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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자랑하라 / 왕하 20:12-21, 2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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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김은호 목사 (오륜교회)
설교제목 : 하나님을 자랑하라
설교본문 : 열왕기하20:12-21,21:10-11 


우리는 지난 시간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하여 생각을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죽음에 대한 선포를 들었을 때 기도의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나는 왜 39살의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까?  얼마든지 하나님께 항변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었지만 그는 원망하며 분노하기 보다 자신의 낯을 벽으로 향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는 심히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히스기야는 기도를 통하여 죽을 병에서 건짐을 받았고 15년이나 되는 생명을 연장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표로 아하스의 일영표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10도를 물러가게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벽들을 만납니다. 우리가 넘을 수 없는 인간한계의 벽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물질과 질병과 죽음의 벽이있습니다. 그리고 이런것 말고도 인간관계의 벽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도 부부간의 관계에도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벽들이 있습니다. 이런 인간한계의 벽들 앞에서 좌절하지 마십시오. 기도의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러면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 벽을 뛰어넘어 우리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려울 때 괴롭고 답답할 때 흠도 티도 없는 내 가슴 속에 순수하게 고여 있는 눈물을 주님 앞에 드리십시오. 눈물의 기도가 주님의 보좌를 움직입니다. 눈물의 기도는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멈추게 합니다. 눈물의 기도가 눈물을 멈추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매일 주님의 교회 건축과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꿈과 비전을 따라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마십시오. 기도의 여러 유혹들을 물리 치시고 집중력을 가지고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히스기야의 실수

히스기야는 종교 개혁자일 뿐만 아니라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날 때마다 기도의 무릎으로 해결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도로 앗수르의 침략도 물리치고 기도로 죽을 병도 고침받고 생명을 연장받게 되었을 때 바벨론의 왕이 보낸 특사가 히스기야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부로닥 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저에게 보낸지라”(왕하20:12)
당시 세계의 최 강대국은 앗수르였습니다. 그 앗수르라는 나라에 북왕국 이스라엘도 무너졌지 않습니까? 그런데 앗수르에 비하면 바벨론이라는 나라는 이제 막 신흥국가로 성장하고 있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왕이 히스기야에게 특사(사신)를 보낸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히스기야의 병 문안을 위하여 보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유다라는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전략을 탐색하기 위하여 보낸 정탐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그 사실을 모른채 그들에게 유다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궁중의 보물을 보여 주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사자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 군기고와 내탕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에게 보였는데 무릇 왕궁과 그 나라 안에 있는 것을 저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라”(왕하20:13)

히스기야는 보물고와 군기고와 내탕고의 모든 것을 다 사신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보물고는 문자 그대로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군기고는 군수창고를 말하고 내탕고는 왕의 개인 소유물들을 보관하던 창고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여주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왜 히스기야는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이 모든 것들을 보여주었을까요?
우리나라가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렇게 많은 금은과 보물을 가지고 있다.  뻐기고 싶고 자랑하고 싶어서 그 모든 것을 그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보여준 많은 금은과 보물들은 도리어 그들의 욕심을 자극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 안에 더욱 이 나라를 침략하고 정복하여 이 모든 것들을 약탈하여 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히스기야와 같은 실수를 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고 물질의 축복을 주셨을 때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축복의 결과만을 자랑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랑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결과만을 생각하고 그것만을 자랑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보아라! 내가 지금 얼마나 많은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가? 의정부에도 있고 부산에도 있고 용인에 사 놓은 땅은 얼마나 뛰었고....집사님, 예전에는 내가 비실비실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건강하잖아요? 예전에는 차가운 음식만 먹어도 배탈이 나고 소화가 안되었느데 지금은 없어서 못먹을 정도로 건강해 졌잖아요?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하나님을 자랑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결과만을 자랑할 때가 많습니다.
만일 히스기야가 그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하나님을 자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분명히 당신의 왕에게 이렇게 전하십시오. 오늘 우리가 세계 최강 앗수르를 물리친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내가 성전에 올라가 항복 협박편지를 앞에 놓고 기도했더니 그날 밤 하나님께서 하늘의 천사를 동원하사 앗수르의 군사 18만 5천명을 일각에 물리쳐 주셨습니다. 18만 5천명이 한 순간에 시체가 되었는데 우리가 그 시체를 장사 지내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또한 내가 죽을 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내가 낯을 벽으로 향하여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사 나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하스의 일영표가 10도나 뒤로 물러가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사 그것을 확증해 보여 주셨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앗수르를 물리쳤고 나도 죽음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쟁에 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자랑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감히 그들이 하나님이 도우시고 함께 하시는 유다를 침략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나라를 침략했다가는 우리도 앗수르나라처럼 되겠구나’ ‘잘못하다가는 뼈도 못추리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과시하고 뻐기고 자랑하고 싶어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결과만을 자랑했습니다.

