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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르심을 방해하는 것들(2) / 왕상 19: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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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을 방해하는 것들(2)
왕상 19:19-21
김영주 목사 (기쁨의교회)


많은 사람들이 왜 부르심에 실패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 외에 5가지 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부르심의 문제를 정리해보겠습니다.


1. 값을 치루려 안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셨다는 것 기쁨입니다. 춤추며 감격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 부르심의 길을 가려면 값을 치러야합니다. 저절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최고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덜 중요한 것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버리지 못하면 둘 다 놓칩니다. 우리는 수퍼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가지에 집중하면 나머지 것은 당연히 소홀히 하게 됩니다. 둘 다 집중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있지만 특별한 몇 사람이지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모델로 삼지 마십시오. 부르심의 길을 가는 자가 치러야 할 값은 어떤 것입니까? 세상의 것을 버리는 값을 치러야합니다.

본문 보십시다. 에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는 장면입니다. 19절 보시면 그는 당시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열두 겨리란 말은 열두 쌍이라는 말입니다. 12쌍의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 정도이니까 상당히 부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두 마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 정도인데 열두 쌍의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간다? 굉장한 부자입니다. 적어도 먹고살기에 지장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자기 겉옷을 벗어 던졌습니다. 보통 선지자의 겉옷은 선지자의 소명의 상징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복장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겉옷을 그에게 던졌다는 것은 그 사람을 선지자로 부른 다른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자 밭을 갈던 엘리사는 이 사인을 알아차리고 당장 반응을 보였습니다.

20절 보세요.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여기까지 보면 엘리사는 참 괜찮은 사람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을 더 원했습니다. 그 많은 소를 당장에 버리고 엘리야에게 달려갔습니다. 마지못해 갔다거나, 어쩔 수 없이 간 것 아닙니다. 달려갔습니다. 부르심의 축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귀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믿고 의지하던 것 버려야합니다. 이렇게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할 때 하나님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만 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합니다. 능력도 하나님 주시는 것으로, 먹고사는 것도 하나님 주시는 것으로, 건강도, 생명도 하나님 주시는 날까지 살겠다는 작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엘리사에게는 하나의 모험이었습니다. 부자로 살았는데 다 버렸으니까 이제부터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이 그렇게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아합 왕의 잘못된 통치로 인해 나라 여기 저기에 기근으로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농사도 그렇게 잘되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비가 안 왔기 때문입니다. 열왕기 상하를 읽어보면 사르밧 과부나 수넴 여인의 기사가 나오는 것만 보아도 당시 얼마나 살기 힘들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부자 된다는 것 쉽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런 부자가 부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쉽지 않을 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 답답한 사람입니다. 노후대책도 없이 그냥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믿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인 이상,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는 것 믿어야합니다. 이것도 못 믿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길을 갑니까? 늘 불안한 것입니다. 늘 염려 걱정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버리지 못합니다. 그 종을 불러놓고 책임도 지지 못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따릅니까? 이것은 하나님께도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이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진다는 사실도 못 믿는다면 부르고 싶지도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정도는 믿어야합니다. 이것도 못 믿는다? 그러면 하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급을 믿는 사람은 버리는 것에 대해 인색해하지 않습니다. 버린 것보다 더 많이 채워주시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의 길을 가다보면 많은 값을 치루게 됩니다.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물질을 투자해야 합니다. 고생 할 때도 있습니다. 외로움과 싸우기도 합니다. 아주 불편하고 긴장되는 삶을 살 때도 있습니다. 가족끼리 단란한 시간을 가질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두려워하면 부르심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이런 값을 치를 각오가 된 사람이 부르심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2. 잘못된 우선 순위 때문입니다.

버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우선 순위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버리는 것까지는 잘하는데 그 다음에 넘어지는 것이 우선 순위입니다. 엘리사도 이 부분에서 한번 실수했습니다. 부르심보다 먼저 생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부모입니다. 자식으로서의 도리입니다. 20절 중간을 보십시다.
".....청컨데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여기서 문제는 무엇입니까? '후에'라는 단어입니다.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먼저 부모와 입맞춘 다음에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모와 입맞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간단한 작별인사가 아닙니다. 당시 풍속을 볼 때 대부분의 가정에서 부모와 작별하는 과정은 보통 몇 일씩 걸리는 과정입니다. 단 몇 분 안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엘리사는 부모와 석별의 정을 나누고 오겠으니 몇 일만 말미를 주십시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거절했습니다.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하였느냐?" 하나님의 일이 자신의 일보다 뒤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르심에 실패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통해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잘 보세요. 우리가 속는 것이 있습니다. 엘리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따르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따른다고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따르되 내 일을 먼저 하고 나서 '후에'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이랬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런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제가 따르기는 따르되, 결혼한 후에 하겠습니다! 직장문제 해결하고 따르겠습니다. 돈 좀 벌어놓고 안정되면 따르겠습니다. 자녀들 크고 나면, 학위마치면, 건강 회복되면, 문제가 해결되면 따르겠습니다.....등
대부분 자신의 일, 형편, 생각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중입니다. 이것이 실패의 이유입니다. 사단의 전략 중에서 가장 잘 먹히는 전략이 '나중에'전략입니다. 따르긴 따르되 나중에 여유가 있으면 따르겠다.


