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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 행 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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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사도행전 21:4-14
제 목 :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설 교 : 박근호 목사 (구미영락교회)


'2002 한일 월드컵'이 만들어낸 말 중에 가장 유명한 말은 한국과 스페인의 8강전에서 사용된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구호일 것입니다. 월드컵 이후 정치, 경제, 문화 등등 사회 모든 영역에서 이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꿈 깨'라는 말도 그 못지 않게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꿈 깨'라고 일침을 놓는 것은 유머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모든 꿈이 다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경계적 표현도 되겠습니다.
'이루어져야할 꿈'이 있는가 하면 '이루어져선 안될 꿈'도 있습니다. 모든 꿈이 다 이루어져야할 현실일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꿈 속에는 바람직하지 못한 인간의 허상과 욕망이 배어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이루어진다'는 이 말은 신앙적 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 바람직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걸러짐없이 그냥 사용하기에는 그리 적절한 말은 아닌 것이라 여겨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할 말은 따로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는 말일 것입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우리 다같이 한번 외쳐보십시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드와이트 무디에게 어느날 짓궂은 교인이 찾아와서는 그가 읽는 성경책을 좀 보자고 요구해왔습니다. 무디는 그 사람에게 너무 오래 봐서 이제는 다 헤져버린 자신의 낡은 성경책을 보여줬습니다. 그 성경책은 무디가 읽으면서 줄치고 표시하고 글도 써놓고 해서 여간 지저분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리저리 뒤적거려보던 그 교인이 무디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여기 써놓은 T, P라는 글자가 무슨 뜻인가요?' 그 질문에 무디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T자는 Tried의 약자이고, P자는 Proved의 약자입니다...' Tried는 '시험해 보다. 연습해 보다'는 뜻이고 Proved는 '확인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어가다가 그 말씀이 마음에 와 닿으면 Tried 라고 써놓고 시행을 하고, 또 그 실천으로 인해 성경이 약속한 결과에 이르게 되면 Proved라고 써서 그 말씀이 진리임을 확증했다는 것입니다. 즉 그 글자들은 무디 스스로 생활 속에서 말씀을 실천해 봄으로써 정말 그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입증했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러니 무디의 삶이 어떠했겠는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성경 말씀 하나하나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그것이 그런가 안그런가 확인을 했다니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을까 짐작되는 일화입니다. 내 뜻이나, 내 바람이나, 내 꿈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함으로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과 바람과 꿈을 이루어드렸던 자가 무디였던 것입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꿈은 내가 꾸는 게 아닙니다. 만약 내 마음대로 꿈을 꿀 수 있다면 TV도 필요 없고, 영화관도 필요 없을 겁니다. 진정한 꿈은 내 속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요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게 참 꿈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꾼 꿈도 야곱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꿈이었습니다. 요셉의 꿈도 마찬가지이고 요엘 선지가 '말세에 늙은이들이 꾸게 될 것'이라고 한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꿈이 진짜 꿈입니다.

그러나 어디 그렇습니까? 대부분의 인간의 꿈이라고 하는 게 자기 욕망의 분출이거나 자기 욕구의 변형임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사실 오늘 이 땅의 혼돈과 무질서와 공허는 바로 그러한 변질된 꿈의 추구가 만들어내는 어지러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외치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는 세상은 결코 꿈같은 세상이 아니라 더욱 처절하고 냉엄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 꿈을 이루어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가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을까요?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결코 쉽지 않은 얘기입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 뜻을 앞세우고 내 꿈보다 하나님 꿈을 먼저 꿈꾼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구호가 되어야 합니다. 야고보 장로도 자기 계획을 세우고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골몰하는 인생들을 향해서 '너희가 도리어 주의 뜻이면 우리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것이라고 말하라'고 권면하지 않습니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외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구호를 그 누군들 외치지 못하겠습니까? 문제는 무디처럼 'Tried 하고 Proved 하느냐 하는 겁니다. 실천하고 확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 구체적으로 오늘 여기에 실현되어가는 하나님의 뜻, 그러한 삶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비롯한 우리 믿음의 선진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자기들의 꿈을 이루어간 게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간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믿음의 조상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도 그러한 위대한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으로 이방땅에 생명의 복음을 증거한 충성된 종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아 복음 전파를 위해 세 번씩이나 소아시아 지방으로, 유럽으로 전도 여행을 다닙니다. 그때의 전도여행이란 것이 어떠했겠는지는 우리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날과 같은 여행이 아닌 온갖 위험과 불확실함이 사방에서 압박해 오는 그런 고행의 연속이었습니다.

