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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로운 목표, 새로운 질서 / 히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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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히브리서 13:17 
제목 : 새로운 목표, 새로운 질서
설교 :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새해를 맞이하여 신앙의 새 출발을 하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우리 울산교회는 생명 사랑 나눔의 신앙공동체입니다. 올해는 특히 예배공동체를 세워가는 일을 주력하기 위해서 “찬송 기도 전도의 해”로 연간 목표를 잡았습니다.

신앙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워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목표만 아니라 새로운 질서가 꼭 필요합니다. 특히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리더십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에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의무에 충실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할 것을 하나님께 다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는 입술 되기를 바랍니다.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가 계속될 때 우리의 싸움은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분인지를 증거하며 찬양과 감사를 드릴 때 싸움은 이미 우리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영적 임무와 아울러 어려운 처지에 있는 동료 인생을 돌보는 사회적인 임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여서 이같이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은 나아가서 자기 주위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 동참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을 찬양할 숭고한 의무와 약한 이웃을 도울 사랑의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종교적인 의무뿐 아니라 불쌍한 사람들을 돌봐주는 사회적인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인이 수행할 또 하나의 의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현대인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은 지도자들의 말을 잘 듣고 그들에게 복종 하십시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모두 다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택하신 백성”입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경배를 받으시고 섬김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성령께서는 교회에 두 계층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도 “인도하는 자들과 그 인도를 따르는 자들”- 소위 지도력을 행사하는 자들과 그 지도력을 따라야 되는 사람들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전투하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군대가 명령체계가 서지 아니하면 그 군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명령체계가 사라지면 오합지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거나 오해하게 될 때 일반 평신도를 종처럼 부리는 교직 계급이 등장합니다. 심지어는 집사든 권사든 불러서 담임목사 개인 살림살이 하는데 불러들이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또 잘 따라요. 참 해괴한 일들도 다 있어요.그런가 하면 반대로 평신도들이 ‘교역자 오라 가라’ 하는 주인 노릇 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서 17절은 명령합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

히브리서를 받은 성도들에게 7절에서 이전에 신앙의 지도자들의 모습을 본받도록 명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17절에는 지금 현역 지도자들에 대해서 잘 순복하도록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명령을 한다는 것은 뭘 뜻한다고 그랬죠? 이 히브리서를 받는 사람들이 이런데 문제가 없으면 아까운 종이 낭비해 가면서 순종해라, 복종해라 이런 말 할리가 만무합니다. 그런 명령을 받는다는 것은 그런 권면이 필요한 상태의 교회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해야 됩니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군지도 우리 사실 확실히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일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나바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누구인지 우리가 정답을 알게 될 것은 아마 천국가야 되겠지요. 그러나 이 편지를 성령의 감동으로 쓰게 된 사람은 인편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전갈을 통해서, 그 히브리서를 받는 신앙 공동체 가운데는 이 지도력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니 지도력에 도전을 하는 계층들이 있다는 것을 들은바 있을 것입니다.

지도력에 대한 도전 그것은 전염병과 같아요. 마치 가루 서 말 속에다가 이스트를 넣어놓으면 그게 전체를 다 발효시키는 것처럼 처음에는 누가 조금 불평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점점 더 번져나게 되어서 공동체 전체를 와해시키는 이런 자리까지 나갈 수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언제까지 공동체 전부가 지도자 없는 , 지도력이 상실된 오합지졸이 될까봐서 이 히브리서를 쓰는 기자가 이런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명합니다.

