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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의 열쇠 / 마 22: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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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 22:6-14
제목 : "천국의 열쇠"
설교 : 박근호 목사 (구미영락교회)


요즈음 발행되는 일간 신문 속에서 우리는 전에 없던 현상 하나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광고란에 점술을 비롯한 수많은 운세상담, 굿당 등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첨단 과학시대를 표방하는 현대에 갓 태어난 자녀들의 사주, 작명, 운세, 배움의 도상에 있는 자녀들의 합격, 진학운, 취업운, 혼기를 앞둔 자녀들의 궁합, 애정, 가정문제 그리고 가장의 사업, 택일, 재물운 등을 신통하게 봐준다는 광고가 봇물처럼 넘쳐나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굿만 하는 굿당도 전국적으로 수백개가 되고 수천만원짜리 굿조차도 예약이 넘친다고 하는 이러한 오늘의 현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그 굿당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세상의 문제를 푸는 열쇠를 찾는 자리'라고... 세상의 온갖 문제를 푸는 열쇠를 얻고자 몸부림치는 자리가 바로 굿당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굿당만 그런가 하는 것입니다. 종교포화상태인 우리나라에서 절은 어떻고, 성당은 어떻고, 교회는 어떻습니까? 다른 종교는 고사하고 예배당조차도 그런 자리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마16장에 보면 주님은 교회를 '천국의 열쇠가 간직된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천국의 열쇠'와 관련되어 있지 결코 '세상의 열쇠'와 관련된 곳이 아닙니다. 주님은 교회에 '천국의 열쇠'를 준다고 말씀하시고서는 그것으로 '땅에서 무엇이든지 열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고 땅에서 무엇이든지 닫으면 하늘에서도 닫힐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열쇠로 열고 닫는 게 아니라 천국의 열쇠로 열고 닫는 겁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당에 나와서 천국 열쇠보다도 세상 열쇠에 더 관심을 기울입니다.

왜 교회에 나오는 겁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늘의 풍성한 삶을 오늘에 누리기 위해 그 열쇠를 갖기 위해 나오는 겁니까 아니면 내 인생의 당면한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받기 위해서입니까? 때로는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보다 이 세상 문제를 푸는 열쇠를 얻기 위해 나온다'는 말이 더 솔직한 경우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면 이 예배당을 찾아 나오는 우리나 굿당을 찾아가는 저들이나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갖는 중요한 물음 중의 하나가 바로 '천국에 무엇으로 들어갈까'하는 것일 겁니다. 행위냐, 믿음이냐 뭐 이런 교리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만은 실제적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키가 무엇일까 하는 물음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갖는 물음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열쇠'가 아니라 '천국의 열쇠'를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그 열쇠를 갖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주님은 군중들에게 당신 선포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를 곧잘 결혼잔치에 비유해서 설명하곤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기쁨을 띤 일상사가 바로 혼인잔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은 그 혼인잔치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비유의 끝말인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는 주님의 경고는 우리를 긴장시키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그 수족을 결박당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져져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것도 참으로 섬뜩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미래가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경각심을 갖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 무엇일까'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됩니다. 왜 하나님 나라로 청함받은 자들이 다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일까?... 왜 청함받은 자가 곧 택함받은 자가 못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열쇠는 무엇일까?...