지난 주간에 제가 휴가를 보내면서 한 사흘 여정으로 안가본 우리 땅을 밟고 왔습니다. 구미를 출발해서 경남 진주로, 통영으로, 거제로, 그리도 다시 진주로 나와 전남 순천, 보성, 벌교, 광주 그리고 전북 전주를 거쳐 구미로 돌아왔습니다. 경북, 경남, 전남, 전북, 충남... 이렇게 5개도를 돌아오니 자동차 주행 메타기가 1000Km를 가리켰습니다. 4Km를 10리로 치는 우리 식으로 환산을 해보면 2500리 길을 다녀온 셈입니다.
만약 그 정도의 길을 2천년 전 바울이 여행했다면 얼마나 걸렸을까요? 그의 세 차례 전도여행은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고후11:23절 이하의 그의 간증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거기서 이렇게 자신이 여행 중에 당한 일들을 열거합니다.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도 하였고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태장으로 세 번, 돌로 한번 맞았고... 또 세 번 배가 파선해서 밤낮을 암흑 속에서 지낸 적도 있었고 여러 번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했고... 거기다 여러 번 자지도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었노라...' 그러나 그런 전도여행을 통해서 복음이 이방인들 사이에 전파되어 비로소 기독교가 세계를 향해 뻗어가는 종교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그러한 이방을 향한 기독교 복음을 공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준비를 합니다. 자기의 이방 사역을 예루살렘 모교회의 사도들로부터 인준받아야 그의 선교적 열매가 공식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들도 만나고 또 여러 교회에서 연보한 것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필요도 있고 해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복음을 위해 그렇게 수고하고 애쓰며 헌신한 바울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그를 미워하고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유대인들의 적대감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왠지 바울의 신상에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 새벽말씀처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유대인들의 손에 고초를 당하셨듯이 그렇게 바울 또한 고난받게 되리라는 것을 감지헸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본문 4절에 보니 "바울의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면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제자들이 바울을 향해 '예루살렘행을 금지하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자, 과연 이런 처지에서 바울은 어떻게 처신할까요?... 가야할까요, 가지 말아야할까요? 가는 게 하나님의 뜻일까요, 가지 않는 게 하나님의 뜻일까요?... 당사자 바울로서는 갈등하고 번민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20:22절에 보면 그는 이미 단단한 결심을 하고 길을 떠나왔었습니다. '보시오, 나는 이제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오. 그러나 성령께서 내게 알려주시기를 각 성에서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시오. 하지만 나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오...' 그런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고 서로 부둥켜안고 울면서 3년 동안 정들었던 에베소를 떠나왔습니다. 그런데 두로에 도착하자 이번엔 이곳의 제자들이 바울의 여정을 가로 막고 나서는 겁니다. 그것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두로에서 이레를 그렇게 시달리며 머문 후에 겨우 저들을 떨치고 가이사랴로 갔더니 이번에는 아가보라는 한 예언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이 저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 하고 또 그 말을 들은 여러 사람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강권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바울은 여기서 하나의 딜렘마를 경험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내 발걸음이 과연 주의 뜻인가, 아니면 나의 고집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예루살렘행을 막고 있습니다. 그것도 성령의 감동으로... 그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은 뭡니까? 자기 고집을 세워 가는 겁니까?

행20:22절에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노라... 그곳에 가면 내게 환난이 있고 고통이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내게 알려주셨다...' 그리고 21:1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그곳에서 결박만이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고 있노라...' 가면 환난이 있고 고통이 있다고 성령께서 자기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그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온통 가지 말라고 난리입니다. 이 상충된 현실 속에서 과연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는가 말입니다.

헷갈리지 않습니까? 같은 성령께서 바울에게도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뜻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일까요 안가는 것일까요? 성령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바울을 지지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면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하는 제자들을 지지하고 있는 것입니까?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이게 참 묘한 국면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결정하시겠습니까?...

구약성경에 보면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쫓을 때 다윗이 역으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씩이나 맞게 됩니다. 그런데 그 타이밍이 얼마나 절묘한지 모릅니다. 정말 얼핏 생각하면 '야, 이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절호의 기회야'라고 쾌재를 부를만 합니다. 그런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다윗은 한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만납니다.
하나님이 사울의 군사들을 잠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부하들은 '이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수 갚을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자기가 애를 쓰거나 손에 피를 묻힐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냥 말 한마디면, 아니 그냥 모른 채 가만히 있기만 해도 팔자가 뒤집힐 순간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정말 기막힌 찬스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해버려도 좋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에게 너무도 좋은 그 기회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해버리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다윗을 남달리 아끼시고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유리한 순간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해버리려는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같은 것과 하나님의 뜻은 다릅니다.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회피하고는 욥바 항구로 도망칩니다. 그런데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가 막힌 타이밍입니다. 요나는 얼른 그 배에 올라 다시스로 내뺍니다. 그럼 그게 하나님의 뜻일까요?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잘 분별해야 합니다. 상황이 절묘하다고 하는 것과 자기가 따라야할 하나님의 뜻과는 전적으로 다른 겁니다.