동시에 이 명령의 배후에는 이 편지를 쓰는 분의 입장에서는 그 현역 지도자들에 대해서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도자 들이고 그들은 그 일을 해 나갈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신임이 있기 때문에 너희를 인도하고 있는 자들을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소명에 대해서, 그들의 능력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믿어 주었기 때문에 지도력에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들은 소식에 의하면 지도자를 존경하는 풍토에 상당한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충고를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 조직에는 지도자와 그 지도를 따르는 추종자들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직장에 가도 그렇고 집에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서는 일을 시키는 상급자가 있고 그 일을 해야 되는 하급자가 있습니다.가정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가장이 있고 거기에 따른 식솔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두 사람 이상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누군가가 리더십을 가져야 합니다. 리더십이 뭡니까? 현대인의 성경이 말한 것처럼 여러분들은 지도자의 말을 잘 듣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말을 잘 듣는데서 부터 지도력은 생겨나는 것입니다. 가장의 지도력을 세워주고 싶습니까?그러면 남편보고 “내 말 좀 들어봐요” 그렇게 고함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남편의 말에 다소곳이 귀를 기울이는 겁니다.
회의에 회장이 있지 않습니까?헌데 어떤 사람들은 한참 다 토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말하고 회장이 정리를 했는데도 그 다음 또 정리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위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제직회나 당회에 그런 분이 있다고 그러면 저는 신학 하라고 권하겠습니다. 신학 해서 당신이 목회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지도력을 세우는 일에 함께 마음을 모아야 옳습니다. 두 사람 이상 모이는 곳에는 누가 지도력을 갖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치 한 마리 말을 두 사람이 타야 된다면 누군가 한사람이 앞에 앉아서 말고삐를 잡아야 되지 않습니까? 경주 보문단지에서 두 사람이 타는 자전거를 여러분이 타려면 누군가 한사람이 핸들을 잡고 두 사람이 패달을 밟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 다 핸들을 잡으려고 들면 그건 제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좋은 리더십이냐 나쁜 리더십이냐, 좋은 정치냐, 나쁜 정치냐 이런 문제이지 정치가 없는 사람의 조직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 조직에는 반드시 인도자가 있고 인도를 따르는 이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교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인도하는 자와 인도를 따르는 사람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있다는 것이 아주 건강할지 모르겠습니다. 같이 사랑해서 만나도 결혼하고 나면 누가 누구말 들을 것인지, 다홍치마 밑에서 길들이라든지, 고양이 호랑이 되기 전에 잡으라든지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은 누군가 리더십 문제가 설정되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 복종의 원리는 한 사회나 단체의 유익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통솔력을 잃은 모임은 살아남을 가치가 없는 조직입니다.
교회가 가진 지도력도 모두의 유익을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다만 권위의 자리에 있는 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에 주어진 지도력이 잘 성공적으로 효율적으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교회는 세상 어떤 단체와는 다릅니다. 반드시 권위아래 있는 자들이 자원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복종과 순종이 필요합니다. 교인들이 많다 보니까 주일 지나도 누가 주일날 출석을 했는지 결석을 했는지 체크가 잘 안돼요. 김차순 전도사님이 한때는 컴퓨터로 불리면서 모든 교인을 눈으로 다 체크를 했습니다. 아마 김 전도사님이 할 수 있는 그런 역량을 이제는 초월한 것 같아요.
교회가 너무 커졌고, 새로운 사람들이 오고 그래서 누가 왔는지 갔는지 잘 알수가 없어요. 그것 때문에 잘 안 오는 사람 챙겨야 되는데 이게 우리가 고민 많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그런 아이디어를 제공하데요.회사 출근할 때처럼 기계에 찍는 것 있지 않습니까? 그게 뭔지 나는 이름도 모르는데 그걸 하자고.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아 이 사람아 회사는 그걸 안 찍고 들어가면 월급을 못받어, 그런데 교회는 월급 받으려고 오는데가 아니야, 교회는 다 자기 헌금 하면서 나오는데 그 표 다 찍으라고 하면 이 교회 아니면 다닐 데 없나면서 다 떠나가 버리게 될 거니까 그건 아이디어가 못돼” 이렇게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하고 회사하고는 다르지 않습니까? 일반 회사에서야 오너 마음이지요. 고용자를 해고 시킬 수 있는 권한도 있고 여차하면 승진 안 시킬 수도 있고, 봉급을 좀 깍을수도 있겠죠. 그건 자기 회사니까 그렇게들 해왔습니다. 회사가 커지면 그것도 오너 마음대로 안 되지요.막강한 노조가 이 나라에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인사권이 있습니까? 재정권을 가지고 휘두를 수 있습니까? 