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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족한 은혜 / 신 3: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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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족한 은혜 
본 문 : 신 3:23-9
설교자 :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잘 아시는 것처럼 신명기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고별 설교집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중 첫 번째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뜻밖의 자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단호하게 거절하셨다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기에게 화를 내셨다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기도해도 듣지 않으시고, 이제 그런 기도는 그만 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볼 때 모세는 하나님과 하나처럼 여겨진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그를 통해서 말씀하셨고, 그를 통한 기도만 들으시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자기들과는 다른 거의 신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그런 모세가 하나님께 거절당했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큰 잘못을 범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고 고백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척이나 놀랐을 것입니다. 모세의 솔직하고도 인간적인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왜 이런 고백을 했을까요?

고인이 되신 한경직 목사님께서 1992년에 템플턴 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이 상은 종교계의 노벨상과 같은 상으로 테레사 수녀와 빌리 그레엄 목사와 같은 세계가 존경하는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주는 상입니다. 한 목사님께서 이 상을 받는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수상 소감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이런 죄인을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시고 축복해 주셔서 한국 교회를 위해서 일하게 해 주셨고, 여기 이 영광스런 자리에까지 서게 해 주셨습니다."

모두가 당신의 업적을 기리는 자리입니다.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고 감사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어찌 보면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당신의 치부를 일부러 공개하셨습니다. 결코 당신은 이런 상을 받을 만한 사람이 못되고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사 참배한 목사라고 지탄받아 마땅한 목사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영광스런 상을 받게 해 주셨다고 말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모세도 같은 마음으로 자기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자기는 부족한 사람이고, 실수가 많은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귀하게 들어 쓰셔서 지금 여기까지 하나님을 위해 나름대로 충성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자기는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저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세의 이 자기 고백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특히 하나님의 일꾼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가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모세의 기도

본문 24-5에 모세가 기도한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해하기 쉬운 현대어 성경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강한 손으로 위대한 일을 이 종에게 보여주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토록 엄청난 일들과 놀라운 이적들을 주님과 같이 행할 수 있는 신은 하늘에도 없고 땅에도 없습니다. 이제 비오니, 저도 요단강을 건너가서 그곳의 아름다운 땅 멀리 레바논에 이르기까지 그 아름다운 산지를 보게 해주십시오."

지금 모세는 가슴이 벅차 오르는 감개무량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이 120세, 백발에 흰 수염을 날리며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서 있습니다. 지난 40년 간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던 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있습니다. 이제 저 요단 강만 건너면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감격에 자기도 모르게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문제입니다. 이 기도의 문제를 알려면 민 20장 2-13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갈증을 참지 못하게 되자 모세를 공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내서 저들을 마시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크게 화를 내면서 지팡이로 두 번 반석을 쳐서 물을 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12절에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이 한 번의 실수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이미 들었습니다. 자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가나안 땅 앞에 와 보니 정말 그 땅에 들어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요단 강을 건너가서 가나안  땅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그 땅에 들어가 살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다만 그 땅을 밟아 만이라도 보게 해 달라는 것이고, 죽더라도 그 땅을 한 번 보고 죽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정말 인간적인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알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소원이 너무 간절하기에 하나님께 다시 기도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너무도 인간적인 기도를 드리신 일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그 일 때문에 오셨고 지금이 바로 그 십자가를 지실 때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너무 고통이 크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피해보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실제로 저는 아직도 인간적인 기도를 많이 드리는 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아직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인간적인 소원이 없을 수 없습니다. 때론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배치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탓하시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인간적인 소원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지 아셨습니다. 그 후로 다시 그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모세도 다시는 그 기도를 반복해서 드리지 않았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적인 기도를 드린 뒤에 그 기도에 계속 매달립니다. 집착하고 반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거절하셨다고 원망합니다. 불평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 여부까지 의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간적인 소원을 품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빨리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빨리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기도 중에 하나님의 뜻을 빨리 깨달으려면 욕망을 벗어야 합니다. 약 4:3을 보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에 실패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정욕, 욕망 때문입니다. 이 욕망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게 우리의 영안을 흐려 놓습니다.


하나님의 응답

본문에 보면 모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단 한 마디였습니다.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여기서 그만해도 족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표면적으로는 그런 기도를 이제 그만 하라는 말씀입니다. 내면을 들여다보면 내게 네게 베풀어준 은혜가 족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모세의 마음이 서운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하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 같으면 그렇게 투정을 부렸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그토록 고생하고, 죽도록 충성했는데 그래 다른 것도 아니고 목표로 삼고 백성들을 인도해 온 가나안 땅을 밟아 만이라도 보자는 데 그것 하나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거절하셨을까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표면적인 이유입니다.