3. 은밀하게 따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하면 거기에 목숨을 걸어야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사나 죽으나 하나님만 따르며 살겠다. 작정해야합니다. 배수의 진을 쳐야합니다. 돌아갈 곳이 있으면 사람들은 언제든지 뒤돌아봅니다. 전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헌신할 때는 은밀하게 하는 것보다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21절 보십시오.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더라"

여기 백성에게 주어 먹게 했다는 말은 친구들과 친척들을 말합니다. 엘리사는 선지자의 삶을 살기로 작정하면서 아는 사람들을 전부 초청했습니다. 일종의 송별식이요, 헌신의식을 행했습니다. 소를 잡고 소의 기구들을 불살라버렸습니다. 소고기는 사람들에게 주어 먹게 했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엘리야를 따라 갔습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하나님이 부르실 때 대게는 공개적으로 결별식을 하고 따랐습니다.

마4장보시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셨을 때는 그물을 버려 두고 좇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실 때는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좇았습니다. 은밀히 혼자서 좇은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좇은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로 했으면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믿으십시오. 은밀히 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상황이 어렵고 형편이 안 좋으면 돌아가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과거도 잊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삶이 열리게 될 것을 믿어야합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의 일에 우선을 두어야 합니다. 자녀문제도 맡길 것은 맡겨야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잘 돌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일보다 우선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녀 돌보느라고 모임에 못 온다면 문제 있는 것입니다.


4.남의 길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주신 은사가 다르고, 부르심이 다릅니다. 내게도 내게만 주신 은사가 있고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한참 부르심의 길을 가다보면 나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보입니다. 어떤 때는 나만 가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남의 길이 더 멋있고 좋아 보입니다. 그들은 나처럼 고생하지 않아도 잘되는 것 같고, 나처럼 수고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열 개의 달란트를 주시고 내게는 한 개만 주신 것 같거든요. 그러면 갑자기 내 길이 힘들어 보입니다. 더 어려워 보입니다. 남의 길이 더 멋있어 보입니다. 이 길 포기하고 남들이 가는 길을 가고 싶습니다. 나도 그들처럼 살고 싶습니다. 게다가 혹시 옆에서 아내나 가족들이 한마디 거들면 더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저희가 96년도에 처음 유학을 떠날 때입니다. 짐 싸서 다 보내고, 출국을 몇 일 앞두고 있는데 집사람이 한번은 이런 얘기하더라구요. "여보 우리 그냥 평범하게 살면 안될까?" 이해가 됩니다. 걱정되죠. 나이 30중반을 넘어서서 유학간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 누가 후원해준다는 약속도 없었고, 하나님만 바라봐야 하는 상황이고, 가서 살집도 구해지지 않았지 모든 것이 미지수이거든요. 엄청 부담되는 겁니다. 갔다와서 좋은 목회 자리 보장된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는 인정받고, 그래도 괜찮게 살았는데, 다시 낯선 곳에 가서 영어도 못하는데 적응하기가 쉽지 않게 생겼거든요. 그래,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사실 저도 부담은 많이 되더라구요. 가족들이 전부 저만 바라보고 있는데 가장으로 책임을 져야하고, 또 앞길도 부딪쳐서 개척해가야 하고,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원도에서 개업해서 잘 나가고 있다가 의료선교사의 부름을 받고 병원 정리하고 선교지로 가려고 준비하고 있던 한 선교사의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여보, 우리 평범하게 살면 안될까?" 저와 같은 경험을 했더라구요. 대부분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한 두 번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차피 우리는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평범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 큰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평범하게 살겠습니까? 그건, 이런 사랑을 못 받은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이때 다른 사람들이 바라봐 지더라구요. 남들은 교회에서 유학비용 다 대주고 돌아오면 담임으로 써주겠다는 약속까지 해줬다는데, 남들은 외국에 아는 친척들이 목회하고 있어서 가서 사역할 수 있어서 생활비정도는 해결한다든데.....등등. 하나님이 차별하시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혼자서 다 처리해야 한다는 것도 싫었습니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면 그것들이 더 좋았습니다. 배울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았고, 부딪쳐서 하나 하나 하는 경험하는 것이 더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비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는 여러분만이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만이 개척하고 부딪쳐서 해결할 영역이 있습니다. 어차피 가는 길, 기쁨으로 즐겁게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차별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것이 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5. 세상의 기준, 가치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최고라는 것을 알고 확신하지만 막상 세상에 나가면 사람들은 그렇게 안 봐준단 말입니다. 세상의 기준과 가치로 보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불쌍하고 초라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안 그런데 이런 세상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그들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다보면 갑자기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작년 엔가 EBS 교육방송에서 영어 토플을 가르치던 모 대학 교수님이 교수직 그만두고 외국에 유학을 갔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님이 되겠다고 떠났습니다. 그래서 한때 뉴스에 난 적이 있습니다. 아주 인기 있는 강사요, 대학교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목사가 되겠다고 좋은 자리, 인기 다 버리고 유학 떠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하겠습니다.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정신 나갔다고 할 것입니다. 그 좋은 자리 버리고 무슨 짓이냐 할 것입니다. 남들은 그런 자리 못 들어가서 난리인데 좋은 자리 버리고 떠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같은 논리입니다.
의사가 잘되는 병원 그만두고 선교사로 떠났다?
변호사가 그 좋은 직업 그만두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재벌이 회사 그만두고 신학교 갔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 못합니다.
저의 신학교동기들 중에도 서울대 법대 출신 있었습니다. 기업체 사장 하다가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선배 중에는 서울의대 졸업하고 신학교 온 사람도 있었고, 다른 대학 교수하다가 온 분도 있었습니다. 물론 많지는 않지만 이런 사람들도 가끔 있었습니다.