오로지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기꺼이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을 때 거기 세워진 지도력이 제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상태가 히브리서 편지를 받는 성도들 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훨씬 잘 순복하고 있다고 저는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잘 따르는 것은 여러분 자신의 체면 때문에 잘 따르던지 혹은 여러분이 세운 지도자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더욱 더 잘 순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뿐 아니라 성경은 일관되게 이런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를 향해서 바울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여기에서 알고라는 말은 알아주고 그런 말입니다. 저희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 그들이 일하는 것 인정해 주고 그것 봐서 사랑 안에서 아주 존귀한 자들로 생각해 주라 이런 말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면하는 자들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 이런 명령은 설교하는 제 자신하고도 좀 관련이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설교자들은 이런 문제가 나오면 슬쩍 건너나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제가 배운 것이 있다면 가르쳐야 할 것은 바로 가르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개척교회를 두 번째 할 때에 어느 해 추수감사헌금을 했는데 봉투에 오백 원짜리가 딸랑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지난 수년 동안 한국 교회가 너무 헌금에 대해서 강조를 많이 하니까 내가 그것에 식상해 가지고 교인들한테 헌금이 무언지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전혀 가르치지 않았구나, 너무 잘못된 가르침이 많으니까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싫어가지고 말한다는 자체가 싫어서 말을 안했더니 추수 감사헌금을 한다는 것이 오백 원 넣는 것은 내가 못 가르친 잘못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도력에 관한 문제도 내가 이해관계가 있다고 그래서 언급하지 않고 지나가면 교인들에게 뭐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물론 예민한 문제니까 조심해서 말씀을 하긴 해야 되겠지요. 아마 우리 한국교회 상황을 돌아볼 때 많은 성도들이 지도자들하고 특별히 목사하고 담임목사와 상처를 갖지 않은 경우들이 참 없습니다. 드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울산교회는 하나님께서 좋은 목사님을 박 목사님을 보내주셔서 여러분들이야 말로 그런 상처가 무엇인지 모르고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여러분들 중에는 있습니다.그러나 일반적인 현실을 놓고 보며는 그런 것 때문에 상처한 번 안받아본 사람이 있겠습니까? 신년 벽두부터 다룰만한 달가운 주제는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기 나오는 인도하는 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너희를 인도하고 있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구역에서는 누가 모임을 인도합니까? 구역장입니다. 그렇죠? 또 교육부서에는 부장도 있고 교육전도사도 있습니다. 성가대도 대장이 있고 지휘자가 있습니다. 봉사기관에 회장들이 있습니다. 교회 전체를 영적으로 살피는일을 맡은 당회원들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당회원이란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을 하는 목사와 다스리는 일을 맡아서 하는 장로로서 구성되어 있습니다.그중에서 담임목사는 당회의 지도권을 대표적으로 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들에 한해서 발해지는 명령입니다. 목사라는 이름만 갖고 교회의 유익보다는 손해를 끼치는 그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단지 목사라는 이름 때문에, 오직 장로라는 직함 때문에 복종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종교개혁을 성취했던 칼빈 선생은 목사라는 직함을 갖고 교회를 망치는 일을 하는 이를 조금도 존경하거나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당대의 성도들을 향해서 경고했습니다. 아직도 이런 권면이 필요한 것 같아요. 너무나 답답한 것은 목사라는 타이틀만 가지면 다 같은 목사인줄 알아요. 저는 지난 한 해 동안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면 다 같은 목사 아니라고. 저는 하나님 앞에 가서도 그렇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여러분 집사라고 다 같은 집사입니까? 장로라고 다 같은 장로라고 존경받을 수 있습니까? 목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직함 때문에 순종해야 될 이유는 없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헌신을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존경할 것인지 말 것인지 그것을 결정해야 될 것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로마서 13장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시장, 대통령, 국가가 명령하는 명령이면 무조건 따라야 됩니까? 둘만 낳아 잘 기르자 국가가 그럴 때 거기 순종한 사람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잘했는지 못했는지, 아들딸 가리지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그러면 또 따라가는 여러분 잘했습니까? 못했습니까? 만약에 그것이 옳다고 하면 모세 부모야 말로 국가가 명하는 명령을 소홀히 한 반국가적인 인물일 것입니다. 아들 낳으면 다 강물에 던져 버려라. 여러분 그런 명령이, 바로의 명령일지라도 말 안 되는 소리라면 여러분은 아니요 라고 말해야 됩니다. 생명을 어떻게 쓰레기처럼 강물에 던질 수 있습니까? 단 유대인이라는 이유로서 가스실에 몰아넣어가지고 죽이라고 명령이 내리면 여러분이 어떻게 그것을 그대로 따라야 됩니까? 그래서 우리 신교는 신교를 영어로 말할 때 프로테스탄트라고 말하는데 프로테스트. 비진리에 대해서는 프로테스트- 항거하는 입장이 기본 입장입니다. 우리 존재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입각하지 않으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우리는 No 라고 해야 합니다.

