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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설적 삶 / 행 26:24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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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행26장 24절- 29절
제목: 역설적 삶
설교: 강목사 (한길교회)


지난주간 우리 교회 수련회로 여수 애양원과 대전 선교부를 다녀왔습니다, 참 여러가지를 보았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계획이나 기대보다도 더 많은 것을 베풀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원래 이 수련회를 계획할 때에는 전라도 지역의 기독교유적들을 한번 답사해보자는 의도로 시작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애양원과 선교부..'.라고 하는 두 곳으로 인도해주셨고, 이틀동안 방문했던 두 곳에서 정말 많은 것을 보았고,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애양원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성경암송관에서 만났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습니다. 일흔 아홉의 인생중에 무려 60년을 그 곳에서 나환자로 사셨다는 한 장로님의 고백과 간증은 참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환자로 살게 된 것이 은혜겠소, 저주겠소?" "우리가 눈이 멀고 손가락이 구부러진 것이 축복이겠소, 망한 거겠소?" 너무 당당한 목소리로 자신들의 나병과 눈이 먼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고 고백하는 그 분들의 그 고백과 웃음은 참 위대한 역설이었습니다.

누구나 저주받았다고 말하는 그 참혹한 나환자의 삶을 축복이요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요, 역설이 아닐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역설은 참 위대한 역설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둘째날 대전선교부에서 만난 앙골라 선교사 정명섭 목사님도 참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분도 느끼셨겠습니다만 저는 마치 불덩어리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뜨겁고 그렇게 불타는 사람을 참 오랜만에 만나보았습니다. 그 분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역설..이었습니다.

1985년도에 외항선 선장으로서 그 당시 일년 연봉이 일억원이었는데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그런 돈방석을 한순간에 내어던지고는 포르투칼 마약촌으로 뛰어들어 3년을 헌신하고 나아가서 아프리카 유일한 공산국가인 앙골라로 들어가서 10년이 넘게 사역하고 있는 분입니다.
생각해보세요. 1985년에 연봉이 일억이면 지금의 십억쯤 되는 돈인데 그런 부를 누리던 사람이 한순간에 다 내어 던지고는 세상에서 가장 열악하고 가난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오직 믿음, 오직 기도...라는 원리 하나만 붙잡고 무일푼으로 학교를 짓고 교회당을 짓고 사역을 해 가고 있으니 그것도 역설 아닙니까?

할 수 있으면 사람들은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고 더 많이 안락하고 더 누리는 곳으로 나아가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그 자리에서 오히려 더 가난하고 더 낮은 곳으로 찾아가면서 세상을 꺼꾸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오히려 기쁨이요 감사라고 말할 수 있으니 이것도 위대한 역설 아닙니까?

한가지만 더 말하면 애양원에 들어와서 평생을 나환자 치료하는데 바쳤던 선교사나 외국인 의사들이 1985년을 전후로 해서 우리나라를 다 떠났답니다.

그런데 그 떠난 이유가 이제 나이많아 늙었으니 은퇴해서 좀 쉬자...라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제 한국은 어느정도 경제성장이 이루어져서 더이상 선교사나 의료진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니 더 열악한 곳, 도움이 진짜로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를 찾아서 결국 아프리카 케냐로 떠났다고 합니다.

게다가 애양원의 유일한 한국인 의사였던 김 모....박사는 정년은퇴 5년을 남기고는 '우리나라가 외국의 도움을 받았으니 나도 남은 삶을 남을 도우는데 바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역시 아프리카 케냐로 떠나서 거기서 정말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역설적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들이 불행이라고 말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저주라고 말하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고 추구하는 것을 오히려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고, 도리어 남들이 싫어서 외면하는 것을 진짜 가치있는 것으로 알고 거기에 삶을 거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인의 삶은 역설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분명히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세상은 우리를 비웃거나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세상에 충실할 수록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서는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도 역설이 있습니까? 세상이 부러워하는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는 역설이 있습니까?

세상이 정말 가치있게 바라고 사모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오히려 세상이 가볍게 여기고 비웃어버리는 것을 아주 소중한 가치로 붙잡고 살아가는 역설이 여러분의 삶에도 있습니까?