주님이 하늘나라로 표상한 혼인잔치에 있어서 주인공은 꼭 신랑 신부 그 두 사람 만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결혼은 '양가의 행사'이지 '두 사람만의 행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만의 결합이 아니라 두 가문간의 결합이기도 한 것이 바로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입니다. 그러므로 양가 부모의 허락과 합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 둘만 좋으면 그만이다'는 단순한 자세는 혼사가 뭔지를 모르는 경솔한 단견일 뿐입니다. 두 사람의 사랑도 중요하지만 양가의 문화라든가, 관습이라든가, 종교 등등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결혼식을 준비하는 양가 부모의 입장에서 가장 신경쓰이는 것이 바로 하객들입니다. 결혼식에 축하객이 많아야지 축하객이 없으면 그것만큼 민망하고 난감한 일이 없습니다. 잔치의 규모는 주인의 명예에 관련된 일이어서 하객이 많으면 많을수록 초청한 그 사람의 명예는 높아지기에 혼주들은 더 많은 하객을 유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하객의 규모는 그 혼주의 명예와 비례되기에 신분이 높을수록, 유명인일수록 하객의 수는 더해지는 겁니다. 때로 어느 정객의 자녀 결혼식으로 인해 그 근처 교통이 마비되었다는 보도를 접하게 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아들의 결혼을 준비하는 한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여러 사람을 초청합니다. 그리고 결혼 당일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어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와서 즐기시라'고 거듭 초대합니다. 이렇게 종을 두 번씩이나 보내 초청하는 것은 고대 근동 상류 사회의 정중한 예의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임금은 정말 깍듯한 예를 갖춰 이웃을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초청장을 아무 사람에게 막 보내는 건 결코 아닙니다. 평소에 안면이 있고 그래도 이 사람이라면 우리 잔치에 기꺼이 와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는 자에게 보냅니다. 내 청을 거절하지 않을 사람들, 기꺼이 응해줄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당연히 와줄 줄 알았던 자들이 오질 않습니다. 당연히 많은 이웃들이 자신의 초청에 응하여 혼인잔치를 빛내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결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이웃들의 태도였습니다. 저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임금의 초대에 대해 어떤 이들은 '돌아보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무관심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들은 척도 않습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태도입니다. 두 번째는 밭갈러 가고 장사하러 가버립니다. 그건 그저 그런 일상사로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조정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을 핑계삼아 한결같이 임금의 정중한 초대를 거절합니다. 마치 주인의 명예를 떨어뜨리기 위해 서로 공모라고 한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경우는 급기야 초청장을 가지고 간 종들을 잡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사자는 보낸 자를 대신하는 것인데 저들은 이런 무례를 임금에게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러한 저들의 반응은 왕의 명예에 대한 매우 중대한 모욕이었습니다. 상대방의 정중한 예의를 성가시고 기분 나쁘게 여기고서는 무시하고, 들은 척도 않고, 무자비하게 죽이기까지 하는 저들은 결국 그 이해되지 않는 처사에 분노한 임금에 의해 진멸당하고 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임금이 생각하는 저들'과 '저들이 생각하는 임금'이 서로 달랐다는 것입니다. 임금은 저들이 자기가 저들에게 호의적이니 저들도 자기에게 호의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임금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임금을 무시했고 심지어 적대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사고의 간격입니까? 왕은 저들이 당연히 내 아들의 결혼을 기뻐하고 또 와서 축하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들은 무관심하고 참석치 않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 소식을 가져간 종들을 죽여버리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한 둘 빠질 수는 있겠으나 모두가 다 그것도 '핑계 같지 않은 핑계'를 대며 거절하자 임금은 심한 모욕감을 느낍니다. 이제 임금은 자신의 명예를 아랑곳하지 않고 생각을 바꿉니다. 임금은 다시 그 혼인잔치의 하객들을 청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청했으나 거절한 그 사람들이 아니라 종들로 사거리 길에 나가 만나는 대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게 합니다. 악한 자든 선한 자든 가리지 않습니다.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다 결혼식장을 가득 메우게 합니다. 거리에서 배회하는 가난한 서민들을 불러 피로연장을 채웁니다. 이것은 어쩌면 처음 초대했던 자들에 대한 모욕일 수도 있습니다. 거절한 자들은 이 혼인잔치에 참석 못하고 전혀 다른 사람들이 참석하여 그 즐거움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왕가의 결혼식은 성대하게 치러지고 많은 하객들이 잔칫상을 받고 흥에 겨운 피로연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혼인예식에 참여한 그 하객들 가운데 예복을 갖춰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임금은 손님들을 둘러보며 인사를 나누는 가운데 발견하게 됩니다.