이렇게 교회 정치의 제 1조가 양심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쥐어주신 그 양심에 따라서 성경이 명하고 있는 바에 따라서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또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아내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하라 성경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복종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남편이 말도 안 되는 것을 시키면 여러분은 아내로서 No 해야 됩니다. 남편이 도둑질 시켜도 할 겁니까? 남편이 윤락행위를 시켜도 할 겁니까? 남편이 변태적인 요구를 한다고 다 들어줄 겁니까?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합니다. 강단에서 나온 말이고 목사의 말이니까 무조건 순종하게 되면 교회가 병들 수밖에 없죠. 양심에 따라서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라 타당한 순종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따라서 우리가 순종해야 합니다. 맹종하는 신자들이 있는 곳에는 군림하는 교역자들이 생겨납니다.

듣고 싶은 것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거짓 예언자들이 판을 치게 되어 있어요. 말마다 축복과 축언을 외치는 거짓 선지지가 많아 진 것은 무조건 적인 세상 축복을 받고싶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세속적인 생각과 현실적인 삶을 책망하는 설교를 달게 받으십시요. 언제나 부드러운 말과 종교적인 재담으로 찾아오는 이들을 멀리하십시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오늘 이말 우리가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편지를 받은 사람들의 지도자는 신임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능력에 대해서도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어떤 사역자가 존경받을 만한 우리가 순종하고 따라야할 만한 지도자이겠습니까?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자기가 대신 계산해 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존경받아야 될 지도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가 맡은 영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사람, 그들은 성도들이 자고 있는 순간에도 자지 않고 깨어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야곱이 밤에 라반의 양떼를 지키듯이 양떼들이 잠든 순간에도 깨어있는 목자가 합당한 존경과 복종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주탄생의 밤에 밖에 자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처럼 깨어있는 목자들이 누릴 존경입니다. 우리 지도자들에게는 이런 직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등록교인 오천 명이 넘는 교인들의 이름을 밤마다 나 혼자 부르라고 그러면 제가 잠잘 여가 있겠습니까? 제가 새벽2시까지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날마다 잠 안자고 버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성도들의 영적인 상황을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태 이상으로 깨어서 돌보라 그런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영적 상태를 보살피는 것 이상으로 맡은 성도들을 위해서 헌신하라.그런 이야기이겠지요.

깨어서 양떼를 돌보는 직무를 잘 감당하기 위해서 교회는 조직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경우는 지구, 교구, 구역이 편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구를 맡은 우리 담당교역자들을 부르기를 지구수비대라고 그렇게 부릅니다. 어디서 들어보셨죠? 구자가 한문으로 조금 다를 뿐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는 10지구 23교구 218 구역으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구역마다 구역장이 있습니다. 구역장은 구역모임을 인도하면서 구역에 속한 성도들을 보살피도록 하고 있습니다. 구역장이 할일은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서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열명 내외, 그러면 그 사람들 이름을 불러가면서 감당할 수 있겠죠? 예배에 잘 참석하며 신앙생활 잘하는지 돌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누가 참석했는지 안했는지 그걸 교인이 한 백 명, 백오십 명 같으면, 그리고 점심도 같이 먹고 그러면 아는 사람 환히 압니다. 담임목사만 아는 것이 아니라 구역장들도 다 알고 살필 것인데 우리처럼 사람들이 많으면 일단 여러분이 서로 만나도 그렇잖아요? 이 사람이 우리교회 다니던 사람인지, 처음 나온 사람인지 서로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면 누가 왔는지 빠졌는지 살피는 게 참 쉽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여기다 코드를 찍어서 통과하면 딱딱딱 찍히도록 그렇게 하자고 아이디어가 다 나오겠습니까?