반대로 세상이 불행이요 저주라고 말하는 것들을 감사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역설적 고백이 여러분의 삶에도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삶은 역설적 삶입니다. 이런 역설적 요소가 그 삶에 많으면 많을수록 그리스도인의 삶에 충실한 것입니다. 세상과 다른 가치와 세상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또 하나의 역설이 나옵니다. 쇠사슬에 매인 죄수가 화려한 복장과 권세를 가진 임금에게 말하기를 "당신 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9절

이런 역설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화려한 왕관을 쓰고 안락한 왕궁에 거하는 권세자의 삶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쇠사슬에 온 몸이 꽁꽁 묶인 죄수의 몸이 되어서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습니다.
왕궁에 있는 권세자를 볼 때에는 부럽다고 하고 출세했다고 말하지만, 사슬에 묶인 죄수를 보면서는 안됐다고 말하고 불쌍하다고 동정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화려한 왕궁에 앉은 권세자를 향해서 당당히 말하기를 "내가 이 두 손이 결박된 것을 빼고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나와같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아그립바왕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세상에서 나야말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바울의 고백속에 그리스도인의 가치가 있고 행복한 자존심이 있습니다. 남들이 다 불행하다 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다 실패했다..고 말하는 상황 가운데서 가장 성공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9절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이 역설적 삶에 대해 말하기를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나는 속이는 자 같으나 실은 가장 참된 사람입니다'--우리가 전파하는 천국이나 영생 구원 부활 같은 교리가 세상적으로 보면 속이는 것 같고 사람을 미혹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이 믿어지지 않는 교리가, 진리되신 하나님께로 부터 나왔음을 믿기 때문에, 이 믿음이야말로 세상의 그 어떤 과학적 사실보다도 분명한 진리라는 것을 나는 믿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무명한 자 같으나 사실은 가장 유명한 사람입니다'--애양원 나환자 촌에서 나병환자들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던 손양원 목사님이나 그들의 치료를 위해 머나먼 이 땅 한국으로 날아와 평생을 바쳤던 의료선교사들의 이름을 세상은 별로 알아주지 않습니다.
잘 나가던 선장의 길을 접고 아프리카 앙골라로 떠났던 정명섭..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사람들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저도 이번에 처음 이름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과연 무명한 사람들입니까? 과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의 인생으로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기억해주십니다. 세상은 기껏해야 종이에 그 이름을 기록해줄 수 있을 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천국에서 해와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단12장 3절)
오늘 이 땅 구석구석 자기가 선 자리에서 이름없이 빛도 없이, 사람들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묵묵히 하나님앞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복음의 종들의 이름을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무명한 사람들이 하늘에 하나님앞에서는 가장 유명한 이름으로 기억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의 삶을 비웃을 때 오늘의 이 진리를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느날 문득 내가 참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고, 내가 참 가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 오늘의 이 진리를 기억하십시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역설의 진리를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는 자이면서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그 이유를 쇠사슬에 묶인 사도 바울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쇠사슬에 온 몸이 묶인 죄수의 몸으로서 나는 가장 행복한 인생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앞서 13절부터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지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간증은 성경에 세번씩이나 나오는 간증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할 수 있으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의 그 감격과 기쁨을 간증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바울은 과연 이런 역설적 기쁨을 알았을까요?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는 여전히 세상사람들이 바라고 추구하는 돈이나 명예나 권세를 좇는 삶을 살다가 그저 그렇게 죽어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애양원의 그 장로님은 이것을 ' 새 눈'이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어도 눈이 달라지니까 '새 눈'으로 보는 하늘은 '새하늘'이요, '새 눈'으로 보는 땅은 '새 땅' 이더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세상의 가치를 버리고 영원한 가치를 좇는 역설적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만난 이후로 눈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눈이 바뀌니까 이전에 좋던 것들이 이제는 하찮은 것으로 보이게 되고, 이전에 생각지도 못했던 영적인 가치들이 정말 소중한 가치들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감히 좇아가지 못하는 역설적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눈은 지금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을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전혀 새로운 것들을 보고 있습니까?
세상이 가치있다고 말하는 돈이나 명예나 권세 같은 것이 여전히 좋아보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천국과 하나님앞에서 받을 하나님의 칭찬과 안정과 상급이 더 귀하게 여겨지십니까?