성경에도 이런 일이 있습니다. 누가는 의사인데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덕망 있는 선생이요, 지도자인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 자리 버리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가만있으면 나중에 왕이 되는데 그 자리 버리고 나왔단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불신자들이 볼 때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종교에 미쳐서 한 인생 잘못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이 볼 때도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검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부자가 되고 장관이 되는 것은 부러워하면서도 이런 일 그만두고 하나님의 일군이 되는 것은 불쌍하게 봅니다. 이런 사람들하고 대화하다보면 자신이 갑자기 초라해 보입니다. 바보 같이 느껴집니다. 그들은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인생을 바라보는 것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대화가 되겠습니까? 이것은 부모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좋은 일 버리고, 고생길 자초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집니다. 그러면 주저됩니다. 갈팡질팡하게 됩니다. 뒤돌아보게 됩니다. 후회하게 됩니다. 회의를 느낍니다. 하나님이 미워집니다. 왜 하필이면 나를 불러서 꼭 그 길을 가기 원하시는가? 다른 사람도 많이 있는데...... 원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불신자들과 교제하면 안됩니다. 불신자들은 전도의 대상이지 교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괜히 이런 사람들하고 만나고 나면 시험 들고, 기죽어서 짜증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고, 이해 받기 원하는 그 자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수준이 같아야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초등학생들이 어떻게 대학생하고 생각하는 수준, 인생을 바라보는 수준이 같겠습니까? 30센티 자로 어떻게 100미터를 잴 수 있습니까? 영적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전 가진 사람은 비전 있는 사람들과 교제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가는 길이 다르고, 보는 것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미 넘치도록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받은 것이 감사해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불신자들처럼 이 땅에서 무엇을 얻어보고, 누려보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해보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보는 것이 다릅니다. 사는 방법이 다릅니다. 이세상의 기준과 가치로 잴 수도 없고, 평가할 수도 없습니다.
--부름 받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의 영광을 알고, 본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있는 어떤 것도 천국의 그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살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세상이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인정해주겠습니까? 그런데 자꾸 세상의 기준으로 자신을 보고 평가하려하니 안 되는 것입니다. 침체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기준과 성경의 기준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면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왔다갔다합니다. 뜨거워졌다 식었다 합니다. 헌신했다 안 했다 합니다. 두 잣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잣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늘 열등감, 비교의식, 후회로 인생을 채우게 됩니다. 세상의 기준을 버리십시오.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바라보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공급해주십니다. 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확실하게 뒤를 봐주십니다. 천국의 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시고 기억해주시는 인생이 진짜 멋진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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