우리가 한해의 2/3를 살아오면서 이런 어리석음을 저질렀던 적은 없었는지 한번 되돌아보십시다. 하나님의 뜻을 빙자해서 자신을 합리화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요. 결코 지혜롭고 바람직한 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윗같은 성숙한 영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깊은 영성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런 영성을 갖지 않고서는 이 세상을 올바로 분별하며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너무나 복잡 다단하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많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구별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성령이 막으시고 있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단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고난받을 것을 알려주고 계실 뿐입니다. 바울에게도 그것을 알려주셨고, 또 바울을 아끼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이것은 그 길을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고난을 예고하는 것은 그러니 그 길을 가지 말라고 막는 것과는 다른 겁니다.

그럼 왜 성령께서 이렇게 역사하시는 걸까요? 성령의 그러한 역사는 바울과 그의 동료들의 각오와 헌신을 더욱 다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가는 길은 전보다 더한 그의 헌신과 각오 없이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동료들의 기도와 후원없이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들 그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아는 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도 모든 걸 다 가르쳐 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냥 모르는 건 모르는 겁니다. 20:22절에 보면 바울은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21:11절에도 보면 성령께서 그냥 막연하게 '체포당하여 고난 당할 것'만을 암시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다 낱낱이 샅샅이 알아서 이루어드리는 게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밖에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겁니까?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꿈을 당신의 종들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그들의 기도와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가십니다. 그러기에 성령께서는 저들에게 미래에 대한 암시를 통해 저들의 입을 통해 신앙고백이 쏟아지게 만드시는 겁니다.

이 현실 속에서 바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앙고백을 더듬어 보십시다. 20:22절 이하에서 그는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해도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또 21:13절 이하에서는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면서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고 제자들을 독려합니다. 그러자 저들 모두는 다같이 한 목소리로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기도하고 이 일에 대한 정리를 하게 됩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한해의 2/3를 보내고 1/3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 날의 삶의 목표는 무엇이었습니까? 앞으로 남은 날의 삶의 목표는 또 무엇입니까? 내 꿈, 내 소원, 내 뜻을 이루려 살았습니까? 이제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살아가십시다. 내가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드리고자 살면 하나님은 우리의 꿈을 이루어 주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십니다.
꿈은 내가 꿀 수도 이룰 수도 없는 것으로 하나님이 주시고 이루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참 지혜이겠습니까? 내가 내 뜻을 이루어가는 게 지혜로운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내 뜻을 이루어주시도록 하는 게 지혜로운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후자의 삶을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거느리고 있는 병사 중에 알렉산더 대왕과 꼭 같은 이름을 가진 졸병이 있었습니다. 동명이인이지요. 그런데 이 졸병이 아주 문제가 많은 사고뭉치 고문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졸병의 잘못된 행실로 인해 왕의 이름에 수없는 누가 끼쳐지고 욕이 돌아가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졸병이 실수할 때마다 상관들은 기합을 주면서 '알렉산더, 이놈!'하고 매질을 하곤 하니 그 이름으로 인해 왕에게 늘 불명예가 돌아가곤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들은 황제가 어느 날 조용히 막사를 찾아옵니다. 마침 그날도 아니나 다를까 졸병 알렉산더는 술에 만취되어서는 물건을 때려부수고 행패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대왕은 조용한 곳으로 그를 불러내어서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그제서야 정신이 든 병사 알렉산더는 벌벌 떨며 어쩔 줄을 모릅니다. 대왕 알렉산더가 사고뭉치 병사 알렉산더에게 묻습니다. '자네 이름이 분명 알렉산더인가?' '예, 그렇습니다.' '언제부터?' '저의 아버지가 제 어렸을 때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제가 알렉산더가 분명합니다.' '그렇군. 그런데 자네의 그 이름 때문에 내게 누가 돌아오고 내 이름이 욕되게 될 때가 많은가 보더구먼...' 그리고 끝으로 정색을 하고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알렉산더! 이제 내가 네게 명령한다. 네 이름을 바꿔라! 만일 그렇지 않으려거든 네 행실을 바꿔라! 알겠느냐!...'

이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행실을 바꾸든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우리 믿는 사람의 소행 하나하나에 따라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기도 하고 영광이 돌아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남아있는 이 석달 동안만이라도 주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인생들이 되십시다. 그게 바로 내 뜻, 내 꿈을 이루는 지름길입니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에게 2002년도 남은 날들, 아니 남은 여생의 아름다운 표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외침은 '꿈은 이루어진다'에 앞서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꿈도 아름답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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