그저께 방송 뉴스에서는 두가지 취재기사를 연이어 내 보냈습니다.
하나는 서울 강남 지역 젊은 사람들의 소위 명품 선호 유행 기사였습니다. 거기에는 9400만원짜리 시계와 800만원짜리 구두, 4000만원짜리 핸드백이 날개 돋힌 듯이 팔린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연이어 나온 기사는 평생 모은 270억원의 재산을 KBS 사랑의 리퀘스트에 기부한다는 한 기업인의 이야기였습니다.

누가 잘했고 누가 훌륭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대비되는 두 뉴스를 보면서 생각한 것은 두 종류의 사람들이 가진 눈의 차이입니다.
내 몸을 수백, 수천만원짜리 물건으로 휘감고 소유해야만 삶의 행복과 기쁨을 느끼는 사람과 좀 더 소중한 가치를 위해서 아낌없이 그 돈을 사용할 수 있는데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의 차이 아닙니까?

눈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것을 서로 보는 것이고, 다른 것을 보고 살기 때문에 그 삶의 그런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인생과 온 세상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그 눈이 바뀝니다. 새 눈을 받은 것이고, 새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불행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들 눈에는 행복으로 보이게 되고, 세상 사람들이 가난이라고 말하는 것도 부요함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이고,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자리에서도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은 바뀌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때문에 달라진 세상, 달라진 가치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달라진 눈으로 세상과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이 역설적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참 자랑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이전에는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 사람중에서도 정통 히브리가문에서 태어났고, 어릴때부터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최고의 선생에게서 배웠고, 바리새인에다가 그 당시 기득권의 상징인 로마 시민권을 당당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자랑할 게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의 아그립바왕앞에서 그는 이런 것들을 한마디도 자랑하지 않고 있습니다. 8절과 23절을 읽어봅시다.

처음과 끝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말씀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던 그대로 십자가와 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만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 가운데 최고로 좋은 것을 가지고 자랑을 합니다. 한 선수가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 한 개와 은메달 두개를 땄다고 할 때 이 선수가 은메달 딴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오로지 금메달 하나 딸 때의 그 이야기만 자꾸 반복해서 말하게 되는 겁니다.

바울이 십자가에서 쏟으신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알고 난 후 부터는 이것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만한 것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문을 자랑하고 돈을 자랑하고 자기 능력을 자랑하고 다닐 때 그는 마치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인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속에 담김 사랑만 자랑하고 다닌 것입니다. 자랑할 게 없어서가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자랑하고 다니다보니까 다른 건 이야기할 시간도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자랑할 게 많으면 부끄러운 것도 부끄럽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애양원 할아버지의 나병, 시력상실....손가락 마비에 굴절.....그러나 그로 인해 성경을 암송하게 되었고 보배로운 십자가 사랑을 입으로 말하고 가슴에 담게 되어서 너무 감사하고 자랑스럽다..고 했다...
참 자랑을 만나니 남들이 꺼리는 불구의 몸도 자랑거리가 되는 것....

박세호집사의 시......

"날 사랑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두 발로 걸을 수 없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두 손으로는 잡을 수 없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으신 모든 것을 볼 수 없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부족한 감사를 드리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눈물로 내 얼굴을 씻을 수 있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주의 십자가 내가 질 수 있도록
못으로 내 손과 발을 쪼갤 수 있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 귀한 생명 허락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참 자랑을 만나고 보니 다른 것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었습니다. 진짜 감사할 것을 깨닫고 보니 다른 모든 것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 위해 십자가에서 날 위해 살 찢고 피흘려주신 최고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고, 그 사랑이 지금도 나를 향해 쏟아부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가난도, 질병도, 장애의 팔다리도 다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거스려 사는 이런 역설적 삶을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바뀌어진 눈으로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기를 힘쓰십시오. 세상의 가치기준에 함께 휩쓸려가지 아니하도록 자신의 눈을 잘 지켜나가십시오. 정말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항상 진지하게 따져 물으십시오.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거기에 진정한 만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진짜 자랑할 예수님의 사랑이 나에게 부어지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고도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안에 있습니다. 목숨을 내어주신 사랑을 받았으니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쇠사슬에 매인 죄수의 삶을 살면서도 진정한 행복을 노래할 수 있었던 사도바울의 행복과 만족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도 넘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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