임금은 그에게 다가가 그 연유를 묻습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이 임금의 물음에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질 않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종들에게 '이 자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고 명하며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는 이건 참으로 억울하고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가 이 잔치에 자원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좀 참석해달라는 간청에 못이겨 마지못해 참석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당에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여러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게다가 손발까지 묶여 어두운 집밖에 내쳐진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못할 일입니다. 오라고 해서 왔다가 일방적으로 당한 셈이니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게 됩니다. 왜 이 사람이 그 잔칫자리에서 쫓겨났을까요? 왜 임금이 화가 나서 그를 내쫓았을까요? 예복을 갖춰입지 않아서? 물론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그만이 예복을 갖춰 입질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가 어떻게 예복을 갖춰 입을 수 있을까 의아하게 생각되는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길에서 급작스럽게 혼인잔치에 초대받아 온 사람이 어떻게 예복을 갖춰 입고 그 예식에 참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같은 처지에서 초청을 받았는데도 저들은 한결같이 예복을 갖춰입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예복을 갖춰 입을만한 시간적 여유와 환경적 여유가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집에 가서 갈아입고 왔든지 아니면 잔치를 주관하는 왕이 제공하는 예복이 있었던지 아무튼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다 예복을 갈아입고 그 예식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복을 갖춰 입질 않았습니다.

예복하니까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약 20년 전인 1984년도에 제가 서울 영락교회 교구 전도사로 있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가 선교100주년 기념교회로 지어질 바로 그때입니다. 교회가 크다 보니 한 교구에 목사와 전도사가 한 팀을 이루어 소목회를 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저는 성동교구를 담당하고 있었스빈다. 막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임하여 주중엔 심방 그리고 주일엔 예배 안내 및 성경공부를 한 반 맡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금요일에는 철야기도회 전에 찬양을 인도하고 또 1년에 한 두 번씩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이 자기 교구 목회자들 외엔 관심들을 갖지 않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교구는 다르지만 저를 무척 좋아하는 교우들이 몇 분 있었습니다. 그 중 강남에 사는 대령으로 예편한 어느 남집사님이 하루는 자기 아들이 모일모시에 장충동에 있는 신라호텔에서 약혼식을 하는데 절더러 주례를 좀 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제 나이가 서른 둘, 저희 애들이 세 살, 한 살 때였습니다. 신랑이 몇살이냐고 물었더니 서른 하나랍니다. 게다가 신랑은 모 병원 레지던트였습니다. 제가 너무 부담스러워서 해당 교구 목사님께 부탁드리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부득불 절보고 해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수락을 했는데 문제는 입고 갈 옷이었습니다. 결혼 후 4년 동안 양복을 한 벌도 사지 않았거든요. 그때가 5월이었는데 그렇다고 11월 결혼식 때 입은 예복을 입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저희 매형이 입다가 안입는다고 준 양복들 가운데 하복 하나를 입고 가서 약혼식 주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뜨근한 일입니다.
잔치 자리에 걸맞는 예복을 갖춘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상가에 가는데 색깔 있는 양복과 타이를 맨다면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또 반대로 결혼식장에 가는데 상복을 입고 가는 것도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걸맞는 품격을 갖춰야 하는 겁니다. 그게 상대방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복을 갖춰 입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해 봅니다. 과연 왕의 진노가 단순히 저가 예복을 갖춰 입지 않았다는 그 이유 때문이었을까? 그것 때문에 왕이 진노하여 그를 그렇게 모질게 추방한 것일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그가 왕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유구무언', 바로 이것이 그가 왕의 진노를 산 결정적 이유라는 것입니다.
