴퓨터 워드로 문장별로 쳐가지고 확대해서 A4용지 같은 큰 면에다가 성경 읽을 본문을 따로 적어서 그래서 가지고 나와서 성경 봉독하세요. 또박또박하게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10번이고, 20번이고 집에서 읽고 나오셔야 합니다. 어떻게 읽어야 듣는 성도들에게 은혜가 될까를 고민하며 읽어야 합니다. 모든 순서가 마찬가지예요. 정말 소중한 자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기를 호세아를 통해서 마음을 먹었을 때 이미 유다는 하나님과 관계가 원만해서 하나님의 응답과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치유가 충만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북왕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셨어요. 비로소 호세아에게 말씀할 때에는 이제는 타락할 대로 타락한 그런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종 호세아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희망이 여기에 있어요. 여전히 사랑하시기를 원하는 하나님, 행음함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들을 다시금 당신의 아내로, 신부로 맞이하겠다고 결심한 하나님, 그 하나님의 마음을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고멜을 가서 데려와라. 너의 아내로 삼아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또 다른 통로는 우리가 위기와 곤경에 처해있을 때, 여러분에게 지난 한해 동안의 위기는 언제였습니까? 아니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위기와 곤경은 언제였습니까?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을 뻔 할 때였습니까? 사업이 망해서 부도가 나서 도망쳐야 할 그러한 상황이었을 때입니까? 아니면 부부관계가 심각해서 이혼 직전까지 간 그때였습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자녀나 배우자가 죽어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으로 몸부림칠 때였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런 위기가 있었습니다.

부모님 말씀을 들어보면 저도 한 4번은 죽을 뻔 했어요. 제가 기억하기로 그쯤 됩니다. 젖먹일 때 그 이렇게 선반을 베니아로 만들어놓으시고 그 위에 사람 머리보다 큰 호박을 말린다고 올려놓으셨는데 그 밑에서 어머니가 저를 안고 1년도 못된 저를 젖을 먹이고 있었는데 이게 뭐 지진이 나서 흔들렸는지는 모르지만 그 엄청난 호박 덩어리가 떨어지면서 제 머리를 쳤답니다. 그런데 제가 아직 살아있잖아요?

제가 뽕나무에 올라가서 뽕나무의 뽕을 따려고 낮에 다 일터에 나가시고 없을 때, 아마 유년부로 생각이 되는데 뽕나무에 올라간 기억은 있는데 눈을 떠보니까 집이예요. 그래서 얘기를 들어보니까 거기서 떨어져서 기절해서 하루종일 바닥에 누워있다가 밭의 일 끝나고 들어오시던 동네 분들에 의해서 발견이 되어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는 그런 말씀을 들었어요. 아마 그때도 뇌진탕으로 죽을 뻔 했겠지요.

중학교 2학년 때는 사경회 참석해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입고 큰 결심을 한 그 해에 성도들이 민박으로 그 먼 곳에서 온 성도들을 다 이렇게 보살폈는데 새 손님 왔다고 새 집에 겨울에 연탄불을 때지 않던 방에 연탄을 넣었는데 장로님 아들과 권사님 아들 몇 명이 함께 자다가 다음날 새벽에 모두가 다 죽었어요. 그날 사경회가 아수라장이 되었어요. 목사님 아들, 장로님 아들, 약대교회 그 학생들이 4명이 다 죽어간다고 아주 굉장했어요. 겨우 살아났지만 다음날 우리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또 사경회에 참석했어요.

군에 있을 때 청평 59후송병원 앞길 언덕길에서 비오는 날 트럭 위해서 잔뜩 시멘트를 싣고 그 위에 보급병들이 올라앉아서 벙커 작업을 하러 가던 중에 차가 건물을 들이받았고, 그 건물에 미장원 어머니와 딸이 하던 그 미장원 두 사람이 즉사를 했습니다. 함께 했던 군인들이 공중에 떠올랐다가 떨어졌는데 구멍이란 구멍에서는 다 물이 나오는 거예요. 저만 어깨로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져서 한 일주일 입원해 있다가 나왔고, 다른 분들은 다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4번의 죽음의 길에서 사실은 저도 살아났습니다. 공중에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시간이 1-2초도 안 될텐데 그때 제 생각에 "아, 이제는 죽는구나" 그 생각이 먼저 들더라구요. 그 짧은 시간에... 그리고 짧은 시간에 뭔가를 마무리를 해야 할텐데 무얼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굉장히 아쉽지요. "하나님 앞에 꿈도 많고 할 일도 많은데 이제 죽는구나" 그 1-2초 동안에 엄청난 생각들이 지나갔어요. 결국 방법이 없잖아요. "주님께 맡깁니다" 그리고 저도 기절했는데 59후송병원에서 저는 일주일에 깨어났어요. 죽음의 문턱은 저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도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또 경험할 지도 몰라요.

그런 위기들이 사실은 우리의 삶을 정말 정신차리게 만드는 것이지요. "아, 내가 암만 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구나. 건강이라고 하는 것이 내가 보약을 때마다 챙긴다고 해서 건강한 것도 아니고, 나의 가정을 평안히 아무리 내가 제 때에 시간을 맞춰 들어온다고 해도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 내 모든 삶이라고 하는 것이 나의 수고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구나"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결론을 하나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구나" 그때부터 우리는 겸손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다운 그런 모습이, 그런 냄새가, 그런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전에는 여전히 세상 냄새가 나고, 여전히 인간 냄새가 나는 거예요.

버릴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 행음하고 우상의 길로 가서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 그래서 첫 번째 아들을 낳았더니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해라" 그 말은 "내가 포기했다. 버리겠다" 그 말입니다. 이 땅의 자손들은 내가 포기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사랑을 받을 수 없을 만한 그런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이름으로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우리 주님은 호세아 당신의 종을 통해서 우리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제 앞으로 저와 여러분은 이 놀라운 주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계속 듣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붙잡히셔서 그 주님의 사랑에 우리가 결코 한 눈 팔지 않고 끝까지 주님의 사랑에 주목하며 이 한 해를 시작하는 복된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 주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저희들이지만 주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스라엘을 호세아를 통해 사랑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 주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감사함으로, 감격함으로 주님 앞에 이 사랑을 우리가 체험하기 위해서 전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무쪼록 평안의 공동체가 이 주님의 사랑을 회복해서 가정마다 이웃마다 사랑이 풍성한 한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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