그러다가 오늘 주보를 보니까 구역별 기도후원 선교사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구역장은 먼저 그 우리 구역에 기도 후원을 하기 위해서 배당된 선교사가 누군지 이름을 확인을 해야 합니다. 저도 1부예배에 선교헌금 작정하면서 한번 확인 해보니까 스페인에 있는 김대영 선교사가 우리 지구더라구요. 사실 교역자들은 따로 구역이 없습니다만 집사람들이 속해있는 구역이 우리 구역이라고 이렇게 믿고 있죠? 남복산 1구역은 김대영 선교사 그렇게 되어있데요. 하필이면 김대영 선교사는 제가 67년에 대학 입학할 때 입학 동기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부터는 위해서 기도하는 책임을 맡은 겁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일을 하는 것이고 그 선교사를 헌금 작정하는 그 선교사에게 가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를 후원하는 일을 올해는 시작합니다.

구역장만 이런 임무를 감당해야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교사도 마찬가지겠지요? 충분히 준비하고 가르칠 때 잘 가르쳐야 되겠지요 마는, 주보에도 광고가 나있고, 들어오는 게시판에도 많이 붙어 있는데, 잘 가르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배울 기회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가르치는데서 끝나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언젠가 그 영혼을 맡았던 마지막 계산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대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는 우리 위치라고 하는 것이 그래요. 누군가 나 위에도 사람이 있고, 밑에도 있습니다. 때로는 누군가의 말을 들어야 할 때도 있고 누군가에게 일을 시켜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보면 마음에 안들 때가 많아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는 잘하는지 밑에 사람들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대통령 하나는 우리가 잘 뽑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면 평가제가 실시되어 일방적이 아니라 정말 아래위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사회, 이제는 새로운 사회가 와야 됩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임인데도 불구하고 예수이름으로 우리가 찬송하는데도 불구하고 생각 아주 깊은 곳에서는 공자님이 들어있습니다.

