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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를 존중히 [삼상 2: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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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김이봉 목사 
제목 : 예배를 존중히 <삼상 2:27-30> 


□  예배를 존중히 (삼상 2:27-30)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
냐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나의 제사장을 삼아 그로 내
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
의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어찌하
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
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
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
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
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참된 예배를 통해서 예배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것이 안식의 복입니다.
그것이 쉼의 복입니다.
그래서 안식을 기억하여 그날을 구별되게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신 우리 주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쉼의 복, 안식의 복을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도 인생고의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삶의 진정한 안식을 얻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참으로 딱한 스트레스 속에 있는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딱한 스트레스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살아야 이 위태로운 세상에서 쉼(Rest)을 누리며 살게 될까?
그것을 말씀에서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쉼의 근원이 어디로부터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인생의 참된 <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생활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1.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최우선적 행위입니다.

① 예배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② 예배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며,
③ 예배란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연합하면,
거기에서부터 쉼이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지 못하기에 쉼이 없이 살게 됩니다.
오늘도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피곤한 인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왜 하나님을 섬기고, 왜 하나님과 교제하고, 왜 하나님과 연합해야 하는가?
우리는 모두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란 약하고, 제한적 존재란 뜻입니다.
☞ 한 장의 종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지만, 거기에 돈의 액수가 기록되면 그 가
치는 수백장의 종이를 사고도 남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연합되면 보잘 것
없는 인간이지만 무한한 가치를 느끼게 됩니다.
같은 사업을 해도, 하나님과 연합된 사람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 지난 주 모 장로님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장로고시 때 주일성수 문제로 질문을 받았는데, 그 때 마음 속에 다짐한 바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대로 실천했더니 하나님이 축복을 해 주는데, 연 3
년째 전 군에 납품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더란 얘기입니다. 그것도 남들은 사람
을 동원하고 로비를 하느라고 애쓰지만, 이 장로님은 있는 그대로, 거짓말하지
않고 정직하게 단가를 써냈는데, 언제는 처음에는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3
년 연속으로 낙찰자의 부정이 드러나 차점자인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을 체험하
였다고 간증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너무나 감사하다고 점심초대를 하
였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무가치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면 무한한 가치를 얻게 합니다.

☞ 거즈 한 조각은 별로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힘없는 거즈가 베니어판에 부착되면 베니어판이 깨지지 않는 한 찢
어지지 않습니다. 두꺼운 철판에 부착되면 철판이 갖는 강함을 같이 갖게 됩니
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과 연합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를 찾아 예배하는 자들을 찾아 크게 쓰려고 합니다.
얼마나 바른 예배를 하고 있는가를 살피고 있습니다.

예배의 행위는 구약에서는 제사의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십계명에 보면, 그 날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날은 쉼을 얻게 하는 날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쉼을 주시려고 하였습니다.
고통과 아픔과 비극이 아니라, 안식의 즐거움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에덴동산의 낙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 한 후 이 안식은 깨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안식을 주려고, 계명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식을 주려고 하는 하나님의 본래의 뜻을 망각하고, 바리새인이나 율
법주의자들은 문자적으로 그 날(The Day)에 얽어매어서 쉼을 주려고 한 날에 도
리어 사람을 꽁꽁 얽어매었습니다.
결국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그 날에는 무엇도 하면 죄요, 무엇도 하면 죄라는 식으로 사람
을 묶어버렸습니다. 예수님도 저들은 안식일에 병 고쳤다고 책잡으려고 하였습
니다. 주님은 저들과 반대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
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하면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면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
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폭탄적인 선언입니까? 
요즘말로 하면, 획기적인 의식개혁의 말이었습니다.