미국 오페라계에 힐리니 할버튼이라고 하는 유명한 가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기 아들이 이웃집 아이와 놀면서 주고받는 대화를 집안에서 살짝 엿듣게 되었습니다. 이웃 아이가 자기 아들을 보고 "우리 아버지는 시장을 잘 아신다"하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들은  자기 아들이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을 잘 아셔" 라며 대꾸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아들의 대답을 듣는 순간 그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아는 자기의 아빠를 떳떳하게 자랑하는 아들의 모습이 너무나 자랑스러웠기 때문에 그는 운 것입니다.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운 것입니다. 그래서 힐리니 할버튼은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해 서재로 달려 들어가서 실컷 울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를 자랑하십니까?
얼마만큼 그분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에 감격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자랑하십시오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은 결과

그런데 뒤늦게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 선지자가 이 사실을 알고 왕에게 찾아와 물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먼저 왕에게 왕이여 그들이 어디로부터 온 사신이었습니까?  히스기야가 말합니다. 저 먼나라 바벨론으로부터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내 궁에 있는 것을 다 보았습니다. 아마 이 왕궁에서 보지 않는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17절-18절의 말씀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 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왕하20:17-18)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말씀하셨는데 왕과 왕의 열조가 쌓아 놓았던 왕궁의 모든 것들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여기에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 중의 한 사람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역사적으로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성전은  불에 태워지고 성전의 기구와 왕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아들인 므낫세왕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결과만을 자랑하며 자신을 과시하고자했던 그 결과는 이렇게 엄청난 비극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자식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나라가 망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들을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나의 힘을 자랑하지 말고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자랑하십시오. 몇평 아파트 좋은 집을 자랑하지 말고 나의 반석이 되신 하나님을 자랑하십시오. 물질을 자랑하지 말고 학력과 명예를 자랑하지 말고 나에게 물질 얻을 능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십시오. 나에게 지혜와 명철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난 뒤 예수님만을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분토처럼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갈6:14절을 볼까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바울에게는 자랑할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의 베냐민 지파로서의 가문과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학문과 로마의 시민권등 많은 자랑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 뒤에는 오직 예수님만 자랑했습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했습니다. 왜? 그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모든 죄 짐이 벗어졌고 그 모든 저주가 끊어졌고 그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과 화목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십시오. 예수님을 자랑하십시오. 성령님을 자랑하십시오. 십자가를 자랑하십시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자랑하십시오. 그것은 곧 주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자랑하고 십자가를 자랑하면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결과만을 자랑하면 그 축복이 오래가지 못하고 도리어 있는 것 까지도 빼앗겨 버리는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인생 다하는 날까지 주님만을 자랑하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의 세대를 생각하라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드디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므낫세가 대신하여 왕이됩니다. 그리고 왕하 21장에 보면 므낫세의 여러 행적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12세에 왕 위에 오른 므낫세는 자기 아버지가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짓기 시작하였습니다.(왕하21:3) 바알과 아세라를 다시 섬겼습니다.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하늘의 일월성신을 섬겼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성전 앞 마당에 우상을 세웠습니다. (왕하21:5) 심지어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했습니다.(왕하21:6) 또한 무죄한 사람들을 학살하였습니다. (왕하21:16) 유대의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도 므낫세에 의해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정말 그는 잔혹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왕하21:11절에 보면 그는 “유다 왕 므낫세가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들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케 하였도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 아버지 히스기야는 어떤 왕이었습니까? 우리가 지난 주에 생각한 것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온전히 여호와를 의지한 자였고 왕위에 등극하자마자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 밑에서 가장 가증스럽고 악한 왕이 나온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선한 왕 밑에서 이렇게 악한 왕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 원인이 바로 므낫세의 아버지 히스기야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했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했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자였지만 다음의 세대를 생각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왕하20:19절을 보겠습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의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또 가로되 만일 나의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 하리요”(왕하20:19)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보여 주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 주었음으로 이제 왕궁의 모든 것이 다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왕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 중에서 한 사람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난 다음에 히스기야가 이사야 선지자에게 한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히스기야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히스기야는 이 엄청난 예언을 듣고도 놀라지 않습니다. 아니 나라가 망하고 자식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가게 되리라는 예언을 듣고도 하나도 놀라지 않습니다. 도리어 무덤덤하게 당신이 말씀하신 여호와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의 사는 날 동안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지금 히스기야는 자신의 당대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자기 대에 임하지 않고 자기가 사는 날 동안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 것임으로 어찌 하나님이 선하지 않으시냐?고 말합니다.