공자님은 뭘 중요시하죠? 장유유서 이런 것들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전통...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단체가 아닙니다. 옛날에 어떻게 했던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깨달은 말씀이 무얼 말하는지, 우리 주님이 무얼 요구하는지, 어떤 사람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했는데 나는 공자가 죽어야 교회가 새로워질 것 같아요.
미흡한 지도자 만나면 그것가지고 여러분이 잘근잘근 씹는 즐거움 갖지 말고 그런 사람을 위해서 계속해서 진지하게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화란에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프라고 총장도 지내고 수상도 지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카이프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교회 왔을 때 성도들의 마음은 무거운 부담이 되었습니다. 목사님 설교하는 것 들어보니까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들이 몇 사람 모여서 계속 아브라함 카이프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카이프가 변하여 새사람 되었습니다. 화란이 낳은 개혁주의 신학자 가운데서 몇 사람 꼽으면 들어가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사역자는 보통수준이면 된다고 늘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셔올때 설교한번 듣는 이런 절차를 저희는 안 갖고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부르셨다면 누구나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천 명이 넘는 우리 등록교인들이 위해서 기도하면 보통사람도 비범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함으로서 여러분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세운 구역장들, 우리가 세운 장로님들, 우리가 모셔온 교역자들. 기도하게 되면 보통 사람들이라도 탁월한 사람으로 하나님은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러더라고요. 목사님 나 처음 올 때 물어보는 것도 없고 그래서 참 어정쩡 했습니다. 목사님이 나를 쓸려고 하는 것인지 말려고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는 거예요. 제가 그 사람에 대해서 크게 많이 알아볼 것이 뭐가 있습니까? 제가 사람에 대해서 기대를 했다면 꼬치꼬치 캐묻고 해야지요. 그러나 저는 그 사람도 변화시킬 수 있는, 그 사람에게도 은혜 베풀실수 있는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지도력을 잘 발휘할수록 구역원들은 우리 구역장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고 구역장들은 우리 교구장들이 올해에는 교구장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고 모든 구역에 속한 사람들은 지구 수비를 맡은 담당 교역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온 교회 성도들이 우리 당회와 저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우리 교회는 우리 자신의 눈으로도 놀랄 만큼 변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여러분
즐거움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께 보고 드리게 해주십시오. 여러분의 일로 하나님께 아뢸 때 마다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해 주십시오. 구역장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구역은 몇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생각만 하면 하나님께 감사가 막 터져 나오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람 이름만 떠올랐다 그러면 하나님 어쩌시렵니까? 불쌍히 여겨주십시요, 도와주십시요.이렇게 염려되는 기도가 나오는 사람인 것 같으면.......그래서 여러분 이름이 떠오르는 순간에 여러분 위해서 감사할 것이 많고 여러분을 위해서 생각만 해도 기뻐할 수 있는 그래야 여러분에게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역장으로 하여금 여러분 때문에 근심하지 말게 하십시오. 교구장이 여러분을 위해서 염려하는 구역장 되지 마십시오. 지구담당 교역자로 하여금 여러분을 위해서 걱정하지 말게 하십시오. 온당회가 여러분을 위해서 심려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도자들과 불화할 때에, 특히 여러분에게 말씀을 들려주는 목사에게 마음으로 순복하지 않으면 그가 하는 설교가 여러분의 마음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천사처럼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가르침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영적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인해서 은혜를 못 받으면 심령은 메마르게 됩니다. 비가 오랫동안 계속해서 안 내리면 땅은 완전히 사막으로 변해갑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 해보시지 않았습니까? 신앙생활 하면서 설교하시는 교역자와 마음이 맞지 않으면 그 주일부터 설교가 귀에 안 들어 오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너에게 유익이 없다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말씀의 은혜는 마음이 열려지지 않는 사람들과는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존경하고 복종하는 마음이 없을 때 그가 하는 설교는 은혜 되지 않습니다. 그런 목사님 밑에서 신앙생활 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설교를 들을 때에 계속해서 졸음만 온다면 결단해야 되요. 하나님 내가 주일날 교회 와서는 졸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설교자를 위해서도 열심히 기도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가 쏟아질 때 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직분자 여러분 절대로 여러분이 예배 중에 졸고 있는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말씀선포의 현장은 영적 싸움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이 선포되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천국 가느냐. 지옥으로 떨어지느냐 그런 갈등을 하고 있는 순간에 여러분이, 직분자인 여러분이, 중직자인 여러분이 눈감고 졸고 있어 되겠습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설교자만 깨어있는 것이 아니라 직분자 모두가 깨어서 함께 기도하며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목사와 같이 최전선에 서있어야 할 사람은 중직자가 아니겠습니까?앉아서 열중쉬어하고 편안하게 아버지 집에 왔다고 졸고 있으면 어떻게 싸움이 되겠습니까?

저는 처음 오는 사람들이 조는 일에 대해서는 제 마음이 하해와 같습니다. 저는 이십 수년 동안에 목회하면서 한번도 처음 온 사람이 조는 것 때문에 마음 상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건 너무나 당연하니까, 자기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게 처음에 올때부터 막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감동되고 눈물 콧물 나오면 그건 엄청난 은혜 받은 겁니다. 첫날부터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처음에는 보통 나오면 무슨소리 하는지 잘 몰라요. 여러분 초등학교 2학년을 고3 수학 반에 갖다놓아 보십시오. 알아듣는 지. 세상 것도 등급이 틀리면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적인 것과 하늘의 것인데 하나님이 눈을 안밝혀주고 길을 안열어주면 못 알아듣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나와 준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꾸벅꾸벅 졸다가 한마디만 잘 들으면 천국갈수 있는 길이 열리니까, 축복받게 되니까 얼마나 그분 앉아있는 것만 해도 감사합니까? 좌우로 흔들고 앞뒤로 흔들어도 저는 그런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마음상하지 않습니다.