주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한 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일상생활 중에 구별된 날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생활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구별된 날은 있어야 합니다.
즉 우리의 생활 속에 주님의 날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날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사는 날이지만,
<주님의 날>을 구별되게 지키는 행위가 신앙의 행위란 말입니다.
생활 속에, 신앙의 행위가 구별 되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 돈을 벌어도, 돈을 버는 생활 속에 하나님을 기억하는 행위가 있어야 합니
다. 그것이 신앙생활이란 말입니다.
⇒ 공부를 해도, 공부하는 생활 속에 하나님을 기억하는 신앙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 공무원이 되어 공무를 수행하는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는 신앙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 날을 구별하게 지킨다는 말의 의미입
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문자주의자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보면 그와는 정 반대입니다.
돈을 벌면 돈 버는 일에만 전심전력하느라고 하나님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주일이 없어집니다.
예배의 행위가 사라집니다.
오로지 돈줄 찾아 나서기 바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느라고 예배가 없어집니다.
고시 준비하느라고 주일이 사라집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과 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높은 공직 수행을 하느라고 주일이 생활 속에서 밀려납니다.
그러니, 그 생활 속에 안식이 없어지고,
그러니, 그 생활 속에 쉼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엿새동안 창조하시고, 하루는 쉬었습니다.
그것이 안식의 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에덴동산은 살아지고, 변명과 책임전가와 미움과 다툼과
갈등으로 서로를 물고 물리는 세상으로 전락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다 멸
망할 우리를 위하여 다시 구원의 길이 열렸으니, 그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주일을 존중히 여겨서 주님의 날을 지켜야 하는가?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주일은 모든 것 위에 최우선순위에 와야 합
니다. 생활 속에 주님의 날이 밀려나기 시작하면 바쁘기만 하지 <쉼>이 없어집
니다. 광야생활에서 안식의 날 거두어 들인 만나는 모두 냄새가 나고 썩어버렸
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이 매우 큽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은 정성이 포함되어야 합니
다.
대통령과 약속한 사람들은 얼마나 정성을 다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대통령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세들이 정성없이 나와서 과
연 쉼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성전 뜰만 받고 돌아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정성 된 표현은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감사와, 마음으로부터의 구별된 의식으로 드리면 그것을 하나님
은 기뻐하십니다.

2.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신앙적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다는 말은 예배를 중요시함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병이 든 증거로 나타나는 징조는 먼저 예배시간이 지겨워집니다.
예배가 재미가 없어집니다.
주의 종들에게 대하여 시험에 들게 됩니다.
심지어 미워하게 됩니다.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이유만 있으면 예배시간에 빠집니다.
그래도 별로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결국 마비된 상태에 이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결과라고 하였습니다.
⇒ 엘리 제사장의 경우에서 너무나 잘 나타난 사실입니다.
제사장의 고귀한 직분을 망각하고 오히려 자식들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오늘도 자식들을 더 중요하게 여겨서 저들만을 위한다고 예배를 등한히 여기는
사람들은 있지 않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면 이것이 잘못된 일입니다.
유태인의 가정 교육이 철저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행위가 최우
선적으로 왔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
하고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철저하게 자녀들에게 가정에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의 유태인들을 보십시오.
육신적으로 보아도 얻어먹는 거지들은 없습니다.
유명하다는 사람들은 모두 유태인들에 핏줄로 이어지는 현실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3. 예배를 존중히 여기면 하나님도 그를 존중히 여깁니다.
주님이 가르친 예배는 주일을 지키는 형식에서 보다 생활로 이어지는 것을 더
중요시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씀하실 때 예배의 장소보다, 신령과 진
정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마음을 더 중요시하였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의 예배의 행위가 얼마나 형식에 치우쳤었는
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뒤엎
어 버리면서,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도 이것이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나와 앉아서 예배시간에 참석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몸은 나와 있지만, 마음은 모두 세상으로 나간 상태에서 있다면, 그런 예배 자
들을 하나님이 존중히 여길래야 여겨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자들의 마음의 정성을 보십니다.
헌금하는 자들의 마음의 정성을 보십니다.
봉사하는 자들의 마음의 정성을 보십니다.
교회 일을 맡은 자들의 마음의 정성을 보십니다.
직분만 맡고 그 직분을 감당하려는 정성을 보십니다.
그 직분을 등한히 여기는 자들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길 수가 없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들을 내가 멸시하리
라"고 하였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자기를 살펴서 우리 가정에서 예배가 등한히 여겨지지 않았는
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가는 길에서, 내가 하는 일에서, 예배의 행위가 밀려나지 않고 있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려진 행위들을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안식의 복을, 우리의 삶 속에 참된 쉼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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