모세의 사명이 가나안 땅 진입 전까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후는 여호수아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대상 22장을 보면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의 성전 건축에 대한 준비는 정말 눈물겨운 것이었습니다. 설계를 마쳤습니다. 자기 전 재산을 털어서 건축비용을 마련했습니다. 전문가들을 시켜 최상의 건축 자재들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전을 건축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사명을 아들 솔로몬에게 넘겼습니다. 대상 22:8-8을 보면 서운한 마음에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 즉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다윗은 아쉽지만 자기의 사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깨끗하게 아들 솔로몬에게 바톤을 넘겼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도 아쉽지만 바톤을 여호수아에게 넘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사명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해야 할 일을 잘 알아서 최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해서는 안 될 일을 알아서 하고 싶어도 물러서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때를 알고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를 알고 물러서는 것도 중요합니다.


둘째는 내면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이지 않은 또 다른 숨겨진 이유가 있습니다. 내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모세를 지켜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주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그의 기도는 거의 대부분 교회를 위한 기도요, 선교를 위한 기도요, 주님의 사역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을 위한 기도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후 12장에 보면 바울은 자신을 위한 기도 이야기를 적어 놓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거절 당한 이야기입니다. 무슨 병인지는 정확치 않지만 몸에 병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병 낫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너무도 차가웠습니다. 고후 12:9을 보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병을 고쳐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문제로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바울은 무척 서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명분도 있습니다. 건강해야 더욱 힘있게 주의 사역을 감당할 것 아닙니까? 병으로 고생하면 사역하는데도 지장이 있고 교회에도 큰짐이 되니까 주를 위해서라도 병을 고쳐달라고 떼를 쓸만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깨달았습니다. 고후 12:7을 보면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이 병을 몸에 가시로 두게 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병마저 낫게 하시면 자기가 너무 교만해 져서 하나님 의지하기보다는 자기 능력을 의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시조차도 은혜로 받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아마 모세가 가나안까지 백성들을 인도해서 들였다면 모세는 내가 시작하고 내가 마쳤다고 자기의 공적을 드러내고자 했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모세를 섬기려고 덤벼들었을지 모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정말 큰 시험에 들 가능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은혜가 족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더 받아서 더 누려서 오히려 해가 되는 사람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적당하게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실패도 은혜요, 거절도 은혜요, 그만 쉬는 것도 은혜요, 나아가 이제 죽어 편히 쉬는 것도 은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세의 순종

하나님께서 모세를 위로하시려고 비스가 산 꼭대기로 올라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다만 먼발치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홀로 그 산 위에 올라 한없이 울었을 것입니다. 한 편으로 가나안 땅을 지척에 두고 밟아보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함이 은혜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자기의 사명임을 깨닫고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요단 강을 건너게 할 마지막 준비를 발빠르게 이행했습니다. 마지막 유언 설교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쳤습니다.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우고 지도자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신 34:6을 보면 모세가 요단 동편 모압 땅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골짜기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오늘까지 그 무덤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명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 무덤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간곡하게 부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만일 모세의 무덤이 알려진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뒤에 이 모세의 무덤은 아마도 성지가 됐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지역을 성역화하고 왕을 비롯한 모든 지도자들이 때마다 와서 참배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이 사실을 미리 예측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자기의 존재는 잊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경배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무덤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 은혜가 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세의 순종이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의 마무리입니까? 얼마나 위대한 인생입니까?

하나님께서도 모세의 죽음을 축복하셨습니다. 신 34:7을 보면 모세가 죽을 때 나이가 120이었습니다만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사명을 다 완수할 수 있도록 건강을 주신 것입니다. 노환으로 고생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족한 은혜를 깨달으면 마무리를 잘할 수 있습니다. 자기 사명이 끝난 줄을 알고 미련을 두지 않고 마무리를 잘합니다. 자기의 자취를 감추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들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족한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구원받기에 족한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명자로 충성을 다하기에 족한 은혜를 주십니다. 그 족한 은혜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원망과 불평을 없앨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인생의 마무리를 아름답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찬송 406장 1절을 함께 불러보겠습니다. '내맘이 낙심되며 근심에 눌릴 때 주께서 내게 오사 위로해 주시네 가는 길 캄캄하고 괴로움 많으나 주께서 함께 하며 내 짐을 지시네그 은혜가 내게 족하네 그 은혜가 족하네 이 괴론 세상 나 지날 때 그 은혜가 족하네...' 이 찬송을 기쁨으로 부를 수 있음이 은혜요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 하나님의 족한 은혜를 깨닫게 하소서. 족한 은혜에 감사하며 순종하며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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