제가 조금 마음이 상하는 경우는 직분자들, 그것도 관록이 붙은 직분자들이 앉아가지고 졸고 있으면 저사람 진짜 내하고 한편 맞나 안 맞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 힘뺄려고 앞에 앉아서 일부러 저렇게 하는 건가? 내가 아마 자존감이 낮았더라면 그런 오해 까지도 했을겁니다.그래서 제가 좋게 말하지요? 제발 토요일 밤에 일찍 주무십시오. 토요명화 그런 것 감상하지 마십시오. 보탬이 안 됩니다. 그런데도 석 달 가도 안 돼요. 육개월이 가도 안변해요. 목사도 사람인데 그렇게 누누이 말하는데도안 되면 어떤 때는 자기도 모르게 뚜껑이 열릴 뻔하잖아요. 그렇죠? 하면 이제 제가 이야기를 하죠. 꼭 그렇게 안 되걸랑 잠오게 하는 설교자 있거든 딴 교회 보내버리십시요. 딴 교회 보내는 일이 만만찮으면 자기가 다른 교회 가든지 그래야 되지 이 나그네 된 인생에서 주일날 듣는 이 말씀으로 하늘에서 내려주는 신령한 은혜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삼년, 오년, 팔년째 아직도 눈감고 있으면 그건 문제가 있다니까요. 옆에 사람 붙들고 물어보십시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 제가 처음 삼년은 이해할 수 있지요. 만 칠년까지도 제가 이해를 해 드렸습니다. 팔년째 부터는 한사람이라도 그런 사람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실은 다 잘 듣습니다. 우리교회 와서 설교하시는 목사님들 다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가 여러분들 말씀 잘 듣는대요. 잘 들어요. 그것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100명이 잘 들어도 그중에 한사람만 제대로 안 들으면 거기 신경이 가더라고요. 어떤 선배 목사님은 그런 충고를 하데요. 조는 사람 있더라도 그 사람은 보지 말고 잘 듣는 사람만 쳐다보면서 설교하라 그러더라고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나는 자꾸 곁눈질이 졸고 있는 사람한테 가더라고요. 그러니까 절위해서 여러분 토요일날 충분히 주무시고 나오십시오. 여러분 복종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은혜를 받으십시오. 주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반대하는 것은 주님 자신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 지도자가 구역장일 수도 있고 교구장일수도 있고 당회 장로님이든지 담당 교역자든지 상관없습니다. 주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한테 대해서 거스리는 말은 용서받을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성령을 거스르면 안 된다 그랬어요. 너희를 내가 파송한 너희를 거부하면 그것은 나를 거부하는 일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냥 살면서 느낌을 가지고 한번 이야기 해 봅시다. 여러분 자신이 차라리 다른 사람한테 좀 무안을 당하는 것이 낫습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식이 무안을 당하는 것이 낫습니까? 여러분이 무시당하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까? 여러분 자녀들이 무시당하는 것이 보기에 낫습니까? 여러분 느낌이 어떻습니까? 부모들로서 제가 부모노릇 잘 못해서 늘 무늬만 부모라고 하지만 그래도 저 같은 사람도 생각해 보면 차라리 내가 당하지 자식이 그렇게 당하길 원치 않거든요 그렇죠? 우리 주님도 그렇다고요. 우리 주님도 당신이 세운 지도자들에 대해서 함부로 대할 때 민감하게 기억하십니다. 반드시 거기에 대해서 주님이 그냥 넘어가실 리 만무합니다. 우리교회 어떤 장로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목사님 목회하는 것 힘들지만 그 직분이 그렇게 영광스러운 직분인줄 몰랐습니다. 사흘 동안 혼수상태에 있으면서 자기가 목회자에게 잘못한 것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교회 앞에 한번 세워달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못 세웠어요. 왜? 세워주면 어떻게 하죠? 결국은 그분이 하실 내용은 정해졌잖아요. “저처럼 목회자한테 함부로 하지 말고 잘해라. 나 이번에 고생 많이 했다”이런 말씀 하실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세우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하겠지요? 그래서 제가 안 세웠어요. 그러나 그분 변화되어 새사람 되었어요. 정말 은혜가운데 요즘 살고 있습니다. 감사해요.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것으로 택한 사람 한사람도 놓지아니하십니다. 일부러 문제 만들어서 반대하고 자기 영혼을 도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구원이 달린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조건 맹종하는 대열에서 벗어나십시오. 또 무조건 반대하는 대열에서도 떠나야 합니다.


말씀 맺습니다.
부디 여러분의 영혼을 위한 지도자의 수고를 짓밟지 마십시오.
세우신 권위에 순종하고 복종하십시오!
그때 여러분의 영혼에 유익이 있습니다.
기쁨으로 여러분에 관한 마지막 보고를 드리는 순간까지 여러분들, 여러분의 사역자들을 위해서 복 받는 모든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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