히스기야의 결정적 실수는 자신의 사는 날 동안만 생각했지 다음의 세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사는 날 동안 믿음을 지키고 정직하게 살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면 된다는 생각을 하였지 다음 세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간다는 소식을 듣고도 무덤덤하게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이런 모습은 여호수아의 모습과 얼마나 대조 되는지 모릅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다음의 세대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를 잊지 말라!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도 말라! 여호와를 친근히 하라! 여호와를 사랑하라!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네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그런데 히스기야는 다음 세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지 않았습니다. 질병에서 죽을 병에서 나은 후 3년 만에 나은 아들이니 얼마나 그 아들이 귀엽고 사랑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들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너무 귀여운 나머지 그를 훈계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음의 세대를 생각하십니까? 나 혼자 신앙생활 잘 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 세 가지를 물으신다고 합니다. 첫째는, 물질입니다. 내가 너에게 준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다 왔느냐? 두 번째는, 시간입니다. 내가 너에게 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왔느냐? 마지막 세 번째는 지금 네 자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를 물으십니다. 만일 여러분의 후손들 가운데 므낫세처럼 우상 앞에 절을 하는 후손이 나오고 무당이 나오면 되겠습니까? “여호와가 누구이냐?”할까 하는 후손들이 나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음의 세대를 기억하십시오. 믿음의 가문이 이어질 수 있도록 다음의 세대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공부보다 신앙이 먼저입니다. 실력보다 하나님 사랑이 먼저입니다.  그들을 위하여서라면 희생도 감수하셔야 합니다.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말라.

히스기야가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왕궁의 모든 것을 보여는 실수를 범하게 된 것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뽐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교만과 방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 이런 영적인 교만과 방심이 언제 찾아 온지 아세요? 기도의 응답으로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을 때였습니다. 확실하게 15년이라는 생명을 연장 받고 난 다음입니다.  앗수르의 침략도 물리치고 자신의 생명도 15년 연장되고 태평성대가 계속되니까 자신의 삶에 안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위기는 기도의 응답을 받고 난 이후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난 다음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때는 고난의 시기가 아닙니다. 태평성대의 시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언제 가장 많이 실족하고 넘어집니다. 어려울 때가 아닙니다. 인간관계의 아픔을 겪을 때가 아닙니다. 질병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할 때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가 아닙니다. 건강할 때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될 때입니다. 잘 나갈 때입니다. 보세요. 다윗이 언제 넘어졌습니까? 사울에 의해 쫒겨다닐 때입니까? 아닙니다. 나라가 태평성대를 누릴 때입니다. 계속해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라의 지경은 넓여져 가고 백성들이 자기를 존경하고 신뢰할 때 그는 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안일한 가운데 빠져서는 안됩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어찌 보면 나무토막과 같은 인생을 사는 헬렌 켈러를 전 세계에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 사람이 누구입니까? 앤 설리반입니다. 앤 설리반이 헬렌 켈러에게 늘 되풀이해서 해서 했던 말이 뭔지 아세요? “시작하는 것과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 ”입니다. 신앙은 경주입니다.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달리지 않으면 자전거는 넘어지고 맙니다. 안주 하지 마십시오. 끊임없이 도전해야 합니다.

히스기야의 영적인 교만과 방심은 기도의 무릎을 꿇지 않았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누가 교만해지고 싶어서 교만해집니까? 기도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 집니다. 기도는 게을러서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안 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기도의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나라가 망하고 왕궁의 모든 것이 빼앗기고 심지어는 자기의 아들이 포로로 끌려 간다는 소식을 듣고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는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마다  히스기야는 기도의 무릎을 꿇어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고 기도로 승리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태평성대 이후 기도를 잃어버렸습니다. 죽을 병에서 건짐을 받고 난 이후 기도의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특별히 부모된 우리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면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기를 소망하면서도 비전의 사람, 꿈 꾸는 자가 되기를 원하면서도 기도의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특별히 영적인 가장인 아버지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딤전2:8절에 보면 “그러므로 각 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부모는 자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는 기도하는 부모의 무릎에 달려 있습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최고의 축복은 바로 기도입니다.

주신 말씀을 생각하며 나의 힘이 되시고 나의 반석이신 나의 생애 목자이신 그 주님을 찬양하며 나아갑시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34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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