왕이 묻는데도 그는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이게 왕의 입장에서 얼마나 불쾌한 일입니까? 왕은 이미 무시당함에 예민해 있습니다. 벌써 그런 무례를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반응이 없습니다. '이러이러해서 예복을 갖춰 입지 못했다'든지, '급하게 오느라 옷을 갈아입지 못했다'든지... 뭐 어떤 대답이나 해명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는 그저 묵묵부답입니다.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이건 곧 무시와 마찬가지인 무례한 행동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응답입니다. 차든지 덥든지, 무슨 반응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응답을 보여주질 않습니다. 유구무언일 뿐입니다. 바로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외되는 비운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악하다 선하다가 기준이 아닙니다. 천국은 선해서 들어가고 악해서 못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 기준은 오로지 '하나님께 대한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중요한 겁니다. 그분께 예를 갖추는 게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임금의 물음에 대해 아무 대답도 않는 그의 태도는 앞서 왕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던 자들의 무례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의 왕을 향한 유구무언은 무시일 수도 있고, 적대일 수도 있고, 무례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천국의 열쇠를 빼앗기고 그 즐거운 잔치자리로부터 쫓겨나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천국은 어떻게 들어가는 것일까요? 천국의 열쇠는 무엇일까요? 이 혼인잔치의 청함과 택함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요?... 첫째는 예복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예복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옷으로 주님이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즉 예복을 입었다는 말은 여태까지 입고 있던 자기의 옷을 벗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인과 자기 비움 그리고 자기 포기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관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부족을 인정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자기를 벗고 주님으로 옷입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것을 거부한 겁니다. 여전히 그 혼인잔치 자리에서 자기 옷을 고집하여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서 이 사람은 쫓겨난 게 아니라 스스로 나가버린 겁니다.
혼인잔치의 특징은 활짝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잔칫집은 닫혀있지 않습니다. 한때 상습적으로 결혼식 피로연에 단체로 몰려가 식사를 하는 건달들이 화제였습니다만은 결혼식은 언제나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그 스스로가 진정으로 참여하지 않은 것이지 배제시킨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는데 불이 그를 태워 죽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겉으로 나타난 현상만 보면 쫓겨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쫓겨난 게 아니라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진 것입니다. 그는 거기에 어울리는 자가 아니었고 함께 어울려 기뻐하며 축하할 마음도 애초에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이 버린 자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여러 번 그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셨더랬습니까? '내 할 일을 어서 해라...' 그가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오기를 몇 번이나 암시하셨습니까? 그러나 끝내 그는 돌이키질 않았고 제 갈길로 가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복도 갖춰 입지 않고, 또 임금의 물음에 유구무언으로 아무런 대답도 않았던 그는 추방당한 게 아니라 그가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려진 것일 뿐입니다. 그가 예복을 갖춰 입지 않은 것과 그가 임금의 질문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것은 다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할 대목입니다. 그는 그 결혼잔치에 어울릴 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여러분은 어떤 교인인가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교회는 선인만 있는 게 아니라 악인도 있고, 의인만 있는 게 아니라 불의한 사람도 있습니다. 강자와 약자, 부자와 가난한 자가 모여 있고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기에 교인된 우리는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 이 신앙 공동체의 지체를 이루고 있지만 아직 최종적으로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아무런 구별이나 전제 조건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로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하늘나라 출장소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들어왔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다시 택함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를 벗어야 합니다. 이 공동체 속에서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만을 주장해서는 그는 축제에 함께 참여할 자가 못됩니다. 더불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지 못하는 자는 천국의 열쇠를 얻을 자가 못되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청함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 받은 자는 적으니라...'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가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의 숫자와 같지 않다는 이 말씀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청함받은 많은 사람들이 택함받는데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이곳에 모인 우리들 중에는 택함받는 자도 있겠지만 청함받은 데서 그칠 자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영락의 제단에 청함받은 모든 교우들이 하나같이 모두 택함받는 천국백성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청함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 받은 자는 적다'는 이 주님의 말씀이 우리 신앙공동체에는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자기를 벗고 그 나라에 합당한 예복을 갖춰 입고 주님을 경외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더불어 하늘꿈을 이루어가는 그런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천국의 열쇠를 손에 쥐고 천국문 앞에 서는 은총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청함도 받았지만 택함도 받은 나의 백성들이다'라는 주님의 선언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는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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